소설리스트

그 기억의 끝에 (70)화 (70/131)

70화. Boite de Pandore(5)

악몽의 시작이 언제였더라.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일상으로 자리 잡은 뒤였다. 습관처럼 이어지는 악몽의 출처를 찾으려고 한 적은 없고, 그게 현실과 어떠한 연관성이 있으리라 추측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자꾸만 꿈에 권이도가 나왔다. 그저 꿈이라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생생한 장면들이었다. 당연히 그 여파는 현실까지 이어졌다.

나는 눈을 뜨자마자 한참을 침대 위에 멍하니 있었다. 꿈에서 보았던 장면이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히 머릿속에 남았다. 우성 알파의 힘에 짓눌려 처참하게 무너지던 그 순간은 내가 상상하던 그 무엇보다 절망적이었다.

권이도를 보고 싶지 않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 권이도를 보았다간 옴짝달싹 못 한 채 굳어 버릴 거란 생각이 들었다.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 두려움이 꿈과 현실의 감각을 모호하게 무너뜨렸다.

“……출근하셨다고요?”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주방으로 내려갔을 때 권이도는 집에 있지 않았다. 고용인은 권이도가 먼저 출근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저녁 식사 전에는 돌아온다고 이야기했다. 주말에 출근하는 거야 예삿일이라지만 식사까지 거르고 나가는 건 오랜만이었다.

나는 홀로 식사를 마치고 소설책 한 권을 챙겨 온실로 향했다. 일을 시작한 이후엔 주말마다 조향 공부를 했지만, 다음 자격증 준비를 하기 전까지는 여가 시간을 즐길 생각이었다.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출근한 이태성은 묵묵히 나를 쫓아 온실로 따라왔다.

온실에는 고용인이 준비한 수국 꽃차가 놓여있었다. 계절을 고려해 차가운 차였는데, 파란 색감의 꽃잎이 무더운 여름날과 퍽 잘 어울렸다. 보이는 것과 달리 쌉싸름한 맛 때문인지, 이태성은 한입 머금자마자 표정이 굳었다.

“주말인데 이희나 씨 안 만납니까?”

아, 꽃차가 아니라 나 때문인가.

“……그게 대표님이 물어보실 말입니까?”

이태성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불만스럽게 되물었다. 미간을 한껏 찌푸리고 있는 게 제법 어이가 없나 보다. 하긴, 주말을 빼앗고 있는 당사자가 묻기엔 좀 뻔뻔한 질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뭐…… 퇴근 후에 만날 수도 있죠.”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놨다. 생각보다 향은 진하지 않았고 꽃잎의 색도 물에는 우러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이태성이 조용히 있는 게 웃겨서,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나왔다.

“그보다 이젠 아닌 척도 안 하시는군요.”

그렇게 모르쇠로 굴더니 관계가 확실해지긴 했나 보다. 그 사람 얘기가 왜 나오냐고 시치미를 떼던 게 엊그제 같은데.

“……남의 연애사에 왜 이리 관심이 많으십니까.”

“그게 ‘연애’사이긴 한가 보네.”

“…….”

자꾸 이렇게 놀려 버릇하면 안 되는데. 무뚝뚝한 주제에 반응이 재밌어서 매번 건드리게 된다. 내가 푸스스 웃음을 흘리자,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표님 그러실 때마다 진짜 주책입니다.”

“어쩌겠어요. 그래도 제가 대표인걸.”

그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술 더 떠 그래서 어떻게 잘된 거냐고 묻자, 마지못해 책 취향이 맞았다고 대답해 주기도 했다. 그러더니 한참 간격을 두고 이렇게 이야기한다.

“……대표님께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가 내게 감사할 일이 있던가. 마땅히 짐작 가는 부분이 없었다. “뭐를요?” 그렇게 되묻는 내게 이태성은 어쩐지 멋쩍은 기색으로 덧붙였다.

“책 말입니다. 대표님께서 권하지 않으셨으면 평생 안 읽어 봤을 거라…….”

머뭇거리는 말투가 이태성답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런 말을 하는 게 영 민망한가 보다. 그러니까 지금, 내 덕에 이희나와 잘됐다고 이야기하는 건가.

“이태성 씨 정말 귀여운 구석이 있네요.”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법 위협적인 표정이었으나 역시나 내겐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나는 찻잔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입매를 당겼다.

“꼭 책이 아니었어도 잘됐을 겁니다. 저한테 감사할 필요 없어요.”

잘될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잘되더라. 책이 계기가 되었을지는 몰라도, 근본적인 이유는 그게 아니었을 거다. 아마 비슷한 책을 읽지 않았어도 두 사람 사이에 연이 닿았겠지.

“정 감사하면 얘기나 더 해주셔도 되고요. 남의 연애가 재미있을 줄 몰랐네.”

장난스레 건넨 말에 이태성이 미간을 찌푸렸다. 고마움이 싹 달아난 얼굴이었다. 그는 차라리 식사를 대접하겠다며 말을 돌렸고, 나도 더 이상 무어라 묻지는 않았다.

대화를 끝내고 책을 읽기 시작하자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정신을 차리니 점심 먹을 때가 되었고, 이태성은 은근히 눈치를 주며 자리에서 일어나길 채근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고작 세 페이지가 남은 소설책을 들고 온실을 나서야만 했다.

오후가 지날 즈음엔 권이도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일이 좀 더 걸릴 것 같으니 식당에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나와의 약속을 잊어버리지는 않았구나. 그리 생각하며 장소와 시간 따위를 알려 줬다. 어차피 외식을 할 거라면 굳이 한 집에서 출발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나는 어영부영 시간을 때우고 그와의 약속을 위해 옷을 갈아입었다. 론칭 행사를 준비할 때 그랬던 것처럼 입고 갈 옷을 고르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결국 고른 건 무난한 디자인의 회갈색 정장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오랜만에 반지를 꼈다. 은색의 링 가운데 하얀 보석이 박힌 권이도와 내 약혼반지. 이제는 자국도 모두 지워진 터라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낯설게 느껴졌다. 새삼스러운 기분에 반지를 만져 보던 나는 문득 다 늦은 의문 하나를 떠올렸다.

“…….”

반지 사이즈는 또 어떻게 알았을까. 호수를 알려 준 기억도 없건만 맞춘 것처럼 손에 꼭 들어맞았다. 옷이야 눈대중으로 때려 맞췄다고 해도 이건 나조차도 사이즈를 모르는데.

“……이것도 물어봐야겠네.”

기분은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내가 품은 의문과 그에게 물어야 할 것들. 그 모든 것들이 차곡차곡 정리됐다. 오랜 시간을 준비해 왔으니 말을 더듬거나 떨지 않고 이야기를 나눌 자신이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침대 옆 협탁에 놓아둔 향수까지 뿌렸다. 권이도가 선물한 향수를 손목에 뿌리고, 목 뒤에 가만히 대고 있다가 떼어 냈다. 그럼에도 좀 허전한 기분이 들어서, 그 위에 내가 그의 페로몬을 본떠 만든 향수까지 한 겹 덧씌웠다.

꽃향기와 나무 냄새, 두 가지가 섞인 잔향이 썩 나쁘지 않았다. 마치 그와 몸을 섞을 때면 느꼈던 페로몬처럼 미미하게 남은 긴장을 풀어 주는 듯했다. 물론 그보단 훨씬 모자랐지만, 은은하게 코끝에 스치는 향기가 마음에 들었다.

“후…….”

오늘이 지나면, 권이도와 내 사이가 어떻게 바뀔까. 권이도는 과연 내가 물어보는 것들에 솔직히 대답해 줄까. 만약 답하지 않는다면 그다음에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계속해서 이어지는 생각은 그 중간 즈음에서 억지로 끊어 버렸다. 계속 생각하다간 기껏 날까지 잡아 놓고 모든 게 무용지물로 돌아가리란 기우 때문이었다.

지금 드는 불안감이 부디 현실이 되지 않길. 내가 바랄 수 있는 건 딱 그 정도였다.

* * *

내가 예약한 레스토랑은 고층 빌딩 최상층에 위치한 양식집이었다. 재계 유명 인사와 국회의원들도 종종 찾는 곳이었고, 나도 아주 중요한 미팅이 있을 때 몇 번 와본 기억이 있다. 미쉐린 가이드에서 별 세 개를 받은 식당답게 음식의 질과 맛 역시 훌륭했다.

처음엔 한정식집을 예약하려고 했으나, 내가 자주 가는 곳이 의선당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다른 곳으로 골랐다. 의선당은 권이도의 아버지가 회장으로 있는 선호그룹의 요식업 계열사였다. 권이도에게 대접하는 식사를 그와 연관된 곳에서 할 수는 없었으니까.

“길이 많이 막히네요.”

이태성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움직이는 사이 바깥에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일찍 출발한 덕에 시간은 넉넉할 듯했다. 하늘이 어둑어둑하니 식사 중에 볼 야경이 참 예쁘겠구나. 여러모로 중요한 대화를 하기엔 안성맞춤인 분위기가 될 터였다.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약속 시간까지는 20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나는 이태성을 돌려보내고 홀로 위층으로 올라왔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웨이터가 자리를 안내해 주고, 일행이 오면 음식을 준비해 주겠다며 정중히 물러났다.

이 시간대를 모두 빌린 덕에 홀에는 나와 직원을 제외하면 그 누구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시간을 한 번 확인하고 창밖을 내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초고층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예상과는 달리 그저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한강이나 한 바퀴 돌고 오죠.’

그때 그 야경은 굉장히 예뻤던 것 같은데.

“…….”

둘과 혼자의 차이일까. 반짝이며 부서지는 조명에 별다른 감흥이 생기지 않았다. 1분 1초가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권이도 없는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렇게 권이도를 기다리길 15분. 그는 약속 시간 딱 5분 전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자 웨이터를 따라 들어오는 권이도의 모습이 보였다.

“…….”

자리에서 일어났어야 했는데 몸이 굳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별로 대단한 이유는 아니었고, 고작 하루 만에 보는 그의 모습이 지나치게 뇌리에 각인돼서.

그는 늘 그랬듯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정장 차림이었다. 어깨에서 딱 떨어지는 재킷과 빈틈없이 채운 베스트 단추가 탄탄한 상체를 그대로 드러냈다. 출근할 때와 비슷한 복장이었는데, 각을 맞춰 넣은 행커치프 때문인지 이상하리만치 신경 쓴 태가 났다.

“오래 기다렸죠. 배고플 텐데 미안해요.”

권이도는 내 맞은편에 앉으며 나긋이 사과를 건넸다. 의자에 앉는 그 별거 아닌 동작조차 권이도가 하니 우아해 보였다.

“길이 좀 막혀서…… 왜 그렇게 봅니까?”

“……아뇨.”

나는 떠듬떠듬 입을 열며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그를 위아래로 찬찬히 살펴보기도 했다. 곧게 뻗은 목과 반듯한 어깨, 그리고 다시 수려한 얼굴까지.

“오늘 되게…… 신경 쓰셨네요.”

“…….”

권이도가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부드럽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그려 놓은 것처럼 섬세했다. 그는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기분 좋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알아주니 고맙군요.”

아니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저 만족스러운 얼굴로 다시 눈을 들어 올렸을 뿐.

“중요한 날이라 신경을 좀 썼어요. 겸사겸사 할 얘기도 있고.”

“중요한 날이라니…….”

나와의 외식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내게는 엄선된 날이지만 그에게는 흔해 빠진 하루 중 하나일 텐데. 그보다 할 얘기가 있다는 말이 거슬렸으나, 우선 나는 권이도에게 양해를 구했다.

“메뉴는 제가 골라 놨고, 편하게 대화하고 싶어서 한 번에 내어 오라고 했어요. 괜찮으시죠?”

사실 안 괜찮다고 해도 그럴 생각이었기에 나는 일부러 뻔뻔하게 물었다. 다행히 권이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웨이터가 와인 병을 들고 다가왔다.

“와인부터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웨이터가 따라 준 와인은 살짝 산미가 감도는 화이트와인이었다. 이름과 연도, 풍미 따위를 설명해 줬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는 않았다. 권이도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감흥 없는 눈으로 와인 잔을 보고 있었다.

권이도와 내 잔이 모두 채워지고 곧이어 주방장이 요리를 내어 왔다. 설명을 최대한 간략하게 해달라고 요구했기에 메뉴마다 간단히 이름과 재료만 소개해 줬다. 물론 요리에 자부심이 넘치는 사람답게 그마저도 긴 편이긴 했다.

“세계 3대 진미인 오세트라 캐비어와 블랙 트러플, 푸아그라로 만든 아뮤즈 부쉬입니다. 이쪽은 저희 레스토랑에서 직접 만든 버터와…….”

코스로 나와야 하는 요리가 한 번에 나온 탓에 테이블 위에 음식이 빼곡히 채워졌다. 나는 차례차례 내어 온 요리를 모두 확인하고 주방장에게 살짝 눈짓했다. 눈치 빠른 주방장이 황급히 설명을 마무리하고 자리를 비켜 줬다.

“입에 맞으셨으면 좋겠네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그에게 와인 잔을 내밀었다. 그에 권이도가 엷은 미소를 띤 채 나와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

“여기 음식이 입에 안 맞긴 힘들죠.”

유리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근사한 식사의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 “잘 먹을게요.” 그리 말하는 목소리 역시 달큼하기 짝이 없었다. 이 자리가 성공적으로 끝나리라고, 그런 환상을 가지게 될 정도로.

이름깨나 있는 레스토랑답게 요리는 굉장히 맛있었다. 우리는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이어 갔고, 그사이 와인을 두 잔 정도 비웠다. 권이도는 ‘Sejin’의 론칭을 축하하며 간략히 앞으로의 계획 따위를 물어 왔다.

“곧 홍보 모델이랑 미팅을 할 예정이에요. 광고도 다른 버전으로 하나 더 찍을 거고. 카 디퓨저 쪽은 이번에 반응이 좋으면 판매하는 쪽으로 해볼까 합니다.”

“백화점에 입점된 디스플레이는 확인해 봤어요?”

“우선 사진으로만 보고 받았고, 조만간 시간 내서 다녀오려고요. 아무래도 첫 론칭이니까 봐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투자자로 있기 때문일까 그는 ‘Sejin’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 또한 가능한 한 생산적인 계획을 들려주기 위해 노력했다. 손익 분기점을 신경 쓰지 말라고 했어도, 내심 신경 쓰였던 참이니까.

그런데 묵묵히 있던 권이도의 표정이 점점 미묘하게 바뀌었다.

“그래서 기획팀이…….”

“…….”

“……혹시 하실 말씀 있으세요?”

나는 이야기를 끊고 슬며시 그에게 물었다. 혹시 심기가 불편한 건가 싶어서. 물론 그건 아니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아뇨, 그냥…….”

역시나 그는 선선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비스듬히 입매를 당기며 눈가를 찌푸렸다.

“괜히 욕심이 나서.”

무슨 욕심이냐고, 그리 묻지는 못했다. 권이도가 식기를 내려놓으며 화제를 돌린 것이다.

“다른 얘기를 하죠. 어제는 잘 잤습니까?”

“아, 어제…….”

나는 애매하게 시선을 피하며 대답을 뭉뚱그렸다. 문득 다 잊어 가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를 억지로 제압하고 폭력적인 행위를 이어 가던 그 악몽이.

“……늘 비슷합니다.”

“잘 못 잤다는 뜻이군요.”

권이도는 내가 하는 말을 정확히 알아들었다.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권이도가 나직이 운을 뗐다.

“보니까 악몽을 꾸는 것 같던데…….”

“…….”

그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 아니, 모르는 게 이상할 것이다. 잠든 나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사람이자, 그런 나를 푹 잘 수 있도록 재워 준 사람이었으니.

“무슨 꿈을 꾸는 겁니까?”

“……음.”

딱히, 대답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 질문을 듣자마자 입이 간질거렸다. 입 안에 한가득 이야기가 담겨서 툭 내뱉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할 정도로. 그에게 모든 걸 묻기 전에, 나부터 솔직해지면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모르는 사람한테 강간당하는 꿈을 꿉니다.”

그 말을 내뱉는 순간엔 놀라울 정도로 담담한 기분이었다. 언젠가, 선호 측에서 나를 정신병자 취급할 거란 생각을 했던 적이 있는데. 지금은 그가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고…… 가끔 이유 없이 꾸더군요.”

그런데 그 말을 듣자마자 권이도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서서히 입꼬리가 내려오더니 이내 입매를 딱딱하게 굳힌 채 나를 응시한다. 그래서 노파심에 괜히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딱히 트라우마 같은 건 아닙니다. 제가 잤던 상대는 권이도 씨밖에 없거든요.”

“…….”

일순, 권이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멍하니 넋을 놓았던 그가 한 타이밍 늦게 물었다.

“……상대가 나뿐이라고요?”

“제가 다른 사람 얘기를 한 적이 있던가요?”

스물아홉이 된 지금까지, 내가 몸을 섞은 상대는 권이도밖에 없었다. 애초에 만나는 사람이 없었으니, 섹스는커녕 키스조차 유일했다.

“권이도 씨뿐입니다. 처음부터 다.”

아무렇지 않은 척 덧붙이자, 권이도가 입을 다물었다. 가늘게 떨리는 시선이 알 수 없는 감정을 한가득 담고 있었다. 괜히 이런 말까지 해버린 게 멋쩍어서,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며 이야기했다.

“그래서 그런가……. 어젯밤엔 그 상대가 권이도 씨로 나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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