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억의 끝에 (69)화 (69/131)

69화. Boite de Pandore(4)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나도 일을 하는 입장에서 갑자기 생긴 돌발 상황에 대응할 방법이 없다는 걸 안다. 론칭 행사 정도야 사실은 별것도 아니니, 그가 오지 않았다고 해서 서운해할 상황도 아니었다.

“……그럼 연락 한 번만 해주지 그러셨어요.”

그런데도 툭 튀어나온 말이 이따위였다. 미묘하게 엇갈린 시선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며 혼잣말처럼 이야기했다.

“기다렸거든요. 권이도 씨가 무리를 해서라도 온다고 하셨으니까.”

이런 말을 그에게 하는 게 부담을 주는 일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어리광 비슷한 행동이었고, 권이도가 기분 나빠해도 할 말은 없었다. 불과 몇 달 전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말이었는데, 한 번 입에 올리니 줄줄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계속 찾았는데, 끝날 때까지 안 보이시더라고요.”

왜 자꾸, 그가 일부러 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 바빴다는 말이 고작 핑계에 불과하고 사실은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도. 행사에 오고 말고는 권이도의 마음인데, 자꾸만 뻔뻔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합니다.”

권이도는 천천히 사과의 말을 건넸다. 내가 그의 집에 들어온 이후 몇 번이나 들은 사과였다. 내게는 아무것도 미안해하지 말라고 했으면서, 그는 미안하다는 말이 이다지도 쉽다.

“…….”

“…….”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시선은 상대방에게 고정되어 있는데, 그 시선이 좇는 건 서로가 아니었다. 그의 사과가 거짓 같지는 않았으나, 진짜 속내는 감추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우선……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죠.”

나는 넌지시 운을 떼며 넥타이를 풀어 내렸다. 그에게 듣고 싶은 말이 사과였던가. 기분이 풀리지 않는 걸 보면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브랜드 론칭했어요. 권이도 씨 덕분에.”

이 한마디를 행사장에서 할 수 있었다면 좋을 텐데.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에게 떳떳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우리 사이는 밝히지 못해도 적어도 감사 인사는 할 수 있으리라고, 막연히 기대하고 있었단 말이다.

“반응도 괜찮았고…… 기사도 긍정적으로 났더군요.”

“…….”

“아마 수익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첫 단추는 나쁘지 않게 끼웠다. 퍽 그럴싸한 시작이었고,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았다. 비록 그 과정에 권이도가 없었을지언정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다 권이도 씨 덕분이에요.”

“…….”

권이도는 내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짙은 눈동자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을 뿐이다. 그 긴긴 침묵 끝에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걸 바라시는 줄 알았는데요.”

축하한다는 말이 듣고 싶던 모양이다. 그가 주는 모든 걸 받았으니, 권이도가 기분 좋아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정세진 대표’라는, 그가 안겨 준 직책으로나마 당당히 그의 앞에 서고 싶었단 말이다.

“그러게.”

그런데 권이도는 영 알 수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나직이 가라앉은 음성은 긍정적인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정적이었다. 느릿느릿 두 눈을 깜박인 권이도가 들릴 듯 말 듯 이야기했다.

“그게 내가 바라던 거죠.”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대답해 놓고 전혀 아니라는 표정을 하고 있으니. 불만…… 아니, 불안이라고 해야 할까. 원인 모를 눈빛에 기시감이 들었다.

“정세진 씨.”

“……네.”

그 부름이 오늘따라 참 낯설었다. 권이도는 가만히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이야기했다.

“정세진 씨 주려고 장미를 샀어요.”

보면 볼수록 재주가 많은 사람이다. 분명 웃고 있는데, 전혀 웃는 것처럼 보이질 않다니. 그려 놓은 것처럼 섬세한 눈매가 처연한 빛을 띠었다.

“근데 이번엔 못 주겠군요.”

왜 못 주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장미를 어떻게 했냐고, 그렇게 묻지도 못했다. 권이도는 특유의 여유로움을 가장한 채 부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끝마쳤다.

“쉬어요. 피곤할 텐데.”

그가 내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걸음을 옮긴다. 점점 멀어지는 그에게서 왠지 모르게 익숙한 향기 하나가 느껴졌다. 그의 페로몬에 섞인 은은하고 달큼한 향기는, 행사장에 있던 디퓨저 냄새와 비슷했다.

* * *

바로 어제가 회식이었기 때문에 직원들은 모두 두어 시간 늦게 출근했다. 나도 천천히 나올 생각이었으나 잠이 오지 않는 바람에 평소처럼 출근하고 말았다. 늘 먹던 수면제는 역시나 효과가 없었고, 잠깐 잠이 들 때면 계속해서 기억도 나지 않는 악몽을 꿨다.

‘오늘 늦을 겁니다.’

아침 식사 때, 권이도가 내게 한 말이었다. 그 말을 하는 권이도는 나와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혹시 화가 나기라도 한 걸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뒷말은 퍽 다정했다.

‘학원 조심히 다녀와요.’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어디라고 콕 집어 말하긴 어렵지만, 권이도가 평소와 달랐다. 오늘 아침. 정확히는 어젯밤부터 내내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곤 했다. 정확히 어디가 이상한지 모르니 왜 그러냐고 묻기에도 애매했다.

그래서 나는 그냥 모르는 척 인사를 나누고 회사에 출근했다. 오늘도 권이도는 내가 탄 차가 사라질 때까지 주차장에 서서 차 뒤꽁무니를 바라봤다. 서서히 멀어지는 그 모습이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처량하단 생각이 들었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업무 시간에는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이제부터 ‘Sejin’의 본격적인 시작이었기에 내가 처리해야 할 일도 장난 아니게 많았다. 새삼 김 실장을 데리고 와서 다행이지. 그가 일정 관리를 해주지 않았다면 여러모로 벅찼을 터였다.

퇴근길, 나는 이태성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자격증 학원으로 향했다. 오늘 마지막 수업을 듣고 시험을 치르면 모든 강의를 수강했다는 수료증이 나왔다. 그리고 며칠 뒤면 시험 결과가 나오고, 또 며칠 뒤에는 자격증이 발급될 거다.

“브랜드 론칭하신 거 봤어요.”

이희나와 비슷한 이미지의 강사는 모든 시험이 끝난 내게 상냥히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고생했다며 언젠가 학원 홍보를 해달라는 장난스러운 말도 덧붙였다. 나는 그와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고, 미리 챙겨 두었던 향수 샘플까지 선물한 뒤에야 비로소 완전히 학원을 나섰다.

계절이 여름의 한가운데였기 때문에 밖으로 나왔을 땐 후텁지근한 공기가 밀려들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구나. 그걸 가장 적나라하게 느끼는 게 계절이 아닌가 싶다.

“고생하셨습니다.”

이태성과 함께 대기하던 김 실장은 내가 차에 올라타자마자 정중히 이야기했다. 무슨 수험생이라도 대하듯 진심이 듬뿍 담긴 인사였다. 그게 조금 우스워서, 픽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고생은요.”

사실, 내가 딴 건 가장 기초적인 과정이고 남은 자격증은 두 단계가 더 있었다. 좀 더 깊이 공부하고 싶으면 관련 학과가 있는 대학원에 진학하는 방법도 있다고 했다. 혹시 관심 있으면 말해 달라며 학원 강사가 알려 준 것이었다.

“아직 갈 길이 멀었더라고요.”

이희나의 말이 맞았다. 나는 학원에서 받은 수료증을 만지작거리며 새삼스레 생각했다. 성과가 있으면 기분이 좋다던 말대로, 내 손으로 무언가 이뤄 낸 결과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정 부담스러우면 우선 자격증을 딸 때까지만 다녀 봐요.’

집으로 향하는 길에는 문득 권이도의 말이 떠올랐다. 처음에 정한 대로라면 나는 오늘부로 대표직을 내려놔야 한다. 짧은 유예 기간은 끝났고, 그와 약속한 때가 다다랐으니까.

“김 실장님.”

“예, 대표님.”

“제가 해신에서 몇 년 일했죠?”

“5년 조금 넘게 일하셨습니다.”

“5년이라…….”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곧장 해신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남들보다 높은 위치에서 시작했지만, 20대의 절반을 바쳤으니 그리 짧은 기간은 아니었다. 하나 본부장을 관두는 데는 하루가 걸렸고, 그 사실에 미련을 가졌던 적은 없다.

그런데 왜, 고작 몇 달 일한 회사를 관두는 건 이토록 아쉬울까.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손에서 놓자니 입 안이 썼다.

욕심이 난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내 이름이 붙은 회사에, 그리고 지금 가지고 있는 이 수료증에. 하물며 이태성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이 순간까지.

“도착했습니다, 대표님.”

집으로 향하는 길은 마냥 짧기만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눈 깜박할 새에 차고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이태성과 김 실장에게 인사를 건네고 월요일에 보자고 말한 뒤 집으로 올라왔다.

집에는 역시나 권이도가 없었다. 오랜만에 텅 비어 버린 집을 보니 허전한 기분이 물씬 밀려들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누군가의 온기에 익숙했다고. 본가에 살 때도, 오피스텔에 살 때도, 나를 맞이해 주는 사람은 없었는데 말이다.

“언제 오려나…….”

많이 늦지 않으면 저녁 식사는 함께하고 싶었다. 그가 나를 기다렸듯, 나 또한 그를 기다리면 될 테니까. 식사를 마친 다음엔 늘 그랬듯 대화를 나누고, 내일 있을 우리의 외식을 확실히 정하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권이도를 기다리며 오랜만에 욕조에 몸을 담갔다. 고용인이 풀어 준 입욕제는 몽실거리는 거품이 올라오는 배쓰 밤이었다. 솔솔 풍기는 냄새가 지나치게 달큼했지만 피로를 풀기엔 썩 나쁘지 않았다.

목욕을 다 하면 온실에서 책이나 읽으며 권이도를 기다려야지. 조명을 달아 놨으니 어두울 때 가더라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한두 시간만 머물다가 돌아오면 권이도도 퇴근하지 않을까. 즉흥적인 계획이었으나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내가 온실에 다녀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권이도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 * *

‘세진아.’

잠결에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다정하다면 다정한 그 목소리는 내가 대답할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왜 부르냐고, 하고 싶은 말이 있냐고, 그리 묻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세진아.’

나는 이 악몽이 근래에 더욱더 심해진 그 내용이라는 걸 알았다. 약혼식을 앞뒀던 날, 꿈에서 보았던 바로 그 장면. 누군가 내 머리채를 붙잡고 거칠게 뒤로 젖히던 그 감각.

‘창부처럼 굴어야지.’

수치심을 비롯한 모멸감은 그동안 이미 익숙해진 것이었다. 벌어진 입술 틈새를 억지로 파고드는 살덩이도 이제는 그다지 낯설지 않았다. 물론 상황에 적응이 되었다고 해서 그 고통까지 익숙해지진 않았지만 말이다.

‘으웁…….’

‘입 똑바로 벌려.’

굵고 기다란 성기는 구역질조차 하지 못할 만큼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입천장을 긁으며 들어와 혀뿌리를 꾸욱 눌러 왔다. 내가 입을 아무리 벌려도 도무지 머금을 수 없었고, 그렇기에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웠다.

‘정세진.’

목구멍을 억지로 벌리는 그 감각은 마치 현실처럼 선명한 것이었다. 목울대가 불룩 튀어나올 것처럼 깊이 삽입된 성기가 마침내 뿌리 끝까지 입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내, 반쯤 빠져나갔다가 가차 없이 목구멍을 꿰뚫는다.

‘욱……!’

나는 이다음에 어떤 장면이 이어질지 알았다. 반사적으로 입술을 오므리는 바람에 두꺼운 성기에 앞니가 닿는 순간. 움직임을 멈춘 상대가 거칠게 내 머리채를 잡아당겨 내던지는 것까지.

‘이거 하나 똑바로 못 해?’

냉랭한 목소리가 나를 채찍질하는 것 같았다. 온몸이 덜덜 떨려서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내게 상대방은 더할 나위 없이 싸늘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주제 파악을 제대로 했어야지.’

눈물은 쉴 새 없이 줄줄 흘러나왔다. 뭐가 그렇게 억울한지, 서러움과 함께 분노가 일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바닥을 기었지만, 쏟아지는 페로몬은 그 무엇보다 날카로운 것이었다.

“……허억!”

번쩍,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흐리멍덩하던 시야가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눈앞에 보이는 건, 새것 같은 구두 앞코가 아닌 높디높은 방의 천장. 그리고 피부에 닿는 건 칼로 저미는 듯한 페로몬이 아닌 포근하고 보드라운 이불.

“하아, 하아…….”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차갑게 식은 이마를 매만지며 찬찬히 주변 풍경을 돌아봤다. 권이도가 선물한 향수와 은방울꽃, 그리고 내가 만든 향수병과 소설책 두 권까지.

“……언제 잠들었지.”

내 방이었다. 권이도의 집에 있는, 그가 마련해 준 나만의 공간. 내가 무릎을 꿇을 필요도 모멸감을 느낄 일도 없는 아늑한 안식처.

나는 상체를 일으켜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고작 두어 시간을 잔 건지, 해가 뜨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권이도는 집에 돌아온 걸까. 그런 생각으로 침대에서 내려와 방 밖으로 향했다.

복도는 밤이 늦은 탓에 어둡기만 했다. 정체 모를 불빛에 의존해 걷는 사이, 내가 실내용 슬리퍼를 신지 않고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맨발에 카펫이 밟혔지만 굳이 방으로 돌아가 슬리퍼를 신고 오기엔 또 귀찮았다.

그래서 그냥 마저 권이도에게 가기로 했다. 집에 돌아왔는지만 확인해야지. 그런 생각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그의 방에 다다를 즈음, 나는 복도 끄트머리에 있는 서재의 불이 켜져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

아, 퇴근했구나.

그 사실엔 이유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가 시키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정체 모를 불안감이 끝도 없이 떠올라서, 당장이라도 권이도의 페로몬을 느끼고 싶었다.

나는 망설일 것 없이 그쪽으로 다가갔다. 권이도가 서재엔 오지 말라고 했는데. 그런 생각도 잠시였다. 불빛에 홀린 건지, 그게 아니면 잠이 덜 깬 건지. 마치 불나방처럼 서재 불빛을 향해 다가갔다.

문 앞에 다다라서는 역시나 긴장감이 들었다. 일전에 이곳에 처음 왔을 때와 비슷한 공포였다. 가늘게 떨리는 손을 문고리에 얹고, 아주 천천히 손잡이를 내려 문을 열었다.

끼익, 문이 열리는 순간엔 노크를 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일은 벌어진 다음이었고, 나는 열린 문틈으로 안쪽을 들여다봤다. 원목으로 된 가구들과 문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앉아 있는 단 한 명의 사람.

“…….”

“…….”

권이도가 있었다. 수려한 외모에 기품 있는 페로몬이 느껴지는 권이도. 방금 퇴근한 것처럼 정장을 입고 있는 주제에 평소와 달리 머리는 조금 흐트러진 권이도.

“……안 잤습니까?”

그는 다급히 책상에 내려놨던 무언가를 서랍에 넣었다.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철컥 서랍 잠그는 소리를 듣고 알 수 있었다. 그가 방금까지 만지고 있던 건, 다른 무엇도 아닌 총이라는 사실을.

“아…… 자다가 깨서요.”

부적 같은 걸까. 할아버지가 선물한 것이니, 마음을 다잡기 위해 만지고 있던 걸까.

권이도가 종종 새벽을 서재에서 보낸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나를 위해 방을 비워 줬을 때, 그가 있을 만한 곳은 오로지 서재밖에 없었다. 다만 이렇게, 총을 만지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여기서 뭐 하세요?”

“…….”

그는 내 말에 대답하는 대신 찬찬히 내 모습을 살펴봤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왔다.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온 그는 코앞까지 걸어와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었다.

“……권이도 씨?”

그리고 그가 한 건 한쪽 무릎을 꿇고 자세를 숙이는 것이었다. 내가 주춤 놀라 뒤로 물러나자, 조심스레 오른 발목을 그러쥐기도 했다.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자, 그가 내 발을 가져가 제 슬리퍼를 신겨 줬다.

“발이 찬데.”

“…….”

그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반대쪽 발에도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아무리 여름이어도 맨발로 다니지 말라며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건네기도 했다. 그러는 저야말로 맨발로 무릎을 꿇고 있으면서. 남들이 보면 기함할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가서 다시 자요. 난 할 일이 남았으니까.”

그가 내리는 축객령은 다른 때보다 더 단호한 감이 있었다. 친히 문까지 열어 주는 그를 보고 나는 밖으로 나가는 대신 살며시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기다릴까요?”

“…….”

권이도가 가만히 나를 내려다봤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느릿느릿 눈을 깜박인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현실감 없는 풍경에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찼다.

“어차피 내일 주말이니까…… 같이 자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동안 좀 드물지 않았나. 그의 러트 사이클을 마지막으로 한 침대에서 잠을 잔 적은 없었다. 물론 내가 선택한 일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달라도 좋을 듯했다.

“……아뇨.”

그러나 권이도는 나를 바라본 그대로 느리게 대꾸했다. 나직이 내려앉은 음성이 차분히 뒷말을 이었다.

“오늘은 안 되겠군요.”

왜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그가 내 등에 손을 얹어 서재 밖으로 데리고 나갔기 때문이다. 강제적인 손길은 아니었으나, 거부하기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먼저 자요. 내 방에서 자도 되니까.”

결국 나는 아무 말 못 하고 그를 뒤로한 채 서재를 빠져나왔다. 언제 퇴근했냐고 질문도, 내일의 약속을 기억하냐는 질문도 하지 못했다. 그저 어딘가 불안정해 보이는 그를 둔 채 내 방으로 돌아왔을 뿐.

그날은, 서재로 향하기 전에 꾸었던 것과 이어지는 내용의 꿈을 꿨다. 누군가 나를 억지로 바닥에 엎어뜨려 제압하는 꿈. 바르작거리는 몸을 내리눌러 개처럼 다루던 끔찍한 꿈.

‘너 같은 걸 믿는 게 아니었는데.’

그리고 나를 강간하는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권이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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