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억의 끝에 (68)화 (68/131)

68화. Boite de Pandore(3)

나도 알고 있었다. 인간관계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걸. 아주 당연한 얘기였고, 모르려야 모를 수 없을 만큼 간단한 진리였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건 무척이나 다르다. 간신히 유지하던 가족의 울타리가 무너진 그 날, 나는 김 실장과의 인연도 끝났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예전 같은 관계는 될 수 없으리라고, 홀로 결론 내렸단 말이다.

“도련님한테는 제가 단순히 비서일 수 있어도…….”

“……아뇨.”

팔짱을 낀 채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기분은 이루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데, 반대로 머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내가 자식 같다던 말과 자신을 너무 내치지 말라던 말이 아른아른 귓가에 남았다.

“그런 거 아닙니다.”

약혼식을 치르던 날, 나를 걱정하던 유일한 상대가 김 실장이었다. 권이도의 집으로 들어오던 날, 내가 유일하게 인사를 하고 온 상대도 김 실장이었다. 단순히 비서라서가 아니라 항상 나를 챙겨 준 게 그였기 때문이다.

“김 실장님 말씀 이해했어요.”

권이도가 그랬다. 비서에게 많이 의지하는 타입이냐고. 술에 취해 김 실장을 찾을 만큼 내 삶에 그가 버릇되어 있었으니까. 그러한 일상이 깨어졌단 사실에 상실감이 들었는데, 지금은 놀라울 정도로 아무렇지 않아졌다.

“…….”

“…….”

그는 조용히 있는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처럼 한동안 입을 다물었을 뿐이다. 저 멀리 회사가 보일 때가 되어서야 김 실장이 나직이 이야기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느덧 차가 주차장에 들어섰다. 그때까지도 나는 하염없이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운전석에서 내린 김 실장이 뒷좌석으로 다가와 정중히 차 문을 열어 줬다. 기계적인 동작이었는데, 가볍게 건넨 말만큼은 퍽 친근하게 들렸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대표님.”

“…….”

도련님이었던 호칭이 다시 대표님으로 바뀌었다. 아마 당분간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으리라. 그게 그다지 서운한 기분은 아니라서 나는 픽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 * *

며칠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코앞으로 다가온 행사 준비에 이래저래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해신금융에서는 해본 적 없는 업무들이었지만, 다행히 그간 익숙해진 덕에 헤매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행사 날이 다가오기에 앞서 권이도에게도 초대장을 건네줬다. ‘Sejin’의 큰 투자자이니만큼 초대 순서에서는 1순위가 되어야 했다. 공적으로도 한 장 보내 놨고, 사적인 자리에서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할 생각이었다.

‘드디어 내일이군요.’

권이도는 달큼한 미소를 지으며 내가 건네준 초대장을 살펴봤다. 안에 든 시향지를 흔들어 냄새를 맡아 보곤 느른하게 입매를 당기기도 했다. 특유의 여유로움이 듬뿍 묻어나는 동작에, 괜히 덧붙이지 않아도 되는 말을 덧붙였었다.

‘무리하진 않으셔도 됩니다.’

그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 그런 건 익히 알고 있었다. 고작 이런 향수 회사 론칭 행사에 얼굴을 내비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도. 만약 업무 관계였다면 권이도가 아닌 그의 대리인이 대신 참석했을 것이다.

‘무리를 해야죠. 정세진 씨가 만든 자리인데.’

그런데 권이도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얘기했다. 정확히는 본인이 만든 자리건만. 모든 공을 내게 돌리고 있었다. 초대장을 고이 접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그가 장난스럽게 건넸던 말까지도 기억난다.

‘기대할게요, 정세진 대표님.’

“대표님.”

“……아.”

퍼뜩 고개를 들어 그쪽을 바라봤다. 내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김 실장이 눈을 내리깔고 시간을 확인했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태블릿 PC 하나가 들려 있었다.

“일정 들으셨습니까? 못 들으셨으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뇨…….”

나는 길게 말꼬리를 늘이며 눈앞에 있는 거울을 살펴봤다. 명성호텔 리브라홀 연회장 옆에 딸린 관계자실. 벽면에 있는 널찍한 거울로 정장을 차려입은 내 모습이 보였다.

“들었습니다, 일정.”

마침내, 대망의 론칭 행사 날이 되었다. 처음으로 ‘Sejin’을 세상에 공개하고 그동안 준비한 향을 널리 알리는 날. 내가 만든 향수는 아니었지만, 내 이름과 함께 팔릴 물건을 최초로 예약받는 날.

평소엔 최대한 수수하게 입고 다녔지만 오늘은 차림새에 꽤 신경을 썼다. 잘 입지 않는 밝은 색의 정장을 입고, 잘 차지 않던 독특한 디자인의 시계를 찼다. 중요한 날이면 하던 대로 머리도 이마가 보이도록 깔끔히 정돈했다.

“그만 나가보죠.”

나는 다시 한번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김 실장과 함께 관계자실을 나섰다.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태성이 소리 없이 내 뒤에 따라붙었다. 김 실장이 비서로 온 덕에 그는 다시 기사 겸 경호직으로 복귀한 상태였다.

“……긴장되십니까?”

연회장으로 향하는 복도에서, 김 실장이 넌지시 물었다. 내 표정이 굳은 게 그에게도 보였나 보다. 그렇게 걱정스럽게 물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굳이 부정하는 대신 그냥 어깨를 으쓱했다.

“그동안 너무 조용히 살아서요.”

그간 매스컴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내 이야기를 쏙 빼놓고 기사를 내보냈다. 정철호 회장의 구속 사실과 이혼 소식은 알렸지만, 그의 오메가 양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리지 않았다. 아마 권이도가 손을 썼으리라고 나는 막연히 그렇게 추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이 지나면 하릴없이 나와 관련된 기사가 나게 될 거다. 암암리에 선호 측에 납품하던 것과 공식적으로 브랜드를 론칭하는 건 다른 문제니까. 해신의 본부장이던 정세진이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고, 대대적으로 공표될 거란 말이었다.

“반응이 어떨지 좀 걱정이 되네요.”

아무리 손익 분기점을 신경 쓰지 말라고 했어도, 이건 사업의 일환이었다. 투자자인 선호 측에 최소한의 면은 살아야 할 게 아닌가. 대박을 내진 못해도 망하지는 않도록, 신경 써야 할 부분이 굉장히 많았단 말이다.

“그런 거라면 굳이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하나 김 실장은 뭐 그런 걱정을 하냐는 듯이 가볍게 대꾸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애초에 명성호텔을 빌려 론칭 행사를 열고, 곧장 유명 백화점을 통해 유통되는데 오히려 망하기가 더 어려울 것이다. 남들보다 한참 앞선 곳에서 출발하니, 걱정은 사치일지도 몰랐다.

“뭐…… 기분상의 문제라고 해야 하나.”

나는 괜히 손목시계를 매만지며 시선을 돌렸다. 긴장감이 드는 이유가 단순히 위에 나열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론칭 행사가 끝나고 주말이 되면, 그간 미루고 미루던 마지막 과제를 해결해야 했으니까.

“이왕이면 시작부터 순탄하면 좋겠군요.”

단계를 밟는다고 해야 할까. 첫 단추를 잘 끼워야 마무리도 잘 될 것 같았다. 그러기 위해선 오늘 이 자리를 완벽하게 해낼 필요가 있었다. 권이도가 준비해 주고, 내가 기꺼이 받아들여 내 손으로 일구어 낸 결과를 말이다.

* * *

우리가 행사를 열 연회장은 선호그룹 창립 기념식 때보다는 작은 크기였다. 명성호텔에 속한 디자이너가 내부 인테리어를 담당했고, 직원들과 함께 향수 배치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논의했다. 우리가 주력으로 내놓을 제품과 호불호가 갈릴 법한 제품을 구분해 내부 동선에 맞춰 장식해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향수를 판매하는 만큼 행사장 내부 향기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입구를 포함한 곳곳에 은은한 디퓨저를 놓아두고 장식품이 있는 근처에는 작은 향초도 켜 놨다. 샘플로 놓아둔 향수와 그에 맞는 시향지도 구비해 놓되 향들이 섞이지 않도록 간격 조절에 공을 들여야 했다.

나는 손님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향수 샘플과 카 디퓨저였다)을 확인하고, 포장에 하자가 있지는 않은지 꼼꼼히 살펴봤다. 벽면에 일정 간격으로 걸어 둔 엽서는 향수를 구매하는 분들이 함께 골라 포장에 넣을 수 있도록 장식한 것이었다.

“대표님, 슬슬 준비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행사장을 쭉 둘러본 뒤 손님들이 오는 시간에 맞춰 단상 쪽으로 향했다. 언뜻 살펴본 홀에는 생각보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와 있었다. 습관적으로 익숙한 얼굴을 찾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인사는 못 할 수도 있습니다.’

온다고는 했지만, 내게 말을 걸겠다고는 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반지를 끼지 않았고, 밖에서는 그와의 연결 고리를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만약 행사장에 온다고 해도 모르는 사이인 척 악수나 주고받지 않을까 싶다.

“대표님, 계단 조심하십시오.”

김 실장에게 고맙다는 눈인사를 하고 계단을 하나씩 올라갔다. 마이크를 들고 있던 사회자가 나를 보고 꾸벅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홀을 한 번 쭉 둘러보고 내게 건네진 마이크를 받았다. 사회자가 흠흠 헛기침을 하곤 먼저 운을 뗐다.

“귀빈 여러분들께서는 잠시 시간을 내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모였다. 일부러 자유로운 분위기의 행사를 기획했지만, 우선은 최소한의 과정을 밟아 시작해야 했다. 가령 내 인사라든가, 간단한 제품 설명 같은 것들. 앞서 대본을 준비해 놨던 터라 별반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우선…….”

나는 느리게 운을 떼며 오랜 시간 버릇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볍게 입꼬리를 올리고 너무 과하지 않게 눈웃음을 지었다. 거래처 사람들을 대할 때, 그리고 직원들을 대할 때처럼 적당히 사무적인 표정이어야 했다.

“‘Sejin’의 론칭 행사를 찾아 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언제 긴장했냐는 듯이 말을 꺼내자마자 마음이 차분해졌다. 사람을 대하는 건 어렵지 않았고, 지금 여기는 내가 평가받을 자리도 아니었다. 누군가의 착한 아들을 흉내 낼 필요도, 사랑받고 자란 겸손한 후계자의 탈을 쓸 필요도 없단 말이었다.

“저는 대표 정세진입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익숙한 얼굴이 반, 그리고 익숙하지 못한 얼굴이 반. 평소라면 품평하듯 나를 바라봤을 시선들이 지금은 평화롭기 짝이 없었다. 기대감과 흥미, 딱 그 정도의 감정들.

“오늘 이 자리를 빌려…….”

미리 외워 두었던 말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여러 투자자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그간 고생했던 직원들에게 수고했단 말까지 전했다. 본격적으로 패키지 스토리를 설명하기 전에 ‘Sejin’에서 준비한 소정의 선물을 소개하는 시간도 가졌다.

“저희 ‘Sejin’에서는…….”

아득히 멀어졌던 현실감은 말을 하면 할수록 서서히 돌아왔다. 나는 지금 이곳에 서 있고, 사람들은 오로지 나라는 한 사람을 보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제품부터 시향하시길 추천 드리겠습니다.”

권이도가 보고 싶었다. 이유야 어찌 됐건 그가 눈앞에 있었으면 했다. 지금 이 순간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또 다른 방법으로 확인받고 싶었다.

그러나 홀 내부를 아무리 돌아봐도 권이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분명 오겠다고 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건지. 웬만하면 눈에 띌 사람이 머리카락조차 보이지 않았다.

“부디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마침내 모든 연설이 끝나고 또 한 번 박수가 터져 나왔다. 기분 좋은 표정의 손님들과 남몰래 엄지를 들어 주는 직원들. 그리고 그 모든 곳에서, 역시나 권이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 * *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어요, 대표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시끌벅적한 말소리가 잔뜩 취한 것처럼 들렸다. 누구는 발음이 샜고, 또 누군가는 목소리 크기를 조절하지 못해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비틀거리며 꾸벅꾸벅 인사하는 직원들을 향해 나는 최대한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다들 조심히 들어가고 내일 출근은 천천히들 하세요.”

‘Sejin’의 론칭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직원들과 함께한 회식 자리까지 마무리가 됐다. 특별한 날이니만큼 늘 가던 소고깃집 대신 코스 요리가 나오는 일식집을 다녀왔다. 회를 포함한 해산물을 잔뜩 먹은 직원들은 마찬가지로 사케 역시 한가득 마시고 얼큰하게 취한 채로 일식집을 나섰다.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나는 이태성이 대기하던 차에 올라 뻐근한 눈을 꾹꾹 눌렀다. 김 실장은 미리 퇴근시켰고, 그 탓에 이태성이 회식이 끝날 때까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나를 한 번 살펴보곤 느릿느릿 차를 출발시켰다.

“…….”

어두컴컴한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간판에 들어온 불빛들이 잔상처럼 눈에 남았다. 조금 전까지 시끌벅적하게 있었던 탓인지, 차 안이 유독 조용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태성 씨.”

“예.”

나는 눈을 깜박이며 느릿느릿 이태성을 불렀다. 론칭 행사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예상했던 것보다 예약된 향수도 많았다. 새로 출시된 향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으며, 농담으로라도 나쁜 말을 하는 손님도 없었단 말이다.

“별건 아니고…….”

그런데 왜 이리 기분이 착잡할까. 공허한 기분과 함께 물밀듯 허무함이 밀려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사실은 원인이 무엇인지는 분명했다.

“권이도 씨, 오늘 보셨습니까?”

‘무리를 해야죠. 정세진 씨가 만든 자리인데.’

분명 온다고 했는데, 권이도가 끝까지 오지 않았다. 인사는 건네지 못한다고 해도 얼굴은 내비칠 줄 알았건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행사장을 찾아오지 않았다.

내가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은 없었다. 권이도는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고, 그가 등장하는 순간 자연스레 이목이 끌렸을 터다. 오고 가는 손님들에게 모두 인사를 건넸는데 그중 당연히 권이도는 없었다.

“아뇨, 오늘은 못 뵀습니다.”

이태성은 담담한 목소리로 그렇게 대꾸했다. 역시나, 단순히 내가 그를 놓친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른 이의 입으로 마지막 확신을 듣자마자 머리가 차게 식어 버렸다.

“……그렇군요.”

언제부터 이렇게 서운함이 쉬워졌을까. 의도하지 않았는데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유치하게 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울컥 억하심정이 들었다. 무리하겠다는 말을 하지 말지.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달큼하게 웃지라도 말지.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들이 자꾸만 기분을 가라앉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권이도가 나를 지나치게 오냐오냐한 모양이다. 무슨 상황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뻔뻔한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내 입으로 무리하지 말라고 한 주제에 이토록 아쉽단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머리가 복잡한 와중에 차는 집으로 향했다. 애써 잡념을 떨치려고 노력해 봤지만, 집에 도착할 때까지 별반 달라지는 건 없었다. 오히려 기분만 더 나빠져서 막상 차에서 내릴 땐 표정 관리가 되질 않았다.

“내일 뵙겠습니다, 대표님.”

나는 이태성에서 묵례를 건네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권이도를 마주치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머리로는 계속해서 생각을 정리했다.

그런데 막상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애써 곱씹던 말들이 새하얗게 휘발됐다.

“늦었네요.”

예의 그 우아한 목소리가 나를 맞이해 줬다. 시간이 늦었음에도 정장을 입고 있었고, 머리도 아침에 세팅한 그대로였다. 혹시 지금까지 일을 했던 걸까. 그리 생각하면서도 불쑥 말이 튀어나왔다.

“……바쁘셨나 봐요.”

수려한 눈매가 느리게 깜박였다. 짙은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올곧게 나를 보고 있었다. 이내, 발간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바빴죠.”

그는 그렇게 이야기하곤 고개를 까딱했다. 왜일까, 아래로 내리깔린 시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무얼 얘기하는지도 모르면서, 권이도는 담담히 덧붙였다.

“갑자기 일이 생겼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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