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억의 끝에 (67)화 (67/131)

67화. Boite de Pandore(2)

‘Sejin’의 브랜드 론칭 행사는 명성호텔 연회장에서 이뤄질 예정이었다. 선호그룹 창립 기념식과 마찬가지로 리브라홀에 행사장이 있었고, 프라이빗하게 구성해 초대받은 손님들만 올 수 있는 자리였다.

초대장 디자인부터 행사장 구성까지, 모든 부분에 내 검토가 안 들어간 곳이 없었다. 나는 그쪽으로는 전문가가 아니었지만, 디자인팀과 마케팅팀의 조언을 듣고 십분 반영하기로 했다. 다행히 업체 측과 우리의 의견이 크게 갈리는 부분은 없었다.

“그래서 이게…… 초대장이라는 거죠?”

그리고 론칭 행사를 앞둔 날. 나는 이태성과 함께 이희나의 공방을 찾았다. 라고 쓰인 나무 간판과 아늑한 공방 내부는 언제 봐도 참 따뜻한 분위기를 풍겼다. 종아리까지 오는 하늘하늘한 치마를 입은 이희나는 초대장을 살펴보며 선하게 웃었다.

“예쁘다. 디자인 세진 씨가 고르셨어요?”

“고르는 건 디자인 팀이 했고, 저는 그냥 사인만 했어요. 제가 보는 눈이 없어서.”

행사 초대장은 엽서 같은 형태로 안에는 간단한 행사 소개와 반투명한 시향지가 함께 들어 있었다. 시향지는 호불호가 갈리지 않는 무난한 향기가 나게 했는데, ‘Sejin’의 대표 향수 중 하나가 될 제품이었다.

“향도 좋네요. 저 오라고 주신 거 맞죠?”

“그럼요.”

우선은 거래처였기에 이희나에게도 진작 초대장이 갔어야 했다. 다만 개인적인 친분이 있고, 겸사겸사 할 말도 있어서 직접 찾아왔을 뿐. 잠깐 이태성을 통해 줄까도 고민했다가 이제는 구실이 필요 없을 사이라는 생각에 그만두기로 했다.

“대표님이 직접 초대장까지 주러 오고…… 출세한 기분인데요?”

이희나는 특유의 발랄한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성격도 좋고, 일 처리도 잘하고, 그간 봐 온 바로는 이태성에게 제법 아깝지 않나 싶다. 물론 이태성도 어디 하나 빠지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우선 성격이 꽤 무뚝뚝했으니.

“희나 씨.”

이희나가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씩 웃으며 이야기했다.

“저 이번 주에 자격증 수료합니다.”

“세상에, 조향 자격증이요?”

이 말을 하러 이희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내게 길을 알려 준 사람이 다름 아닌 이희나니까. 그는 별 의미 없이 건넨 말이었을지 몰라도, 사소한 한마디로 여기까지 온 거였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너무 축하드려요.”

이희나는 마치 제 일이라도 된 양 순수하게 기뻐했다. 아직 시험을 본 건 아니었지만, 수료 시간을 모두 채운 이상 웬만하면 취득할 수 있을 터였다. 그 또한 그 사실을 알기에 사르르 미소 지으며 이야기했겠지.

“이제 어엿한 향수 회사 대표가 되셨네요.”

장난스러운 말이었으나 반쯤 진담이었다. 나는 그를 향해 마주 웃어 주곤 시간을 확인했다. 손목에 찬 시계가 슬슬 돌아갈 시간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잠깐 회사에 들렀다가 별일 없으면 집으로 가도 될 듯했다.

“저는 이제 슬슬 가보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시고요. 행사 때 뵐게요.”

이희나가 초대장을 팔랑팔랑 흔들어 보였다. 공방에서 나는 달큼한 향기에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섞였다. 이번 행사 이후에 출시될 라인엔 이희나에게 조달받은 향료를 사용한 향수가 포함돼 있었다.

“아, 그리고…….”

나는 손목시계에서 눈을 떼고 힐긋 이태성을 돌아봤다. 그사이에 공방을 몇 번이나 왔는데, 이태성은 여전히 늘 문 앞에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예전엔 왜 저렇게 고집을 부리나 했더니, 제가 이희나에게 품고 있는 사심을 들키지 않으려고 그랬나 보다.

“이태성 씨는 여기서 퇴근하세요.”

“……예?”

이태성이 눈을 끔벅였다. 짙은 눈썹이 삐쭉 올라갔다. 티 나지 않게 이희나를 돌아본 그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럼 운전은 누가…….”

“데리러 올 사람이 있어서요. 아, 차는 놓고 갈 거니까 이태성 씨 마음대로 써도 됩니다.”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부재중 전화 대신 다 도착했다는 메시지 하나가 나타나 있었다. 역시 시간 약속은 칼이라니까. 정확히 5분 전에 도착한 메시지가 참으로 그다웠다.

“그럼 내일 보죠.”

이희나의 공방을 나와 향한 곳은 건물에 딸린 지하 주차장이었다. 미리 등록된 차만 주차할 수 있는 탓에 주차장 내부는 텅텅 비어 있었다. 몇몇 이름 있는 브랜드의 외제 차와 내가 타고 온 권이도의 차. 그 모든 걸 둘러본 나는 입구와 가까운 곳에서 익숙한 차 하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던 한 명의 남자도.

“…….”

“…….”

특징 없이 차려입은 정장이 그의 성격을 보여 줬다. 투 버튼으로 된 재킷을 깔끔히 여미고, 무채색 넥타이엔 아무 무늬도 없었다. 나는 시선을 올려 얇은 테의 안경까지 확인하고 넌지시 이야기했다.

“오랜만에 뵙네요.”

“……예.”

그가 느리게 대답했다. 습관적으로 안경을 추켜올리더니 가만히 고개를 숙여 내게 인사를 건넨다. 정중한 태도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도련님.”

‘김 실장님을 제 쪽으로 불러 주셨으면 합니다.’

그에게 부탁한 두 가지 중 다른 하나. 그건 김 실장을 다시 내 비서로 붙여 달라는 것이었다. 일을 하면 할수록, 바빠지면 바빠질수록 능력 좋은 비서의 부재가 크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물론, 권이도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떠보려는 의도도 있었다.

‘새로운 비서를 뽑자니 번거로울 것 같고, 이태성 씨한테 계속 비서 일을 시키기엔 복지가 별로인 것 같아서요.’

이태성이 권이도의 사람이라면 김 실장은 해신의 사람이었다. 뭐, 이제는 해신의 사람이 아니었으니, 애매한 포지션이 되었지만 말이다. 다만 나를 정말 완전히 독립시킬 거라면, 내 주변에 있는 그의 사람들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해신…… 아니, 구 해신그룹에서도 내부 기밀을 유포한 비서 실장을 데리고 있긴 힘들 테니까요.’

허울뿐인 구실이라는 건 모르지 않았다. 그냥 화풀이하듯 내뱉은 부탁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다시는 손 내밀지 않을 인연이라고 생각해 놓고, 이렇게 쉽게 불러들이는 게 민망하기도 했다.

‘이게 제가 처음으로 내린 혼자만의 결정입니다.’

그러나 밀려드는 서운함은 그러한 감정을 모두 지워 내기에 충분했다. 내가 뿌리 내리지 못하게 할 거라면, 애초에 다른 곳에서 뿌리 뽑지 말았어야 했다. 비가 오면 떠내려갈 미약한 땅이었지만, 그 비를 내린 건 결국 권이도였으니.

‘들어주실 겁니까?’

도발하듯 건넨 말에 권이도는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차례 김 실장을 경계하던 그였으니 제 손으로 데려오기엔 달갑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퍽 차분한 말씨로 얘기했다.

‘……그게 정세진 씨가 바라는 거라면 내가 의견을 낼 부분은 아니죠.’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나는 거기까진 알지 못했다. 그가 보이는 반응이 겸손인지 아니면 단념인지 알아낼 방법도 없었다. 어쨌든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아무렇지 않은 척 덤덤한 표정을 꾸며 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비서로 붙여 주겠습니다. 인수인계를 해야 할 테니 수면제보단 늦겠군요.’

그렇게 지금, 정말 김 실장이 내 눈앞에 있었다. 내가 해신에서 일할 때 타던 차를 끌고, 내 비서로 있을 때와 하나도 바뀌지 않은 모습으로. 아무렇지 않게 뒷좌석 문을 열어 주며 사무적인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회사로 모시겠습니다.”

나는 무어라 안부를 묻는 대신 차에 올라탔다. 차 문을 닫아 준 김 실장이 뒤로 빙 돌아 운전석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시동을 거는 동안 그와 내 사이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차는 지하 주차장을 나와 익숙한 길을 따라 회사로 향했다. 아마 오래 걸리지 않아 도착할 텐데, 그때까지 이 정적이 깨지지 않을 듯했다. 어색함을 느끼는 게 나뿐만은 아닌지, 김 실장은 평소처럼 ‘피곤하면 눈을 붙여라.’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

운전을 하는 뒷모습이 새삼 낯설었다. 그 몇 달 사이에 이태성에게 익숙해지기라도 한 모양이다. 덩치가 산만 한 이태성과 달리 김 실장은 뒤에서 봤을 때 운전석이 꽉 차 보이지는 않았다.

“용케 이 차가 아직도 있네요.”

나는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넌지시 이야기했다. 앞으로 계속 함께 일할 텐데 이런 상태로 회사에 돌아갈 수는 없었으니까. 물론 그 외에 물어볼 것도 몇 개 있었고 말이다.

“정리하면서 팔아 버렸을 줄 알았는데…….”

김 실장이 가져온 건 내가 본가에 두고 왔던 차였다. 권이도에게 차를 받는 바람에 굳이 찾지 않았던 그것. 오피스텔에 둔 것도 아니니 분명 처분했을 줄 알았는데, 김 실장은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도련님 재산에는 손대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 재산이라 함은 자동차 몇 대와 오피스텔일 것이다. 현금성 재산은 당연히 못 건드리겠지만, 물건까지 그대로 둘 줄은 몰랐다. 이런 내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김 실장이 담담히 덧붙였다.

“권이도 전무가 손 써놓은 거 맞습니다.”

“…….”

얼마나 철저히 준비해 놨던 건지, 그 치밀함이 아득할 지경이다. 아무리 서류상 남이라고 해도, 내게 아무런 불똥도 튀지 않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본가에 있던 고용인은 어떻게 됐냐고 물어볼까. 그리 생각했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문 집사의 안부는 궁금했지만 다른 사람들까지 내가 챙길 필요는 없었으니까. 이제는 내가 관심을 두는 것도 월권이었다.

“도련님.”

김 실장은 나직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홀로 고개를 젓기도 했다.

“아니…… 대표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김 실장만큼 공과 사 구분이 철저한 사람이 있을까. 가끔은 AI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승진할 때면 꼬박꼬박 호칭을 바꾸고, 벌어진 상황에서 항상 이성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뭐, AI는 자의로 누군가를 배신하진 않겠지만 어쨌든.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그를 보는 대신 차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백미러로 눈을 맞춰 봤자 괜히 기분만 이상해질 것 같았다. 게다가 그가 할 질문이야 어차피 뻔했으니까.

“저를 왜 다시 부르셨는지 여쭤봐도 됩니까?”

역시나 김 실장은 내가 충분히 예상한 질문을 건넸다. 거기다 친절하게도, 자신이 왜 이런 질문을 건네는지까지 설명해 줬다.

“외람되지만, 사실 다시는 연락하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나는 결코 김 실장에게 연락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내가 먼저 나서서 상황을 바꾸기엔 그만한 체력과 여유가 턱없이 부족했다.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원래는.”

그래서 솔직히 대답하자, 김 실장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으며 카 시트에 머리를 기댔다.

“근데 비서가 필요해졌어요.”

더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그가 다시 나를 보필하게 됐지만, 예전처럼 사적인 부분까지 맡길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수면제도 내 선에서 해결하고, 최대한 업무를 분리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게 답니다.”

“…….”

김 실장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층 고요해진 분위기는 아까의 어색함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정확히는 공허함이라고 해야 하나. 둘 다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한 게 분명했다.

“……저한테 실망하셨을 거 알고 있습니다.”

한참이 지나서야 김 실장이 이야기했다. 이번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가 운전을 하고 있는 터라 눈을 맞추진 못했지만 말이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독단적으로 행동해서 죄송합니다. 대표님이…… 아니, 도련님이 저한테 실망하고 배신감 느끼셔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언뜻 건조한 사과였으나 김 실장 나름의 진심일 것이다. 오히려 절제된 감정이 더 크게 와닿았다. 나는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고, 그에게 딱히 실망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근데 도련님.”

넌지시 운을 뗀 김 실장이 잠깐 말을 멈췄다. 동시에 신호에 걸린 차도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다. 김 실장은 백미러를 통해 나를 바라봤다.

“저희 부부는 아이를 가질 수 없어서, 신혼 때부터 진지하게 입양을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뜬금없는 말이었으나 무어라 딴지를 걸 수는 없었다. 그에게 아이가 없다는 건 알았는데, 그게 그런 이유였는지는 몰랐다. 그냥 일이 바쁘니까 2세를 보지 않는 줄만 알았지.

“……처음 듣는 얘기네요.”

“예, 처음 말씀드렸으니까요.”

김 실장은 고개를 끄덕이곤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눈이 살짝 접혔는데 사실 남들이 보면 거의 비슷할 것이다.

“실제로 쉬는 날엔 아내랑 봉사도 몇 번 가고 그랬습니다. 근데 한 아이를 책임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 아직까지도 둘이 살고 있고요.”

그 신중한 성정에 입양을 쉽게 결정할 리가 없었다. 하물며 물건을 사도 고민하는데 한 생명을 데려오는 건 또 다른 문제니까.

“그런데 해신에 도련님이 입양됐죠.”

아버지가 나를 주웠을 때, 김 실장은 아버지의 기사였다. 내 나이가 아홉이었으니, 그는 아직 서른도 채 되지 않았을 때다.

“주제넘은 건 알지만, 간혹 도련님이 제 자식 같을 때가 있어서요.”

그 말엔 나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어이가 없어서가 아니라, 나 또한 은연중에 알고 있었기 때문에. 김 실장이 나를 보는 시선은 자식을 보는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절 너무 내치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왜, 그 말을 듣자마자 욱하는 기분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여태껏 차분하던 마음이 파도치듯 크게 흔들렸다. 멀미라도 하는 것처럼 명치 언저리가 울렁거렸다.

“도련님을 남이라고 생각해서 말씀을 안 드렸던 게 아닙니다. 내 자식 같으니까, 좋은 모습만 보여 드리고 싶어서 그랬던 겁니다.”

서운했나 보다. 이미 여러 번 권이도에게 그랬듯이. 나를 쏙 빼놓고 벌어진 상황에, 그걸 알리지조차 않았던 무심함에. 그러는 나야말로 최소한의 알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아 놓고.

“지난번엔 저도 경황이 없어서 설명을 제대로 못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제 와서 몇 마디 해봤는데…… 변명이라고 생각하고 무시하셔도 됩니다.”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김 실장은 내게서 시선을 떼어 내며 기어를 바뀌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가 유독 먹먹하게 들렸다.

“다시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

공과 사 구분이 철저하긴. 내가 김 실장을 잘못 봤던 게 분명했다. 이토록 사사로운 마음을 가질 줄 알았다면 그런 생각 따위 하지 않았을 텐데.

“……김 실장님은 왜 다시 저한테 오셨습니까?”

나는 잔뜩 복잡한 기분으로 김 실장에게 물었다. 이 마음을 무어라 부르면 좋을지, 그런 건 찾으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때의 기분이 서운함이었노라 깨달은 것만으로 오늘의 할당량이 끝난 기분이었다.

“제가 자식 같아서 돌봐 주려고 오신 겁니까?”

“아뇨, 그건 아닙니다.”

김 실장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단호하게 대꾸했다. 내년이면 벌써 서른이지 않으시냐는 말엔 나까지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자식 같다느니 뭐니 해놓고, 돌봐 줄 나이가 아니라고 선을 그을 건 뭐란 말인가.

“그냥 스카웃 조건이 좋았습니다.”

깔끔한 대답은 그 무엇보다 신뢰 가는 것이었다. 복지를 돈으로 주겠다던 말대로, 권이도가 제법 그럴싸한 조건을 불렀나 보다. 그럼 다른 데서 더 좋은 조건이 오면 거기로 가버리겠다는 건가. 그리 생각하는 와중에 김 실장이 운을 뗐다.

“전에 그러셨죠, 이제 내 비서도 아닌 사람을 무슨 권한으로 혼내냐고요.”

가족들을 보고 왔던 날 내가 차에서 했던 말이었다. 그 말을 할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아직까지도 또렷이 기억난다. 이제는 더 이상 연결 고리가 없다는 사실에 더할 나위 없는 허무함을 느꼈더랬다.

“관계엔 구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

무심히 튀어나온 말이 귓가에 꽂혔다. 나는 멀거니 그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김 실장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뒷말을 이었다.

“제가 비서를 관둔다고, 저희가 생판 남으로 돌아가는 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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