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Boite de Pandore(1)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화를 부르는 이야기는 오랜 옛날부터 수도 없이 많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판도라의 이야기다. 신들이 인간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제우스가 건네준 작은 상자. 절대 열어 보지 말라는 당부에도 판도라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상자를 열어 본다.
그 안에서 나온 건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재앙들이었다. 욕심, 원한, 시기, 질투를 비롯한 부정적인 감정들. 판도라는 황급히 상자를 닫았으나, 비통하게도 이미 돌이키기엔 늦어 버린 뒤였다. 제우스가 판도라에게 내린 저주는 다른 무엇도 아닌 호기심이었다.
이렇듯 호기심은 인간에게 결코 긍정적인 감정은 아니었다. 득보단 실이 많고, 해소한다고 해서 상황이 해결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왜,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처럼. 때로는 적당한 외면이 진실과 마주하는 것보다 낫곤 했다.
그렇기에 나는 언제나 알고자 하는 욕구를 최대한 억누르곤 했다. 어린 시절에는 그럴 자격이 없어서, 크고 난 이후엔 알아 봤자 좋을 게 없어서, 그리고 권이도와의 약혼 이후에는 왠지 모를 위기감 때문에.
그가 내게 숨기는 건 무엇일까.
그는 어떻게 나에 대해 알고 있을까.
그의 머릿속엔 무슨 생각이 들어 있을까.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의문은 권이도가 아니면 해결해 줄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에게 직접 물어야 했고, 확인한 뒤 모든 사실을 들어야 했다. 비록 그게 달가운 내용이 아닐지언정 언제까지고 외면할 수 없단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판도라처럼 그 상자를 열어 볼 용기가 없었다. 처음엔 자격이 부족했을 뿐이지만, 지금은 미지에서 오는 불안감이 그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게 했다. 권이도가 주는 아늑함에 빠진 채로 흐르는 강물에 몸을 맡기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유예라는 이름의 준비 시간을 갖고 내 나름의 계획을 세웠던 거다. 조금만 더 나중에, 내 마음이 어느 정도 안정된 후에, 그의 말이 어떤 내용이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약 그게 지금의 평온함을 깰 무언가라면 내가 숨 쉴 구멍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니까.
“대표님, 이쪽 서류 결재 부탁드립니다.”
장례식장에 다녀오고 보름이 지났다. 권이정의 실종은 결국 실족사로 마무리됐다. 시체를 찾지는 못했으나, 들짐승에게 변을 당해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원래라면 매스컴이 떠들썩해질 소식이었지만, 공교롭게도 권병욱 회장의 죽음과 겹치는 바람에 묻혀 버렸다.
갑작스러운 회장의 부재로 선호 측은 이런저런 일 처리에 여념이 없는 듯했다. 조만간 권상미가 회장으로 올라가야 했고, 그에 따른 구조 조정도 잇따를 것이다. 그래서일까, 한때 떠들썩하던 해신금융그룹의 이야기는 이제 신문 말미에도 잘 나오지 않았다.
“론칭 행사 일정은 다 나왔나요?”
“예, 이제 마무리만 하면 됩니다.”
그사이, ‘Sejin’의 모든 론칭 준비가 마무리됐다. 중간부터 합류한 대표였지만, 나 또한 모든 과정에 직접 참여해 세세한 부분까지 관리했다. 처음에는 잠깐 머무는 회사라고 생각했는데, 일과 관련해서는 또 대충이 되질 않았다.
“저…… 대표님.”
한창 서류를 훑는 와중에 직원이 넌지시 운을 뗐다. 이야기하라는 의미로 고개를 들자, 그가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괜찮으신가요? 요새 많이 피곤해 보이셔서…….”
“아.”
나는 작게 탄성을 내뱉고는 습관적으로 눈언저리를 매만졌다. 안 그래도 아침에 거울을 봤을 땐 나조차도 조금 놀라고 말았다. 눈이 퀭한 건 둘째치고 전체적으로 너무 지쳐 보여서. 근래엔 항상 이런 식이었으나, 오늘은 조금 더 심했나 보다.
“괜찮습니다. 론칭 때문에 긴장돼서 잠을 잘 못 잤네요.”
제대로 된 이유를 말할 수는 없으니 적당히 그럴싸한 핑계를 가져다 붙였다. 딱히 거짓말은 아니었고 그 또한 피곤의 이유 중 하나긴 했다. 직원은 내 말이 영 의외라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긴장이요? 대표님도 그런 걸 하세요?”
“……그럼요. 저도 사람인데.”
부드럽게 웃어 보이자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게 중얼거리며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기도 했다.
“그래도 항상 침착하셔서 생각도 못 했어요.”
“그런가요? 그럼 다행이고요.”
하하, 웃으며 서류에 사인을 휘갈겼다. 전에 일할 때부터 늘 쓰던 사인인데, 이제 보니 ‘Sejin’의 로고와 퍽 비슷하단 생각이 든다. 남들이 보면 아마 분명히 내가 만든 회사라고 생각할 터다.
“대표님도 행사 날까지는 푹 주무세요. 밥도 잘 챙겨 드시고요.”
잘 챙겨 먹는 걸 넘어서 아침저녁으로 진수성찬이 차려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냥 걱정해 줘서 고맙다고 한 뒤 서류를 들려 내보냈을 뿐. 달칵, 문이 닫히자마자 대표실 내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잠을…….”
가만히 눈을 감고 의자 헤드에 머리를 기댔다. 머리가 핑핑 돌았지만, 잠이 들 것 같진 않았다. 지끈거리는 두통은 요 며칠 한시도 내 몸을 떠난 적이 없었다.
“잘 잘 수가 없지.”
그래, 푹 잘 수 있을 리가. 내 오랜 불면증과 악몽이 아직까지도 매일 반복됐으니까. 차라리 마음이라도 편하면 모르련만, 이제는 또 다른 고민까지 생겨 버렸으니.
‘……뭐가 불안해요, 권이도 씨.’
그날, 권이도에게 러트 사이클이 왔던 날. 우습게도 나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깊은 단잠에 빠져들었다. 아마 권이도의 페로몬이 충분했고, 그가 내 곁에 머물렀기 때문일 거다. 지난 며칠간 쌓여 온 피로 역시 한몫했을 거고.
‘일어났어요?’
다음 날이 되었을 때, 권이도는 잠에서 깬 나를 말끔한 얼굴로 맞이해 줬다. 상냥히 머리를 넘겨 주고 조금 더 자도 된다며 시간을 알려 줬다. 새벽 중에 주변을 다 치웠는지, 지저분하게 뿌려졌던 정액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어제 일 기억나세요?’
나는 가장 먼저, 그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잠들기 전 보았던 것과 달리 그는 또렷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눈가를 찌푸린 채 가볍게 대꾸했다.
‘대충.’
‘대충이라면 얼마나…….’
‘아예 안 나는 건 아니고.’
전부 기억하진 못한다는 말이었다. 대충 뭉뚱그리는 게 아니라, 정말 생각나는 게 별로 없다는 듯이. 잠깐 눈을 내리깔았던 권이도는 영 난감한 얼굴로 사과를 건넸다.
‘내가 실수한 게 있다면 사과하죠.’
모르는 척하는 거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가 아무리 표정 관리에 능해도 이렇게까지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그 어떤 것도 묻지 못한 채 고개를 저었다.
‘……아뇨.’
‘…….’
‘실수하신 거 없습니다.’
그냥, 복합적인 이유였다. 그가 한 말이 얼마만큼의 무게를 담고 있는지 가늠이 되질 않아서. 엿보면 안 될 무언가를 훔쳐본 것처럼 괜히 죄지은 기분이 드는 바람에. 마지막에 보았던 권이도의 얼굴에서 불가침의 감정을 발견했으니까.
‘다행이네요.’
죄책감이었다. 후회이자 역린이기도 했다.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감정 끝에 그는 실수한 게 없다는 말을 듣고서야 안도를 내비쳤다. 내 손을 붙잡고 손등에 입을 맞추는 상대를 앞에 두고, 나는 차마 그 평온함을 망가뜨릴 자신이 없었다.
“미련한 일이지…….”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묻지 않았는데, 이제는 또 기분이 상할까 봐 묻지 못하고 있다. 호기심을 이기는 건 두려움이구나. 직면하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새삼 느끼는 요즘이다.
게다가 대화도 결국엔 타이밍이라고 했다. 그날 아침에 묻지 못했더니 도무지 물어볼 순간이 오질 않더라. 권이도가 바쁜 건 둘째치고, 진짜 시간이 없는 건 그가 아니라 나였으니까. 함께 식사를 못 하는 날도 수두룩했으니 진지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올 리가 없었다.
“……애초에 말도 안 되고.”
나는 멀쩡히 살아 있는데,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이야기였고 곧장 이해하기엔 어려움이 많았다. 그걸로 모자라 이어진 그 뒷말까지도. 믿기지 않을뿐더러, 믿고 싶지도 않았다.
“…….”
드르륵 의자를 움직여 창문 바깥을 내다봤다. 널찍한 도로엔 오고 가는 차와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 한적했다. 부유감이 느껴질 만큼 평화로운 풍경 속에 나는 갑갑한 숨을 토해 내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 * *
퇴근길엔 자격증 학원에 들렀다. 그간 일이 바빠서 나오지 못했지만, 앞서 부지런히 수강한 덕에 다음 주 즈음에 조향 시험이 예정돼 있었다. 계절 이미지에 맞는 향수를 조향하고, 간단한 필기시험을 치르면 드디어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배운 건 톡 쏘는 향이 독특한 스파이시 노트였다. 개성이 강해서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오리엔탈 향료에 섞으면 이국적인 표현이 가능하다고 한다. 권이도의 페로몬에도 이것과 비슷한 성분이 조금은 있지 않을까. 허무맹랑한 생각임을 알면서도 그를 떠올렸다.
“일찍 들어왔네요.”
학원을 마치고 돌아간 집에는 권이도가 있었다. 예전 같으면 이른 시간도 아닌데, 그는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얘기했다. 비꼬는 건 아니었고, 그냥 담담히 내뱉은 사실이었다.
“식사하셨어요?”
“아뇨, 아직.”
“……아직 안 드셨다고요?”
가볍게 물었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근래보다 좀 일찍 들어왔을 뿐, 원래라면 식사를 마쳐야 할 시간이었다. 옷까지 갈아입은 걸 보면 제시간에 퇴근했나 본데, 왜 아직도 밥을 안 먹었냔 말이다.
“혹시 몰라서 기다렸거든요.”
권이도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며 고개를 까딱했다. 보일 듯 말 듯 올라간 입꼬리가 제법 뿌듯해 보였다.
“기다리길 잘했네요. 같이 먹죠.”
“…….”
나는 마땅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뒷덜미를 쓸어내렸다. 괜스레 멋쩍은 기분이 든 탓이다. 혹시 내가 늦은 며칠간 항상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을까. 그리 생각했다가 괜히 고개를 저었다.
옷을 갈아입고 내려오자, 역시나 식탁에 화려한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날이 더워서인지, 대체로 찬기가 도는 음식에 새콤한 소스를 얹은 메뉴였다. 산미가 감도는 해산물 냉채와 통후추를 뿌린 양갈비, 간장 소스를 곁들인 민어찜이 그것이었다.
나는 오독오독한 식감의 해파리를 씹으며 흘긋 권이도를 살펴봤다. 집에 있을 땐 앞머리를 내리고 있어서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 보였다. 도저히 서른두 살로는 보이지 않았고,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미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어제도 잘 못 잤습니까?”
한참 식사를 이어 가던 중, 권이도가 넌지시 물었다. 나는 입 안에 있던 음식을 꿀꺽 삼키곤 애매하게 눈을 굴렸다. 늘 대답할 말은 비슷한데 답할 때마다 어쩐지 머뭇거리게 됐다.
“그냥 좀 설쳤습니다.”
역시나 권이도는 전혀 믿지 않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냥 좀 설친 수준이 아니라는 걸 그 또한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눈가를 찌푸리며 혀를 찼겠지.
“수면제를 바꿔야겠군요.”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권병욱 회장의 장례식을 치르던 날. 나는 그에게 총 두 가지를 부탁했다. 하나는 시간이 좀 걸린다고 했고, 다른 하나는 의사를 소개해 달라는 것이었다.
‘수면제를 처방받을 의사가 필요합니다.’
기존에 먹던 수면제가 다 떨어졌으니, 약을 처방해 줄 의사가 필요했다. 원래는 김 실장이 전해줬으나 이제는 내 손으로 직접 해야 할 테니까. 그렇다고 아무 병원에나 가기엔 애매하니, 권이도가 연결해 준다면 좋을 듯했다.
‘언제까지고 권이도 씨 페로몬에 의존할 수는 없으니까요.’
사실 반쯤 시위하듯 건넨 말이었다. 네가 나를 독립된 개체로 만들려면 내 불면증을 다른 방법으로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권이도 당신과 함께 잠이 드는 게 아니라, 약물로 치료해야 한다고.
‘……상담이 필요한 게 아니라면 수면제 정도는 내가 가져다주죠.’
권이도는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 입을 다물었다가 확신 어린 목소리로 묻기도 했다.
‘원래 먹던 약이 뭡니까?’
졸피뎀 타르타르산염. 권이도가 그다음 날 곧장 가져다준 약이었다. 최 교수가 늘 처방해 주고, 김 실장이 전달해 주었던 것. 흔히 사용되는 수면제였는데, 문제는 전혀 효과가 없다는 점이었다.
“……아마 바꿔도 비슷할 겁니다.”
물론 이게 단순히 약의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이미 한차례 최 교수에게 여러 가지 수면제를 처방받아 봤다. 수면 환경을 바꾸는 건 소용 없었고, 그가 조심스레 권유했던 상담 역시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불면증이 워낙 심해서요.”
“…….”
살면서 처음으로 최 교수를 제외한 누군가에게 솔직히 말한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잠깐 침묵이 감돌았다. 아마 그 또한 차마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겠지.
“……그렇군요.”
저와 함께 자라고 하면 무슨 말을 해줄까.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 권이도는 포기한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정작 입 밖으로 나온 건 다른 화제였다.
“……다음 주가 론칭이죠?”
그답지 않게 부자연스러운 화제 전환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뒤이어 질문 하나가 더 건네졌다.
“학원도 그때까지 다닙니까?”
“네, 그 주에 다 끝날 겁니다.”
다음 주면 바쁜 일정도 어느 정도 일단락됐다. 고생한 직원들을 위해 회식을 하고, 앞으로의 추이를 살펴보며 안정 궤도에 들어서는 일만 남았다. 그때에는 내가 늦게 퇴근하는 날도 확실히 줄어들 거다.
“그래서 말인데…….”
나는 느리게 운을 떼며 젓가락을 내려놨다. 권이도가 의아함이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짙은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예전과는 달리 퍽 복잡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 주 주말에 같이 밥이라도 먹을래요?”
“밥?”
권이도가 고개를 갸웃했다. 마치 지금 먹고 있는 건 밥이 아니냐는 듯이. 나는 엷은 미소를 띤 채 느릿느릿 입술을 움직였다.
“우리가 아직 외식은 안 해봤잖아요.”
집이 아닌 곳에서 식사한 건 약혼식과 장례식 때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우리 둘만의 식사는 아니었으니 외식이라고 부르기엔 애매하지만 말이다.
“제대로 된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어서요.”
만약 싫다고 하면 깔끔히 포기할 생각이었다. 중요한 자리라 구색을 갖추고 싶었을 뿐, 집에서 먹는다고 해도 상관은 없었다. 오히려 그쪽이 대화를 나누기엔 편할지도 몰랐고.
“식당은 제가 빌릴 테니까…….”
“…….”
“권이도 씨는 몸만 오면 됩니다.”
일부러 장난스러운 투로 얘기했다. 데이트 신청이라도 하는 양 눈까지 찡긋하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권이도는 그리 나쁘지 않은 느낌으로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기대해야겠네요. 첫 외식.”
자상한 목소리였다. 내 제안이 그다지 껄끄럽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 오히려 좋아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드시고 싶으신 건 따로 있으세요?”
“아뇨, 정세진 씨가 좋아하는 음식이면 됩니다.”
가볍게 대꾸한 그가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언뜻 무표정 같았으나, 그간 권이도를 봐 온 나는 알 수 있었다. 권이도는 지금 정말로 그날을 기대하고 있다는 걸.
“바쁘면 얘기해요. 식당 예약은 내가 해도 되니까.”
“……그럼 제가 대접하는 게 아니죠.”
괜히 명치에 돌덩이가 얹히는 기분이었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식사를 청했는지도 모르면서, 막연히 미소 짓는 모습이 양심에 찔렸다.
“제가 가 본 곳으로 예약해 둘게요.”
식당은, 역시 통으로 비우는 게 좋겠지.
나는 머릿속으로 계획을 정리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였다. 그에게 물어볼 것들과 확인해야 하는 것들. 그리고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지나갔던 수없이 많은 의문.
‘나는 너를 따라서 죽었지.’
그가 건네준 상자엔 대체 어떤 것들이 들어 있을까. 내가 그걸 열어 봤을 때, 나는 과연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안에 담긴 게 부정적인 것이라면 부디 마지막에 남은 건 행복이길. 헛된 희망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