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억의 끝에 (64)화 (64/131)

64화. Le Bon Choix(6)

식당으로 돌아갔을 때, 권이도는 내가 떠날 때와 같은 모습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팔짱을 낀 채 눈을 내리깐 모습은 무언가 깊이 생각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도무지 방해할 수 없는 분위기였기에 그에게 말을 거는 것도 한참이 걸렸다.

“……왔어요?”

나를 먼저 발견한 건 권이도였다. 그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내가 돌아왔음을 알아차리고 알은체를 했다. 그제야 나는 그에게 다가가 다시 맞은편에 앉았다.

“오래 걸렸네요.”

그러게. 이렇게까지 오래 걸릴 줄은 몰랐는데. 세수만 하고 돌아오면 될 것을 너무도 긴 시간을 소요하고 말았다.

“잠깐 부사장님을 마주쳐서요.”

“……누나를?”

권이도는 내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 하나 아까 나눴던 대화를 마저 이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술이 반쯤 담긴 종이컵을 톡톡 건드린 권이도가 넌지시 내게 물었다.

“무슨 얘기를 했습니까?”

“그냥…….”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까. 솔직히 말해 주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건 내키지 않았다. 곧장 그에게 모든 걸 말해 버리는 것도 왠지 고자질을 하는 느낌이었으니까.

“별 얘기 안 했습니다.”

‘어차피 선호그룹은 조만간 해체될 거예요.’

아까, 부사장직을 내려놓겠다던 권이경은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그렇게 얘기했다. 언젠가 권이도가 해줬던 이야기와 정확히 일치했다.

‘그룹 대표자가 갖는 상징성은 생각보다 더 영향력이 크거든요.’

나도 모르지 않았다. 권병욱 회장이 선호그룹에 어떤 존재인지. 그의 죽음으로 인해 앞으로 그룹의 미래가 어떻게 바뀔 것인지.

지금 선호의 형태는 권병욱 회장이 생전에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기업 이념은 물론 그 체제와 권력, 그리고 대외적인 이미지까지. 잠깐이겠지만 그 공백으로 인해 선호는 피치 못하게 주춤할 것이다.

‘회장님이 돌아가셨으니 주변에서 쥐잡듯이 물어뜯겠죠.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오는 기업이 없는 건 세진 씨도 알 거고.’

아마 권이경은 그 말을 하며 내 너머로 해신을 떠올렸을 것이다. 온갖 비리로 인해 무너진 아버지와 처참하게 망가진 신뢰 같은 것. 해신은 좀 과하게 먼지투성이였지만, 대개 기업이란 적당한 비리를 공익을 위한 것이라 속여 운영하는 곳이었다.

‘줄줄이 터지기 전에 우리 선에서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해야죠.’

그 수단이 그룹의 해체일까. 이해되지 않는 표정인 내게 권이경은 상냥히 설명했다.

‘권력을 분립하겠다는 명목하에 계열사별 자율 경영 체제로 바뀔 거예요. 서민 친화적 기업이 되겠다는 느낌으로 긍정적인 변화를 보여 줘야죠.’

참으로 이상적인 말이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는데, 다행히 권이경도 웃는 바람에 무안하지 않았다.

‘물론 대외적으로 분리할지언정 지분 관계는 별로 달라지지 않겠지만…….’

선호그룹이 100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이제는 10 정도의 계열사 열 개로 쪼개겠다는 말이었다. 그 지배 관계는 변하지 않을 테니 결국 가장 꼭대기에 있는 사람이 가진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

‘민심을 잡을 경영 쇄신안은 늘 필요하거든요.’

‘그 말씀을 왜 저한테…….’

‘왜겠어요?’

권이경은 그걸 모르냐는 듯 의아한 표정이었다. 권이도와 닮은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뒤이어 흘러나온 한마디는 언젠가 권이도가 내게 내비쳤던 자신감과 일치했다.

‘차기 부회장은 이도가 될 거예요.’

“부사장님이…….”

나는 느리게 운을 떼며 슬쩍 권이도를 바라봤다. 권이도는 가만히 내 뒷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한 목소리를 꾸며 냈다.

“혜율이랑 잘 놀아 줘서 고맙다고 하시더라고요.”

거짓은 아니었다. 실제로 들은 말이기도 했고. 그 말만 한 게 아니라는 점이 문제였던 거지.

“부사장님 부부가 정말 금슬이 좋으신가 봐요.”

“뭐…… 평범한 편이죠.”

권이도는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휴게실이 있는 쪽을 쳐다본 그가 종이컵 끄트머리를 입술에 대며 얘기했다.

“둘 다 성격이 좋아서.”

‘내가 관심 있는 건, 부회장 따위가 아니라 선호재단이거든요.’

그러고 보니, 선호재단 이사장이 권이경이었다. 저소득층 가정을 위한 보육 사업과 그 외 문화예술사업을 구축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 재단 안에 있는 선호미술관, 즉 혜율미술관은 그의 남편인 신대웅이 관장으로 있었고.

‘기업이 쪼개진 후의 그런 귀찮고 지저분한 뒤처리는 별로 하고 싶지 않네요.’

그리 말하는 권이경은 지금껏 본 적 없는 편안한 표정이었다. 매체에 나올 땐 늘 딱딱한 표정인데, 마치 제 아이인 권혜율을 떠올릴 때처럼 부드러웠다. 그 표정을 보자마자,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정말 그걸로 괜찮으십니까?’

내가 아는 권이경은 결코 권력 욕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후계자라는 유리함을 제외하더라도 그 능력과 노력으로 꼭대기에 우뚝 섰단 말이다. 그런데 끝내 포기할 자리였다면 왜 그렇게 아등바등 올라갔단 말인가.

‘지금까지 쌓아 온 게 아깝지 않으세요?’

‘글쎄…… 아까울 이유가 있나?’

권이경은 픽 웃으며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단정히 묶은 머리칼이 사르륵 흘러내렸다.

‘남들은 배부른 소리로 듣겠지만, 위로 올라가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건 내가 선택한 길이 아니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이런 게 아니라고.’

꿈이라고 해야 할까. 장래 희망의 영역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을 짓자, 권이경이 씩 웃으며 물었다.

‘세진 씨는 본부장 일이 만족스러웠나요?’

‘…….’

이 집안사람들은 말문을 막히게 하는 데 자격증이라도 딴 모양이다. 식사는 했냐는 듯 가볍게 묻고 있는데 그 내용은 두말할 것 없이 정곡이었다. 내가 말없이 입을 다물자, 권이경이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거기서 그만두면 다들 날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중간에 힘들어서 포기한 사람인 줄 알겠지.’

충분히 상상되는 그림이었다. 만약 거기서 권이경이 그만뒀다면 그의 능력은 딱 거기까지로 평가됐을 것이다. 그룹을 이을 자신이 없으니 도망치는 거라고, 그런 이야기를 들을지도 몰랐다.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과 할 수 없어서 못 하는 건 달라요. 난 포기하는 게 아니라 내 손으로 관두는 거예요. 이 차이를 알겠어요?’

내 손으로 직접 선택한다는 게 뭘까. 깊이 생각하진 않았지만, 최소한 내게는 남 일처럼 느껴지는 말이었다. 나는 단 한 번도 나 스스로 무언가 선택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내가 이 자리까지 올라오지 않고 이도한테 모든 걸 넘겨줬으면 넘겨준 게 아니라 빼앗겼다는 소리를 들었겠죠.’

권이경은 어림도 없다는 듯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권가 특유의 여유로움과 제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실제로 그는 후계 싸움에서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나는 그룹엔 관심이 없지만 능력이 없어서 졌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고, 이도는 주변 평가가 어떻건 제 손에 들어오면 괜찮다는 주의거든요.’

어떤 의미에선 권이도도 참 대단하다 싶다. 그 드높은 자존심에 거저먹는 권력을 거부하지 않다니. 아니, 어쩌면 그 또한 드높은 자존감에서 나오는 타협일 수도 있었다.

‘이해관계가 맞으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서로 윈윈해야죠.’

권이경의 마음은 잘 알겠으나, 여전히 왜 내게 이런 말을 해주는지는 알 수 없었다. 권이정을 찾았냐고 묻는 짧은 통화는 입막음을 시키고, 이런 깊은 사정은 자세히 설명해 주다니. 내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자, 권이경이 가벼운 말투로 물었었다.

‘놓치기 아깝지 않아요? 장차 선호그룹의 모든 게 정세진 씨 약혼자 손에 들어갈 텐데.’

‘…….’

두 번째, 그의 입에서 약혼자라는 말을 들었다. 놓치기 아깝다는 게 설마 권이도일까. 권이경은 내가 애써 부정하려던 사실에 못을 박았다.

‘동생이 세진 씨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신기한 일이지. 일적인 이야기를 할 땐 냉철하기만 했는데, ‘동생’이라고 말하는 순간 느낌이 달라졌다. 나긋하게 내려앉은 페로몬이 권이경의 다정함을 보여 주는 듯했다.

‘오지랖인 걸 알지만,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니까요. 나는 그 약혼이 계약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거든요.’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서 다른 가족 일에 신경 안 쓴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리 말한 게 불과 몇 분 전이 아니던가. 권이경은 퍽 재미난 말을 들은 사람처럼 웃었다.

‘보통 그걸 속으로는 생각해도 말로는 못 따지던데.’

그야 그렇겠지. 권이경에게 말로 딴지를 걸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나도 순간적으로 물었을 뿐, 결코 따지려던 의도는 아니었다.

‘우리 혜율이가 세진 씨를 좋아해요.’

나직이 흘러나온 말에 나 또한 입을 다물었다. 권이경은 엷은 미소를 띤 채 이야기했다.

‘세진 씨가 그만큼 좋은 사람이라는 뜻이겠죠.’

얼핏 내 칭찬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권혜율의 칭찬이었다. 제 아이의 보는 눈을 전적으로 믿는 것이다. 좋게 봐주는 건 고마웠지만, 그렇다고 그거 하나만 믿고 결혼을 부추긴단 말인가.

‘이도가 실연 좀 당했다고 일을 때려치우진 않겠지만, 만약 그걸로 업무가 마비되면 나도 편히 쉬진 못하거든요.’

아마, 권이경의 본론은 그 마지막 말이었나 보다. 제 계획의 완전한 성공을 위해 혹시 모를 불안 요소를 모두 배제하고 싶은 거다.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 줄 알고 그 리스크를 감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부탁 좀 할게요.’

권이경은 내게 명함 하나를 쥐여 주고 먼저 자리를 떴다. 개인 번호가 적힌 명함엔 그의 직급과 사명이 함께 적혀 있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했는데, 과연 연락할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졸립니까?”

퍼뜩, 고개를 들고 권이도를 바라봤다. 한창 생각에 잠겨 있던 터라 나도 모르게 오래 침묵했던 모양이다. 권이도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시간을 한 번 확인한 뒤 얘기했다.

“피곤해 보이는데 혜율이 옆으로 가서 쉬어요. 혹시 중간에 깨면 잠깐 놀아 주고.”

그를 따라 나도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늦었을까. 평소라면 잠자리에 들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물론 잠이 들긴커녕 뜬눈으로 하염없이 이불 위를 뒤척였겠지만.

“난 잠깐 나갔다가 올 테니까…….”

“권이도 씨.”

넌지시 그를 불렀다. 자리에서 일어났던 권이도가 내 쪽을 내려다봤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이야기했다.

“제가 독립된 개체가 되길 바란다고 하셨죠.”

내 의지로 무언가 선택하는 게 어떤 기분일까. 아무런 외압 없이, 그리고 아무런 강요 없이. 권이경이 그랬듯 제 앞길을 스스로 만드는 게 내게 감히 가당키나 할까.

그에게 덜 의지해야겠다는 생각은 있었다. 그는 내게 분명히 선을 그었고, 내게는 그 선을 넘어갈 만한 용기가 없었으니까. 버림받는 게 두려워 전전긍긍해 왔는데, 사실은 그게 나를 자립시키기 위함이었단다. 그렇다면 나는 뿌리 내리기도 전에 그에게서 떠나갈 준비를 해야 하는 걸까.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 * *

사흘간 나는 권이도와 함께 장례식장에서 밤을 새웠다. 발인 때까지 함께해 주려고 했지만, 권이도가 피곤해 보인다며 나를 먼저 돌려보냈다. 혜율이에게 다음에 보자며 약속을 하고, 어른들에게 인사까지 한 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뒤엔 샤워를 하고 곧장 권이도의 방으로 향했다. 어차피 권이도는 오지 않을 테니 조금이나마 잠을 잘 수 있었으면 해서. 그의 방으로 향하기 전,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 그의 페로몬을 본떠 만든 향수를 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집에 가서 쉬고 있어요.’

푹신한 침대에 누웠을 땐 권이도의 얼굴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얇게 쌍꺼풀진 눈매, 짙은 눈동자와 높게 뻗은 콧날. 모양 좋은 입술이 천천히 움직이고 상냥한 목소리가 귓가에 감기는 것까지.

‘정세진 씨가 부탁한 건 빠른 시일 내에 들어주죠.’

당연히 들어주리라 생각했지만, 막상 그렇게 말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어디까지 요구해도 될지 한번 시험해 보고 싶을 정도였다. 자리를 내어 주면, 자꾸 다리를 뻗기 마련인데. 권이도는 오히려 그걸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나는 긴 잡념 끝에 겨우겨우 선잠을 청했다. 늘 그랬듯 잠은 오지 않았지만, 오늘은 왜인지 악몽을 꾸지 않을 거란 확신이 생겼다. 이불에 남은 페로몬과 내가 뿌린 향수 냄새. 그 두 가지 속에서 어느 순간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사르륵,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와중에 익숙한 페로몬이 한가득 느껴졌다. 긴 손가락이 앞머리를 넘겨 주고 이마로 내려와 귀에까지 닿았다. 귓바퀴, 귓불, 그리고 턱선. 느릿느릿 이어진 손길은 조심스레 내 아랫입술을 어루만졌다.

“…….”

막연히 기분이 좋단 생각이 들었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페로몬은 비를 맞은 나무에 화사한 꽃이 핀 것처럼 은은했다. 본능적으로 입술을 달싹이자, 틈새로 들어온 손가락이 아랫니를 톡 건드렸다.

“응…….”

졸리다는 생각, 그리고 페로몬이 고프다는 생각. 쏟아지는 존재감이 점점 짙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

드문드문 현실감이 끊겼다. 아직 잠이 다 깨지도 않았는데 몽롱한 감각이 머릿속을 녹진하게 만들었다. 입술을 건드리던 손가락이 천천히 떨어지고 그다음엔 조금 더 보드라운 무언가가 닿았다.

“…….”

그게 입술이라는 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아, 권이도가 돌아왔구나. 그 사실도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래서 저항하지 않았고, 입술을 움직여 그의 숨결을 받아 마셨다.

“…….”

“…….”

그는 한참이나 가만히 입술을 대고 있었다. 더 깊이 다가오지도,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않은 채. 혀를 밀어 넣거나 은근슬쩍 입술을 베어 물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감질나는 감각에 정신이 점점 맑아지기 시작했다.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듯 주변 공기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이불이 스치는 소리, 가까운 거리에서 닿는 숨결, 그리고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느껴지는 짙은 페로몬. 마지막으로 간간이 얼굴에 떨어지는 정체 모를 물방울까지.

“…….”

살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혹시, 아주 혹시라도 그 물방울이 눈물은 아닐까 싶어서. 그러나 가까운 거리에서 보이는 두 눈은 곱게 감겨 있을 뿐 울고 있지는 않았다.

나는 내가 깨어났다는 걸 알리기 위해 그의 입술을 머금었다.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쪽, 소리가 나게 떼어 냈다. 그에 권이도가 실눈을 뜬 채 나를 내려다봤다.

“……언제 오셨어요?”

인제 보니 머리카락이 살짝 젖어 있다. 샤워를 한 건지 입고 있는 옷도 가운이 전부였다. 몽롱하게 풀린 눈을 느리게 깜박인 그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까…… 한참 전에 왔어요.”

그는 어린아이처럼 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애교를 부리듯 코를 비비적거리고 드러난 목을 쪽쪽 빨아들였다. 늘 비슷한 전희를 해왔지만, 지금 그의 행동은 어딘지 모르게 덜떨어진 느낌이었다.

“술 드셨어요?”

“……아니.”

그래서 물었는데, 그는 느릿하게 대답했다. 문제는 그 대답조차 이상하게 느껴졌다는 점이었다. 귀 아래쪽부터 쇄골이 있는 부분까지, 코끝으로 쓸어내린 그가 도드라진 뼈에 입을 맞췄다.

“흣, 왜 갑자기…….”

그가 다리 사이에 허벅지를 밀어 넣었다. 자고 일어난 탓에 발기해 있던 성기가 꾸욱 짓눌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안하무인으로 덤벼드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리 생각하기 무섭게 향긋한 페로몬이 한가득 쏟아졌다.

“내가 생각을 못 했는데…….”

갈라지는 목소리가 오늘따라 유독 허스키했다. 온몸에 느껴지는 페로몬도 조금 이상한 감이 있었다. 그가 고의적으로 흘리는 게 아니라, 질질 새어 나오는 것처럼. 일부러 힘을 줘서 참는데도 양이 너무 많아 넘치듯이.

“날짜가…….”

그는 느릿느릿 운을 떼며 온몸으로 나를 내리눌렀다. 내 뒤통수 아래에 손을 밀어 넣고 머리칼을 살짝 그러쥐기도 했다. 옴짝달싹 못 한 채 품에 안겨 있는 와중에, 나직한 목소리가 속살거렸다.

“벌써 그렇게 됐더라고.”

“…….”

오싹, 소름이 끼쳤다. 그 말의 내용이 아니라 속삭이는 음성이 지나치게 야해서. 그리고 귓가에 입을 맞춘 그가 뒤이어 내뱉은 한마디 때문에.

“……근데 억제제를 늦게 먹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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