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Le Bon Choix(5)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흔들림이 없었다. 짙은 눈동자엔 더없이 진지한 빛이 가득했다. 고백이라도 하는 양 달큼한 말을 하면서, 표정은 쓰디쓴 약을 먹은 것처럼 착잡하다.
“우리 관계를 정의할 자격은 정세진 씨한테 있습니다.”
그냥 문득 깨달았다. 지금 이 얘기가 지난번 그와의 다툼에서 파생된 내용이라는 걸. 한참 늦은 대답이었고 먼 길을 돌아 건네진 허락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권리만 취하면 돼요.”
권이도에게 차를 받았던 날, 그날도 그는 내게 비슷한 말을 했었다. 내게는 아무런 의무도 없고 그저 권리만 취하면 된다고. 그때는 장남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러 갔으나, 이제는 정말 그럴 필요조차 없어졌다.
“권리…….”
알고는 있었다. 그가 내게 호감을 품고 있다는 걸. 말로 하지 않으면 모를 만큼 나는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어렴풋이 느끼는 것과 그의 입으로 직접 듣는 것의 무게가 달라서 그랬지.
“……저한테 무슨 권리가 있습니까?”
나는 권이도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따지는 게 아니라 정말 단순히 궁금해져서. 그가 내게 뭘 얼마만큼 해줄 수 있는지 그 깊이를 알아보고 싶었으므로.
“달라는 대로 주도록 하죠.”
권이도는 선뜻 그렇게 대답했다. 모양 좋은 입술이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향수를 만들고 싶으면 만들고, 다시 해신에 다니고 싶으면 그래도 됩니다. 정세진 씨 비서를 데려오는 것도 괜찮고, 막말로 지금 당장 집에 가버리는 것도 할 수 있어요.”
꿈을 꾸는 것처럼 다정한 목소리였다. 내가 말만 하면 모든 걸 다 이뤄 줄 준비가 되어 있는 듯했다. 느리게 눈을 깜박이는 내게 그가 상냥히 말을 마무리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다 해줄게요.”
“…….”
기뻐해야 하는 타이밍일까. 혹은 기회라고 생각해 덥석 물어야 할까.
내가 정의해 둔 권이도와의 관계는 이런 종류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맞춰 줘야 할 상대였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의 배려에 스며들고 말았다. 그러한 안일함에 취해 방심하고 있다가, 정신을 차린 게 얼마 되지 않았단 말이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래서 나는 그의 말에 기뻐하지 못했다.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안심하기엔 떠오르는 의문이 너무도 많아서.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해달라는 걸 다 해주면서 약혼 사실을 알리지는 않는다. 내게 모든 선택권을 주는 듯 보여도 결국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 건 권이도였다. 그가 미묘하게 그어 뒀던 선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다.
“왜 저한테 그렇게 해주시겠다는 건지…….”
“…….”
“그래서 권이도 씨한테 무슨 이득이 있는지.”
그는 내게 연인이 되겠느냐고 물었지만, 그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내게 관계를 정의하라 이야기했지만, 그건 결코 내게 온전히 속하겠단 말은 아니었다. 내 주변 환경을 통째로 바꿔 놓고 왜 그 환경 속에 본인이 들어올 생각은 하지 않는 걸까.
“그거야…….”
권이도는 느리게 운을 떼며 눈을 내리깔았다. 살짝 달싹였던 입술이 퍽 그럴싸한 이유를 내뱉었다.
“내가 정세진 씨를 좋아하니까.”
“…….”
“바라는 걸 다 해주고 싶거든요.”
설레어 마땅할 말이었는데, 거짓이라도 들은 양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가 날 좋아하는 마음이 거짓이라는 게 아니라, 애매한 사실 속에 진실을 감춘 것만 같아서.
“……권이도 씨 말씀에 모순이 있는 걸 아시죠.”
언젠가 말했듯, 그와의 대화는 논점을 중심에 놓고 주변을 빙빙 도는 것과 비슷했다. 그는 또 원하는 걸 말하지 않았고, 애매하게 자신이 주고 싶은 것들을 얘기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고작 이런 것밖에 없었다.
“제가 바라는 건 그런 권리 따위가 아닙니다.”
내가 속할 수 있는 울타리, 그리고 안정적인 관계. 이 두 가지가 그토록 충족되기 어려운 건가. 많은 걸 바란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권이도는 그 두 가지만 빼고 내게 모든 걸 약속했다.
“제가 좋다고 하시면서, 결국 저와의 관계를 욕심내진 않으시네요.”
나는 대가 없는 친절을 믿지 않는다. 그가 내게 해주는 모든 게 단순히 호감과 호의에서 나오는 행동이라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만약 그가 정말 마음을 표현할 뿐이라면, 그 대가는 내 마음이어야 하는 게 아닐까.
“차라리…… 그 모든 걸 줄 테니 연인이 되어 달라고 하지 그러셨어요.”
“…….”
권이도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면서도 무어라 말을 하지는 않았다. 복잡하게 일렁이는 두 눈이 끝내 모든 속내를 보여 주진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속삭이듯 조그맣게 이야기했을 뿐.
“내가 지금 연인이 되어 달라고 말하면 정세진 씨는 기꺼이 그러겠다고 말하겠죠.”
그 말을 하는 권이도는 아까보다 한결 차분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동요하던 눈빛도 고요히 가라앉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손을 가볍게 그러쥔 권이도가 느리게 얘기했다.
“근데 나는 정세진 씨가 완벽히 독립된 개체가 되길 바랍니다.”
독립된 개체라니. 나도 모르게 눈가를 찌푸렸다.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뒷말을 이었다.
“정세진 씨가 내리는 모든 선택이 항상 정세진 씨 혼자만의 결정이었으면 좋겠군요.”
어렴풋이 느꼈다. 이번에 하는 말은 정말 진심이라는 걸. 올곧게 나를 향하는 시선이 티끌 하나 걸리지 않을 만큼 투명했다.
“그 어떤 외압이나 강요 없이 그냥 정세진 씨가 하고 싶은 대로 했으면 해요. 그 선택의 기반이 불안은 또 아니었으면 하고.”
“…….”
이번에야말로 정곡이 아닐 수 없었다. 그를 향한 마음이 오로지 애정에만 기반하지는 않았으니까. 움찔, 미간을 좁히는 사이 자조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음 같아서는 그래, 나를 선택해 달라고 애걸이라도 하고 싶은데.”
거기까지 말한 권이도는 잠깐 입을 다문 채 헛웃음을 흘렸다. 웃음이라기보단 허탈한 한숨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그는 한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리곤 들릴 듯 말 듯 억눌린 음성으로 얘기했다.
“나한테 그럴 자격이 없어, 세진아.”
“…….”
목까지 차올랐던 전의가 바람 빠지듯 사그라들었다. 맥이 탁 풀림과 동시에 울컥 허무함이 밀려들었다. 공허하게 비워진 머릿속엔 누구 것인지 모를 속삭임이 떠올랐다.
‘……세진아.’
“…….”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적으로 스친 기억이 머리털이 삐쭉 설 만큼 당황스러웠다. 의자가 밀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던 권이도는 창백하게 질린 나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정세진 씨?”
차게 식은 손을 움켜쥐며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찰나의 순간 떠올랐던 장면은 눈 깜박할 새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떠듬떠듬 입술을 움직이며 몸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그가 나를 붙잡을 새도 없었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서, 거의 뛰듯이 식당을 빠져나왔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의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일지도 몰랐다.
인파를 모두 차단한 덕에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화장실로 들어가 찬물을 틀어 몇 번이나 얼굴을 닦았다. 괜히 얼마 마시지도 않은 술이 올라오는 기분이라, 어떻게든 열기를 식혀야 할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정신이 들었을 즈음, 수도꼭지를 꾹 눌러서 흘러나오던 물을 잠가 버렸다. 멍하니 고개를 들자,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보였다. 턱에 맺혔던 물방울이 세면대에 똑, 똑, 떨어졌다.
‘세진아.’
“……하.”
머리가 어지러웠다. 퍼뜩 떠오른 장면 하나가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에 남았다. 간절히 내 손을 붙잡고 애원하던 모습. 내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 그리고 눈앞에 보였던 익숙한 얼굴.
‘내가 미안해.’
권이도가 울고 있는 기억이었다.
* * *
문득문득 내 것이 아닌 기억이 스치는 순간이 있다. 가령 그의 집에 처음으로 들어갔던 날 욕조에서 창문 너머 하늘을 보며 생각한 것. 혹은 비가 내리던 날 온실에서 떠올린 나를 걱정하던 누군가.
왜 이런 것들이 떠오르는지, 대체 어디에서 온 기억인지, 의문이 든 적은 많았지만 깊이 고민해 보진 않았다. 잔상처럼 남은 장면에 직면했다간 무언가 어그러질지도 모르겠단 위기감 때문이었다. 권이도가 주는 아늑함이 마음에 들어서, 막연히 이대로 안주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기억이 권이도의 얼굴이라면 달랐다. 눈물을 흘리며 사과하는 모습은 그냥 넘어갈 수 없을 만큼 신경 쓰였다. 설령 그게 내 상상일 뿐이라 하더라도, 지나치게 선명한 모습이 자꾸만 뇌리에 남았다.
그래서 나는 아주 오랫동안 화장실에 머물렀다. 속이 이상하게 울렁거려서 생각을 정리하는 것만 해도 한참이 걸렸다. 그사이에 세수를 두 번이나 다시 했고, 젖은 앞머리는 마를 새도 없이 물을 뚝뚝 흘려야 했다.
“…….”
그리고 밖으로 나왔을 즈음이었다. 다시 식당으로 가는 길. 코너를 돌려는 순간 웬 오메가 페로몬이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찾았어?”
우뚝, 발걸음이 멈췄다. 이 근처는 모두 막아 놨고, 당연히 이런 곳에 있을 만한 여자는 딱 두 명밖에 되지 않았다. 권상미, 혹은 권이경. 그리고 이 익숙한 목소리는 아마도 권이경일 것이다.
“……그래.”
“…….”
“아니, 괜찮아. 그 자식이 언젠가 사고 칠 줄 알았어.”
통화를 하는 중이구나. 다른 쪽으로 돌아갈까 했는데, 안타깝게도 길이 이거밖에 없었다. 나는 막다른 복도를 한 번, 내가 가야 할 코너를 한 번 쳐다보고 곤란한 얼굴로 혀를 찼다.
“할아버지가 데려가신 거지. 벌 받은 거야.”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타박타박 소리가 들리자마자 “가족들도…….”라고 운을 떼던 목소리가 뚝 끊겨 버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걸음을 옮긴 곳엔 역시나 핸드폰을 든 권이경이 있었다.
“……아.”
그는 아차 싶은 얼굴로 나지막한 탄성을 내뱉었다. 검은 옷을 입고 입에는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물고 있었다. 이 건물은 금연일 텐데. 그리 생각하는 와중에 권이경이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다시 전화할게.”
뚝, 전화가 끊겼다. 그는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를 까딱이며 눈을 찡긋했다. 우선은 이것부터 해명해야겠다는 듯이.
“안 피워요. 물고만 있었던 거라.”
설마하니 권이경 정도 되는 사람이 병원 장례식장에서 담배를 피우지는 않겠지. 그런 개념 없는 행동을 했다간 기업 이미지에 썩 좋지 않을 것이다.
“…….”
“……왜 그렇게 보십니까?”
권이도와 닮은 눈매가 가만히 나를 올려다봤다. 조금 더 가냘픈 턱선에 입술은 굳게 다문 채였다. 권이경은 한참이나 그렇게 있다가 넌지시 물었다.
“들었죠?”
“네.”
그냥 이실직고했다. 어차피 별말 듣지도 못했으니까.
“찾았냐고 물으실 때부터 들렸습니다.”
“아아…….”
알 만하다는 듯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눈가를 찌푸리기에 조심스럽게 사과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엿들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아뇨, 내가 여기서 통화하면 안 됐죠.”
권이경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구겼던 얼굴도 금방 풀어졌다. 담배를 반으로 똑 부러뜨린 그가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그걸 버렸다.
“다른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못 했거든요.”
아마 가족들만 있는 공간이라 내가 있을 줄 몰랐던 모양이다. 어차피 이쪽엔 화장실밖에 없으니 오고 가는 사람도 없을 거라 생각했겠지.
“그럼 저는 이만…….”
더 할 말도 없고 그냥 지나치려던 순간이었다. 통화 내용은 아마 권이정을 뜻하는 거겠지만, 굳이 관심을 둘 필요는 없으니까.
그런데 내가 한 발짝 떼자마자 권이경이 나를 불렀다.
“세진 씨.”
이 집안 식구들은 혹시 어디서 발성이라도 배우는 걸까. 어쩜 하나 같이 말투나 목소리가 고상하기 짝이 없다. 나도 화술 교육은 받았지만 이렇게 우아한 느낌은 아니었다.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인데 방금 들은 얘기는 잊어버려요. 어디 가서 말할 거라고는 생각 안 하지만, 그래도 말은 해놓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부드러운 목소리는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졌다. 간혹 권이도를 대할 때면 느끼던 것이었다. 아니, 약혼식 날 그들의 어머니에게서 느껴지던 것이라고 해야 하나.
“걱정하시는 일 없게 하겠습니다.”
딱히 말할 곳도 없고, 크게 기억에 남는 내용도 아니었다. 그래서 곧장 대답하자, 권이경이 살짝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대답이 시원해서 좋군요.”
“…….”
뭐랄까. 권이도가 생각났다. 표정이나 말하는 방식 같은 게.
“왜 그래요?”
“아뇨, 남매라 그런지…… 권이도 씨랑 말씀하시는 게 비슷해서요.”
“아아. 그런 말 많이 듣죠.”
권이경은 기분 나쁜 기색 없이 긍정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이도랑 난 어머니를 닮고, 이정이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거든요. 뭐, 성격은 셋 다 다르지만…….”
길게 늘어진 말꼬리엔 많은 말이 함축돼 있었다. 나는 자리를 뜰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권이경이 힐긋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세진 씨도 들었죠? 이정이 실종된 거.”
“네, 기사로만 봤습니다.”
적당히 무심한 태도로 대답했다. 유감을 표해야 할까 싶었는데, 그런 아부성 발언을 해봐야 좋을 게 없을 듯했다.
“이도는 뭐라고 해요?”
“딱히…… 별말 없으셨습니다.”
“하긴, 약혼자한테 꺼낼 말은 아닌가.”
‘약혼자’라는 말에 움찔 입을 다물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그의 가족들이 나를 그렇게 칭할 줄은 몰랐으니까. 권이경 역시 그 형식적인 약혼식 자리에 있지 않았던가.
“아마 못 찾을 거예요. 부모님도 별로 찾을 생각 없으신 것 같고.”
문득 빈소에서 보았던 그의 부모님이 떠올랐다. 권병욱 회장의 죽음에 슬퍼하는 듯 보였는데, 거기에 권이정을 향한 걱정은 없었던 걸까.
“우리 집안이 좀 그래요.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서 다른 사람한테 무슨 일이 있건 별로 신경 안 쓰거든요. 나쁘게 말하면 정이 없는 거고, 좋게 말하면 공과 사 구분이 철저한 거고.”
그런 것치곤 가족끼리 사이가 나빠 보이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이정이는 하도 원한 살 짓을 많이 해서 언제 한 번은 문제가 생길 줄 알았어요.”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걱정?”
권이경이 픽 웃으며 되물었다. 그러고는 흘러내린 머리를 뒤로 넘기며 가볍게 묻는다.
“이도는 걱정하던가요?”
“…….”
“거봐요.”
직접적인 이야기는 나눠 보지 않았지만 아마 권이도라면 걱정하지 않을 터였다. 다섯 살 이후로는 형이라고 부른 적도 없다는데, 내게 해코지하려 했다는 이유로 주먹다짐까지 하지 않았던가.
“벌 받았다고 생각해요. 피가 섞였다고 무조건 편을 들 필요는 없죠.”
혹시 권이경은 그의 동생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녔는지 아는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냉랭한 반응을 보일 리가 없었다. 그는 설레설레 고개를 젓더니 미안하다는 듯 눈을 찡긋했다.
“갑자기 넋두리가 길었죠. 그냥 좀 답답해서.”
“아뇨…… 괜찮습니다.”
설령 권이정에게 아무런 정이 없어도 동생이 실종된 이상 신경 쓰이긴 할 거였다. 아까 세 사람 다 성격이 다르다고 했던가. 권이경과 권이도의 차이는 이런 건가 보다.
“그리고 늦은 인사지만…… 혜율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부드럽게 웃는 권이경의 얼굴이 다정해 보였다. 지금까지는 사무적인 느낌이 강했지만 ‘혜율’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우리 애한테 잘해 줘서 고마워요.”
새삼스럽다고 해야 하나. 그냥 평범한 인사였는데 그렇기에 더 낯설었다. ‘그’ 권이경이, 차기 부회장 후보로 뽑히는 냉철한 사람이, 지금은 그냥 평범한 부모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종종 놀러 갈 텐데 잘 부탁해요. 내가 당분간 좀 바빠질 예정이라.”
“회사 일로 정신없으시겠어요.”
“뭐, 그렇죠.”
선호그룹 회장 자리가 공석이 되었으니 얼마간 처리할 일이 많을 것이다. 부회장인 권상미가 회장이 되고, 부사장인 권이경이 차기 부회장 후보로 꼽히겠지. 명실상부 부회장은 자신이라던, 권이도의 이야기와는 반대로 말이다.
그런데 권이경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이렇게 얘기했다.
“부사장직에서 물러날 생각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