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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억의 끝에 (62)화 (62/131)

62화. Le Bon Choix(4)

그 후에도 혜율이는 한참이나 수다를 떨었다. 자신이 언제쯤 어디서 혼자 살지, 그때 가면 수련을 어디에 장식해 놓을지 따위의 내용이었다. 이 정도면 나중에 진짜 사 달라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권이도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얼마나 수다를 떨었을까, 잔뜩 신났던 목소리가 점점 느려졌다. 또랑또랑한 눈을 끔벅끔벅 감았다 뜨고는 권이도의 품에 폭 머리를 기댄다. 가물가물 감기는 두 눈이 금방이라도 잠에 빠져들 것만 같았다.

“그래서…… 3층에 미술관을 만들 거야.”

“응, 예쁘겠네.”

권이도는 익숙하게 제 조카를 고쳐 안고 조그만 등을 살살 쓸어내렸다. 한 번, 두 번, 그를 다독일 때마다 숨소리가 차츰 고르게 변했다. 나는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기울여 권혜율의 얼굴을 살폈다.

“……잠든 거예요?”

속살거리듯이 묻자 권이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독거리는 손길을 멈추지 않은 채 마찬가지로 작게 대답했다.

“혜율이도 오늘 일찍 일어났거든요. 피곤할 만하죠.”

아이를 재우는 모습이 무척이나 익숙해 보였다. 아이들은 원래 이렇게 금방 잠이 드는 건가. 곤히 잠든 얼굴이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를 듣고 나까지 마음이 편안해질 정도로.

나는 한동안 그림을 감상하듯 그 모습을 바라봤다. 온갖 매체에서 봤던 권이도는 결코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렇게 온화한 표정을 짓지도 않았고, 이렇게 소중한 것을 다루듯 부드러운 행동을 보이지도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람 정도면 퍽 훌륭한 아빠이지 않나. 암만 부모와 삼촌은 다르다고 해도, 아이를 대하는 태도는 달라지지 않을 테니. 제 울타리 안에 들어온 사람에겐 기본적으로 다정한 사람이었다.

“눕혀서 재우는 게 낫겠네.”

권이도는 혜율이를 품에 안고 휴게실로 가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널찍한 휴게실엔 담요와 방석이 구비돼 있었다. 내가 이부자리를 봐주는 사이 그는 권혜율의 묶은 머리를 풀어 줬다.

자그마한 담요는 고작 일곱 살짜리 아이에겐 충분한 이불이 되었다. 옷이 불편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크게 거슬릴 만한 차림은 아니었다. 권이도는 꼼꼼히 혜율이의 잠자리를 봐주고 휴게실 바깥을 눈짓했다.

“나가 있죠.”

장례식장에 도착한 게 저녁이었기에 시간은 어느덧 밤이 될 무렵이었다. 아마 별다른 일이 없는 한 혜율이는 아침까지 곯아떨어질 것이다. 장례식장에 와 있는 것도 어린아이에겐 꽤 고된 일정이었을 테니.

“뭐라도 마실래요? 마땅히 줄 게 없긴 한데.”

식당엔 불이 반쯤 꺼져 있었다. 권이도는 냉장고 앞에 서서 안에 있는 음료수를 쭉 훑어봤다. 원래 장례식장에 비치된 물건인지, 탄산음료와 소주 따위가 그와는 썩 어울리지 않았다.

“아뇨, 음료수는 괜찮고…… 그보다 가족분들한테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는 내가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안에서 소주 한 병을 꺼냈다. 대나무 그림이 그려진 초록색 병이었다. 음료수가 아니라 술을 주겠다는 거였나. 그리 생각하는 와중에 그는 종이컵 두 개까지 챙겨 테이블로 다가왔다.

“내가 필요하면 부르겠죠. 서 있지 말고 앉아요.”

어차피 조문객도 없을 테니 그가 빈소로 돌아갈 필요가 없긴 했다. 중간에 누군가 휴식을 취하러 오면 그즈음 바꿔 줘도 될 것이다. 물론 그 기다림을 술로 보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주도 드세요?”

소주를 마시는 권이도라. 눈앞에서 보는 풍경임에도 그다지 믿기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런 술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권이도에게 생각보다 소박한 취미가 있다 싶다.

“아뇨, 안 먹습니다. 원래는.”

그런데 그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며 소주 뚜껑을 열었다. 종이컵 끄트머리에 병 주둥이를 대고 마치 와인이라도 따르는 양 조르륵 잔을 채운다. 내게도 한잔하겠느냐며 권하기에 예의상 양손으로 술잔을 받았다.

“……그걸 그냥 드시려고요?”

마침 종이컵을 들어 올렸던 권이도가 잠깐 멈칫했다. 테이블 위엔 술병 하나와 종이컵 두 개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 그는 눈썹을 삐쭉 들어 올리며 고개를 까딱했다.

“그럼?”

그의 시선이 옆에 놓인 술병으로 향했다. 병을 돌려 라벨을 살피고는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린다.

“양주보다 도수가 낮은데.”

“…….”

암만 그래도 깡소주를 마실 셈인가. 그것도 소주잔도 아니고 이런 종이컵에. 나도 소주를 즐기진 않았지만 적어도 안주 없이 마시기엔 부담스럽다는 걸 안다.

“양주도 온더락으로 드시는 분이…….”

게다가 그는 얼음 없이는 양주를 즐기지 않았다. 물론 이유를 물었을 땐 그냥 습관일 뿐이라는 대답이 돌아왔지만 말이다. 소주에 얼음을 넣진 못해도, 이렇게 무식하게 마시긴 좀 그렇지 않은가.

“그러지 말고 간단한 안주라도…….”

“…….”

“……왜 그러세요?”

짙은 시선이 뚫어져라 나를 응시했다. 손에는 종이컵을 든 채 멍하니 눈을 깜박인다. 한순간 넋 나간 표정이 되었던 그가 느리게 입술을 움직였다.

“내가 온더락으로 마시는 걸 어떻게 압니까?”

“…….”

일순, 나 또한 그와 같은 표정이 되었다. 우리는 한 번도 술자리를 가진 적이 없고, 나는 한 번도 그가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방금, 대체 무슨 생각을 했단 말인가.

“…….”

“…….”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그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내 대답을 기다렸다. 자칫 화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나로선 그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

“그냥 그럴 것 같아서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나조차 이유를 모르는데 왜냐고 물어봤자 답해 줄 말이 있을 리가. 권이도는 내 말을 듣고도 속내를 가늠하려는 것처럼 한참 나를 바라봤다.

“……그렇군요.”

마침내 권이도의 시선이 내게서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긴장한 탓에 참았던 숨이 느리게 흘러나왔다. 권이도는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종이컵에 담긴 술을 한 번에 쭉 들이켰다.

“…….”

그렇게 마시지 말라니까.

하나 이제는 그를 말릴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는 권이도의 눈치를 살피며 내 잔에 있던 소주를 한 모금 마셨다. 역시 그다지 맛있지는 않았고 쌉싸름한 알코올 향 뒤에 아주 약간의 단맛이 느껴졌다.

권이도는 말없이 다시 제 잔을 채웠다. 컵이 커다랬기 때문에 딱 석 잔을 따랐는데 벌써 한 병이 사라졌다. 이번엔 적당히 나눠 마신 권이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가 한 건, 냉장고에서 소주 세 병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여전히 무표정한 걸 보면 술이 마음에 들지도 않았나 본데. 아무렇지 않게 뚜껑을 돌려 또다시 제 잔을 채운다.

“권이도 씨.”

이번엔 나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한 병이야 그냥 넘어간다고 쳐도, 네 병까지는 좀 곤란했다. 주량이 약하지 않다는 건 알지만 속을 버리는 건 또 다른 문제니까.

“정세진 씨 되게…….”

그는 느리게 운을 떼며 술병을 내려놨다. 뒤이어 종이컵을 쥔 왼손엔 나와의 약혼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컵을 입가에 가져다 댄 그가 픽 웃음을 흘렸다.

“잔소리하는 남편 같네요.”

“…….”

무어라 말릴 새도 없이 그가 종이컵을 기울였다. 꿀꺽, 꿀꺽, 목울대가 시원스럽게 움직였다. 눈 깜박할 새에 그는 한 잔을 모두 비우고 나를 향해 이야기했다.

“이번엔 여보라고 안 해줍니까?”

뻔뻔스러운 말이었다. 어찌 들으면 놀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그냥,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권이도 씨가 아직 남편은 아니죠.”

권이도는 눈썹을 삐쭉 들어 올리곤 느른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기분 나쁜 기색은 아니었는데, 어쩐지 조금 허무해 보이긴 했다. 금방이라도 따져 물을 것 같았으나, 그의 뻔뻔함은 거기까지인 듯했다.

“…….”

“…….”

오랜 시간, 우리는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주로 잔을 비우는 건 권이도였고, 나는 그를 구경하며 간간이 컵에 따라 둔 소주를 한 모금씩 머금었다. 술은 여전히 맛없었지만, 묵묵히 있는 권이도를 감상하는 건 나쁘지 않았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권이도가 네 번째 병을 열며 이야기했다.

“정세진 씨가 봤던 총, 그건 할아버지가 주신 겁니다.”

갑작스러운 주제에 나도 모르게 허리를 바로 세웠다. ‘총’이라는 단어가 유독 날카롭게 들렸기 때문이다. 권이도는 눈을 내리깐 채 가라앉은 목소리로 뒷말을 이었다.

“교육관이 좀 괴팍한 분이셨거든요.”

표현은 과격했으나 그 내면엔 애정이 담겨 있었다.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듯 그 눈빛 역시 무척이나 씁쓸했다. 역시, 사이가 좋았나 보네. 나는 그런 생각으로 그의 말에 집중했다.

“스무 살 때였나. 생일이 되자마자 실탄이 장전된 총을 선물로 주시더군요. 기업을 잇고 싶으면 죽을 각오로 노력하라고, 사업엔 어느 정도 대범함이 필요하니 자신 있으면 집에 장식해 놓으라면서.”

그의 표현을 빌려 괴팍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손주들에게 총을 쥐여 주다니. 누군가 알게 되면 난리가 날 터였다. 자수성가해 이 정도 대기업을 일구어 내려면 그 정도 도전정신은 있어야 하는 모양이다.

“누나도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받았고, 권이정은 받았다가 1년이 채 안 됐을 때 빼앗겼다고 하더군요.”

권이경을 부르는 호칭과 권이정을 부르는 호칭에 많은 차이가 있었다. 누나와 이름의 차이는 아니었고, 그 안에 담긴 친근함의 무게가. 전자는 익숙해 보였지만, 후자를 말할 땐 저도 모르게 눈가를 찌푸렸으니.

“괴팍하긴 해도 현명한 분이시죠. 그대로 권이정이 가지고 있었으면 부하직원 한둘은 쏴버렸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실종되었다던 권이정은 어디로 갔을까. 눈앞의 권이도가 아무렇지 않아서, 잠깐 망각하고 말았다. 아니, 정확히는 권이도뿐만 아니라 모든 가족이 비슷했지만 말이다. 걱정하는 기색이 하도 없어서, 내가 들었던 뉴스가 착각인가 싶을 정도였다.

“궁금한 게 있는 표정이네.”

권이도는 의아한 표정으로 있는 내게 가볍게 물었다. 잠깐 권이정을 떠올렸던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떨쳐 냈다. 장례식장에서 실종된 사람에 대해 묻다니. 지나치게 무례한 일이 아닌가.

“……총기 소지는 불법 아닙니까?”

그래서 그냥 목소리를 낮추고 그에게 물었다. 식당엔 아무도 없었지만, 혹시 몰랐으니까. 내 질문에 권이도가 입매를 길게 늘어뜨렸다.

“중요한 게 그겁니까?”

실없이 눈가를 찌푸렸다. 사실 불법이고 말고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적당히 그럴싸한 의문 하나를 제시했을 뿐. 돌아올 대답도 충분히 예상됐다.

역시나 권이도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대답했다.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건 없어요.”

절대 불변의 진리였다. 아무렴, 다른 누구도 아닌 선호그룹인데. 그런데 그는 잠깐 멈칫하며 미소를 지워 냈다. “아니…… 안 되는 게 있긴 하지.” 그렇게 중얼거린 권이도가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어쨌든 나는 내가 제일 오래 머무는 장소에 그걸 장식해 놨어요. 서재 벽면에, 아무런 보호장치도 없이.”

내가 봤을 땐, 장식해 놓지 않았던 것 같은데. 새카만 총을 서랍 속에 넣던 장면이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다. 그걸로 모자라 서랍을 잠그고 제대로 잠겼는지 두어 번 확인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안 됐는데…….”

권이도는 전혀 취하지 않은 얼굴로 주정과 같은 한탄을 내뱉었다. 척 보기에도 취기가 오르지 않았는데, 이렇게라도 술의 힘을 빌리는 것 같았다. 조부님의 죽음이 그토록 마음에 남았을까. 안쓰럽다는 생각과 함께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가끔 생각해요. 그렇게 장식해 놓지 않았으면 조금 달라졌을까 하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후회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걸 왜 내게 이야기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한 번은 실수지만, 두 번부터는 실수가 아니에요.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고.”

품위 있는 음성이 단조롭게 얘기했다. 그는 나와 시선을 맞춘 채 차분히 입술을 움직였다.

“그래서 총알을 버렸습니다.”

거기까지 이야기한 권이도가 입을 다물었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뜨더니, 남은 술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이런 걸 물어도 될까. 나는 종이컵을 매만지며 눈가를 찌푸렸다.

“실수라면…….”

대략 짐작하길, 무언가 사고가 있던 모양이다. 실탄이 장전되었던 총에서 총알을 버릴 만한 일이라면 떠오르는 게 몇 개 있었다. 실수로 발포됐거나, 혹은 발포될 뻔했거나.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래서 그런 의미로 물었는데 권이도는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보지도 않은 채 무심히 대꾸했을 뿐이다.

“글쎄, 거기까진 나도 잘 기억이 안 나서.”

대충 듣기에도 거짓말이었다. 기억이 나지 않는 사람치곤 너무도 적나라한 표정을 하고 있지 않은가. 처연하게 가라앉은 두 눈은 결코 술기운 때문은 아니었다.

“아무튼……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 각오는 그래요.”

그가 고개를 까딱했다. 뒤이어 흘러나온 목소리는 냉랭하게 들릴 만큼 단호했다.

“올바른 선택을 할 것.”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는 특유의 정확한 발음으로 한마디 한마디 내뱉었다.

“일을 그르치지 말고, 실수하지 않을 것. 감정적인 행동 대신 이성적인 판단으로 움직일 것. 최초의 계획에서 절대 타협하지 않을 것.”

쉽게 말하고 있지만 죄 어려운 것투성이였다. 어기는 건 눈 깜박할 새고, 지키는 건 평생을 다해도 모자라다. 타인에게 늘 칼같이 구는 이유가 있었다고, 내가 그리 생각하던 때였다.

“근데 그거 압니까?”

조용히 되물은 그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길게 드리운 속눈썹이 더할 나위 없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권이도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뒷말을 이었다.

“아무리 굳은 다짐을 해도, 그게 흔들리는 순간이 있다는 거.”

“…….”

그 말을 하는 권이도가 너무도 서글퍼 보여서, 나는 차마 그에게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지 못했다. 그저 종이컵 끄트머리를 어루만지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을 뿐. 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나직이 나를 불렀다.

“정세진 씨.”

“……네.”

말하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비치던 감정을 억지로 지운 채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비록 그 목소리만큼은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지만 말이다.

“나와의 각인이 정세진 씨한테 수단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아마 권이도는 이미 눈치채고 있던 모양이다. 내가 그에게 각인하자고 이야기한 게, 단순히 마음에서 우러나온 고백이 아니라는 걸. 그에게 속하기 위해, 그리고 안정감을 얻기 위해. 내가 간절히 찾아낸 생존 수단 중 하나라는 걸.

“오해할까 봐 말하는데, 이 약혼은 선호와 해신의 계약이 아닌 우리 두 사람의 혼사입니다.”

그게 어떤 의미일까. 곧장 이해하기엔 모호한 말이었다. 일전에 권이도는 이미 우리의 약혼을 계약의 일종이라고 못 박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두 가지가 다르다고 선을 긋다니.

“해신과의 계약은 더 이상 효력이 없고, 당연히 정세진 씨가 거기에 따라야 할 의무도 없어요. 더 이상 해신의 후계자가 아니니 계약의 범주에 묶기에도 구실이 부족하죠.”

덜컹,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그의 말이 이제는 약혼 생활을 끝내자는 의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내가 쓸모없어졌으니 그만 내 집에서 나가라고. 우리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러나 권이도는 더없이 쓸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정세진 씨는 을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

설마하니, 이 말을 권이도에게 들을 줄이야. 늘 가지고 있던 생각을 그가 뿌리째 부정하고 말았다. 그걸로 모자라, 가만히 눈을 맞추며 건넨 말까지.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을이라면, 그건 당신이 아니라 나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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