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Le Bon Choix(3)
나는 소중한 사람이 죽는 게 어떤 기분인지 모른다. 어린 시절에 조부모님이 돌아가셨지만, 그들은 나와 얼굴만 아는 남이나 다름없었다. 펑펑 우는 민재를 앞에 놓고 함께 울어 주지 못한 채 등을 다독였던 기억이 있다.
“……괜한 말을 했군요.”
권이도는 픽 웃음을 흘리며 다리 위에 올려놓은 손을 그러쥐었다. 이번엔 눈가가 떨리지 않았지만, 조금 전 보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느릿느릿 손을 뻗어 그의 손 위에 살짝 올려놨다.
“…….”
그는 손을 빼내지 않고 천천히 나를 돌아봤다. 차게 식은 체온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위로의 말을 건넬 자신은 없었고, 어설픈 공감 따위는 하느니만 못할 터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조심조심 그의 손을 어루만지는 것뿐이었다.
맞닿은 온기는 한동안 떨어지지 않고 머물렀다. 우리가 약혼하던 그 날처럼, 그는 잔뜩 일렁이는 눈으로 그 손을 내려다봤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표정은 비단 권병욱 회장의 죽음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차가웠던 체온도 어느덧 미적지근하게 바뀌었다. 그때까지도 입을 다물고 있던 권이도는 손을 돌려 살며시 깍지를 껴왔다.
“정세진 씨.”
큼직한 손이 내 손을 꼭 움켜잡았다. 모양이 예쁜 것과 달리 뼈마디가 굵고 손등엔 핏줄이 도드라졌다. 내가 손이 작지는 않은데, 그와 맞잡고 있으면 유독 여리게 보일 정도였다.
“말씀하세요.”
나는 순순히 대답하며 엄지로 그의 손등을 쓸어내렸다. 고작 손 하나 잡았다고, 손가락 끝에서 맥박이 뛰는 것만 같았다. 그의 약지엔 약혼반지가 끼워져 있었지만, 내 왼손엔 아무것도 끼워져 있지 않았다. 그 사실이 좀, 어쩐지 민망해서 맞잡지 않은 왼손을 그에게 보이지 않게 숨겼다.
“우리는 한 집에서 살고, 가끔은 섹스를 하고, 이렇게 손을 잡고 있는데.”
그는 우아한 말투로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섹스가 정말 가끔일까. 그런 의문을 품는 동안 권이도의 시선이 깍지 낀 두 손으로 내려갔다. 그러고는 다시 눈을 들어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이런 건 무슨 사이라고 부릅니까?”
어제처럼 기분이 가라앉진 않았다. 그 질문을 하는 권이도가 정말 모르겠다는 눈을 하고 있어서. 똑똑한 사람이 왜 이런 부분에서 모자라게 굴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대답이 흘러나왔다.
“보통은 연인이라고 할 텐데…….”
깍지 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권이도는 여전히 고요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작게 웃음을 흘리며 뒷말을 이었다.
“우린 순서가 좀 이상하네요.”
첫 만남에 약혼을 했고, 마음을 확인하기 전에 입부터 맞췄다. 함께 잠을 자는가 하면 대놓고 질투를 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 관계를 나타낼 단어가 없으니, 뒤죽박죽 엉망이란 생각이 든다.
“그럼…….”
권이도는 느리게 운을 떼며 입매를 당겼다.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고 짙은 눈동자가 부드럽게 누그러졌다. 분명 웃는 얼굴인데 그다지 웃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우리도 할까요, 그거.”
그거? 그리 되묻는 대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는 들릴 듯 말 듯 조그마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연인.”
“…….”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리 어렵지 않은 단어였는데 이해하기까진 시간이 걸렸다. 권이도는 내 손을 살살 어루만지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실…… 잘 모르겠거든요.”
모르겠다니, 그게 무슨 말일까. 기분이 좋기보단 얼떨떨했다. 그 말을 하는 권이도가 너무도 쓸쓸한 표정이라. 내게 연인을 하자고 말하는 주제에 확신 없는 눈으로 고개를 숙여서.
“내가 정세진 씨를 어디까지 욕심내도 될지…….”
“…….”
“그게 가늠이 잘 안 돼서.”
가슴 언저리가 내려앉을 만큼 자조적인 목소리였다. 심장이 지끈 조여들어서 대답을 할 수조차 없었다. 그사이 차는 장례식장에 도착했고, 인적 드문 주차장 한구석에 멈춰 섰다.
“대답을 들으려던 건 아닙니다.”
그는 아쉬움을 남긴 채 내 손을 놓고 먼저 차에서 내렸다. 뒤늦게 손가락을 움찔거렸지만, 권이도는 이미 차 문을 닫은 뒤였다. 차를 빙 돌아 내 쪽으로 다가온 그가 문을 열어 주며 고개를 까딱했다.
“올라가죠.”
* * *
권병욱 회장의 장례식은 가족들끼리 조촐하게 치를 예정이었다. 기자의 출입은 엄격히 금지됐고 식장 내외로 경호원을 배치해 놓는다고 했다. 가까운 친인척조차 부르지 않는다니 얼마나 조용한 장례일지 충분히 알 만했다.
권이도는 차에서 기다리겠다는 내게 괜찮으니 올라오라고 이야기했다. 혹시 몰라 검은 옷을 입긴 했지만, 가족들이 모이는 자리에 내가 껴도 될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다행히도 그를 따라 식장으로 올라왔을 때, 그의 가족들은 내 존재에 별다른 의문을 보이지 않았다.
<故 권병욱>
복도부터 줄줄이 놓인 화환, 그리고 벽면에 세워 둔 근조기. 그곳엔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국회의원과 온갖 기업 총수들의 이름으로 가득했다. 조문객은 없었지만, 수많은 꽃들이 권병욱 회장의 마지막을 추모했다.
나는 권이도와 시선을 교환한 뒤 향이 피워진 곳으로 다가갔다. 권병욱 회장의 사진은 수많은 국화에 둘러싸여 있었다. 분향은 하지 않았고, 절만 올리고 가족들이 서 있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곳에 권이정은 없었다.
“와줘서 고마워요. 오랜만에 보네요.”
완장을 차고 있던 권이도의 어머니가 내게 악수를 청했다. 권이도가 미리 연락을 넣은 걸까. 권상미는 내가 오리란 사실을 알고 있던 것처럼 보였다. 나는 공손히 양손으로 그의 손을 마주 잡고 깊이 허리를 숙였다.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아버지의 죽음과 아들의 실종. 두 가지 일로 힘들 권상미는 부드럽게 웃으며 내 어깨를 감쌌다. 여러 비보를 받아들이는 모습이 담담하고 조용하기만 했다. 늘 화려한 모습만 보았는데 수수한 차림새로도 느긋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여기까지 왔는데 식사라도 하고 가요. 인사는 다음에 제대로 하죠.”
약혼식 날에도 이토록 다정한 사람이었던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 더 부드러워진 것 같다. 그냥 겉으로만 보면 해신에 일어난 일을 전혀 모르는 사람 같다. 물론 그렇지 않을 테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혜율이는?”
“신 서방이랑 쉬고 있어.”
권이도의 질문에 권이경이 다른 쪽을 가리켰다. 아마 빈소 바깥 식당에 제 아빠와 함께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다른 식구들에게도 눈인사를 건네고 권이도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인파를 완벽히 차단했는지, 식당으로 가는 길엔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 몇몇 장례식장 직원들만 우리에게 꾸벅 인사를 건넸을 뿐이다. 권이도는 그 누구의 인사도 받아 주지 않고 정면만 보고 걸었다.
식당 한편에는 권혜율이 신대웅과 함께 앉아 있었다. 조화가 너무 많이 들어온 탓에 그곳 벽면에도 줄줄이 하얀 리본이 걸려 있었다.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검은 옷을 입고 있던 권혜율은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삼촌!”
권혜율이 쪼르르 권이도에게 다가왔다. 권이도는 자연스럽게 그를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늘 의젓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오빠 데리러 갔었어?”
권혜율은 권이도의 목을 끌어안고 나를 바라봤다. 곱다란 눈매는 역시나 권이도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권혜율을 따라 일어났던 신대웅이 이쪽으로 다가오며 얘기했다.
“혜율아, 인사부터 드려야지.”
그제야 권혜율이 아차 싶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하는 인사에 나도 “응, 안녕.” 하고 친근히 대꾸했다. 지난번에 안면을 터놓은 덕분에 이번엔 내게 낯을 가리지 않는 듯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아뇨, 저야말로 연락 없이 찾아봬서 죄송합니다.”
내가 신대웅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 권이도는 혜율이에게 상냥한 목소리로 이것저것 묻고 있었다. 밥은 먹었는지, 옷이 불편하진 않은지, 아빠와 무얼 하고 있었는지 따위의 것들이었다.
“삼촌, 우리 정말 여기서 3일 동안 있어?”
“응, 여기서 증조할아버지 보내 드리는 거야.”
일곱 살이면 죽음의 개념이 있는 나이던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권혜율은 그다지 슬픈 얼굴은 아니었다. 내가 가만히 그를 살펴보자, 신대웅이 넌지시 이야기했다.
“할아버님께서 병상에 누우신 게 벌써 5년이 넘었거든요.”
“아…….”
5년이면, 아직 매스컴엔 알려지지 않았을 무렵이다. 지금도 어린 권혜율이 말조차 못 할 시기이기도 했다. 아마 혜율이에겐 증조할아버지와의 추억이 거의 없겠지.
“어린애들은 금방 잊으니까요.”
그리 말하는 신대웅은 무척이나 씁쓸한 눈을 하고 있었다. 잊은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지만, 기억하는 사람은 괴롭기 마련이다.
“……상심이 크시겠어요.”
조심스럽게 건넨 말에 신대웅은 어른스럽게 웃었다. 언젠가 권혜율이 제 아빠의 페로몬이 물감 냄새를 닮았다고 했던가. 엷게 느껴지는 알파 페로몬은 향냄새와 섞인 푸른빛이었다.
“오빠도 3일 동안 여기 있어요?”
권이도에게 안겨 있던 혜율이가 나를 보며 물었다. 여전히 바뀌지 않은 호칭에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신대웅의 시선을 피하며 혜율이를 보며 눈가를 찡긋했다.
“오빠 아니라 삼촌, 혜율아.”
“세진이 삼촌, 해야지.”
권이도가 한마디 거들자, 권혜율이 미간을 찌푸렸다. 인상을 구긴 얼굴이 제 엄마인 권이경을 똑 닮아 있었다. 신대웅은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냥 둬, 처남. 나랑 혜율이 엄마도 말했는데 안 듣더라고. 세진 씨가 너무 어려 보여서 그런가 봐.”
호칭은 천천히 바꾸면 된다며 그는 권혜율의 편을 들어 줬다. 혹시 다른 데서 실수하면 어쩌나 걱정스러웠는데, 생각해 보니 ‘다른 데’라고 부를 만한 곳이 없지 않은가. 물론 그렇게 따지면, 호칭을 천천히 바꿀 만큼 권혜율을 자주 보지도 못하겠지만.
“그래서 오빠도 여기 3일 있어요?”
권혜율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물어 왔다. 고집스럽게도 여전히 호칭은 바뀌지 않았다. 그 모습이 밉지 않아서, 그냥 살갑게 웃고 말았다.
“글쎄…… 잘 모르겠네.”
우선 따라오긴 했지만, 가족장을 치르는 데 내 존재는 방해일 것이다. 나는 가족도 아니고, 그들과 제대로 아는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아마 선호그룹 식구들은 나를 권이도의 계약 상대이자 집안이 망한 오메가 정도로 생각할 터였다.
“편한 대로 해요. 중간에 가도 괜찮고.”
권이도는 부담 갖지 말라는 듯 너그럽게 얘기했다. 신대웅 역시 좋을 대로 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이 중에 내 존재를 신경 쓰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듯했다.
“두 사람 식사는?”
“안 했습니다. 이 사람은 먹어야 돼요.”
권이도는 권혜율을 한 번 추스르고 테이블로 다가갔다. 내가 괜찮다며 사양했지만, 신대웅은 가볍게 뭐라도 먹으라며 훌쩍 안으로 사라졌다. 식사를 안 한 건 둘 다 마찬가지인데 이 사람은 먹어야 한다는 게 웬 말이냔 말이다.
“저 배 안 고픕니다…… 괜찮아요.”
“그래도 먹어야죠. 어차피 매형이 차리는 것도 아니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권이도가 자리에 앉았다. 그러더니 앉으라는 듯이 제 옆자리 의자를 빼준다. 하는 수 없이 옆에 앉자, 권혜율의 시선이 내게로 따라붙었다.
“……가족들 계시는데 제가 있으면 좀 그렇지 않을까요.”
“그런 게 신경 쓰였으면 안 데려왔죠.”
명쾌한 답변이었으나 그럼에도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디 여행을 온 것도 아니고, 가장 웃어른을 추모하는 자리가 아니던가.
“오빠.”
그때 권혜율이 넌지시 나를 불렀다. 혜율이는 권이도의 무릎에 앉아 꾸물꾸물 자세를 똑바로 고쳤다. 너른 품에 편히 등을 기대는 걸 보니, 한두 번 저렇게 앉아 있는 게 아닌가 보다.
“저기서 잘 수도 있어요.”
“응?”
“저기 안에서 자도 되고, 밥은 여기서 먹으면 돼요.”
앳된 목소리가 조곤조곤 설명했다. 나를 붙잡지 않은 손가락으로 여러 방향을 가리키기도 했다. 화장실은 저기에 있고, 음료수는 또 이쪽에 있다는 내용이었다.
“어…… 그래?”
역시 똘똘하네. 나는 딱 그 정도 감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잠깐 사이에 장례식장 구조를 정확히 꿰고 있나 보다. 권이도는 그런 우리를 보며 풋 웃음을 흘렸다.
“오빠가 눈치가 없네, 혜율아.”
“…….”
슬쩍 권이도를 바라봤다. 그는 혜율이의 잔머리를 정리해 주며 조카의 말을 대변했다.
“혜율이는 오빠한테 가지 말라는데.”
권혜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초롱초롱한 시선이 뚫어져라 나를 바라봤다. 의식주가 해결되니 가지 말라는 얘기였을까. 곤란한 기분으로 눈을 굴리는 내게 권이도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도 정세진 씨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네?”
한 타이밍 늦게 그에게 되물었다. 그는 눈가를 찌푸리며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내가 기분이 좀…….”
“…….”
“정세진 씨가 필요해서.”
차에서 보았던 표정이 그의 얼굴 위에 겹쳤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게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라던 그의 표정이. 가만히 내리깔린 속눈썹은 권이도답지 않게 약해 보였다.
“정 불편하면 새벽에라도 보내 줄 테니까 우선은 있어요.”
“…….”
그 부드러운 권유를 거절할 방법은 없었다.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고, 그와 권혜율이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시선을 교환하며 웃는 모습이 왜 그렇게 마음에 남았는지 모르겠다.
* * *
고용인이 차려 준 식사를 마치고, 신대웅은 우리에게 권혜율을 맡긴 뒤 빈소로 돌아갔다. 권혜율은 여전히 권이도의 품에 안겨 있었고, 조잘조잘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았다. 그러다 오랑주리 미술관의 수련 이야기가 나왔을 땐, 나도 모르게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그 수련이 가지고 싶어?”
“응, 근데 엄마가 안 된대. 삼촌이 사서 3층에 걸어 놓으면 안 돼?”
권혜율은 또박또박 제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전달했다. 권이도는 무엇이든 들어줄 것처럼 너그러운 얼굴로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내가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는 와중에, 권혜율이 우려했던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때 오빠한테 말했더니 삼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어 보자고 그랬거든.”
“……그랬어?”
권이도가 나를 바라봤다. 마치 혜율이가 아니라 내게 묻는 듯이. 내가 멋쩍은 웃음을 흘리자, 그 또한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삼촌 집에 놓으면 혜율이가 매일 못 보잖아.”
“그래도 파리에 있는 것보단 자주 볼 수 있어.”
“그러지 말고, 나중에 혜율이 혼자 살면 삼촌이 거기다 걸어 줄게. 그때도 가지고 싶으면 다시 얘기하자.”
“음…….”
미간을 잔뜩 좁힌 권혜율이 진지한 얼굴로 고민을 시작했다. 권이도는 엷은 미소를 띤 채 그런 권혜율을 기다려 줬다. 아이를 별로 안 좋아한다더니. 조카를 저렇게나 예뻐하는데 말이다.
“약속할 거야?”
“그래, 약속.”
권이도는 익숙하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단풍잎처럼 조그마한 손이 권이도의 손가락에 꼭꼭 고리를 걸었다. 엄지로 도장까지 찍는 모습을 보니, 일전에 권이도에게 차를 받았던 때가 떠올랐다.
‘손가락이라도 걸까요?’
“…….”
왜 그런 간지러운 짓을 하나 했지. 조카를 대할 때처럼 장난을 걸었던 모양이다. 그것도 모르고 장단을 맞추겠다며 냉큼 손가락을 걸지 않았던가.
“오빠가 증인이에요. 알았죠?”
“……그래, 기억하고 있을게.”
아, 애들한테 거짓말하면 안 되는데. 혜율이가 혼자 살 때면 적어도 지금으로부터 13년은 지나야 할 것이다. 그렇게 먼 미래에 내가 증인 역할을 해줄 수 있을 리가 없다. 물론 높은 확률로 혜율이가 지금의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괜히 양심에 찔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