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억의 끝에 (60)화 (60/131)

60화. Le Bon Choix(2)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도 그간 누군가에게 화를 낸 기억은 없었다. 어릴 땐 그럴 만한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고 어른이 된 이후엔 딱히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무례한 말을 들었을 때, 부하직원이 큰 실수를 했을 때, 기분이 상하거나 골치 아프다는 생각은 했어도 화가 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권이도의 사과를 듣는 순간 나는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분노라기엔 거창했고 짜증이라기엔 시시했으며 그 외에 이름을 붙이자니 마땅한 표현이 없었다.

머리로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에게 화를 낼 일이 아니고, 내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을. 내가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해봐야 결국 피해는 내 쪽에 돌아온다는 것도.

민재에게 모욕적인 말을 들었을 때, 아버지에게 뺨을 맞았을 때, 그리고 권이정에게 해코지를 당할 뻔했을 때. 화를 내는 건 권리의 일종이기에 나는 그 모든 순간에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려 노력했다. 당연히 원래였다면 권이도에게도 그러지 않았을 거란 말이다.

잠이 오지 않는 밤. 나는 내가 한 모든 행동을 후회했다. 그에게 화를 내지 말걸, 서운한 티를 내지 말걸,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먼저 식사 자리를 뜨지 말걸.

염치없이 그 많은 걸 받아 놓고 또 염치없이 더 많은 걸 바란 기분이다. 그토록 감정적이었단 사실에 자괴감이 드는 한편 만약 시간을 돌린대도 달라지는 건 없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노라 핑계를 붙이다가 그 안일함에 퍼뜩 놀라 정신을 차리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내가 마지막에 느낀 감정은 개운함이었다. 어쨌든 속에 담긴 말을 꺼냈다는 후련함이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를 조금씩 지워 냈다. 물론, 상처받은 권이도의 얼굴과 약간의 미안함도 함께 남아 버렸지만.

“…….”

“…….”

다음 날 아침. 권이도와 나는 요 며칠 그랬던 것처럼 고요한 식사를 이어 갔다. 권이도는 어제의 일을 언급하지 않았고, 나 또한 별다른 사과를 건네지 않았다. 정확히는 몇 번 입을 열려고 했다가 도무지 내키지 않아 관둬야만 했다.

차라리 이럴 거면 식사를 따로 하는 게 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딱히 행동으로 옮길 의지는 없었다. 아마 권이도도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막연히 그렇게 추측할 뿐.

그 후 차고로 내려가면서도 우리는 내내 어색한 분위기를 유지했다. 그 와중에 그는 ‘열림’ 버튼을 누른 채 내가 엘리베이터에 오르길 기다렸다. 검은 정장을 입어서 그런지, 아니면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어서 그런지. 그에게선 오늘따라 유독 더 정적이고 차분한 분위기가 풍겼다.

띵, 엘리베이터가 지하에 멈췄다. 이번에도 권이도는 내가 먼저 내리길 기다렸다. 이렇게 아무런 대화 없이 출근하게 되는 건가. 그런 생각으로 한 발짝 떼는 순간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나랑 말도 안 할 겁니까?”

느리게 흘러나온 음성이 발목을 붙잡았다. 그제야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권이도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앞에선 눈도 안 마주치던 주제에 뒤에서 내내 눈길을 보내고 있었나 보다.

그 시선이 민망해서, 괜히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대꾸했다.

“……말씀이 없는 건 권이도 씨도 마찬가지였는데요.”

“내가 조용히 있으면 어제처럼 말을 걸어 줄 줄 알았거든요.”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하곤 나를 따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태연한 목소리와 달리 평소와 같은 여유로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내 옆에서 멈춰 선 그가 지그시 내 얼굴을 내려다봤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조심스러운 말투엔 나를 향한 걱정이 잔뜩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고작 그 한마디에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린 것은. 잔잔히 넘어오는 페로몬에 쌓였던 피로가 녹아내리는 듯했다.

“하루 정도는 쉬는 게 어때요.”

“아뇨…….”

나는 길게 말꼬리를 늘이며 귓가를 매만졌다. 새삼스레 그의 걱정이 민망했던 탓이다. 이렇게 얼굴을 보고 있으니, 어제 있었던 일이 꿈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일은 별로 힘들지 않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군요.”

담담히 대꾸한 그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무심코 내리깐 시선에 익히 알고 있는 브랜드의 구두가 들어왔다. 정장과 마찬가지로 신고 있는 구두 역시 무늬 없는 검은색이었다. 어디 장례식이라도 가는 걸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카맣다.

“조심히 다녀와요.”

차 앞에 다다랐을 때, 그는 평소처럼 인사를 건넸다. 나는 차에 올라타려다 말고 멈칫 그를 돌아봤다. 차 문을 잡아 주던 이태성이 그런 우리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저녁에 뵐게요.”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인사라고. 권이도는 내 말을 듣자마자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섬세한 이목구비가 미소를 그리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참 적응이 되질 않았다. 아마 평생을 봐도 익숙해지기엔 무리가 있지 않을까.

내가 차에 올라타자 이태성이 문을 닫아 줬다. 오늘도 권이도는 내가 탄 차가 밖으로 나갈 때까지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서서히 멀어지던 그가 완전히 안 보이게 되었을 즈음, 이태성이 넌지시 운을 뗐다.

“외람되지만…….”

퍽 정중한 서론이었다. 그와 반대로 본론은 무척이나 적나라했다.

“싸우셨습니까?”

“…….”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어야 했는데,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대답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소한 충격을 받는 바람에.

“싸우다니…….”

이태성의 말을 듣고 난 뒤에야 깨달았다. 우리가 어제 싸웠다는 사실을. 정확히는 일방적으로 따져 물었을 뿐이지만, 남들이 보기엔 비슷할 것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권이도가 편해졌을까. 그 사실은 또 다른 충격을 안겨 줬다.

“……그런 거 아닙니다.”

뒤늦게 부정했지만 이태성은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알 만하다는 듯 흘긋 백미러를 살피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다행히 무어라 더 캐묻진 않았기에 나는 애써 침착한 척 무표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권이도의 집에서 회사까지는 대략 30분 정도가 소요됐다. 길이 막히면 더 걸리기도 했지만, 그래 봤자 별로 먼 거리는 아니었다. 대충 차창 밖을 내다보다가 오늘 일정을 확인하면 딱 적당한 정도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대표님!”

기분은 계속 싱숭생숭했지만, 회사에 도착했을 땐 티를 내지 않을 수 있었다. 직원들의 힘찬 인사에 살갑게 웃으며 친근한 답을 돌려줄 수도 있었다. 태연한 척 업무를 보는 것쯤은 아버지가 구속되던 날에도 하던 것이었다.

“오늘 점심은 뭐로 할지 정했어요?”

점심시간에는 또 권이도의 카드로 직원들의 식사를 챙겼다. 그렇게 많은 상황이 변했음에도 바뀌지 않은 것 중 하나였다. 그와 함께하는 식사, 그리고 자기 전에 가지는 대화 시간. 이미 버릇된 습관들은 일부러 그만두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이어졌다.

“대표님 저희한테 돈 너무 쓰시는 거 아니에요?”

“맞아요, 저희 회사 식대도 괜찮게 나오는데.”

처음엔 신이 나서 얻어먹던 직원들은 얼마 전부터 슬그머니 내 지갑 사정을 걱정해 주기 시작했다. 아마 아버지가 구속된 직후부터일 텐데 그 여파가 내게도 오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재미난 건, 그럼에도 누구 하나 직접 해신을 언급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

“이 정돈 괜찮아요.”

내 카드가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그냥 대충 얼버무렸다. 아버지가 횡령으로 잡혀갔는데, 나까지 의미심장한 말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이 정도 지출은 굳이 권이도의 카드를 쓰지 않더라도 내 선에서 괜찮은 정도였다.

“나중에 부담스러워지면 슬쩍 모르는 척할게요.”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직원들도 더는 따지지 않았다.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적당히 받아들이기로 한 모양이다. 메뉴가 김밥 정도로 바뀌면 대충 알아듣겠다는 말에는 나 또한 웃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와, 아니 어쩜 좋아.”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올라왔을 때, 직원 하나가 핸드폰을 보며 경악했다. 마침 대표실로 들어가려던 나는 스치듯 ‘선호’라는 말을 듣고 걸음을 멈췄다. 직원은 주변에 있는 동료들에게 제 핸드폰을 내밀며 이야기했다.

“권이정 대표 실종됐대요.”

“…….”

권이정. 익숙한 이름이 귓가에 꽂혔다. 실종이 무슨 뜻이었더라. 순간적으로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더디게 조금 전 들은 말을 되짚는 사이, 다시 한번 믿을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

“그리고 권병욱 회장이 별세했다고…….”

* * *

조향사 자격증 취득을 결심한 이래 처음으로 퇴근길에 학원을 들르지 않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핸드폰으로 확인한 기사는 온통 선호그룹 이야기였고, 차에서 흘러나온 라디오에서도 그와 관련된 소식밖에 들리지 않았다. 나는 한 단어 한 단어 모든 말을 놓치지 않고 전부 머릿속에 주워 담았다.

-오늘 새벽 권이정 호텔명성 대표이사가 실종됐습니다. 권 대표는 별장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산책을 나갔다가 봉변을 당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경찰과 소방관이 수색에 나섰으나 현재까지 행방은 묘연한 상태입니다.

-권병욱 선호그룹 회장이 향년 85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고 권병욱 회장의 마지막 길은 권상미 부회장을 포함한 유족들이 지킨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권상미 선호그룹 부회장은 잇따른 비보에 애도를 표하며…….

“……이태성 씨, 조금만 빨리 가주세요.”

초조한 손길로 흠집 하나 나지 않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권이도에게 전화를 걸어 볼까 고민했지만, 혹시 방해가 될까 싶어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은연중에 그가 집에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권병욱 회장이 곧 별세할 것 같다고 합니다.’

아버지에게 그 말을 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권이도의 말을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선호 측에서 권 회장의 치료를 그렇게 쉽게 포기할 리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못해도 몇 년은 더 버티겠지, 막연히 그리 생각하며 믿지 않았단 말이다.

-권병욱 회장의 빈소는 서울선호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될 예정입니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그런데 권병욱 회장이 별세했다. 그것도 권이정이 실종된 바로 직후에. 마치 짠 것처럼 절묘한 타이밍이었고,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이었다. 아니, 딱 한 명 예상한 사람이 있긴 했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굳이 따지면 일은 내일 생기겠군요.’

어젯밤 유독 조용했던 권이도의 모습. 오늘따라 차분하게 차려입었던 검은 정장. 히트 사이클이냐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던 것까지.

내 히트 사이클이 아니었다. 그가 말한 ‘일’은 다름 아닌 권병욱 회장의 부고였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어떻게 제 조부의 죽음을 먼저 예상했을까.

“도착했…….”

나는 이태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에서 내려 뛰듯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아버지의 구속 소식을 들었을 때도 이토록 마음이 급하지는 않았는데. 머리털이 삐쭉 서서, 소름이 끼치는 만큼 심장 박동까지 빨라졌다.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언제부터 알았을까.

아니,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나에 관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인제 보니 모든 걸 아는 것처럼 보였다. 미래에 일어날 모든 일을 예상하고 남들보다 먼저 대비하는 것처럼. 도무지 무시할 수 없는 위화감이 스멀스멀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왔다.

“…….”

“…….”

벌컥, 현관을 열고 들어갔을 때 역시나 권이도는 문 앞에 있었다. 아침과 똑같은 차림으로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면서.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느른하게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본다.

“타이밍 좋게 왔네요. 못 보고 갈 뻔했는데.”

흐트러짐 하나 없는 모습이 조금이지만 위태로워 보였다. 평소엔 여유롭다고만 느꼈던 눈빛이 지금은 지친 기색을 가득 띠고 있었다.

“잠깐 들어온 거라 다시 나가 봐야 합니다. 미안하지만 저녁은 혼자 먹어요.”

권이도는 그 말만 내뱉고 걸음을 옮겼다. 나를 지나쳐 아마 밖으로 나갈 예정이었을 거다. 그러나 나는 그가 옆을 지나가는 순간 그의 팔을 붙들었다.

“…….”

짙은 눈동자가 올곧게 나를 바라본다. 가까이에서 전해지는 페로몬은 내가 만든 향수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를 올려다보며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를 꾸며 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권이도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얄팍한 눈꺼풀이 움직이는 모습에 현실감이라곤 없었다. 그건, 그가 입술을 움직이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존엄사라고 하죠.”

나직이 튀어나온 말은 높낮이 없이 담담했다.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차분히 뒷말을 이었다.

“더 이상 치료에 의미가 없다고 사료돼서 연명 치료를 중단하기로 했습니다. 당신께서 입원 전에 동의하신 일이고, 돌아가시는 순간에는 함께 있었어요.”

“…….”

“지금은 잠깐 일이 있어서 집에 들른 거고.”

울림이 독특한 목소리는 멍한 머릿속에도 또렷이 전해졌다. 발음이 명확한 탓에 귓가가 먹먹한 와중에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또 한 번 눈을 깜박인 그가 고개를 까딱했다.

“설명이 더 필요합니까?”

“……아뇨.”

스르륵, 붙잡았던 팔을 놓아주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완벽한 대답이었기에 그에게 더 확인할 부분도 없었다. 이 모든 게 예정된 죽음이었다면, 내 의심은 한낱 망상에 불과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걸리는 부분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쉬어요. 3일은 못 들어올 테니까.”

나는 무얼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권이정의 실종과 권병욱 회장의 죽음. 둘 중 어떤 것인지 짚어 주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권이도는 내가 어디에 의문을 가질지 예상한 사람처럼 망설임 없는 답변을 내놓았다.

“……권이도 씨.”

내 부름에 그가 문고리를 붙잡은 채로 뒤를 돌아봤다. 내가 나설 자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데, 그의 뒷모습이 마치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불안했다.

“같이…….”

그래서 온갖 위화감을 느끼는 와중에도 저절로 이 입술이 움직였다. 이대로 혼자 보내면 그가 돌아올 때까지 신경이 쓰일 거라는 생각 때문에.

“같이 가죠.”

* * *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권이도는 계속 일을 했다. 바쁜 건지, 아니면 집중할 거리가 필요한 건지. 입을 꾹 다문 채 서류만 들여다봤다. 그 모습은 약혼식 다음 날, 그가 나를 집으로 데려가던 그때를 떠올리게 했다.

나는 어색한 기분에 차창 밖을 내다보다가 흘긋 그를 살피길 반복했다. 따라오지 말 걸 그랬나. 그 고민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내일은 주말이고, 그가 없는 집에선 잠조차 자지 못할 텐데. 상황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주제넘은 짓이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은 들었다.

새까만 넥타이를 매만지기를 몇 번, 차창 밖으로 바뀌는 풍경을 응시하길 한참, 결국 나는 어색하지만 가장 무난한 주제를 입에 올렸다.

“날이 좋죠.”

권이도의 차에서, 그가 내게 처음 건넸던 말이었다. 무더운 여름에는 썩 안 어울리는 화제기도 했다. 권이도는 눈가를 움찔하며 천천히 시선을 내 쪽으로 돌렸다.

“…….”

가만히 그와 시선을 맞췄다. 허공에서 얽힌 시선은 한참이나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왜 그러나 싶어 가만히 있었는데,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렇네요.”

무난하고 단조로운 대답이었다. 내가 그에게 했던 것과 같은 대답이기도 했다. 내가 픽 웃음을 흘리자, 그가 조금 멋쩍게 눈을 찌푸렸다.

“미안합니다. 옆에 사람을 두고.”

“아뇨, 바빠서 그러신걸…….”

“……바쁘다기보단.”

옆에서 본 그의 얼굴을 그려 놓은 것처럼 섬세했다. 그는 한 손으로 눈가를 꾹꾹 누르고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에서 일하는 건 반쯤 습관입니다. 남는 시간이 아까워서 하다 보니까 버릇이 들었군요.”

참 바지런한 습관이었다. 본인이 그렇다는데 무어라 잔소리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도 권이도는 보고 있던 서류를 허벅지에 내려놨다. 아무래도 더 일할 생각은 없는 듯해서, 나는 넌지시 그에게 이야기했다.

“조부님과 사이가 좋으셨나 봐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 내면에 착잡함이 보여서 건넨 말이었다. 권이도는 살며시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대꾸했다.

“그냥 평범했습니다.”

좋다는 뜻이다. 권혜율을 이야기할 때 그랬듯이.

“…….”

위로를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래도 그런 데엔 재능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눈을 내리깔았는데, 권이도는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뭐…… 딱히 슬픈 건 아니고.”

바람 빠지듯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돌아가실 걸 알고는 있었지만…….”

잠깐 목소리가 멈췄다. 길게 내리깔린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는 모습이 보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게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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