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억의 끝에 (59)화 (59/131)

59화. Le Bon Choix(1)

특이 형질의 각인은 보통 결혼한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였다. 알파가 오메가에게 노팅한 채 온 페로몬을 쏟아부으며 페로몬샘이 있는 부위를 깨문다. 영혼과 영혼을 묶는, 보다 로맨틱하고 낭만적인 방법. 서로의 기억과 감정을 공유하고 오로지 상대방의 페로몬만 느끼게 되는 마법 같은 약속.

각인을 하면 사이클 주기는 물론 그 수명까지 같아졌다. 한쪽이 사고로 죽지 않는 이상 풀리지 않기에 선뜻 각인을 다짐하는 사람도 드물었다. 상대가 어디에 있건 서로를 느낄 수 있으니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나 하고 싶다고 해서 모두가 연인과 각인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우선 마음이 맞아야 했고, 그다음엔 몸이 맞아야 했으며, 양쪽 모두 서로에게 속하는 데 망설임이 없어야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이 들어맞아도 운명적이지 못한 이유로 실패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소문으로는 이러한 각인이 형질의 우열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한다. 열성끼리의 각인은 거의 불가능하고, 반대로 우성은 상대방의 동의 없이도 찍어 누르는 게 가능하다고. 워낙 우성 형질이 드문 데다 대개는 고위층에 속해 있어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말이다.

‘우리 각인할래요?’

권이도에게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막연히 그가 승낙하리라고 짐작했다. 충분히 그럴 만한 분위기였고, 우리는 둘 다 우성이었으니까. 비록 갑작스러운 제안이었지만 본능적인 촉이 그쪽의 편을 들어 줬단 말이다.

그러나 권이도는 내게 각인하지 않았다. 상냥히 건넨 입맞춤만이 그가 돌려준 대답의 전부였다. 마음이 맞았고, 몸을 섞었으나, 그 낭만적인 약속만큼은 해주지 않았다.

그래,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다. 약혼 사실도 알리지 못하는 마당에 각인은 사치일지도 모른다. 빈말로나마 내 것이라고 말해 줄지언정 진심으로 속하는 건 어려울 수도 있었다.

실망한 건 아니었다. 애초에 내가 가진 감정은 그런 기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친절은 의무가 아니니 내가 그에게 바랄 수 있는 일도 한정적이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 버린 서운함이 가시가 박힌 것처럼 따끔거렸을 뿐.

‘……내 방에서 안 잡니까?’

유치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날 이후 나는 권이도의 방에서 자지 않았다. 대외적인 이유는 회사 일이 바쁘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그에게 덜 의지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권이도 없이는 잠조차 자지 못한다니, 갑작스러운 위기감이 내가 처한 현실을 자각시켰다. 그래서 한참을 그의 방에 머물다가도, 잠을 자야 할 때면 내 방으로 돌아와야 했다.

‘정세진.’

당연히 나는 매일, 매일 악몽을 꿨다. 계절이 여름의 한가운데에 접어들고 ‘Sejin’의 론칭이 코앞에 다가올 때까지. 뉴스에서 들리는 아버지의 이름에 더 이상 놀라지 않을 때까지. 그의 페로몬으로 모자라 내가 만든 향수까지 뿌렸음에도 함께 잠을 자던 권이도의 부재를 채워 주진 못했다.

‘주제 파악을 똑바로 해야지.’

솔직히 괴롭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꿈속에서 보는 그의 시선은 아버지가 내비치던 모멸감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나치게 자기 학대적인 방법이었고, 이런다고 한들 바뀌는 게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이 또한 익숙해지지 않을까. 익숙해지지 않더라도 최소한 무뎌지지 않을까. 내가 아버지의 아들로서 20년을 살아왔듯 버티다 보면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니.

-정철호 해신금융그룹 회장이 오늘 낮 회장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정 회장은 현재 구속 수사를 받는 가운데…….

출근길. 이태성이 운전하는 차 안에서 나는 아버지가 회장직을 내려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미 한차례 들은 내용이었으니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여론의 뭇매를 맞으며 무너져 내렸고,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와도 갈라설 터다.

-검찰은 정철호 전 회장에 대해…….

“감기는 다 나으셨습니까?”

뚝,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끊고 이태성이 물었다. 나는 차창 밖을 구경하다 말고 흘긋 그쪽을 바라봤다. 이태성은 백미러를 통해 마치 김 실장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 뭐…… 덕분에.”

지지부진 머물던 감기는 찾아올 때와 마찬가지로 천천히 멀어졌다. 이제는 기침이 나지도 않았고 열 때문에 나른한 기운도 없었다. 큰 열병이 되지 않아 다행인 건지, 아니면 지나치게 오래 지속된 걸 탓해야 하는 건지. 당연히 좋아해 마땅할 일이었는데 왜인지 별로 상쾌하진 않았다.

“잠은 좀 주무셨습니까?”

이태성은 뒤이어 퍽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자연스럽게 라디오를 끄더니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핸들을 붙잡는다. 나는 카 시트에 머리를 기대며 픽 웃음을 흘렸다.

“요새 걱정이 많으시네요.”

“…….”

아무래도 비서가 적성에 맞는 모양이다. 김 실장이 내게 그랬듯 사소한 부분까지 챙기는 걸 보면.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온실 입구에 서 있던 모습과는 정반대로 말이다.

“잠은 그냥저냥 잤고, 기분도 괜찮습니다. 아침도 먹은 데다 몸 상태도 많이 좋아졌어요.”

나는 외운 것처럼 줄줄이 대답을 늘어놓았다. 사실 잠은 잘 자지 못했고 아침도 대부분 남겼지만 기분과 몸 상태만큼은 진짜였다. 다만 한 가지, 이미 동나 버린 수면제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그 부분이 조금 애매해서 그랬지.

“더 궁금한 게 있으십니까?”

“아뇨…… 그거면 됐습니다.”

이태성은 눈치 빠르게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 대답을 끝으로 차 안엔 정적이 내려앉았다. 나는 목까지 차오른 한숨을 삼키며 왼손을 만지작거렸다. 반지 자국이 있었던 약지엔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 * *

‘Sejin’의 업무는 해신금융 본부장으로 있던 때보다 훨씬 강도가 낮았다. 우선 기본적인 업무량이 달랐고, 내가 책임지고 수습해야 하는 심각한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다. 직원들은 모두 열정이 가득했기에 저마다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해 임하곤 했다.

“대표님, 이쪽 샘플도 확인 부탁드립니다.”

레이블 론칭이 코앞이기 때문에 새로이 출시될 패키지의 샘플은 모두 제작 완료됐다. 패키지는 총 다섯 개였고 여름에 맞는 청량한 계열과 스테디하게 쓸 수 있는 무난한 향수가 함께 출시될 예정이었다. 내가 대표로 오면서 관여한 건 이름과 디자인, 그리고 마케팅에 관련된 부분이었다.

“살펴보고 말씀드릴게요. 나가 보셔도 됩니다.”

나는 최 팀장을 내보내고 주르륵 놓인 향수병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냄새를 맡아 봤다. 갓 돋아난 꽃봉오리처럼 곡선으로 된 보틀은 앞으로 ‘Sejin’의 아이덴티티가 될 디자인이었다. 뚜껑 끄트머리엔 유리로 된 꽃잎이 달려 있고 보틀 자체에 브랜드 마크가 각인으로 새겨져 있었다.

아마 추후에 권이도에게 선물한 향수를 만들게 되면 그 또한 이것과 비슷한 병에 담기게 될 것이다. 내 이름이 새겨진 병에 내가 만든 이름이 붙은, 내 페로몬을 딴 향수가 담기게 되겠지.

“…….”

손끝으로 매끄러운 병 표면을 쓸어내렸다. 론칭은 코앞이고, 내가 자격증을 따는 것도 금방이었다. 아마 곧바로 만들지는 못하겠지만, 개발팀의 도움을 받으면 제작은 그리 어렵지 않을 터다. 그리고 그 향수를 권이도에게 건네줄 땐, 물어야 할 것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남들 앞에서는 꾸역꾸역 참았지만 이따금 차오르는 갑갑함을 막을 길이 없었다. 흘러가는 대로 지내는 건 예전과 같은데, 지금은 내가 처한 상황에 자꾸만 의문이 생겼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누구를 위한 선물이고 대체 무얼 위한 과정일까. 권이도가 내게 바라는 건, 그리고 내가 그에게 바라는 건 무엇일까.

예전엔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던 부분들이 이제는 도무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거슬렸다. 할 수만 있다면 권이도의 머릿속을 열어 보고 싶을 정도로. 꼬치꼬치 캐물어 모든 걸 토로하게 만들고 싶을 만큼.

그러나 내게는 권이도에 대해 알 권리가 없었다. 내 질문이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이라면, 마지막에 나올 게 행복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했다. 내게는 권이도가 전부지만, 그에겐 나를 제외한 많은 것들이 있으니.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혼자가 되어도 괜찮을 때까지 마냥 버티는 수밖에.

퇴근길엔 늘 그랬던 것처럼 자격증 학원에 들렀다. 이태성은 밖에 차를 세워 놓고 대기했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건물 앞으로 나를 데리러 왔다.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인적이 드문 비상구를 이용했지만, 가끔 마주치는 수강생들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도착한 집엔 역시나 나보다 먼저 퇴근한 권이도가 있었다. 권이도는 다녀왔냐는 한마디만 내뱉고 씻고 내려오라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오늘따라 조금 조용한 느낌이었는데, 저녁 식사를 마칠 때까지도 내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오늘…….”

결국, 먼저 운을 뗀 건 내 쪽이었다. 나직이 입을 열자 권이도가 그제야 나를 바라봤다. 차분히 가라앉은 시선이 유독 고요하단 생각이 든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

권이도는 느릿느릿 눈을 깜박이며 입매를 당겼다. 특유의 여유로운 표정에 조금이지만 씁쓸한 빛이 스쳤다. 그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내가 말이 없어야 먼저 말을 걸어 주는군요.”

“……뭐.”

그러고 보니, 근래에 내가 먼저 말을 건 게 처음이던가. 그날 이후 미묘하게 서먹한 관계가 되었던 우리였으니까. 물론 권이도는 아니고 나 혼자 일방적으로 말이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굳이 따지면 일은 내일 생기겠군요.”

권이도는 그리 대답하고 다시 식사를 이어 갔다. 내가 더는 묻지 않으리라 확신한 모양이었다. 일은 내일 생길 거라니. 그런 의미심장한 말을 해놓고 말이다.

“내일이 제 히트 사이클입니까?”

툭, 건넨 질문에 그가 눈을 들어 올렸다.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가볍게 덧붙였다.

“가끔 제 주기를 정확히 맞히시길래요.”

가끔이 아니라 매번이었지만, 나는 그냥 그렇게 얘기했다. 딱히 떠보려는 의도는 아니었고, 그냥 무심코 내뱉었을 뿐이다. 그래서 대답을 종용하는 대신 어깨를 으쓱하며 시선을 돌렸다.

“…….”

“…….”

한동안 식사 자리엔 정적만 맴돌았다. 간간이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빼면 그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체할 것처럼 무거운 분위기였으나, 근래엔 이게 보통이었다.

끝내, 우리는 모든 식사를 마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와 엇비슷하게 식기를 내려놓은 권이도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곤 물잔을 내려놨다. 도드라진 목젖이 꿀꺽 위아래로 움직였다.

“정세진 씨.”

가만히 눈을 들어 그를 마주 봤다. 언제부턴가 이름이 불리면 미미한 긴장감이 들었다. 지금도 의도치 않았는데도 목덜미가 빳빳하게 굳었다.

“오늘도 내 방에서 안 잡니까?”

그렇게 묻는 권이도는 미련이 가득 담긴 눈을 하고 있었다. 내가 내 방에서 자겠다는 게 뭐가 그리 아쉽다고. 엄밀히 따지면 우리가 따로 잔 시간이 훨씬 많은데 말이다.

“론칭 전까지는 준비할 게 많아서요.”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습관적인 미소를 그렸다. 한 침대에서 얌전히 잠만 잘 리도 없고, 그 또한 내 말을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니 고개를 까딱하며 이렇게 대꾸했겠지.

“안 건드릴 테니까 내 방에서 자요.”

“…….”

도르륵 시선을 굴렸다. 권이도는 눈가를 찌푸린 채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잠을…… 영 못 자는 것 같은데.”

“…….”

“불면증이 더 심해지면 큰일이잖아요.”

나는 무심코 손을 들어 눈가를 매만졌다. 이미 더 심해질 것도 없지만, 죽을 때까지 이런다면 문제가 되긴 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권이도에게 그걸 해결해 줄 의무는 없었다.

“권이도 씨가 신경 쓰실 부분이 아닙니다.”

수면제로 안 되면 병원에 가고, 그래도 안 되면 또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했다. 이제는 최 교수를 만날 수 없으니 새로운 의사를 알아봐야겠지.

“자꾸 의지해 버릇했다가 출장이라도 가시면 더 큰일인걸요.”

내 불면증의 해결책이 권이도라는 건 그 또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마 그래서 방을 비워 주겠다고 하지 않는 것이다. 페로몬이 아무리 가득해도, 권이도 자체가 없으면 무용지물일 테니.

“걱정해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

권이도는 내 말을 듣자마자 눈을 내리깔았다. 기분 탓일까. 길게 드리운 속눈썹이 무척이나 처연해 보인다. 한참 그렇게 있던 권이도는 아주 느린 속도로 운을 뗐다.

“내가…….”

뒷말은 한참이나 나오지 않았다. 내가 지그시 그를 바라보고, 그가 다시금 나를 마주 볼 때까지. 그는 어딘지 모르게 상처받은 눈으로 딱 한마디를 내뱉었다.

“내가 사과하죠.”

“…….”

왜,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욱하는 기분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대뜸 속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는 바람에 생각을 거치지 않고 툭 되묻고 말았다.

“뭘 사과하시는 겁니까?”

이걸 화가 난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어이가 없다고 해야 할까. 미안하단 말을 듣고 이런 적이 없는데 지금은 도무지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직면하는 순간 더 불쾌해지고 말았다.

“저한테 각인하지 않은 걸 사과하신 거예요?”

“…….”

직접적인 질문에도 권이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다물며 시선을 피했을 뿐이다. 그 침묵이 긍정을 뜻하고 있어서, 나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런 건……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미안하단 말 듣겠다고 이러는 것도 아니고 권이도 씨한테 그걸 강요하지 못하는 것도 알아요.”

내가 이러는 게 너무 우스운데, 한 번 말문이 트이니 막을 수가 없었다. 이제 와 무슨 말인가 싶다가도 이렇게 사과할 거면 뭐하러 그랬나 싶기도 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하면서도 이유는 말해 주지 않는 게 참으로 권이도다우면서도 괘씸했다.

“애초에 기대하고 한 말도 아니었고…….”

나는 부글거리는 속을 억누르며 마른침을 삼켰다. 갑작스럽게 열을 받았던 만큼 사그라드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말을 내뱉을 땐 목소리가 차분하게 내리깔렸다.

“우리가 그럴 사이는 아니잖아요.”

“…….”

권이도는 그 말을 듣자마자 눈가를 떨었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표정을 굳혔다가 느른하게 입매를 늘어뜨렸다.

“그럴 사이라…….”

별거 아닌 중얼거림이었는데, 그의 기분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불쾌함이나 짜증, 혹은 섭섭함 따위의 것들. 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차갑게 물었다.

“그럼 우린 무슨 사입니까?”

“……그걸 왜 저한테 물으시는지 모르겠네요.”

기분이 롤러코스터를 타듯 오르내리길 반복했다. 조금 전까지는 또 괜찮았는데, 권이도가 내게 묻는 순간 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그 질문을 권이도 씨가 하면 안 되죠.”

우리가 무슨 사이냐고 묻는 건, 권이도가 아니라 나여야 했다. 그걸 정하는 사람은 권이도고, 거부할 수 있는 권한도 권이도에게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 내게 그런 걸 묻다니,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제가 권이도 씨 허락 없이는 약혼반지도 못 끼는 걸 아시잖아요.”

“…….”

숨결처럼 건넨 말에 잔잔히 느껴지던 페로몬이 뚝 하고 끊겼다. 나를 향하는 시선이 일순간 덜컹 흔들린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이야기했다.

“우리가 약혼한 그때부터 저한텐 아무 선택권도 없었습니다. 권이도 씨가 주는 걸 다 받으래서 받고 있었더니, 이제는 저한테 관계를 정의하라고 하시는군요.”

아슬아슬하게 차 있던 물웅덩이에 누군가 돌멩이를 집어 던진 기분이었다. 한 번 뒤집힌 이상 수면이 잔잔해지기 전까진 계속해서 물이 넘칠 수밖에 없었다.

“권이도 씨가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분위기에 취했던 거고, 각인 하나 안 했다고 제 태도가 바뀔 일도 없으니까요.”

사실은 서운했던 모양이다. 좋아한다는 말조차 제대로 한 적 없는 우리가, 약혼자는커녕 연인조차 아니라는 사실에. 남들에게는 남보다 못한 비밀스러운 관계라는 점이.

“……할 말 없으시면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나는 그 말만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풀이라는 걸 알면서도 지금은 그의 얼굴이 보고 싶지 않았다. 권이도는 나를 붙잡지 않았고, 오랜 시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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