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억의 끝에 (57)화 (57/131)

57화. Complete Strangers(5)

“…….”

하릴없이 그의 시선을 피했다.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야트막한 숨을 길게 내뱉었다. 울 것 같아서가 아니라, 속이 울렁거려서. 기탄없는 한마디가 소화되기도 전에 배 속에 얹히는 바람에.

“정 회장만 구속시킨 게 나로선 최대한의 선처예요.”

권이도의 말투는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사실을 나열하듯 무미건조하고, 별거 아닌 일이라는 양 담담하기만 하다. 잘못은 그 사람 하나에게만 있지 않다는, 그 단조로운 평가조차 온화하게 들렸다.

“……학대라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그 정도 중얼거림이 전부였다. 애써 입매를 말아 올렸지만, 그 노력은 웃음이 되기 전에 사그라들었다. 윙윙거리는 이명이 들리는 듯해서, 마른침을 삼키며 먹먹한 귓가를 해소하는 수밖에 없었다.

“듣기 거북했다면 사과하죠.”

권이도는 그러한 사과마저 거리낌 없이 건넸다. 거북하다는 표현에 그제야 나오지 않던 헛웃음이 나왔다. 이 기분을 고작 불편함 따위로 정의해야 할까. 그러한 사실에 의문이 든 탓이다.

“……아뇨.”

나는 느리게 대답하며 흐려진 눈을 깜박였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서 심장이 느릿느릿 뛰고 있는 것만 같았다. 조용하다 못해 공허한 공기가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폐부를 난도질했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그에게 모든 치부를 드러낸 것처럼. 절대 들키면 안 될 비밀을 까발려진 것처럼 모욕감과 함께 수치심이 일었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닌걸요.”

나도 모르지 않았다. 내가 맡은 역할이 기형적이라는 걸. 아버지는 가해자였고, 민재는 조력자였으며, 어머니와 서영이는 그저 방관자에 불과했다. 자의냐 타의냐의 차이만 있을 뿐 협조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권이도 씨 말이 맞아요.”

하지만 나라는 사람이 피해자냐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다. 나는 따뜻한 잠자리를 얻었고, 질 좋은 식사를 받았으며, 남들이 보면 부러워할 학벌과 직위까지 생겼다. 부분적으로나마 충족된 게 있으니, 어쩌면 이건 배부른 소리가 아닐까.

“이런 건 가족이 아니죠.”

눈을 내리깐 그대로 기계적인 목소리를 냈다. 머릿속이 텅 비었지만, 입술은 의지와 달리 저절로 움직였다.

“근데…….”

“…….”

“그냥 모르는 척하지 그러셨어요.”

어차피 부질없는 원망이라면 하지 않는 게 좋을 텐데. 한 번 흘러나온 말을 멈출 수 없었다. 억울함인지, 아니면 답답함인지. 영문 모를 감정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보통 그런 걸 다른 사람한테 듣고 싶어 하진 않거든요.”

자존심이 상했다고 해야 하나. 그게 아니면 비참하다고 해야 하나. 어느 쪽인지 확실치 않으니 그냥 창피하다고 하는 게 좋을 수도 있겠다. 나라는 사람이 너무도 보잘것없이 느껴져서, 한없이 작은 존재가 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저에 대해 잘 아시잖아요.”

“…….”

“취향, 입맛, 체질, 히트 사이클 주기에…… 그리고 이젠 가정사까지.”

천천히 눈을 들어 그와 시선을 맞췄다. 음식이 한참이나 남아 있었지만, 누구 하나 식사를 잇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바람 빠지듯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얘기했다.

“그럼 제가 무슨 기분을 느낄지도 아셨어야죠.”

무슨 일이 있어도 편을 들어 주겠다던, 그 꿈결 같은 약속. 내 손에 입을 맞추던 권이도가 이리도 생생한데, 그는 그때도 이러한 결말을 준비하고 있던 걸까. 그 달큼한 순간조차 머릿속에선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권이도 씨.”

그는 내 부름에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나와 시선을 맞춘 채 가만히 눈을 깜박였을 뿐이다. 나는 그 짙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나직이 내뱉었다.

“약속대로 할게요.”

그를 선택하지 않으면 다시금 혼자가 되기에,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이것밖에 없었다. 가족마저 잃어버린 내게 남은 건 오로지 권이도 하나뿐이었으니까. 텅 빈 오피스텔로 돌아갈 바에야, 그가 만든 아늑한 둥지에 머무는 게 좋지 않을까.

“어차피…… 언젠간 일어날 일이었고.”

“…….”

“향수도 만들어 드리기로 했으니까.”

변명처럼 덧붙인 말들이 구질구질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럼 향수를 건네준 다음엔, 그다음엔 어떻게 되는 걸까. 한낱 계약에 불과하던 약혼은 지금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걸까.

“……불안하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는데.”

권이도는 이런 내 대답이 그다지 달갑지 못한 모양이었다. 고요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나직한 음성으로 운을 뗀 것이다. 내가 시선을 들어 올리자, 씁쓸하게 입매를 당기기도 했다.

“내 방법이 또 잘못됐군요.”

“…….”

‘또’라고 이야기했다. 제 방법이 또 잘못됐다고. 위화감을 느낀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식사 마저 해요. 난 일이 좀 남아서.”

무례한 행동이었는데, 기분이 나쁘기보단 안도감이 들었다. 오늘만큼은 그를 마주하고 있는 게 너무도 불편했으니까. 식사를 마저 할 생각은 없지만, 우선 대화를 끝낼 수 있다는 사실이 다행이었다.

“방은 비워 둘 테니 잠이 안 오면 내 방에서 자고.”

그 말을 끝으로 권이도는 곧장 주방을 빠져나갔다. 덩그러니 남은 식사는 손조차 대지 않은 새것이었다. 나는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그의 페로몬이 모두 사라진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이 깊었을 즈음에는 어두운 정원에 나가 홀로 비를 맞았다. 온종일 쏟아지던 장대비 대신 내리는지도 모를 부슬비가 소리 없이 내 온몸을 적셨다. 눅눅한 공기에 섞인 풀 냄새가 복잡한 머릿속을 깨끗하게 비워 줬다.

누군가 보면 미쳤다고 할 행동이었다. 체온이 점점 떨어져서 종국에는 몸을 으슬으슬 떨기까지 했다. 미련한 짓이라는 걸 알았지만, 말리는 사람이 없으니 꺼릴 것도 없었다.

나는 하염없이,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맞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쫄딱 젖어서 물에 젖은 생쥐처럼 볼품없는 모습이 될 때까지. 이대로 물에 녹아 양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면서.

염치없게도, 그 후 샤워를 마치고 향한 곳은 권이도의 방이었다. 이런 기분으로 잠이 들면 정말 끔찍한 꿈을 꿀 것 같단 예감 때문이었다. 다행히 권이도는 방에 없었고, 방 안 가득 퍼진 페로몬만이 나를 맞이해 줬다. 밀도 높은 페로몬에 취해, 그렇게 잠이 들었던 것 같다.

* * *

세상이 뒤집힐 것 같은 순간에도 시간은 아무렇지 않게 흘러간다. 하루를 보내면 해가 지고, 잠을 자면 해가 뜨기 마련이었다. 덧없이 흐르는 시간처럼 날짜는 매일 꼬박꼬박 바뀌었다.

오랜 시간 비를 맞았기 때문일까, 나는 그날 이후 자잘한 감기 기운으로 고생했다. 크게 몸이 아픈 건 아니었지만, 미열과 함께 잔기침이 끊이지 않았다. 병원에 가는 게 좋다는 걸 알면서도,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계속해서 미루기만 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장마 속에 아버지의 소식은 하루에도 몇 번씩 들려왔다.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요새 가장 뜨거운 주제였기 때문이다. 이따금 내 이름도 나왔지만 진작 일을 관둔 터라 직접적인 영향은 없었다.

그동안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해 ‘Sejin’의 론칭을 준비했다. 최근엔 신제품 개발에 한창이었는데, 거기에 필요한 향료를 이희나의 공방에서 조달받기로 했다. 재료인 천연 오일이 꽤 마음에 드는 데다 이래저래 고생하는 이태성에게 그 정도 낙은 만들어 줘도 될 것 같단 생각에서였다.

“대표님, 오늘도 학원으로 가십니까?”

“네, 부탁드립니다.”

퇴근 후엔 항상 학원에 들러 조향 수업을 받았다. 자격증을 따기 위해 정해진 커리큘럼을 모두 수료해야 했기 때문이다. 원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들어야 하는 수업을, 약간의 웃돈을 주고 혼자 들을 수 있게 신청해 놨다.

“……좀 쉬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태성은 껄끄러운 눈으로 내 얼굴을 살펴봤다. 말하는 중간중간 기침을 하는 내가 영 미덥지 않은 모양이었다. 혹시 옮길까 싶어 미안하다고 얘기하자 이번엔 더 황당한 눈을 해보였다.

“전 감기 같은 거 안 걸립니다.”

바보는 감기에 안 걸린다던데. 그리 말하려다가 너무 놀리는 것 같아서 관두기로 했다. 그런데 이태성이 툭 내뱉는 게 아닌가.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데.”

“……저한테 개라고 하신 겁니까?”

“…….”

“와, 아니라고도 안 하네.”

기분이 나쁘진 않았고, 그냥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이태성은 진심으로 내가 감기에 걸렸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으니.

“비 맞아서 그렇습니다. 저도 감기 같은 거 잘 안 걸려요.”

“아니, 항상 차 타고 다니는 분이 비를 왜 맞습니까?”

“그럴 일이 좀 있었습니다.”

자세히 설명하는 대신 그냥 손을 내저었다. 신호가 바뀌었으니 운전이나 마저 하라는 의미였다. 이태성은 묵묵히 기어를 바꾸고,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심해지기 전에 약이라도 드십쇼. 이희나 씨가 그러는데 조향사는 감기도 조심해야 한다고 그랬습니다.”

“둘이 따로 연락도 합니까?”

나랑 있을 땐 그런 말을 안 했던 것 같은데. 그런 생각으로 묻자 이태성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무뚝뚝하게 굴더니, 아무래도 내 말이 정곡이었던 모양이다.

“걱정은 감사하지만, 약이라면 먹고 있습니다.”

내 감기를 걱정하는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이태성 말고도 챙겨 주는 사람이 많았다. 물론 그중 8할은 다름 아닌 권이도였지만.

‘약 꼬박꼬박 먹어요. 혹시 몰라서 졸린 약은 빼라고 했으니까.’

그 어색한 대화 이후에도 우리는 매일같이 식사를 함께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괜찮았고, 예상했던 것보다 더 어색하지 않았다. 그의 집에 들어와 그랬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 반복된 것이다.

‘자꾸 아프면 큰일인데…….’

권이도는 내가 중병이라도 걸린 양 늘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이 정도 감기가 뭐 그리 대수라고. 감기를 옮길까 봐 내 방에서 자려고 하면 억지로라도 제 방 침대에 눕혀 놓을 정도였다. 나야 푹 잘 수 있으니 좋지만, 그의 태도는 이따금 민망한 감이 있었다.

‘일을 좀 쉬는 게 어떻습니까?’

약을 챙겨 주는 건 물론, 매일 밤 조심스레 이마를 매만졌다. 머리가 좀 몽롱한 걸 빼면 거의 아무렇지 않은데, 심지어는 직접 출퇴근까지 도와주려고 했다.

‘이 정돈 금방 나아요.’

‘금방 안 낫고 있으니까 하는 말입니다.’

솔직히 나쁘진 않았다. 막연히 느끼던 불안감이 눈 녹듯 녹아내릴 만큼. 모든 걸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이 그의 다정함으로 메워질 만큼.

‘……잠을 푹 못 자서 그런가 본데.’

사실 감기가 안 낫는 이유는 뻔했다. 원래도 심하던 불면증이 근래에 조금 더 심해진 것이다. 권이도의 페로몬만으로도 숙면을 취하던 나는, 이제 그가 없으면 쉽게 잠들지 못했다. 잠깐 잠든다 해도 금방 깨기 일쑤였고, 어쩌다 깊이 잠들면 발작처럼 눈을 뜨곤 했다.

원인은 딱 하나였다. 나를 내친 가족들이 돌아가며 꿈에 나왔기 때문이다. 하루는 아버지가 나왔고, 하루는 민재가 나왔으며, 또 하루는 어머니와 서영이가 함께 나왔다. 꿈속에서 나를 못 본 척 외면하던 그들은, 나중에는 사람들 틈에 섞여 힐난하듯 손가락질했다.

여기까진 그나마 참을 만했으나, 그 끝에 권이도가 나오는 순간만큼은 견딜 수 없었다.

‘내가 미쳤다고…….’

그는 늘, 매 순간순간 싸늘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게 손가락질을 하진 않았지만 그 차가운 시선은 호된 매질보다 가혹한 것이었다. 길가에 널린 쓰레기를 보듯 경멸 어린 표정은 뭇사람들의 비난보다 더 억울했다.

고작 꿈일 뿐인데, 바늘을 삼킨 기분이었다. 뱉어 내지도 소화하지도 못해서 옴짝달싹 못 한 채 처분만 기다렸다. 조금만 크게 움직이면 배 속이 아파서, 몸을 웅크린 채 최대한 숨을 죽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럴 때면 항상 견딜 수 없는 공포가 밀려들었다. 내 유일한 일상을 이루는 사람이, 내게 등을 돌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텅 빈 침대를 보는 게 두려워서, 본능적으로 권이도를 찾을 정도였다.

잊고 있었는데, 그건 아주 무서운 감각이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겉도는 경험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사무치게 외로워졌다.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잃은 것도 허무한데 거기에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설움이 덧씌워졌다.

권이도는 그런 내 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악몽이 몇 번 반복되자, 내가 자는 동안에는 절대 곁을 떠나지 않았다. 다행히 그가 직접 온기를 나눠 줄 땐 나 또한 안심하고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비록, 그게 일시적인 안정감에 불과하더라도 말이다.

* * *

“오늘 늦으신다고요?”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권이도는 집에 있지 않았다. 타이밍 좋게 걸려 온 전화 한 통만이 그가 전해 준 소식의 전부였다.

-미안합니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 자기 전엔 들어갈 테니까 저녁은 먼저 먹어요.

“…….”

권이도는 바쁜 사람이고, 이런 상황은 언제든지 있을 수 있었다. 지난번처럼 새벽에 오는 것도 아니고 자기 전에 들어온다면 그리 늦는 것도 아니었다. 반대로 나 또한 일이 생기면 그를 기다리게 할 수도 있었고 말이다.

“……얼마나 늦으세요?”

그런데도 나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서운함을 느꼈다. 피치 못 할 일이라는 걸 알면서 가슴 언저리가 울렁거리는 기분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기분인지,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한두 시간은 더 걸릴 것 같은데.

놀랐다고 해야 할까. 내가 이렇게까지 권이도에게 길들었단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약속을 지키는 척 그의 집에 머무르고 있으면서, 사실 의지할 곳이 필요한 건 나였던 모양이다.

-감기 기운은?

“많이 나아졌습니다.”

간질거리는 목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조금만 방심하면 기침이 나올 것 같아서, 괜히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잠깐 말이 없던 권이도는 예의 그 나직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쉬고 있어요.

뚝, 끊긴 전화에서 수화음이 들려왔다. 나는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 내고 화면을 바라봤다. ‘권이도’ 그렇게 저장된 이름이 오늘따라 참 새삼스러웠다.

권이도 없는 저녁 식사는 재미없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지루하기만 했다. 국물이 많은 불고기는 적당히 달큼했고, 아삭한 연근무침 역시 내 입에 꼭 들어맞았는데 말이다. 블루베리 퓌레를 올린 우유푸딩은 두 입 먹자마자 그대로 내려놓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그를 기다리는 사이 기분 전환이라도 할 겸 욕조에 몸을 담그기로 했다. 고용인이 제가 하겠다고 했지만, 정중히 사양하고 욕실에 걸터앉아 물이 받아지길 기다렸다. 쏴아아, 쏟아지는 물소리는 장맛비가 쏟아지는 소리와 비슷했다.

입욕제는 굳이 풀지 않았다. 입고 있던 옷도 대충 바닥에 벗어 버리고 욕조로 들어갔다. 물 온도는 딱 적당했고, 목까지 몸을 푹 담그면 긴장이 풀리는 느낌도 나쁘지 않았다.

“…….”

멍하니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봤다. 투명한 창문 너머로 비 내리는 하늘이 한눈에 보였다. 빗방울이 통통 튀어 오르고, 저마다 한데 모여 힘없이 흘러내렸다. 멍하니 보고 있으면 제법 중독성 있는 구경거리였다.

그렇게 한참 빗방울을 구경하던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스르륵 몸을 미끄러뜨렸다. 아까보다 식은 물속에 머리까지 잠근 채, 꽤 오랜 시간 그렇게 숨을 참았다. 세상과 차단된 것처럼 먹먹한 귓가엔 잔잔한 물소리만이 전해지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물속에 잠긴 채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좋겠다. 이 순간 그대로 더는 변하지 않았으면 했다. 물론 욕조에 빠져 죽는 건, 지나치게 볼품없겠지만 말이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숨이 가빠질 즈음에야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한 손으로 얼굴을 닦아 내고 모자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무심코 고개를 돌린 순간, 나를 바라보고 있던 누군가와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

“…….”

권이도였다. 그것도 무척이나 놀란 표정의 권이도.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파르르 눈가를 떨던 권이도. 언제 퇴근한 건지, 언제부터 있던 건지. 그런 걸 물을 새도 없이 그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불러도…… 대답이 없길래.”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며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에 들어가 있던 건 나인데, 도리어 제 쪽이 숨이 막힌다는 듯이. 잠깐 그대로 서 있던 그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내게서 등을 돌렸다.

“……그냥 가게요?”

나는 넌지시 물으며 욕조에 팔을 걸쳤다.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바람에 한 손으로 쓸어 넘기기도 했다. 속눈썹에 맺혔던 물방울이 뺨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렸다.

“여기까지 왔는데…… 들어오지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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