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Complete Strangers(4)
이젠 정말 과거에서 벗어나야 할 때일까. 아버지를 만나진 못했지만 나는 오늘이 가족들과의 마지막 만남임을 알았다. 더 이상 내게 연락할 일도, 김 실장을 통해 전해야 할 말도 없겠지.
치열하게 살아오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한가로운 삶을 산 것도 아니다.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나는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대부분을 해왔다.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내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 전부였단 말이다.
그런데 덜컥 방향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일직선으로 난 좁은 길을 걷다가, 갑작스레 넓은 공터를 마주한 것처럼. 어디로건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건지, 아니면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신세가 되어 버린 건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오피스텔로 모실까요?”
차가 사거리 신호에 걸렸을 때, 김 실장이 넌지시 물었다. 자연스레 권이도의 집으로 향하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건 한 모양이었다. 확실히 이런 상황에 권이도의 얼굴을 보는 건 좀 그럴지도 몰랐다.
“아뇨.”
“…….”
“권이도 씨 집으로 가주세요.”
그러나 나오는 건 생각과는 모순되는 대답이었다. 다행히 김 실장은 그 이유까지 물어보진 않았다. 그저 묵묵히 신호등을 따라 권이도의 집 쪽으로 차를 돌렸을 뿐. 매끄럽게 회전한 차체에 빗방울이 힘없이 미끄러졌다.
* * *
집 앞에 다다를 즈음엔 창밖에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점점 거세졌고 복잡하던 머릿속도 어느 정도 정리됐다. 사실 정리되지 않아 버린 것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치워 버렸으니 됐다고 생각한다.
김 실장은 나를 대문이 아닌 차고에 내려줬다. 그냥 대문 앞에서 내려 달라고 했지만, 비를 맞을 것 같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여름 감기가 독하다는 말엔 나 또한 굳이 부정하지 못했다.
“들어가세요. 빗길 운전 조심하시고요.”
아마 김 실장은 가족들이 있는 호텔로 돌아갈 거다. 그곳에서 어머니와 동생들을 보필하며 이런저런 잡일들을 처리하겠지. 그리고 그가 가장 가까이에서 머물 사람은 다름 아닌 민재일 터였다.
“그리고 김 실장님이 민재 좀 잘 챙겨 주세요.”
“…….”
그는 알겠다는 대답 대신 침착한 시선을 돌려줬다. 가끔 이렇게 말없이 있으면 권이도 못지않게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제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나직한 서론은 결코 내 부탁의 대답은 아니었다. 무슨 말을 하려나 싶었는데, 그는 미미하게 눈가를 찌푸리며 얘기했다.
“오늘따라 다신 안 볼 사람처럼 인사하시는군요.”
“…….”
가느다란 실소가 흘러나왔다. 바람 빠지듯 미소 짓는 내게 김 실장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그에게 살짝 목 인사를 건넸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연은 칼로 자른 것처럼 깔끔하게 끊어지지 않는다. 내가 마지막을 기약한들 기회가 생기면 닿을 터였다. 물론 그 기회의 순간을 앞으로 내 쪽에서 만들진 않겠지만.
“그럼 가볼게요.”
뭘 느꼈는지, 김 실장은 나를 붙잡지 않았다. 그렇다고 평소처럼 푹 쉬시라며 인사를 건넨 것도 아니었다. 그저 차 옆에 우뚝 선 채로 멀어지는 내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을 뿐.
“……하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동안, 미뤄 뒀던 피로가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아무래도 하루가 너무 길지 않나 싶다. 출근을 하고, 아버지가 구속됐단 기사를 보고, 업무를 모두 끝낸 뒤 권이도의 집으로 돌아왔다. 원래라면 저녁을 먹을 시간에 가족들을 만나고 온 탓에, 그 많은 일을 하고도 남은 하루가 있었다.
권이도는 내가 그를 두고 나가 있던 동안 집에서 무얼 했을까. 그 의문은 현관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해결됐다. 무심코 시선을 들어 올린 곳에 아까와 같은 차림을 한 그가 가만히 서 있었기 때문이다.
“…….”
“…….”
퇴근 후 보았던 것과 전혀 바뀌지 않은 모습이었다. 입고 있는 옷은 물론, 나를 기다리는 위치와 바라보는 시선까지도. 설마 저기서 한 발짝도 안 떼진 않았겠지만, 여러모로 깜짝 놀라기엔 충분했다.
“……왜 그러고 계세요?”
그는 내가 질문을 건넨 다음에야 눈을 깜박였다. 눈꺼풀이 움직이는 순간, 그제야 나는 그가 얼마나 동상처럼 굳어 있는지 깨달았다. 정지된 영화를 다시 재생시킨 것처럼, 그를 둘러싼 공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왜 그러고 있냐니…….”
“…….”
“보통 이러고 있으면, 기다렸다는 생각을 먼저 하지 않나.”
집을 지키는 개 같다고 하면 무례하다고 화를 낼까. 내가 언제 올 줄 알고 이곳에 서 있었단 말인가. 아니, 아마 차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때마침 현관으로 나왔겠지만 말이다.
“돌아오지 않을까 봐 걱정이 돼서요.”
그의 입에서 ‘걱정’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건 몇 번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모든 걸 다 가진 권이도가 세상에 걱정이 있어 봤자 몇 개나 있으리라고. 끽해야 내일은 어떤 넥타이를 맬까, 그 정도 걱정이나 해야겠지.
“정세진 씨가 좀, 다신 안 올 것처럼 밖으로 나갔으니까.”
“……설마요.”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습도 높은 공기에 권이도의 페로몬이 은은하게 섞였다. 늘 젖은 나무와도 같은 냄새가 풍기는 페로몬은 오늘따라 더 밀도 높게 일렁였다.
“제가 여기 말고 갈 데가 어디 있겠어요.”
그 갈 곳을, 그쪽이 없애 버리지 않았나. 애초에 돌아갈 곳인지도 확실치 않았지만, 이제는 정말 돌이킬 수 없어졌다. 내가 남겨 둔 오피스텔, 그리고 권이도의 집.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고작 그 정도였다.
“제 번호까지 바꿔 놓으셨으면서 별걱정을 다 하시네요.”
비꼬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아마 권이도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눈을 가늘게 뜨며 혼잣말처럼 얘기했겠지.
“화낼 줄 알았는데.”
“그런 걸로 화 안 냅니다.”
진작 말하지 않았던가. 화를 내는 것도 권리의 일종이라고. 감정을 소모해서 바뀔 문제라면 좋겠지만, 무어라 따져 묻는다고 한들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근데 이유는 좀 궁금하네요. 왜 그러셨어요?”
제 계획을 완벽히 이루기 위해서라고, 대충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다. 가족들이 내게 연락하면 계획이 어그러질까 봐 그랬다고. 그러나 권이도가 한 말은 내가 예상하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정세진 씨가 연관되지 않길 바랐습니다.”
우아한 목소리가 차분히 얘기했다. 그의 짙은 눈동자엔 거짓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 식구들이 정세진 씨한테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면 했거든요.”
그 식구들. 그리고 정세진. 오늘만 벌써 몇 번째 남이라는 사실을 확인받는지 모르겠다. 내가 그렇게 큰 걸 바랐던가. 지금껏 쌓아 온 모든 게 의미 없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마음이 상한 건 아니었는데, 그냥…… 그냥 허무했다.
“미안합니다. 미리 말 안 해서.”
미안해할 게 고작 그거일까. 단순히 고지의 문제였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괜찮고 말고를 따질 문제는 아니고…….”
그에게 따질 생각은 없었다. 그는 내 번호를 바꿨다고 말하지 않은 것만 사과하고 있었으니까. 그 외에 일어난 일들은 딱히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겠지.
“식사하셨어요?”
갑작스레 건넨 질문에 그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주제넘은 짐작일지는 몰라도 아마 저녁을 먹지는 않았을 듯했다.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배고픈데 밥부터 먹죠.”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내려오자 식탁에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평소보단 가짓수가 적었고, 대체로 소화가 잘되는 부드러운 음식이었다.
권이도와 나는 서로 아무 대화 없이 식사만 이어 갔다. 어색하기 그지없는 공기는, 내가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도 느끼지 못한 것이었다.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만 들리는 와중에, 먼저 입을 연 건 내 쪽이었다.
“가족들을 만나고 왔어요.”
권이도의 시선이 내 쪽을 향해 왔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차분히 이야기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이런 것들을 물어보려고.”
“다정하군요.”
“…….”
“나 같으면 모르는 척했을 텐데.”
무미건조한 감상이었다. 그래서 더 진심처럼 들렸고. 남 일이라고 쉽게 말하는 게 아니라, 권이도라면 정말 그렇게 했겠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얘기해요.”
그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살짝 시선을 내리깔았다.
“예전에…….”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고 잘잘못을 따지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에 연연하는 것만큼 자기 자신을 좀먹는 짓도 없으니까. 길게 끌어 봐야 손해 보는 건 내 쪽일 것이다.
“권이도 씨가 하겠다던 못된 짓, 그게 이거였습니까?”
여러 가지를 통틀어 묻는 것이었다. 해신의 비리를 터뜨린 것, 내 번호를 마음대로 바꾼 것, 그리고 내 의사와 상관없이 독단적으로 움직인 것. 아니, 마지막 건 못된 짓이라기엔 너무 당연한 일인가.
‘너만은 내 편을 들어 주기로 했잖아.’
물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내가 집에서 나가기 전, 권이도는 분명 그렇게 이야기했으니. 호텔에서 그와 약속했던 내용. 이미 결론은 나와 있고, 권이도는 고개만 끄덕이면 끝나는 것이다.
“선호가 해신을 인수하기로 했죠.”
그런데 권이도는 ‘네.’라는 대답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앞서 김 실장에게 들은 내용이었다. 미미하게 미간을 좁히는데, 특유의 고상한 목소리가 설명을 이었다.
“해신금융 윗대가리를 전문 경영인으로 갈아 치우고 사명을 변경할 겁니다. 정철호 회장을 포함한 주요 임원 10여 명을 제외하면 정리 해고는 없을 거예요.”
“……너그러운 처사네요.”
그런 설명을 바란 게 아니라고, 그렇게 물으려다가 관두기로 했다. 그가 하는 말들은 대부분 들어 둬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
“뭐…… 기업 이미지를 생각하면 그편이 나으니까. 그리고 조만간 주주 총회가 열릴 텐데, 거긴 나도 참가할 예정입니다.”
“권이도 씨가요?”
“네, 저한테도 주식이 좀.”
잠시 말을 멈춘 그가 고개를 까딱였다.
“많이 있거든요.”
“…….”
기업이 돌아가는 일을 내가 이토록 몰랐을까. 아니면 권이도가 물밑 작업을 열심히 해놨을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건 간에 예상치 못한 일임은 분명했다.
“인수가 끝나고 안정되기까진 시간이 꽤 걸리겠죠. 정철호 회장의 재판도 그만큼 길어질 거고.”
긴긴 싸움이 될 터였다. 승자가 누구일지는 아마 정해져 있겠지만. 어쩌면 길게 저항하지 않는 편이 아버지에게도 이로울 것이다.
“정세진 씨, 정 회장에게 약혼의 조건을 얼마나 들었습니까?”
권이도는 가볍게 질문하며 화제를 전환했다. 딱히 답을 바라진 않았는지 곧장 뒷말을 덧붙였다.
“그쪽 기업엔 특이 형질이 없죠. 그나마 하나 있는 오메가는 친자식이 아니고.”
참으로 가감 없는 말이었다. 물론 그다지 상처가 되는 말도 아니었다.
“정철호 회장은 나한테 해신이 가진 오메가를 줄 테니 선호카드와 제휴를 맺고 싶다고 제안했습니다. 나는 그 제안을 거절하고, 그 대신 투자금과 시스템을 가지고 협상을 걸었어요.”
여기까진 아버지에게 들은 것과 비슷했다. 아버지가 먼저 제안했다는 건 처음 듣는 얘기였지만, 결과적으로 대가는 같았다. 고작 나 따위 오메가를 가지고 선호그룹에 손을 뻗다니, 아버지도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다.
“그때 정세진 씨에게 줬던 시스템. 그건 내가 원래 주기로 약속한 자료가 맞습니다.”
“…….”
그의 입에서 순순히 이 사실이 나올 줄 몰랐는데. 가만히 입을 다무는 순간, 더더욱 예상하지 못한 말이 들려왔다.
“비록 불량이었지만.”
“……네?”
퍼뜩 눈을 크게 떴다. 권이도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눈을 깜박였다.
“그 시스템에 큰 하자가 발견돼서 고치는 중입니다. 실제로 적용하기엔 아직 미흡한 부분이 많더군요.”
“…….”
목소리는 평온한데, 내용만큼은 그렇지 못했다. 결국 그가 내게 쥐여 준 시스템이 불량이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만약 내가 그걸 그대로 아버지에게 가져다줬다면, 그랬다면 해신은 또다시 위기에 처했을 것이다.
“불량인 걸 알고 계셨습니까?”
“그게 중요합니까?”
권이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고는 눈썹을 들어 올리며 담담히 대답했다.
“몰랐습니다, 처음엔.”
미묘하게 찜찜함이 남는 대답이었다. 그 처음이 언제냐고, 그렇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권이도는 내게 되물을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날 정세진 씨가 한 번 해신을 구한 겁니다. 정 회장은 멍청하게 그것도 모르고 자기한테 득이 되는 사람을 내친 거고.”
지나친 억설이었으나 딴지를 걸기에도 애매했다. 그 말을 하는 권이도가 차게 식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기 때문이었다. 내게 화가 난 게 아니라, 그날 뺨을 맞고 온 나를 떠올린 것처럼.
“못 믿을 수도 있는데, 내 손으로 직접 무너뜨릴 생각까진 없었습니다. 정세진 씨 얼굴을 봐서라도 모르는 척 눈감아 줄 의향이 충분히 있었죠.”
“…….”
“아까 말한 것처럼, 그 방아쇠를 당긴 건 정 회장이고.”
양가감정이 들었다. 시기를 앞당긴 건 권이도지만, 그의 말대로 언젠간 일어날 일이었을 테니까. 이걸 권이도의 탓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의 탓이 아니라고 해야 할지. 나로선 결론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정세진 씨 비서랑은 처음부터 연락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일에 필요한 자료를 많이 가져다준 건 맞지만, 그 사람 하나 때문에 일어난 일은 아니에요.”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다. 고작 한두 사람의 영향으로 터질 일이 아니라는 건. 아버지가 뿌린 씨가 그대로 독이 되어 되돌아왔다면 모를까.
“안타깝게도 정 회장 주변에 제대로 된 사람이 아무도 없더군요. 하긴, 아내까지 등을 돌렸으면 말 다 했지.”
“……어머니와도 연락하셨습니까?”
“…….”
권이도가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못 들었냐는 듯이 말이다. 그러고는 픽 웃음을 흘리며 입꼬리를 말아 올린다.
“현명한 사람이군요. 정 회장이랑은 다르게.”
유독 조심스럽게 나를 대하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아마 권이도가 어머니에게도 입막음을 시킨 모양이었다. 내가 가족들을 만나고 왔으니, 내게 모든 걸 토로했으리라 짐작했겠지.
“정 회장 외의 식구들을 건드리지 않는 대가로 정세진 씨에게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았습니다. 정세진 씨가 원하지 않는 이상 그쪽에서 연락이 오는 일은 없을 거예요.”
“…….”
오늘 느꼈던 예감이 진짜였구나. 놀랍다기보단 마음이 침착해졌다. 다만, 내가 그들에게 아무런 정이 없다는 게 조금 의외였을 뿐. 물밀듯 밀려드는 상실감은 미련이라기보단 허전함에 가까웠으니.
“정세진 씨는 더 이상 정철호 회장의 아들이 아니에요. 키워 준 은혜를 갚아야 할 필요도 없고, 그 사람들이 하는 일에 강제로 함께해야 할 의무도 없습니다.”
혹시 개운하다고 얘기해야 할 타이밍이었을까. 지금 드는 이 기분이 그런 긍정적인 것이라면 나는 긍정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정세진 씨.”
권이도는 느릿느릿 내 이름을 불러 왔다. 그 나직한 부름은 이야기를 마무리하기 위한 서론에 가까웠다. 내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자, 그가 지그시 내 눈을 들여다봤다.
“여기까지가 내가 한 못된 짓입니다.”
마주친 시선이 이상하리만치 씁쓸했다. 왜인지, 그가 내게 미안해하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느릿느릿 운을 뗐다.
“정 회장을 구속시킨 게 아니라…….”
“…….”
“정세진 씨한테 가족을 빼앗은 거.”
배 속에 돌덩이가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목구멍이 꽉 옥죄여서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하는 내게 사뭇 냉랭한 목소리가 이야기했다.
“내 눈에는 학대범들이었지만, 당신한텐 유일한 가족이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