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Complete Strangers(3)
협박은 아니었다. 그저 단순한 의문이었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약혼 따위와 이미 예정되어 있던 아버지의 구속. 그 두 가지로 인해 나는 간신히 유지하던 가족의 형태마저 잃게 되는 걸까.
“…….”
민재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와 시선을 마주한 채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였을 뿐이다. 그러다 끝내, 터져 나온 탄식엔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담겨 있었다.
“하…….”
나직이 욕지거리가 들렸다. 허탈함, 허무함, 그리고 사그라든 분노에 섞인 무력감까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민재는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흘리며 조그맣게 읊조렸다.
“씨발, 진짜…….”
아까처럼 호전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포자기하듯 모든 걸 내려놓은 느낌이면 모를까.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며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그만 가봐야겠다.”
아마, 울고 있진 않을 것이다. 며칠은 좀 낙담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을 추스르겠지. 김 실장에게 잘 챙겨 달라고 말하고, 시간이 약이 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쉬어, 술 많이 마시지 말고.”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더라. 그래도 어렸을 땐 나름대로 잘 지냈던 것 같은데. 형, 형, 하고 쫓아다니는 민재가 정말 피를 나눈 동생처럼 소중하던 시절이 있었건만.
“…….”
나를 향하는 시선에 미련이 득실거렸다. 직면할 자신이 없어 방치한 감정이 나도 모르는 새 이렇게 뿌리를 내리고 말았다. 조금 더 일찍 말렸다면 달라졌을까. 그리 생각한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형 갈게.”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민재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번엔 민재도 무어라 화를 내지 못했다. 그저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울음을 삼켰을 뿐.
그렇게 밖으로 나가기 위해 한 발짝 옮기는 순간, 등 뒤에서 자그마한 물음이 들렸다.
“……이제 또 연락 안 받게?”
“…….”
멈칫, 발걸음을 멈췄다. 그 목소리가 떨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없어서. 내가 연락을 또 안 받다니. 생뚱맞은 말이었다.
“연락했었어?”
민재를 돌아보며 묻자, 그가 와락 얼굴을 구겼다. 민재는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나한테 연락했었다고?”
나는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내게 온 연락이 있나 확인했다. 그러나 시간이 나타난 화면엔 전화도 메시지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혹시 몰라 통화 기록에도 들어가 봤지만, 그곳엔 권이도와 김 실장의 번호만 찍혀 있을 뿐이었다.
“전화 온 게 없는데.”
“……뭐?”
민재는 황당한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아직 남은 감정의 잔재가 꾸역꾸역 지워지는 듯했다. 눈을 커다랗게 뜬 그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장난해? 내가 너한테 전화를 몇 번이나…….”
욱해서 말하던 녀석이 입을 꾹 다물었다. 고개를 팩 돌려 버리는 걸 보니 별안간 민망해진 모양이다. 나는 차단 목록과 메시지 함을 차례대로 확인하고 연락처에서 민재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
핸드폰에서 팝송으로 된 컬러링이 흘러나왔다. 약간의 간격을 두고 그와 똑같은 벨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불과 한 시간 전엔 김 실장과 통화도 했고, 지금도 신호가 잘 가는 걸 봐선 핸드폰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닌 듯했다.
“……뭐야.”
마침 제 핸드폰을 확인한 민재가 미간을 좁혔다. 그는 나와 화면을 번갈아 보곤 배신이라도 당한 양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러곤 짜증스럽게 핸드폰을 콱 움켜쥐었다.
“이젠 몰래 번호까지 바꾸냐?”
“…….”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나는 민재에게 다가가 핸드폰을 들고 있는 손목을 붙잡았다. 움찔, 뒤로 물러나려던 민재가 나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이게…….”
난생처음 보는 열한 자리 숫자였다. 분명 전화를 걸고 있는 사람은 나인데, 평생을 써온 번호가 아닌 전혀 모르는 번호가 나타나 있었다. 혹시 몰라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자, 흘러나오던 팝송 역시 뚝 하고 끊겨 버렸다.
“…….”
번호가…… 바뀌었을 리가 없는데.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됐다. 민재는 표정을 굳힌 나를 보고 말없이 눈치를 살폈다. 이명이 들릴 것처럼 멍한 귓가에 언젠가 권이도가 했던 말이 울리는 듯했다.
‘핸드폰은 오후에 비서가 가져올 겁니다.’
뒷덜미에 소름이 끼쳤다. 누군가 뒤통수를 때린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금방이라도 비명이 나올 것만 같아서, 나는 입가를 가린 채 손에 든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액정이 다 깨졌길래 새 걸 사 오라고 했어요.’
온실에서 히트 사이클이 왔던 다음날. 권이도는 이태성을 시켜 내게 새 핸드폰을 사다 줬다. 정보를 모두 백업해 두었다며 친절하게 전에 쓰던 핸드폰까지 액정을 고쳐 왔다. 그런데 아무 의심 없이 쓰고 있던 핸드폰이, 사실은 내 번호가 아닌 다른 번호로 되어 있었다면 어떨까.
“……하.”
멈췄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날 이후, 나는 그 누구에게도 내 번호를 알려 주지 않았다. 이태성의 번호는 내 쪽에서 받았고, 창립 기념식에서 만난 이들에게도 연락처를 주지는 않았다. 부하직원들에게 왔던 안부 인사도 그때를 마지막으로 다시는 오지 않았다.
권이도가 내 번호를 바꿔 놨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나는 한 가지 모순을 깨달았다. 가족들은 물론, 당사자인 나조차도 모르고 있던 번호. 권이도와 이태성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내가 연락을 주고받은 사람.
‘본부장님. 접니다.’
“……뭐야, 야, 어디 가? 야!”
뛰듯이 객실을 가로질러 문으로 향했다. 한 손에 핸드폰을 움켜쥔 채 민재의 부름도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벌컥, 문을 열자마자 그 옆에 서 있던 사람이 퍼뜩 나를 바라봤다.
“도련님?”
얇은 안경알 너머로 의아해하는 시선이 보였다. 세월의 흔적이 담긴 만큼 예전과는 달리 잔주름이 있는 눈매였다. 나는 민재가 듣지 못하게 객실 문을 닫으며 그를 향해 운을 뗐다.
“김 실장님.”
“예.”
그는 말없이 얘기하라는 듯 가만히 눈을 맞춰 왔다. 내게서 무얼 느꼈는지 목덜미를 빳빳하게 굳히기도 했다. 이 모든 상황이 너무도 말도 안 되게 느껴져서. 질문을 건네는 순간까지 헛웃음이 나왔다.
“제 번호 어떻게 아셨습니까?”
“…….”
벌어진 입술이 딱 다물렸다. 아까 차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의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한참, 아무 말 않던 그는 그 어떤 변명도 하지 않고 딱 한마디만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당신이구나. 권이도에게 모든 정보를 건네준 게.
내가 놓쳤던 부분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김 실장에게 느꼈던 위화감, 그리고 차에서 본 무언가 숨기는 듯한 표정. 유독 김 실장을 신경 쓰던 권이도와 얼마 전 차에서 들었던 그 말까지.
‘단순히 계약으로 약혼한 거였으면 도련님을 위해 그렇게까지 하진 않았겠죠.’
김 실장이 말한 ‘그렇게’는 해신의 파멸을 의미했던 모양이다. 아버지의 최측근이자 내부 고발자는 아마도 다름 아닌 본인이었겠지. 그래서 찾아 봤자 의미가 없다고, 굳이 찾을 노력조차 하지 않았나 보다.
“…….”
배신감을 느껴야 할 상황이었다. 김 실장은 아버지의 사람이고, 한순간에 등을 돌리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의심이 생겼으니 최소한 진위라도 확인해야 할 터인데, 이상하리만치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아버지가.”
“…….”
“정말 인복이 없으시네요.”
만약 딱 한 번이라도 내가 먼저 연락했다면. 김 실장을 통하지 않고 가족들에게 안부를 물었다면. 상황을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왔다면 금세 알아차렸을 것이다. 번호가 바뀌었다는 것도, 해신이 궁지에 몰렸다는 것도, 김 실장이 권이도의 편에 섰다는 것도.
누군가를 탓할 일이 아니었다. 김 실장의 말대로 인복은 스스로 만드는 거였다. 저지르지 않은 비리를 뒤집어쓴 것도 아닌데, 이게 과연 원인을 타인에게 돌릴 일일까.
우습게도, 나는 궁지에 몰린 아버지를 보고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이 상황이 슬프지도 않았고, 그가 안타깝거나 동정심이 생기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통쾌한 기분이 든 것도 아니었기에 그저 방관자가 된 것처럼 멀리서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사모님도 알고 계십니다.”
김 실장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얘기했다. 이번엔 정말 놀라운 내용이었는데, 이제는 어떤 말을 들어도 그다지 놀랍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나는 핸드폰을 안주머니에 넣으며 그를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어머니한테 가죠.”
* * *
어머니를 뵙고 돌아오는 길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마 여름을 앞두고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된 모양이다. 먹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에서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가 온 세상을 회색으로 물들이는 것만 같았다.
김 실장은 빗길을 운전하는 내내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늘 건네던, 피곤하면 눈을 붙이라는 말조차 없었다. 차창을 때리는 빗소리와 이따금 섞이는 도로의 잡음만이 우리가 주고받는 대화의 전부였다.
‘세진이 너는…… 그냥 모르는 척하렴.’
나는 내내, 내내 호텔에서 있었던 일을 되새겼다. 민재의 같은 층 스위트룸에서, 서영이에게 들리지 않도록 응접실에 앉아 나누었던 대화를. 이토록 엉망인 상황 속에서도 고고한 학처럼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던 어머니의 모습을.
‘널 끌어들이는 쪽이 기업 이미지엔 더 안 좋겠지.’
어머니는 긴말 없이 내가 해야 할 행동만 알려 줬다. 아무것도 관여하지 말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가만히 있으라고. 아버지에게 연락할 필요도 없으니 그저 지금까지처럼 권이도의 집에 조용히 머물라고.
‘어차피 너는 남이니까, 너한테 피해가 가진 않을 거야.’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건, 가족의 울타리 안에 들어오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였다. 내가 조용히 있으면 세간에선 은혜도 모르는 입양아라며 나를 욕할 텐데. 그런 것들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게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예요?’
그 말을 묻기까진 제법 많은 망설임이 있었다. 혹시라도 그조차 내게 말하지 않을까 싶어서. 너는 남이니 알 필요 없다고 단호하게 선을 그으면 어쩌나 하고.
‘이혼할 계획이다.’
다행히 어머니는 스스럼없이 앞으로의 예정을 말해 줬다.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힌 결혼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담담히 눈을 내리깔기도 했다.
‘그이랑도 얘기는 끝났어.’
어머니는 해신그룹 사람이 아니었고, 민재와 서영이는 학생이었다. 기업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그들에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거기다 이혼까지 한다면 피해는 오로지 아버지에게만 돌아갈 터였다.
‘냉정한 말이지만, 애들은 살아야 하지 않겠니.’
현명한 판단이었다. 개인의 희생으로 가정을 지킬 수 있다면 꼬리 자르기라도 해야겠지. 꼬리를 맡은 아버지가 동의한 이상 별다른 이견은 없을 테니.
부자는 망해도 3대가 먹고 산다고 했던가. 그들의 생계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각자 가진 재산만 해도 죽을 때까지는 먹고 살 수 있을 터였다. 다만, 민재의 씀씀이는 조금 줄여야겠지만.
‘너한테는 아무런 해가 안 되게 할 테니까…….’
말을 잇는 중간중간 어머니는 지나치게 내 눈치를 살폈다. 입양된 아들을 향한 불편함이 아니라 정말 조심스러운 상대를 대하는 듯이. 그 과한 반응이 거북해서 오히려 더 불편하다는 것도 모르고.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
가만히 턱을 괸 채 비가 내리는 바깥을 바라봤다. 이렇게 습도가 높아지면 주변 사물의 냄새가 더 예민하게 다가오곤 한다. 가령 차 안에 있는 지금조차 카 시트의 가죽 냄새가 선연히 느껴지는 것처럼.
“다시 여쭤볼게요.”
나는 대뜸 입을 열며 느릿느릿 눈을 깜박였다. 나가서 비나 맞으면 좋겠다고, 머리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김 실장님은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권이도에게 한자리 받기로 한 걸까. 그가 무얼 대가로 아버지를 배신했는지 궁금했다. 아니, 처음부터 신의가 없었을 수도 있으니, 그걸 배신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다.
“정말 정해진 건 없습니다.”
김 실장은 이번엔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분명 아까와 같은 내용인데 거짓말을 하고 있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부드럽게 핸들을 꺾은 그가 여상스러운 투로 덧붙였다.
“우선 내일 조사 받고 인수인계를 좀 해야 합니다. 비서실에도 비상이 떨어져서 처리할 것도 몇 개 있습니다.”
쓸데없이 성실한 답변이었다. 내가 물은 게 당장 이번 주 일정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내가 바라는 대답을 얻기 위해선 조금 더 직접적인 질문을 건네야 했다.
“권이도 씨가 뭘 준다고 했습니까?”
세상에 조건 없는 계약은 아무것도 없다. 김 실장처럼 꼼꼼한 사람이 단순히 협박을 당해 움직였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에게 오는 이득이 무엇일지는 몰라도 적어도 손해는 안 볼 터였다.
“그냥 이해관계가 맞았을 뿐입니다.”
김 실장은 어쩐지 착잡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리깔린 음성은 비가 내리는 하늘처럼 무채색이었다. 감정을 절제한, 정제된 말투가 오히려 마음을 안정시켜 줬다.
“회장님이 저지른 일들이 언젠간 알려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평생 숨길 수 있는 비밀은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불안하셨던 겁니까?”
“……예.”
그는 깔끔하게 제가 느낀 불안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 불안의 원인을 자세히 설명해 줬다.
“실직이 아니라, 떳떳하지 못한 사람이 될 것 같아서 불안했습니다.”
가벼운 대답이었는데 오히려 그 말이 주는 무게감은 더 무거웠다. 아버지와 가까운 곳에서 비리를 도와야 했을 김 실장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스트레스를 받는 처지였을 거다.
“도련님이 본부장직을 내려놓은 뒤에 회장님이 더 초조해하셨습니다.”
김 실장의 살길은 권이도였고, 어머니의 살길은 이혼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살길은 아마 나와 권이도의 약혼이었을 거다. 그 약혼이 제대로 풀리지 않으니, 아버지도 불안했겠지.
“이렇게 위태롭게 지낼 바엔 어떻게든 방법을 찾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우습게 들리시겠지만…… 회장님을 배신해야겠다거나 그런 의도는 아닙니다. 저는 회장님을 위해서도 이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들으면 화내시겠어요.”
상황에 맞지 않는 웃음이 나왔다. 그 말을 들을 아버지가 얼마나 노발대발할지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내게 그랬던 것처럼 뺨 한 대쯤은 갈길 것이었다.
“그리고 도련님 번호를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은 건…… 조금이나마 편하시길 바라서 그런 것도 있습니다.”
김 실장은 이번엔 조금 망설이는 기색으로 얘기했다. 나를 위한다고 말하는 게 양심에 걸리는지, 눈가를 살짝 찌푸린 상태였다.
“그 집에서 잘 지내시는 듯해서…….”
불면증이 나아가는 게 가장 안심이었다고, 그는 내가 먹는 수면제의 양이 반의반으로 줄었다고 말해줬다. 주치의인 최 교수가 장난처럼 다른 곳에서 약을 타냐고 물을 정도였단다.
“권이도 전무가 도련님을 진심으로 아낀다고 생각했습니다.”
“……음.”
그 말에는 부정도 긍정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내게 마음이 있는 건 확실한데 그게 얼마큼의 크기인지는 아직까지도 확신할 수 없었으므로. ‘아낀다.’라는 표현을 써도 되는지, 그런 걸 가늠할 수 없었기에.
“독단적으로 행동해서 죄송합니다. 어떤 질책을 하셔도 달게 받겠습니다.”
누가 김 실장 아니랄까 봐, 이야기를 끝내는 말투도 정중하기 짝이 없었다. 애초에 화를 낼 생각도 없었지만, 만약 화가 났더라도 직접적으로 성질을 내진 못했을 거다.
“질책이라니…….”
나는 픽 웃음을 흘리며 두 눈을 내리감았다. 모두가 치열하게 움직이는 와중에 나 혼자만 멈춰 버린 기분이었다. 원래는 부품의 하나였다면 지금은 맞물리는 톱니가 하나도 없는 동떨어진 바퀴가 된 것 같았다.
“제가 무슨 권한으로 김 실장님을 혼냅니까.”
“…….”
“이제 내 비서도 아닌 사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