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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억의 끝에 (54)화 (54/131)

54화. Complete Strangers(2)

“…….”

이번에야말로 나는 정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선호가 해신을 인수할 예정이라니. 나와 권이도의 약혼이 아니면 두 기업 사이에는 그 어떤 접점도 없다. 선호가 해신을 눈독 들일 만한 이유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약혼의 이유가 이거였나.

무심코 반지 자국이 남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어쩌면 선호는 처음부터 무너져 가는 해신을 눈여겨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와의 약혼을 받아들이고, 내가 본부장을 관두게 한 뒤 감시한 거겠지.

‘감시가 아니라 경호입니다.’

“하아…….”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었다. 갑작스레 몰려든 피로감은 뒷덜미를 빳빳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머리에 있던 피가 쑥 빠져나가듯이 아득한 현기증이 일었다.

깊이 생각해 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건 알고 있다. 이 모든 건 내 억측이고, 단순히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는 사실도. 그러나 연달아 들려오는 소식은 자꾸만 생각을 안 좋은 쪽으로 흐르게 했다.

“……남은 직원들은 어떻게 됩니까?”

나와 일하던 팀원들,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무수한 직원들. 경영권이 넘어가면 가장 먼저 피해를 볼 사람들이었다. 선호 정도 되는 기업이 무책임하게 굴진 않겠지만, 구제하지 않겠다고 선언해도 별다른 수가 있는 건 아니다.

그런데 김 실장은 변화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아마 큰 영향은 없을 겁니다. 상층부만 교체되고 구조는 지금과 비슷하게 갈 거라고 했습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인데도 제법 구체적인 계획이었다. 그가 이토록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기에, 나는 불쑥 찾아온 위화감을 느끼며 눈가를 찌푸렸다.

“그럼 정리 해고 당하는 인원이 없는 겁니까?”

“예, 그렇다고 알고 있습니다.”

보통 회사에 찾아온 경영 위기는 중심부를 이루는 직원들이 가장 먼저 눈치채기 마련이다. 그즈음 되면 퇴사가 잦아졌고, 회사에 남은 직원들은 어떻게든 보상을 받기 위해 버티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그런데 얼마 전에 윤 대리와 마주쳤을 때,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가 아니었던가.

예상할 수 있는 경우는 하나였다. 주요 임원들과 협상을 끝내고, 다른 직원들은 아무도 모르게 진행한 것. 어차피 크게 바뀔 건 없으니까, 이 안정적인 체제를 무너뜨리지 않도록.

그 말인즉, 아버지의 최측근인 사람들만 매수해 정보를 빼내고 이 일을 진행했다는 뜻이다.

“아버지가 참 인복이 없으시죠.”

혼잣말처럼 흘린 말에 김 실장은 그 어떤 부정도 하지 못했다. 백미러를 통해 나를 살펴보고 무심히 정면을 바라봤을 뿐이다. 얇은 안경알 너머로 씁쓸하게 가라앉은 두 눈이 보였다.

“인복은 스스로 만드는 겁니다.”

담담한 반응이었다. 그렇기에 더 잔인했고.

“김 실장님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버지가 구속되면 가장 곤란한 건 김 실장일 거다. 가장 큰 불똥이 튀는 것도 마찬가지로 김 실장일 테고. 대책이 따로 없다면 앞길이 막막하긴 매한가지일 것이다.

“저는…….”

여태껏 막힘 없이 대답했으면서, 그는 이번만큼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까딱, 움직인 손가락이 핸들을 톡 건드렸다. 뒤이어 흘러나온 한마디는 어딘지 모르게 머뭇거리는 감이 있었다.

“아직 확정된 건 없습니다.”

“…….”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 대답이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걸. 그가 나를 오래 보필한 만큼, 나 또한 그를 오랜 시간 봐왔으니까. 말을 아낄 때면 어떻게 나오는지, 그런 건 눈빛만 봐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냥 모르는 척 입을 다물었다. 가뜩이나 심란할 사람을 더 괴롭히지 말자는 생각에서였다. 내가 귀찮게 굴지 않아도 요 며칠 이런저런 일로 마음고생이 심했을 테니,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우리는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피곤하면 한숨 자라는 말이 김 실장과 내 사이를 오간 마지막 대화였다. 내 불면증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기에 김 실장은 기회만 생기면 어떻게든 내가 눈을 붙이길 원했다.

“사모님께서는 잠시 자리를 비우셨다고 합니다.”

김 실장은 내게 민재가 있는 방의 카드 키를 건네줬다. 어머니와 서영이는 한 방에 있고, 민재만 홀로 다른 방을 쓰고 있다고 했다. 당연히 어머니를 먼저 뵈어야 했지만, 부재중이라면 우선 민재를 만나 볼 생각이었다.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VIP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객실로 올라갔다. 가족들은 스위트룸이 있는 21층에 머무르고 있었다. 카펫이 깔린 복도를 지나 객실 문 앞에 다다르자, 김 실장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들어와 있으라고 할까, 잠깐 고민했으나 그냥 관두기로 했다. 어차피 김 실장이 따라 들어와 봐야 장식처럼 서 있는 것밖에 할 게 없을 터다. 오랜만에 보는 민재가, 가뜩이나 예민해진 녀석이, 내게 무슨 소리를 할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뻔했다.

삑, 카드 키로 문을 열고 객실 안으로 들어섰다. 넓디넓은 스위트룸을 가로지르자 가장 먼저 기다란 소파와 테이블, 그리고 벽면에 걸린 커다란 TV 따위가 보였다.

“…….”

침실과 응접실. 민재는 어느 쪽에 있을까. 아마도 침실이겠지만, 그럼 또 두 개의 침실 중 어느 쪽일지가 갈렸다.

그런데 내 망설임이 무색하게, 무척 가까운 곳에서 민재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 실장님…….”

다 죽어 가는 목소리였다.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자 소파 팔걸이 쪽에 삐쭉 튀어나온 발 두 개가 보였다. 앞코가 반질거리는 갈색 구두는 민재가 즐겨 신는 브랜드의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어딜 갔다가 이제 오셨어요…….”

아마 김 실장이 민재와 함께 있던 모양이다. 그 후 내 전화를 받고 나를 데리러 왔겠지. 바로 와준 건 고마웠지만, 이렇게 위태로워 보이는 녀석을 그냥 두고 온 건 좀 의외였다.

“제가 말한 건 사 오신…….”

“미안.”

순간, 정적이 맴돌았다. 나는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가 소파 등받이 뒤에서 민재를 내려다봤다. 길게 누워 이마에 팔을 얹고 있던 민재가 더디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김 실장님은 밖에 계셔.”

“……!”

우당탕!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나를 발견한 민재가 소파에서 떨어진 것이다. 제법 아플 것 같은 소리에 흠칫 놀라자, 민재는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나 나를 바라봤다.

“너, 너……!”

커다랗게 뜨여진 눈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경악 어린 표정이 마치 귀신이라도 보는 듯했다. 김 실장은 가족들에게 내 소식을 전해 주지 않은 걸까. 아무리 내가 연락 없이 왔다지만 이런 반응은 좀 과하지 않나 싶다.

“너 어떻게 여기……!”

“……뭘 그렇게 놀라.”

나는 그리 대꾸하며 찬찬히 민재를 살펴봤다. 떨어지면서 크게 부딪친 것 같던데, 다행히 아픈 기색은 아니었다. 어쩌면 너무 놀라서 자각조차 못 하는 걸 수도 있다.

“기사 봤어.”

아버지의 소식을 기사로 접해야 하다니. 그 말을 하면서도 기분이 이상했다. 왜 내게 연락하지 않았냐고 묻고 싶었지만, 아마 민재 또한 김 실장과 별반 다르지 않은 대답을 돌려줄 것이다.

“소식 듣자마자 김 실장님한테 연락해서 데려와 달라고 부탁드렸어. 오면서 무슨 일인지 대충 들었고.”

“…….”

“김 실장님한테 뭐 사 오라고 했는데?”

민재는 무어라 대답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어머니를 닮은 눈매가 매섭게 추켜 올라갔다. 언뜻 보면 화를 내는 듯했으나 그를 오래 봐 온 나는 알 수 있었다.

“급한 거면 내가 말씀드릴게.”

“…….”

눈물을 참고 있는 거다. 여러 감정이 잔뜩 뒤섞여서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려운 게 분명했다.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나 파들파들 떨리는 입꼬리가 그러한 사실을 여실히 드러냈다.

아무리 성질을 부려 봤자 민재는 이제 겨우 스물네 살이었다. 외국에서 하는 공부가 어렵다며 도망치듯 귀국해 버리는 철없는 어린애란 말이다. 서영이는 나름대로 똘똘하지만, 민재는 이런 상황에 정신적으로 꽤 힘들었을 거다.

“…….”

“……민재야?”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이렇게까지 대답이 없는 건 이상했다. 나는 그에게 한 발짝 다가가며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했다. 늘 풍기던 아로마 냄새, 그리고 그 위에 남은 향수의 잔향. 거기다 옅게 풍기는 술 냄새까지.

……와인을 마셨나?

술을 못하는 민재가 유일하게 마시는 게 포도주류였다. 그것도 드라이한 건 안 먹고, 오로지 스위트한 종류로만. 아니나 다를까, 흘끗 살펴본 테이블에 술병과 와인 잔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괜찮아? 김 실장님 불러 줄까?”

혹시 취기가 많이 오른 걸까. 만약 그런 거라면 김 실장을 시켜 술 깨는 약이라도 사 오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내가 몸을 돌리기도 전에 민재가 까칠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긴 왜 왔어?”

“뭐?”

영 달갑지 못한 질문이었다. 묘하게 선을 긋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왜 왔는지, 이미 조금 전에 설명해 놓았건만.

“왜 왔냐니…….”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민재의 얼굴을 살펴봤다. 얘가 왜 이럴까. 평소처럼 괜히 한 번 건드리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보단 오히려, 진심으로 내가 올 줄 몰랐던 것 같다.

“기사 봤다니까.”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

이번에 인상을 찌푸린 쪽은 나였다. 반사적으로 미간을 좁히자, 민재가 짓씹듯 차갑게 얘기했다.

“기사 봤는데, 그게 뭐.”

뚝뚝 끊기는 목소리가 잔뜩 억눌려 있었다. 마구 솟구치는 분노를 참으려는 것처럼.

“아, 그래서 놀리러 왔냐? 꼴 좋다고?”

“왜 말을 그렇게 해.”

지나치게 화를 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화풀이라기엔 오늘따라 유독 냉랭하다. 민재는 그런 나를 보고 비웃듯 입매를 비틀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 네가 제일 잘 알 거 아니야. 우리 다 버리고 그 새끼 집에서 잘 먹고 잘살더니 인제 와서 동정이라도 하려고?”

“…….”

아무래도, 근래에 내 얼굴빛이 지나치게 좋았나 보다. 창립 기념식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내가 잘 지내고 있다고 가정하는 걸 보면.

“아니면 뭐, 착한 척 가식이라도 떨러 왔어?”

“그런 게 아니라…….”

“씨발. 솔직히 너도 잘됐다고 생각하잖아. 어차피 넌 그 새끼랑 결혼할 거니까……!”

“민재야.”

우선, 차분히 민재의 말을 끊었다. 고작 이 정도 같잖은 도발에 발끈할 만큼 인내심이 모자라지 않았다. 실제로 나는 권이도의 집에서 잘 먹고 잘살고 있는 게 맞으니까. 다만, 이 지긋지긋한 말씨름을 반복해야 한다는 게 피곤해서 그랬지.

“내가 왜 약혼했는지 너도 알잖아.”

“…….”

머리가 있다면 모를 수가 없었다. 내게는 아무런 목적도 없고, 나는 단지 오메가 구실을 하기 위해 권이도와 약혼했다는 걸.

“그리고 결혼할지 안 할지는 내가 아니라 그 사람한테 달렸지.”

기분은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그냥, 모든 게 예정된 일처럼 느껴졌다. 정해진 수순에 따라 진행된 것처럼 매 순간순간 기시감이 들었다. 아버지가 구속되었다는 기사엔 충격을 받았지만,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은 대부분 익숙하기만 했다.

“동정하러 온 게 아니고 걱정돼서 온 거야. 놀리러 올 만큼 시간이 많지도 않고, 착한 척 가식 떨 만큼 이 일을 자세히 알지도 못해.”

“…….”

“꼴 좋다고……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겠어.”

민재가 재미있는 건, 내게 폭언을 퍼부으면서도 그게 폭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 기분이 상했으리라고 짐작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구 튀어나오는 감정을 참지는 않는다. 그런 주제에 내가 조금만 정색해도 입을 꾹 다문 채 눈치를 살피곤 했다.

“가족들한테 일이 생겼는데 당연히 와봐야지.”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상식적인 대답이었다. 차라리 어리광을 부리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민재의 심기를 거스를 게 분명해 입에 올리지 않았다. 민재는 잠깐 고개를 푹 숙였다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가족?”

주먹 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하, 헛웃음을 내뱉은 민재가 미친 사람처럼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시선을 들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호적에도 없는 네가 내 가족이라고?”

“…….”

찬물을 끼얹은 기분이었다. 갑작스레 밀려든 현실감이 간신히 유지하던 평온함을 마구 뒤집어 놨다. 민재는 지금껏 봐왔던 그 어떤 모습보다 단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야.”

“…….”

“너랑 나는 남이야.”

남. 그 한마디가 왜 이리 마음에 남았을까. 여태 그 사실을 모르지도 않았는데, 이 모든 것들이 지독하단 생각이 들었다.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던 머릿속이 민재의 한마디로 벌거벗겨진 기분이었다.

“가서 피검사를 하건 아니면 서류를 떼건, 너랑 나는 남이라고. 알아들어?”

민재의 말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틀린 데가 없었다. 나는 아버지의 호적에 올라가 있지 않고, 법적으로 우리가 가족임을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은 아무것도 없다. 그 넓은 집의 조그만 방 하나는 얻었을지언정, 고작 서류에 올라가는 한 칸은 내게 내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딴 게 무슨 가족이라고…….”

그런데 그걸, 민재도 알고 있었구나. 내가 정말 완전한 타인이라는 걸 그 또한 모르지 않았구나. 나조차 스무 살쯤에야 알게 된 걸, 그는 언제부터 알고 있던 걸까.

나는 단 한 순간도 그들의 가족인 적이 없었다. 외면하려야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 아득한 현기증이 되어 돌아왔다. 그래서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애써 차분한 척 입을 열었다.

“민재야, 형이…….”

“형, 형, 씨발 그놈의 형!”

그런 내게 민재는 버럭 소리치며 제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분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신경질적인 반응이었다. 부스스하게 흐트러진 머리칼 너머 서러움에 젖어 든 두 눈이 보였다.

“제발 그 좆같은 소리 좀 그만해!”

“…….”

아무래도, 술기운이 오르긴 오르는 모양이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빨개진 두 눈은 단순히 감정이 북받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피로와 취기가 섞여 만들어 낸 감정적인 얼굴이면 모를까.

“너 일부러 그러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뭐만 하면 일부러 형 소리 하는 거, 그러면서 은근히 눈치 주는 거, 그걸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쉬어 빠진 목소리가 귓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렁그렁 차오른 눈물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민재의 눈가에 매달려 있었다. 그는 어금니를 악문 채 그간 쌓아 놨던 설움을 토해 냈다.

“내가 너 좋……!”

“민재야.”

목소리가 차갑게 깔렸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입술 틈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나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비스듬히 고개를 돌렸다.

“거기까지 하자.”

“…….”

무거운 침묵이 우리 사이에 내려앉았다. 민재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그런 걸 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갑갑한 목을 매만지며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내가 여기 있는 건 네가 내 동생이라서야.”

만약 우리가 정말 남이었다면, 나는 권이도를 두고 호텔로 오지 않았을 거다. 그의 집에서, 그가 마련해 준 회사에 다니며, 하루하루 평온한 일상을 반복했겠지. 민재가 내 가족이니까, 그래도 한때 친근하게 굴던 동생이니까, 내가 이곳에서 민재와 대화하고 있는 거다.

“우리가 가족이 아니면 내가 네 어리광을 들어 줄 이유도 없어.”

냉정하게 말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다. 이게 민재에게 얼마나 잔인한 말로 들릴지도. 그러나 내가 그어 놓은 선이 엉망으로 지워지기 전에 한 번은 단호하게 밀어낼 필요가 있었다.

“민재 네가 날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는 있는데.”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가만히 민재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커다랗게 뜬 눈이 덜컹 흔들렸다. 최대한 담담히 말할 생각이었건만, 그 표정을 보는 순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너, 정말 다시는 나 안 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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