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Complete Strangers(1)
해신금융그룹은 아버지의 아버지 때부터 이어져 온 기업이었다. 비록 한때는 전도유망한 기업으로 손꼽혔으나 현재는 하락세에 접어들어 무너져가는 추세였다. 실적은 말할 것도 없었고, 이미 있는 고객을 유지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망하리라고, 해신은 그러한 평가를 받았다. 주가가 그렇게 폭락했는데, 주주들의 민심이 좋을 리도 없었다. 이미 가라앉기 시작한 배였고 배 안에 차오르기 시작한 물을 빼낼 방법도 없다.
당연히 나 또한 기업의 미래가 그리 밝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최후의 수단으로 나를 약혼시켰지만, 권이도와의 계약은 순탄하지 못한 모양이었으니. 불과 몇 달 전까지 본부장으로 일했던 나는, 해신의 재정 상태와 자금 흐름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단 말이다.
-오늘 아침 정철호 해신금융 회장이 구속됐습니다. 정 회장은 549억여 원에 달하는 거액의 배임, 횡령 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을 예정입니다. 현재 추가 탈세 혐의가 의심되는 상황으로, 내부 고발에 따르면…….
기사는 쉴 새 없이 터졌다. 도무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부채, 다시금 수면 위로 떠 오른 갑질 논란과 속속들이 밝혀지는 비리들. 아버지가 행한 불법적인 일들이 한 번에 터져 나왔고, 내부에서 끊임없이 폭로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사실, 이상함을 모르고 있었다면 거짓말이다. 아버지와 몇몇 임원들이 돈 장난을 친다는 건 이미 오래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다. 감히 말을 얹을 수 없는 위치인데다,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 입 다물고 있었을 뿐.
-또한 정 회장은 근로자들에 대한 임금 및 퇴직금 등 총 200억 원 상당을 가로챈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변호 측은 글로벌 금융 위기의 여파로 주장하고 있으나 검찰은 이에 대해…….
그러나 내가 알고 있던 건 아버지가 저지른 일의 3할도 되지 않았다. 보통의 기업도 아니고 무려 금융권인데. 무엇보다 투명해야 할 기업에서 부조리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뇌물 수수는 물론, 불법적인 비자금 조성까지. 개중엔 정말 관계자가 아니면 모를 일도 있었기에, 이 고발의 뿌리가 굉장히 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현재 금융 당국에서는…….
“이태성 씨, 뉴스 꺼도 됩니다.”
“……예, 대표님.”
뚝, 목소리가 끊기고 차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나는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카 시트에 머리를 기댔다. 떠오르는 생각이 산더미같이 많았으나, 그중 무엇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건 없었다.
아버지가 구속됐다. 오늘 아침 접한 소식은 반복되던 일상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것이었다. 직원의 노트북으로 기사를 보는 순간, 나는 뒤통수를 강타하는 충격과 함께 여러 가지 기억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어디 가셨어요?’
그리 좋지 못하던 어머니의 안색. 유독 까칠하던 민재와 한참이나 자리를 비웠던 아버지. 창립 기념식 날 보았던 흩어진 퍼즐 같은 장면들이 차츰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얼굴이…… 많이 좋아졌구나.’
제아무리 하루아침에 터진 일이라고 한들 내부에서 그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날 가족들의 안색이 이상했던 것도, 이러한 소식을 미리 들었기 때문일 거다.
‘세진이 너 따라오거라.’
그런데 왜, 내게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을까. 해신의 상태를 내게 언질조차 주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말할 수 있는 기회가 그렇게 많았는데, 아버지는 왜 나를 통해 권이도에게 매달리지 않았을까.
‘무슨 일 있는지는 아버지한테 직접 들어. 그 망할 새끼가 입막음을 단단히 시켜 놨으니까.’
뒷덜미가 서늘하게 식었다. 민재가 했던 말이, 지금의 상황과 무관하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권이도가 얼굴조차 못 볼 만큼 바빴던 게, 어쩌면 민재가 했던 말과 상관이 있지 않을까.
‘환심을 사야 하거든요.’
“…….”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빠르게 바뀌는 차창 풍경이 어지럽게 흐트러진 내 머릿속 같았다. 섣부른 추측은, 이로울 게 아무것도 없는데. 하지만 지금의 짐작들이 단순한 의심에 불과하지만은 않았다.
“대표님, 도착했습니다.”
나는 차가 멈추자마자 내가 먼저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차고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로 향할 때는 거의 뛰듯이 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고작 한 층을 올라가는 그 짧은 시간이 억겁처럼 마냥 길게만 느껴졌다.
“왔어요?”
현관을 열고 들어갔을 때, 권이도는 늘 그랬듯 나를 마중 나와 있었다. 오늘은 학원에 다녀오지 않았음에도 나보다 먼저 퇴근한 모양이었다. 홈웨어가 아닌 정장 차림인 걸 보면, 아마 그 또한 귀가한 지 얼마 안 됐겠지.
심장은 놀라우리만치 차분했다. 긴장이 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화가 난다거나 하지도 않았다. 이미 한 번 겪어 본 일처럼, 이 모든 상황에서 데자뷔가 느껴졌다.
“……권이도 씨.”
나는 느리게 운을 떼며 그와 시선을 맞췄다. 권이도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 없는 얼굴이, 내가 할 뒷말을 이미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권이도 씨가 그런 겁니까?”
질문을 건네는 순간에는,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답을 듣기도 전에 내 예상이 맞았다는 확신이 생겨서. 여전히 올곧은 그의 시선에 미동조차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이 허무해져서.
“늦었네요.”
권이도는 담담한 말투로 그렇게 대답했다. 기품 있는 목소리가 귓가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오전 중에 퇴근할 줄 알았거든요.”
“…….”
긍정도, 부정도 표하지 않았다. 변명을 건네지도 않았고, 이유를 설명해 주지도 않았다. 모르는 척 잡아뗄 생각 따위 처음부터 눈곱만큼도 없었나 보다.
“……왜.”
약혼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게 그래서일까. 꼬박꼬박 반지를 빼고, 이유 모를 선을 유지한 게 그런 이유일까. 아버지가 구속되면 그 아들인 내게도 여파가 있을 테니, 약혼자인 제게도 피해가 올까 봐.
“왜 그러셨습니까?”
의도치 않았는데 말끝이 가늘게 떨렸다. 나는 목에 힘을 준 채 천천히 숨을 골랐다. 머리로는 그에게 돌아갈 이득 따위를 열심히 계산하면서.
“권이도 씨한테…… 아니, 선호그룹에 아무런 이득도 없을 텐데.”
권이도는 사업가였고, 철저하게 계산적인 사람이었다. 수지가 맞지 않는 행동은 웬만해서 하지 않는 편이다. 타 기업에서 비리를 저지르건 말건, 그가 직접 나서서 손을 쓸 이유가 없단 말이다.
“대체 왜…….”
“정세진 씨.”
그가 차분히 내 말을 끊었다. 평소에도 늘 불리는 이름이 오늘따라 유독 낯설게 느껴졌다. ‘정세진.’ 그렇게 부르는 목소리가 권이도의 음성에 겹쳐 들렸다.
“나는 내 걸 빼앗기는 것도 싫어하지만, 내 걸 건드리는 건 더 싫어합니다.”
아버지가 그의 심기를 건드렸던 걸까.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가늘게 흔들렸다. 파르르, 눈꺼풀을 떠는 내게 권이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덧붙였다.
“내 사람이 길바닥에 넘어져서 다쳤으면 다시는 그럴 일이 없게 해야죠.”
“…….”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가 하는 말이 단어 하나하나 쪼개서 인식됐다. 내 사람. 그리고 길바닥. 느리게 돌아가는 머리에 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길바닥에서 넘어졌습니다.’
고작 그거 때문에?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논리였다. 고작, 고작 그거 때문에. 뺨 하나 맞고 돌아왔다고 아버지를 벼랑 끝에서 내몰 수는 없었다.
“……넘어진 사람이 조심하면 되는 일입니다.”
주먹을 꾹 쥔 채로 그에게 얘기했다. 그는 무덤덤한 얼굴로 가볍게 되물었다.
“뭐하러 그럽니까?”
“…….”
“그냥 길바닥을 없애 버리면 되는데.”
소름 끼칠 만큼 무미건조한 말투였다. 고압적인 시선은 약혼식 날 보았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권이도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나긋이 얘기했다.
“쉬운 길을 놔두고 멀리 돌아가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나는 무어라 대꾸하는 대신 살짝 시선을 내리깔았다. 목까지 잠근 단추, 그리고 단정히 맨 넥타이. 잘 차려입은 정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래서 지금…….”
이 기분을 뭐라고 하면 좋을까. 말을 하면 할수록 머릿속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여전히 울리지 않는 핸드폰이, 그리고 내 반응을 살피는 그의 시선이, 이 모든 게 지독하리만치 무거웠다.
“저를 위해 그러셨다는 겁니까?”
이런 건 복수라고 부르면 안 된다. 난 단 한 번도 이런 식의 결과를 원하지 않았다. 만약 나를 위해서라고 말한다면 그건 핑계에 불과하다고 반박할 생각이었다.
“원래 망했어야 할 기업입니다.”
“…….”
“나는 그 시기를 앞당겼을 뿐이고.”
권이도는 얄미울 정도로 당연한 말을 했다. 늦건 빠르건, 언젠간 무너질 기업. 친절히 그 사실을 되짚어 준 것이다.
“원망할 상대가 필요하면 기꺼이 되어 주겠지만, 정세진 씨도 날 욕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겠죠.”
“……하.”
작게 탄식이 나왔다.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리고 앞니로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기분이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이상한데, 정작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말없이 등을 돌렸다. 이런 기분으로는 도저히 그와 한집에 있을 수 없었다. 김 실장에게 연락도 넣어야 했고,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사태 파악도 필요했다. 본가는, 아마 기자들로 가득하겠지만. 어떻게든 가족들의 얼굴을 봐야만 했다.
“세진아.”
그런데 문고리를 잡는 순간, 뒤에서 나직한 부름이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움찔하며 잠깐 걸음을 멈췄다. 가라앉은 음성이 들릴 듯 말 듯 조그맣게 전해졌다.
“너만은 내 편을 들어 주기로 했잖아.”
“…….”
비어 있던 왼손을 가볍게 그러쥐었다. 짙게 남았던 반지 자국은 그사이 많이 흐려진 상태였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를 뒤로한 채 현관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쾅 닫힌 문은 다시는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 *
대문을 나서자마자 김 실장에게 연락해 나를 데리러 오라고 부탁했다. 권이도에게 받은 차가 있었지만 뻔뻔하게 그걸 가지고 움직이고 싶진 않았다. 혹여나 전화를 받지 못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김 실장은 곧장 차를 가지고 왔다.
“아버지는요?”
“조사받고 계십니다.”
김 실장은 담담한 대답과 함께 차를 출발시켰다. 어디로 모시냐고 묻지 않는 걸 보면, 어련히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갈 모양이다. 나는 눈가를 꾹꾹 누르며 겨우겨우 한숨을 삼켰다.
“……김 변은 뭐라고 합니까?”
“증거가 확실해서 빠져나올 구멍이 없답니다. 금액적으로 다 물어내기엔 재정 상태가 좋지 않고, 최악의 경우 징역살이를 할 수도 있습니다.”
깔끔하고 간단한 설명이었다. 요컨대 이번엔 정말 방법이 없다는 거다. 그 몸값 비싼 김 변호사가 포기할 정도면 이미 끝난 얘기였다.
“관련 임원들은 벌써 조사받고 있고 저도 내일쯤엔 출석해 봐야 합니다. 사옥은 물론이고 본가도 압수 수색에 들어가서 사모님을 포함한 가족분들은 호텔에 계십니다.”
“어머니는 괜찮으세요?”
나약한 사람은 아니지만, 사회적인 모욕엔 예민한 분이었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심각하다면 정신적인 충격으로 쓰러졌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게다가 배우자 신분으로 함께 조사를 받아야 할 수도 있었다.
“예, 회장님께서…….”
김 실장은 그렇게 운을 떼며 흘긋 내 눈치를 살폈다. 왜 그러나 싶었는데 이어진 뒷말을 듣자마자 헛웃음이 나왔다.
“가족들에게는 피해 가지 않도록 조치해 놓으셨습니다.”
“…….”
누가 뭐래도, 아버지는 가족을 끔찍이 아끼는 사람이었다. 민재가 망나니처럼 굴어도 기사 한 줄 나지 않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이제 고작 열아홉인 서영이에게도 혼사가 들어오지만, 칼같이 쳐내는 이유도 그래서였다.
“……지금 터진 기사 말고 더 터질 건 있습니까?”
“많습니다. 급하게 막은 기사도 있는데, 늦어도 이번 주 내로는 다 터질 것 같습니다.”
이런 때조차 김 실장은 사무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요란스럽게 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크게 피곤한 티를 내지도 않았다. 눈 아래가 움푹 들어가긴 했지만, 딱히 정신적인 타격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김 실장님.”
“예, 도련님.”
나는 미묘한 위화감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가 이상한지는 모르겠는데, 무언가 자꾸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냥, 우선은 가장 처음 궁금했던 부분을 묻기로 했다.
“왜 저한테 연락 안 하셨어요?”
술김에 김 실장을 부른 게 불과 몇 주 전이었다. 그때도 이미 내부에선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했을 것이다. 언질을 줄 생각이었다면 기회는 충분히 많았단 말이다.
“도련님이 하실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
“본부장으로 계셨을 때면 모를까, 지금은 도련님과 무관한 일입니다.”
무력감……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 정확히는 소외감이라고 해야겠다. 내가 해결해 줄 부분이 아니니 내게 말조차 전하지 않았다는 게, 모든 부분에서 나를 배제하려는 것으로만 보였다.
“말씀을 섭섭하게 하시네요.”
“……죄송합니다.”
사과는 할지언정, 그는 변명을 덧붙이진 않았다. 나는 창밖을 내다보며 다시금 한숨을 삼켰다. 답답한 만큼 한숨을 쉬었다간 정말 바닥에 구멍이라도 생길 것 같다.
한동안,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나는 창밖에 스치는 풍경을 바라보며 울렁거리는 속을 정리했다. 조금만 생각을 이어 가면 그 끝에 떠오르는 건 권이도의 얼굴이었다.
“……내부 고발자는 다 찾았습니까?”
이번 일은 권이도 한 사람만의 짓은 아니었다. 그와 내통해서 여러 사람이 힘을 모은 결과겠지. 그 짧은 사이에 어떻게 기반을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많고 많은 사람 중 필요한 인원을 솎아 내 원하는 바를 이룬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성격상 김 실장에게 우선적으로 지시했을 게 이거였다. 비리를 폭로한 사람이 누구인지, 제게 피해를 준 사람이 누구인지 추려 내는 것. 아마 어떻게든 찾아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불이익을 줄 터였다.
“아뇨, 못 찾았습니다.”
“……못 찾았다고요?”
“예, 아마 찾는다고 해도 의미가 없을 겁니다.”
김 실장은 여전히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내가 퍼뜩 놀라 그를 돌아보자, 그가 잠깐 말을 멈췄다. 그러더니 사뭇 심각한 어조로 운을 뗀다.
“……도련님.”
“네.”
백미러 너머로 김 실장을 바라봤다. 테가 가느다란 안경과 피곤이 묻은 눈매가 보였다. 그는 똑바로 정면을 응시한 채 입을 열었다.
“해신그룹 경영권이 넘어갈 것 같습니다.”
“…….”
움찔, 손가락을 떨었다. 너무 놀라는 바람에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아버지가 구속됐다고 해서 회장직을 내려놓는 게 아닐 텐데, 김 실장의 말이 이해 가지 않았다.
“도련님이 관둔 몇 달 사이에 재정 상태가 많이 안 좋아졌습니다. 경영난도 심각하고 이번 일로 윗선이 대거 물갈이될 예정입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대기업은 절대 한순간에 무너지지 않는다. 금이 간 독처럼 서서히 물이 빠지다가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 되면 그제야 밑바닥이 드러나는 식이었다. 내가 일하고 있을 때도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지만, 이렇게 한순간에 뒤집힐 일은 아니었다.
“제가 관둔 지 고작 두 달입니다. 그 잠깐 사이에 어떻게…….”
“도련님이 잘 막고 계셨던 겁니다. 본부장직을 내려놓으면서 막고 있던 부분이 뚫린 거고요. 아마 회장님께서 사퇴하시면 주주 총회가 열릴 겁니다.”
“……아니.”
무어라 반박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내가 기를 쓰고 막았던 구멍이 그 잠깐 사이에 터져 버린 것이다. 더 자세히 이야기해 달라고, 언제부터 그랬냐고. 그리 물으려는 내게 김 실장이 사무적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리고 선호 측에서 해신을 인수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