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Bonheur quotidien(3)
맨 처음, 팀원들을 이곳에 데려왔을 때도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었다. 다들 눈치만 살피고 메뉴는 고르지도 못한 채 바짝 긴장해 있던 것이다. 건물부터 고풍스러운 한옥 구조인 데다, 이래저래 쓸데없이 격식 있는 분위기를 풍겨서 그런 모양이었다.
이럴 땐 딱히 방법이랄 게 없었다. 그냥 내가 먼저 나서서 고기를 굽고, 아무렇지 않게 구는 게 최선이었다. 어차피 음식을 좀 먹다 보면 분위기는 부드럽게 풀리기 마련이니까.
“어어, 제가 구울게요!”
역시나, 내가 집게를 들자마자 직원 하나가 몸을 일으켰다. 눈치만 보던 다른 테이블도 하나둘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윤 팀장은 묵묵히 있다 말고 슬그머니 질문했다.
“……회식을 항상 이런 데서 하셨어요?”
“뭐…… 늘 그런 건 아니고요.”
사실 그때그때 메뉴만 바뀔 뿐 전체적으로 비슷하긴 했다. 가게는 주로 내가 고르고, 계산도 항상 내가 했으니까. 어쩌다 한 번 맛있는 걸 사줄 기회이니, 고생한 만큼 좋은 걸 먹이고 싶었다.
“그리고 첫 회식에 점수 따기엔 소고기가 제일 좋잖아요.”
장난스레 말하자 윤 팀장이 실소를 터뜨렸다. 그래서 여긴 얼마냐고 묻기에, 그냥 생각보다 비싸지 않다고만 대답했다. 나도 확실히는 몰랐고, 나를 대신해 내 카드로 계산했던 김 실장만이 정확한 금액을 알고 있을 것이다.
“대표님, 한잔 받으시죠.”
그 잠깐 사이에 주변이 시끌벅적하게 변해 있었다. 윤 팀장은 가장 먼저 내게 술병을 내밀었다. 종류별로 시킨 술 중에서 하얀 병에 붓글씨로 이름이 적힌 도수 높은 소주였다. 거절할까 하다가, 한 잔쯤은 받아 두는 게 좋다는 생각에 술잔을 내밀었다.
쪼르륵, 투명한 액체가 술잔을 채웠다. 나는 윤 팀장의 잔도 채워 주고 대충 분위기에 맞춰 건배까지 했다. 처음엔 어색해하던 직원들도 다 익힌 고기를 먹자마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와, 고기가 살살 녹네.”
“대표님, 여기 너무 맛있는데요?”
맛있는 술과 음식은 그 무엇보다 좋은 이야깃거리였다. 그날그날 질 좋은 한우를 들여오는 식당이니만큼 고기 맛은 두말할 것 없이 훌륭했다. 새삼 기획팀 팀원들이 떠올랐지만, 직원 하나가 불쑥 술병을 내미는 바람에 생각이 깨져 버렸다.
“대표님! 저도 한 잔 따라드리겠습니다!”
“아, 저는…….”
아직 윤 팀장이 주는 술도 마시지 않았기에 슬쩍 술잔을 가렸다. 아무도 내게 강권하지 않고, 거절하려면 충분히 거절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런데 막상 뒤로 빼자니 직원의 시선이 너무도 초롱초롱했다.
“잠시만요.”
그래서 그냥 잔에 있던 술을 꿀꺽 삼켜 버렸다. ‘오오!’하고 감탄사를 흘린 직원이 내가 내민 잔에 쪼르륵 술을 채워 줬다. 잔뜩 신나 하는 모습을 보니 적당히 맞춰 줘도 될 것 같았다.
“대표님, 저도요!”
“제 잔도 받아 주십쇼!”
분위기가 무르익는 건 금방이었다. 사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적당히 계산이나 해주고 빠질 생각이었다. 대표와 직원이라는, 가뜩이나 불편한 위치일 텐데. 눈치 없이 함께 어울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더, 직원들이 적극적으로 나왔다. 오늘 처음 본 걸 믿을 수 없을 만큼, 술이 들어가자마자 친근하게 바뀐 것이다. 경영지원팀은 물론 다른 테이블에 있던 직원들까지, 자리를 옮겨 가며 내게 술이나 고기를 권하기 시작했다.
“대표님, 제가 쌈 하나 싸드릴게요!”
“아뇨…… 그건 괜찮습니다. 여러분 많이 드세요.”
웬만한 술은 받아 마시고, 고기를 주는 건 대부분 거절했다. 나중에는 살짝 취기가 오르려고 해서 겉에 입은 재킷을 벗어 옆에 내려놨다. 술을 마시는 게 대체 얼마 만인지. 알싸한 감각이 영 달갑지 못했다.
“근데 대표님 향수 뭐 쓰세요?”
“어, 맞아. 저도 여쭤보고 싶었는데.”
알딸딸하게 취한 직원들은 아까보다 더 편안하게 말을 붙였다. 지금 물어보는 건, 아마 제품개발팀에 속한 조향사들이었던 것 같다.
“들어오시자마자 좋은 냄새가 나더라고요.”
지금은 술을 마셔서 모르겠다며, 직원 하나가 냄새 맡는 시늉을 했다. 향이 별로 진한 향수는 아니었는데, 원체 후각이 좋은 모양이다.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오늘 뿌리고 나온 향수를 설명해 줬다.
“G사에서 나온 향수인데…….”
놀랍게도, 그들은 이름을 듣자마자 어떤 제품인지 알아차렸다. 마니아층에게 유명한 제품인지, 한 직원은 연도별로 컬렉션을 모았다며 사진까지 보여 줬다. 다른 한 직원은 가격이 너무 비싸 고민하다가 시기를 놓쳤다고 했다.
“대표님, 그거 시계는 어디 거예요?”
“어디 건 줄 알면 살 수 있어요?”
“당연히 못 사지.”
“봐봐, 근데 뭘 물어봐.”
나는 대답하지 않았는데, 저들끼리 키득거리며 대화가 마무리됐다.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는 모습이 무척이나 친해 보였다. 지금 친해진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 전 이만 가봐야 할 것 같군요.”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시간이 너무 지체됐단 사실을 깨달았다. 차에서는 이태성이 기다리고, 집에서는 권이도가 기다릴 텐데. 이제는 슬슬 돌아가야 할 때였다.
“대표님 벌써 가세요?”
“조금만 더 있다 가세요!”
“같이 노래방 가요, 노래방!”
내가 일어서자마자 얼큰하게 취한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내일이 되면 어떨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처음과 같은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미안한 얼굴로 웃으며 재킷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더 먹고, 혹시 2차 갈 거면 영수증 끊어서 내일 나한테 줘요.”
다행히 직원들은 곤란할 정도로 나를 붙잡지는 않았다. 계속 아쉬운 티를 내긴 했지만, 마지막엔 조심히 들어가시라며 꾸벅꾸벅 인사를 건넸다. 오늘 감사했다는 말을 끝으로, 나는 시끌벅적한 가게를 나와 바깥으로 향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이제는 꽤 따듯해진 밤공기가 나를 맞이해 줬다. 웅웅거리던 소음이 사라진 터라 알싸하게 올랐던 술기운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얼굴이 홧홧거리는 것 같아서, 들고 있던 재킷을 굳이 입지는 않았다.
“후우…….”
나는 나직이 숨을 토하며 고개를 두어 번 털어 냈다. 주머니를 뒤적여 핸드폰을 꺼내고, 익숙한 숫자 열한 개를 눌러 전화를 걸었다. 술자리를 나왔으니, 나를 데리러 오라고 말하기 위해서였다.
뚜르르, 신호음이 울리는 시간은 평소보다 조금 더 길었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지. 그리 생각할 즈음에야 길게 이어지던 신호음이 뚝 끊겼다. 그리고 전화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
멈칫, 몸을 똑바로 세웠다. 인상을 찌푸리며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자 ‘김 실장’이라는 이름이 나타나 있었다. 습관처럼, 이태성이 아닌 김 실장에게 연락한 모양이었다.
-여보세요, 도련님?
“아…… 김 실장님.”
-……술 드신 겁니까?
“…….”
눈치도 빠르지. 딱 한 마디 했는데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별로 취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혀가 꼬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예, 마시긴 했는데 별로 안 마셨습니다.”
-웬일로 술을…… 무슨 일 있으십니까?
김 실장의 목소리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나는 주머니에 한 손을 넣은 채 길게 목울대를 울렸다. 습관처럼 왼손 엄지로 약지를 매만졌으나, 원래라면 만져져야 할 반지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김 실장님.”
-예.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이태성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 차 안에서 기다리다가, 내가 나오는 모습을 보고 데리러 온 모양이었다. 나는 가만가만 반지 자국이 남은 손가락을 매만지며 느리게 입꼬리를 올렸다.
“회식을 했어요.”
-회식…… 말씀입니까?
“네, 이번에 일을 다니게 돼서.”
-…….
“친해지려고 몇 번 술잔을 받았더니, 평소보다 좀 마셨네요.”
가까이 다가온 이태성이 의아한 눈을 해보였다. 누구냐고 묻진 않았고 차에 있겠다며 다시 걸음을 옮긴다. 나는 느릿느릿 눈을 깜박이며 어두컴컴해진 주변을 둘러봤다.
“그래서 기사한테 연락한다는 게, 실수로 김 실장님한테 걸었습니다.”
-…….
“습관이 참 무섭네요.”
김 실장은 잠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럼 쉬라고 말하고 끊을 생각이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핸드폰 너머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의도와는 달리, 결연한 말투였다.
-모시러 가겠습니다.
* * *
부드럽게 움직이는 차 안에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나는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조그맣게 들리는 엔진 소리, 이따금 도로에서 들리는 소음과 자동차 특유의 엷은 가죽 냄새까지.
“피곤하시면 좀 주무셔도 됩니다.”
그 익숙한 감각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그보다 더 익숙한 말을 내뱉었다. 나는 바람 빠지듯 웃음을 흘리며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백미러에 비쳐 보이는 눈매는, 이태성이 아닌 김 실장의 것이었다.
“그 말 오랜만에 듣네요.”
“…….”
김 실장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얇은 안경알 너머로 그의 눈이 마치 웃는 것처럼 보였다. 지나가듯 짧은 변화였기에 정말 웃는 건지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모시러 가겠습니다.’
아까, 그렇게 말한 김 실장은 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가만히 서 있다가, 이태성에게 다가가 이렇게 이야기했다. 미안하지만, 데리러 올 사람이 있으니 오늘은 이만 퇴근해도 좋다고.
‘전무님이 오시는 겁니까?’
이태성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가 내가 고개를 젓자 미묘한 표정이 되었다. 마치 내가 바람이라도 피운다는 양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살펴본 것이다. 나는 결백하단 의미로 어깨를 으쓱했지만, 그는 그러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무뚝뚝하게 얘기했다.
‘같이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김 실장이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은 이보다 더 어색할 수 없는 만남을 가졌다. 서로에게 아무런 인사도 하지 않았고, 그냥 나를 사이에 둔 채 시선만 교환했다. 나도 서로를 소개해 주진 않았기에 아마 이름조차 모른 채 스쳐 지나갔을 터였다.
‘이제 퇴근하셔도 됩니다.’
‘……뒤에서 따라가겠습니다.’
‘그럴 필요…….’
‘전 기사가 아니라 대표님 경호원입니다.’
김 실장도 참 대단하지. 대놓고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는데도 변명 한마디 하지 않았다. 아니, 이태성에게 누구냐고 묻지도 않은 게 더 신기하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그러한 연유로 나는 김 실장이 운전하는 차에 올랐고, 우리 뒤에는 이태성이 운전하는 차가 따라오고 있었다. 언젠가 권이도가 운전을 잘한다고 그랬던 말대로, 소리 없이 따라붙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경호가 아니라 미행을 당하는 기분이었으나, 아무렴 뭐 상관은 없었다.
“제가 그 고깃집에 있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본부장님 회식 때마다 따라다닌 게 누구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맞다, 그랬었지. 예약부터 계산까지 항상 김 실장이 도맡아 해줬었다. 회식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내가 어디에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만했다.
“괜히 죄송하네요. 집에서 쉬고 계셨을 텐데.”
“아뇨…… 회사에서 잔업하고 있었습니다.”
이걸, 쉬고 있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내가 그만둔 뒤에도 김 실장은 참 바쁘구나 싶다. 그래도 일이 좀 줄었을 줄 알았더니, 오히려 아버지를 보필하며 이런저런 일거리가 늘어났나 보다.
“김 실장님.”
“예.”
“저 어디서 일하는지 안 물어보세요?”
그가 흘긋 백미러로 흘긋 돌아봤다. 그러더니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감흥 없이 물어 왔다.
“어디서 일하게 되셨습니까?”
엎드려 절받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말할 구실이 생겼으니 괜찮았다. 나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눈을 감고 중얼중얼 이야기했다.
“권이도 씨가 취미로 하는 향수 사업이랍니다. 좀 더 키워서 나중에 상장까지 할 건가 본데…… 저한테 대표 자리를 맡아 달라고 하더군요. 오늘이 첫 출근 날이었습니다.”
“대표…….”
김 실장이 무심결에 내 말을 따라 했다. “출세하셨군요.” 그리 말하는 목소리조차 참으로 무뚝뚝했다. 누가 김 실장 아니랄까 봐, 장난처럼 하는 말조차 사무적이다.
“그리고…….”
나는 느리게 운을 떼며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빠르게 움직이는 밤 풍경이 아스라이 잔상을 남겼다. 스쳐 지나가는 불빛들을 보고 있노라니, 권이도와 함께 봤던 한강 풍경이 떠올랐다.
“회사 이름이 세진이래요.”
‘같이 한강이나 한 바퀴 돌고 올래요?’
내가 그 말을…… 누구한테 했더라. 머릿속이 몽롱해서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내가 한강에 가본 건, 딱 한 번 차를 선물 받았던 날밖에 없는데. 어렴풋이 떠오른 장면이 현실감 없었다.
“대체 누가 사명에 남의 이름을 붙이는지…….”
작게 중얼거리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온통 어두컴컴해진 시야가 내 속마음과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래서, 술을 즐기지 않는 건데. 취기가 오르면 기분이 제멋대로 들쑥날쑥했다.
“김 실장님.”
“예, 도련님.”
내가 몇 번이고 그를 불러도, 김 실장은 같은 대답을 들려줬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변하지 않은 것이었다. 문 집사와 김 실장. 단 두 명의 어른만이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은 태도를 고수했다.
“김 실장님이 보기엔…… 이 약혼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물어보지 않았을 것이다. 막연히 홀로 생각하고 결론을 내리지도 못한 채 마냥 품고만 있었겠지. 그런데 알코올에 마비된 뇌가 제멋대로 입술을 움직였다.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
“먼 미래에, 아니면 가까운 미래에…… 그때 내가 어디에 있을까 하고.”
차가 가만히 멈춰 섰다. 눈을 감고 있는 탓에 그저 신호에 걸렸겠거니 추측할 뿐이었다. 김 실장은 한참을 뜸 들인 뒤에야 느리게 운을 뗐다.
“저는…….”
실눈 뜬 시야로 그가 백미러를 통해 나를 보는 모습이 보였다. 역시나 신호등엔 빨간 불빛이 들어와 있었다. 깜박, 눈을 감았다가 뜬 그는 정면을 응시하며 뒷말을 이었다.
“적어도, 권이도 전무가 도련님을 버리진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목구멍이 바짝 옥죄였다. 멀미를 하는 것처럼 가슴 언저리가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숨죽여 속을 달래는 동안 김 실장은 차분한 목소리로 제 의견을 얘기했다.
“단순히 계약으로 약혼한 거였으면 도련님을 위해 그렇게까지 하진 않았겠죠.”
“……재미있는 말을 하시네요.”
픽 웃음이 나왔다. 취기는 물론, 잠기운까지 쏟아져서 머리가 생각을 이어 가는 속도가 느렸다.
“‘그렇게까지’라니.”
“…….”
“권이도 씨가 뭘 더 한 줄 알고.”
아무것도 모르는 김 실장이 쓰기엔 어색한 표현이었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설명을 보탰다.
“대표 자리를 줬다길래 드리는 말씀입니다. 회사 이름까지 그렇게 지었으면 말 다 했죠.”
잠깐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무언가 깊이 생각하기엔 여러모로 체력이 부족했다.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고, 김 실장도 무어라 더 말을 붙이지는 않았다.
집에 도착했을 때, 김 실장은 나를 차고에 내려 줬다. 김 실장의 차가 도착하자마자 자연스럽게 차고 입구가 열렸기 때문이다. 이태성이 미리 언질을 준 건지. 어쨌건 나로선 편하게 내릴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잔업 열심히 하시고요.”
나는 차에서 내려 문을 열어 준 김 실장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우리의 뒤를 쫓던 이태성도 차고 한편에 차를 주차한 뒤였다. 김 실장은 푹 주무시라는 말만 남기고, 운전석에 올라타 곧장 집을 빠져나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중에는 괜히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재킷은 아까부터 입지도 않았고, 목이 갑갑해서 단추도 두어 개 풀어 놨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나는 흠칫 놀라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야만 했다.
“…….”
“…….”
짙은 눈동자가 내 얼굴을 살펴봤다. 그려 놓은 것처럼 뚜렷한 이목구비가 그 어느 때보다 환상처럼 느껴졌다. 팔짱을 낀 채 나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 권이도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나직이 내뱉었다.
“늦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