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억의 끝에 (49)화 (49/131)

49화. Bonheur quotidien(2)

말문이 턱 막혔다. 혹시 일부러 이러나 싶었는데, 이태성은 정말 괜찮은 호칭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도무지 반박할 말이 없어서 그냥 한숨을 내쉬며 대답하고 말았다.

“말씀하세요.”

“다른 게 아니라…….”

나직이 운을 뗀 그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약간의 간격을 두고 여상스러운 투로 묻는다.

“이제 공방은 아예 안 가시는 겁니까?”

공방? 백미러로 이태성의 표정을 살폈다. 그냥 궁금할 수는 있어도,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내 일정을 궁금해하진 않았는데.

“네, 수업도 끝났으니까 이제 갈 일 없을 겁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그렇군요.”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거울로 그의 눈매를 보는 순간, 퍼뜩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니까 좀 더 살갑게 대하지 그러셨어요.”

“…….”

핸들을 움켜쥔 손이 순간 움찔했다. 뒤이어 흐르는 침묵엔 잔뜩 어색한 기색이 가득했다. 한참이나 말없이 있던 그는 차가 신호에 걸려 멈출 즈음에야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그 사람 얘기가 왜 나옵니까?”

그러니까, 숨기는 데 재능이 없는 사람이래도. 아닌 척하려면 좀 더 열심히 숨길 것이지.

“그 사람이 누군데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되묻자, 그가 핸들을 꾹 움켜쥐는 게 보였다. 자꾸 놀려 버릇하면 안 되는데, 반응이 재밌어서 괜히 건드리게 된다. 나는 소리 없이 웃음을 삼키며 넌지시 이야기했다.

“연애도 많이 해본 사람이 왜 그렇게 숙맥같이 굽니까.”

“…….”

이태성은 이번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라고 잡아떼는 것조차 어느 정도 뻔뻔한 성미여야 가능한가 보다. 묵묵히 운전에 집중하는 모습이, 요령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연애를 많이 해보진 않았습니다.”

차가 다시 출발하고, 그가 들릴 듯 말 듯 조그맣게 얘기했다. “남들만큼 해봤다고 했죠.” 그리 덧붙이는 핑계가 제법 귀엽게 느껴졌다. 나는 백미러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스물아홉에 남들만큼이면…… 꽤 많은 편인 것 같은데요.”

“본부, 대표님도 저랑 비슷하시지 않습니까.”

“전 연애 경험이 없어서요.”

이태성이 미간을 팍 찌푸렸다. 동시에 짙은 눈썹이 삐쭉 추켜 올라간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그는 아까보다 더 까칠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십니까.”

말만 존댓말이고 내용은 시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그렇다고 기분이 나쁘진 않았고, 그냥 조금 황당한 정도.

“제 말 안 믿으시네요.”

“예, 안 믿습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이 차에 올라탄 이후 처음으로 보는 단호함이었다. 이 나이 먹도록 누군가를 만난 적 없다는 게, 아무래도 이상했던 모양이다.

“진짭니다. 뭐하러 그런 거짓말을 하겠어요.”

나는 눈가를 찡긋하며 내 결백을 주장했다. 딱히 자랑거리도 아닌데 내가 왜 그를 속이려고 든단 말인가. 이태성도 그리 생각했는지, 인상을 찌푸린 채 떨떠름한 목소리를 냈다.

“눈에 차는 사람이 없으셨던 겁니까?”

“뭐…… 딱히 눈이 높진 않은데.”

눈이 높고 낮고를 따지기 전에 애초에 상대를 고르려고 한 적조차 없었다. 누군가 내게 호감을 보인 적은 있지만, 크게 설레거나 마음이 동하지도 않았다. 이걸 눈이 높다고 말하면야, 나로선 할 말이 없었지만.

“그런 것치곤 첫 상대가 전무님이시군요.”

“…….”

그 말에는 그냥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가 하는 게 연애인가.’라는 의문과 ‘이태성은 이 약혼의 전말까지는 모르는구나.’라는 깨달음이 함께 찾아왔다. 그렇지 않고서야 권이도를 내 첫 상대라고 일컬을 리가 없으니.

“권이도 씨가 좀 과분한 상대긴 하죠.”

픽 웃으며 흘린 말에 이태성은 곧장 입을 다물었다. 신호에 걸려 잠시 멈췄을 때, 잠깐 뒤를 돌아본 게 내게 보인 반응의 전부였다. 자연스레 대화는 거기서 끊겼고, 나는 의미 없이 다시 사업 계획서를 훑어봤다.

권이도가 내게 맡긴 회사는 높은 빌딩이 즐비한 거리에 있는 신축 오피스텔이었다. 척 보기에도 값깨나 나갈 것 같은 건물은 권이도의 집에서도, 그리고 해신금융 본사에서도 그리 멀지 않았다. 아마 선호그룹의 자본금이 아니었다면 이토록 좋은 위치에서 사업을 시작하진 못했을 거다.

이태성은 지정된 구역에 차를 주차하고 나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가 말하길, ‘Sejin’은 이 건물의 10층을 통으로 사용하고 있단다. 분명 인원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사무실 규모가 지나치게 과분하지 않나 싶다.

“도착하면 경영지원팀에서 나올 거라고 하셨습니다.”

이태성이 따라붙을 때부터 짐작했지만, 그는 운전부터 비서 역할까지 도맡아 할 모양이었다. 권이도에게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몰라도, 회사에 대해 나보다 더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설마 내가 일을 다니는 내내 이런 포지션을 유지하는 건지. 새삼 김 실장의 존재가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정세진 대표님?”

10층에 도착했을 땐 그의 말대로 경영지원팀에서 직원이 나와 있었다. 머리를 단발로 자르고 정장을 차려입은 여자는 나를 보자마자 환한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윤지영이라고 합니다.”

“정세진입니다.”

“윤 팀장이라고 불러 주세요.”

같은 윤 씨라 그런가. 어딘지 모르게 윤 대리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었다. 칼같이 자른 단발도 그렇고, 서글서글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도 그렇고. 그런데도 눈빛이 또랑또랑해서 일 처리 하나는 깔끔할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직원들한테 인사만 하시고 방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나는 윤 팀장을 따라 사무실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벽면에 큼직하게 창이 트인 내부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깔끔했다. 책상마다 파티션으로 구역이 나뉘어 있고, 구석구석 잘 관리된 화초 따위도 놓여 있다.

기존에 일하던 사무실도 나쁘진 않았지만, 역시 새로 지은 건물에는 비교가 되질 않았다. 해신은 연식이 오래된 만큼 사내 시설도 많이 낡은 감이 있었다. 리모델링을 하자고 제안하고 싶었으나, 아버지에게 씨알도 안 먹힐 게 뻔해서 굳이 입에 올리진 않았다.

“흠흠.”

내가 사무실 안에 들어서자 윤 팀장이 가볍게 헛기침해 주의를 끌었다. 아니, 딱히 시선을 끌 필요도 없긴 했다. 이미 자리에서 일어난 직원들이 한참 전부터 내가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한가득 쏠린 시선은, 마치 처음으로 본부장 자리에 올랐던 그때를 생각나게 했다.

“이쪽은 이번에 새로 오시게 된 정세진 대표님입니다.”

윤 팀장은 정중히 내 쪽을 가리키며 나를 소개해 줬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오기 전부터 이런저런 언질을 들었을 터였다. 나는 한창 본부장으로 일하던 그때처럼 사람 좋은 미소를 띤 채 주변을 쭉 둘러봤다.

“정세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조금 부담스럽다시피 박수가 터졌다. 경계심 반, 그리고 호기심 반. 나를 관찰하는 시선들도 예전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낙하산으로 맡은 직급엔 당연히 따라오는 반응이었으니, 이러한 상황이 불쾌하지는 않았다.

“이제 시작하는 단계지만, 앞으로 회사가 더 성장할 수 있으면 합니다. 아직 부족한 게 많으니 많이 배워 가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예의상 몇 마디를 덧붙이고 말이 길어지기 전에 인사를 마무리했다. 내가 오래 버티고 있어 봤자 직원들에게는 방해만 될 터였다. 친해지는 건 좀 나중으로 미루고, 오늘은 대충 얼굴도장만 찍으면 될 듯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대표님.”

대표님, 대표님. 아무래도 이 호칭에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나 보다. 이태성은 둘째치고 회사 사람들이 부르는 것까지 막지는 못할 테니까. 아마 시간이 지나면 지금처럼 민망하진 않을 터였다.

“여길 쓰시면 됩니다.”

윤 팀장이 안내해 준 방은 사무실과는 분리된 독립적인 공간이었다. 벽면은 불투명한 창으로 되어 있고, 벽면 가득 커다란 블라인드가 쳐져 있었다. 소파와 테이블, 책상과 책장. 기본적인 가구만 놓인 내부는 널찍한 창문 덕에 채광도 퍽 훌륭했다.

“그럼 필요하면 불러 주세요.”

윤 팀장은 제 역할을 마치자마자 곧장 자리로 돌아갔다. 이래저래 말을 붙이는 것보단 이편이 훨씬 편했다. 이태성까지 자리를 비켜 준 덕에(아마 옆에 딸린 비서실로 가는 듯했다) 넓은 방 안엔 어느덧 오로지 나 혼자만이 남게 됐다.

나는 창가로 다가가 멀거니 창밖을 내다봤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개미 떼처럼 조그맣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경영기획팀도 10층이었지. 그곳에서 보는 풍경도 이것과 비슷하지 않았나 싶다.

“여기선 얼마나 일하려나…….”

자격증을 따기까지 앞으로 대략 두 달. 그 후 내 손으로 직접 향수를 만들려면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거다. 모르긴 몰라도 생각보다 오랜 기간을 머물러야 할 게 분명했다.

현실감은 여전히 들지 않았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도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하게 느껴졌다. 예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어차피 이 모든 게 온전한 내 것은 아니었으니까.

‘내일은 일찍 들어올 테니까…….’

‘…….’

‘정 힘들면 전화라도 해요.’

세 번이었나. 그가 내 히트 사이클 주기를 정확히 알아차린 게.

향수를 만들어 준 후 그에게 모든 걸 물어볼 생각이었다. 이 약혼의 기간이 언제까지인지, 당신이 내게 진심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나에 관해 어떻게 그리 자세하게 알고 있는지.

기회를 위한 인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단순히 갈등을 피하기 위한 안주라고 해야 할까. 그 유예 기간에 어떤 이름을 붙이건 별로 상관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를 만난 이후 자꾸만 미래를 그리게 된다는 것 정도.

“…….”

창문에 대고 있던 손을 가볍게 그러쥐었다. 우습게도 잠깐 권이도를 떠올린 것만으로 그리운 기분이 되고 말았다. 오늘 집으로 돌아가면 그에게 사무실 이야기를 해줘야지. 마음에 쏙 든다고 얘기하며 좋은 자리를 마련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도 전할 생각이었다.

때로는 사소한 일상이 현재의 만족감을 극대화시키는 계기가 되곤 한다. 그와의 저녁 식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기분이 한결 좋아졌으니 말이다. 아버지의 아들로 사는 몇 년간,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평온함이었다.

* * *

처음 취임한 날이었기에 본격적인 업무는 얼마 되지 않았다. 주로 회사 시스템을 이해하는 데 시간을 들였고 간간이 직원들의 업무를 파악하며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정리했다. 자본이 있는 회사라 그런지, 내가 굳이 손을 쓰지 않아도 될 만큼 이미 체계가 잡혀 있었다.

점심에는 이태성에게 부탁해 직원들에게 점심을 사주라고 했다. 내가 끼는 건 좀 불편할 테니 카드만 쥐여 주고 나는 함께 나가지 않았다. 이태성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군말 없이 대표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을 무렵. 나는 하던 업무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첫날부터 늦게까지 일하면 직원들이 눈치를 살피느라 퇴근하지 못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대충 집에 갈 채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타이밍 좋게 이태성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 어디 가십니까?”

“슬슬 퇴근해야죠. 이태성 씨도 짐 챙겨서 나오세요.”

간단히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이태성은 의아한 얼굴로 두 눈을 깜박였다. 왜 그러나 싶어 그를 바라보자, 그가 넌지시 물어 왔다.

“회식 안 하십니까?”

“……회식?”

“예, 대표님 환영회 말입니다.”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환영회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단어였다. 회식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그건 직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고개를 저으려는데 이태성이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아까 직원들이…….”

“대표님, 벌써 들어가세요?”

그때, 근처에 있던 직원이 슬쩍 말을 붙였다. 개발팀 팀장으로 있는 남자였다. 그는 슬그머니 내 눈치를 살피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표님만 괜찮으시면 처음 오신 기념으로 환영 회식을 하려고 했거든요.”

“어…….”

나는 머뭇거리며 그의 뒤로 사무실을 둘러봤다. 아닌 척하고 있지만, 은근슬쩍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웬만하면 거절하려고 했는데, 그 눈빛들이 부정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미리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바쁘신 것 같아서…….”

개발팀 팀장은 내게 말을 거는 게 꽤 불편해 보였다. 척 보기에도 조심스러운 태도나 미처 마주치지 못하는 시선을 보고 알 수 있었다. 나는 팀장을 한 번, 그리고 이태성을 한 번 쳐다본 후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며 눈가를 찡긋했다.

“환영회 해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그 말을 듣자마자 팀장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나는 권이도에게 연락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부드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왕 회식을 할 거면, 직원들이 좋아할 걸 먹이는 게 나을 듯했다.

“메뉴는 소고기로 할까요?”

* * *

회식 장소는 내가 팀원들과 종종 가곤 했던 소고깃집이었다. 철저히 예약제로 운영되지만, 워낙 단골인지라 예약이 어렵지는 않았다. 나는 우선 가게를 통으로 빌려 놓고, 권이도에게 연락해 오늘 늦을 것 같다는 소식을 전했다.

-……술 마십니까?

권이도는 ‘회식’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음산하게 내리깔린 음성에서 그의 페로몬이 느껴지는 듯했다. 핸드폰을 통해 전해질 리가 없으니 당연히 기분 탓이지만 말이다.

“아뇨, 술은 안 마실 겁니다.”

음주를 즐기지도 않는 데다, 어색한 사람만 가득한데 마시고 싶지도 않았다.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몇 잔 마실 수는 있어도, 그 정도로는 취하지도 않았다.

“일찍 들어갈게요.”

이 대사를 내가 하게 될 줄 몰랐는데. 미안하단 말을 할까 했다가 그냥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권이도는 약간의 간격을 두고 한숨처럼 이야기했다.

-반지를 끼고 가라고 할 걸 그랬지.

“…….”

이 말도, 설마 권이도에게 들을 줄 몰랐는데. 반지를 빼고 다니는 건 내가 아니라 그쪽이 먼저였건만.

“다시 끼고 다니는 건 어렵지 않죠.”

가볍게 말했지만, 권이도는 긍정의 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저 픽 웃음을 흘리며 집에서 기다리겠다고 대답했을 뿐. 빈말로라도 그러라고 하지 못하는 걸 보면, 정말 약혼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그럼 이따 뵐게요.”

나는 전화를 끊고 멀거니 통화 시간이 남은 핸드폰을 바라봤다. 머리로는 그를 이해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운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내가 불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 그가, 고작 그런 이유만으로 반지를 뺀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를 마치고 돌아온 식당에는 이미 대부분의 직원이 모두 모여 있었다. 이태성은 차에서 기다린다고 했기 때문에 식당으로 들어선 사람은 나 혼자였다. 일이 있으면 편하게 가도 된다고 했는데, 정작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대표님!”

잠깐 어디에 앉을지 고민하는 내게, 그나마 익숙한 얼굴의 윤 팀장이 알은체를 해왔다. 윤 팀장의 테이블엔 경영지원팀 직원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인제 보니 각각 팀별로 친한 사람끼리 모여 앉은 듯했다. 내가 그쪽으로 다가가자, 윤 팀장이 슬쩍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했다.

“대표님, 여기 금액대가…….”

“아.”

무심코 주변을 둘러봤다. 바짝 긴장한 직원들이 슬금슬금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메뉴판을 보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아마 저 안에도 가격은 없을 터다. 나는 최대한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비어 있던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제가 살 테니까 마음껏 드세요.”

하지만 그렇게 말했음에도 직원들은 선뜻 메뉴를 주문하지 못했다. 이럴 줄 알고, 미리 식당 점원에게 언질을 줬었다. 타이밍 좋게, 내 얼굴을 확인한 점원이 테이블마다 고기를 내어 왔다.

“어, 저희가 안 시켰는데…….”

줄줄이 나오는 술과 고기를 보고 직원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윤 팀장이 건네는 수저를 받으며 대수롭지 않은 투로 얘기했다.

“혹시 몰라서 제가 종류별로 시켜 놨어요. 드셔보시고 마음에 드는 걸로 더 시켜 드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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