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Origine du parfum(9)
“…….”
실은 묻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그럼 왜, 내게 본부장을 관두라고 한 거냐고. 그건, 내가 그의 배우자로서 집에만 머물길 바라서 그런 게 아니냐고.
“……이름은요?”
그러나 나는 그러한 것들을 묻는 대신 다른 질문을 택했다. 그를 살짝 밀어 내자, 이번엔 권이도도 별다른 저항 없이 상체를 일으켰다.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친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 사업, 타이틀이 있을 거잖아요.”
그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마치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이내, 느리게 움직인 입술이 하나하나 익숙한 알파벳을 읊조렸다.
“S, E, J, I, N.”
“…….”
“세진.”
깜박, 시선이 마주쳤다. 얇게 쌍꺼풀진 눈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는 특유의 기품 있는 목소리로 달큼하게 이야기했다.
“정세진 대표님이 론칭할 향수 레이블이에요.”
“……허.”
그냥, 가볍게 다녀 보라고 했으면서. 우선은 자격증을 딸 때까지만이라고 기간까지 정해 줘 놓고.
물건으로 모자라, 이제는 회사까지 안겨 주겠다는 말이었다. 이제 막 조향을 배우기 시작한 내게 지나치게 과한 선물이기도 했다. 황당함에 말문이 막힌 사이, 그가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레이블이 마음에 안 들면 일하면서 바꿔도 됩니다.”
“……권이도 씨.”
“당장 향수를 만들라는 말이 아니에요. 어차피 정세진 씨는 경영 쪽 일이 더 익숙할 거고.”
머릿속이 잔뜩 복잡했다. 베갯머리송사고 뭐고, 곧장 대답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그런 내 생각을 충분히 알고 있는지, 그는 여유롭게 웃으며 이렇게 물었다.
“얼마나 줄까요.”
“…….”
“생각할 시간…… 아니, 정확히는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
그가 말하는 준비는 아마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겠지. 선택권을 주는 게 아니라 선택의 시간을 잠시 유예해 줄 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선고를 내리는 판사처럼 당당히 얘기했다.
“일주일을 주죠.”
* * *
누군가 결혼을 인생의 무덤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비록 내가 한 건 약혼이었지만, 반쯤 미래에 관한 것들을 포기하고 있던 건 사실이다. 그런데 그의 집에 들어온 이후, 그가 내게 요구하는 것들은 지나치게 미래 지향적이었다.
처음엔 가지고 싶은 걸 묻더니, 그다음엔 하고 싶은 걸 물어 왔다. 나를 위한 온실에 차와 향수를 쥐여 주고, 이제는 회사까지 안겨 주겠다고 한다. 단순히 약혼자의 비위를 맞춘다기엔 고작 ‘물질’ 따위로 한정시킬 수 없는 선물이 가득했다.
왜 이렇게 내게 잘해 줄까. 처음, 권이도는 내게 바라는 게 있으니 그전까지는 자신이 주는 모든 걸 받으라고 했다. 그리고 최근엔 이 모든 게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고도 이야기했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를 갖다 붙여도 그가 보여 주는 친절에 타당한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물론 가장 이해되지 않는 건,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레 그 모든 걸 받아들이는 나였지만.
‘일주일을 주죠.’
권이도가 이야기한 일주일은 눈 깜박할 사이에 흘러갔다. 그사이,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나와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밤이면 늘 그랬듯이 함께 대화를 나눴고, 그러다 눈이 맞으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몸까지 섞길 반복했다. 당연히 그동안 수면제는 단 한 알도 먹을 필요가 없었다.
‘……이 팀장을 조수석에 태우고 다닙니까?’
당신이 사준 차를 타고 다닌다는 말에 만족스러워하던 그는 직접 운전한다는 말까지 듣고 미묘한 표정이 되었다. 그렇다고 기분이 상한 것 같진 않았고, 선물 받은 차는 직접 운전하고 싶다고 말하자 픽 웃음을 흘렸다.
‘차를 하나 더 줘야겠군요.’
……그 뒷말은, 그냥 못 들은 척하기로 했다.
이태성은 공방에 다니는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뒷짐을 진 채 입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이희나가 항상 앉으라고 권유했지만 매번 이게 편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온실에서 그랬듯, 중간부터는 앉아 있을 줄 알았는데 계속 무뚝뚝한 태도를 고수했다.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네요.”
그렇게, 오늘로 공방에서의 모든 수업을 마치게 되었다. 2주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조향사라는 직종을 단적으로 배우기엔 충분했다. 애초에 원데이클래스 정도를 생각했으니, 이 정도면 오랜 시간을 함께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숙제 검사도 이게 마지막이겠어요.”
노트를 내려놓은 이희나가 미리 준비한 물건들을 꺼냈다. 향료를 묻힌 시향지 몇 개와 원두가 담긴 통이었다. 그 단조로운 준비물을 살피는 내게, 이희나는 시향지에 밴 향을 선호도 순으로 적으라며 종이 한 장과 연필을 건네줬다.
“우디 계열 향수가 좋다고 하셨죠?”
“아…… 네, 그랬었죠.”
오늘은 그간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첫날 이야기했던 향수를 만들 예정이었다. 물론 이미 완성된 향료를 조합할 뿐이니 ‘만든다.’라고 부를 만한 과정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혹시 만들어 보고 싶은 향이 있으세요?’
첫날, 이희나의 질문에 나는 별생각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조금 묵직한 느낌의 나무 냄새가 나는 향을 만들고 싶다고. 퍼뜩 떠오른 상대가 있었기 때문인데, 아마 이희나와 이태성 모두 그런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을 터다.
“냄새 맡으면서 최대한 비슷한 향을 골라 보세요.”
아마 이러한 향료로는 권이도의 페로몬을 흉내조차 내지 못할 텐데. 애초에 페로몬은 향이 아니었지만, 그 발치에조차 다다르지 못한다는 사실이 퍽 아쉬웠다. 물론 내가 진짜 조향사가 아니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종류별로 시향지의 냄새를 맡으며 마음에 드는 향을 골라냈다. 중간중간 코가 피곤해지면 통에 담긴 원두 냄새로 후각이 무뎌지지 않게 주의했다. 지난 2주간 수없이 많은 향료 냄새를 맡으며 이희나에게 배운 것이었다.
이희나가 비율과 종류를 골라 주고, 향의 목록을 보며 몇 가지 조언을 덧붙였다. 이 두 가지가 섞이면 어떤 느낌이 나는지, 그런 것들을 세세하게 설명해 줬다. 나긋나긋하고 온화한 이희나는 유일하게 일과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면 눈빛이 진지하게 변했다.
저울을 놓고 향료를 배합하는 과정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재밌었다. 나는 이희나가 보여 준 시범을 따라 신중하게 여러 가지 향료를 섞었다. 그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모든 향료를 섞은 뒤에야 넌지시 물었다.
“이쪽 관련 일 하실 거죠?”
“네?”
무심코 시선을 들어 그쪽을 바라봤다. 둥글게 내려온 눈꼬리가 찡긋 움직였다. 기분 좋게 입매를 말아 올린 그가 테이블에 손을 짚은 채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되게 적성에 맞으시는 것 같아서요. 보통 적성 맞는 일 찾기 힘들잖아요.”
그는 흘긋 저울 위에 올려놓은 비커를 눈짓했다. 말간 액체가 담긴 비커에선 정제되지 못한 짙은 향기가 풍겨 왔다. 공병을 가져와 뚜껑을 연 그가 가벼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지난번엔 대충 넘겼지만, 사실 전 세진 씨가 이직 준비 중이실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언제였더라. 두 번째 수업이었나. 향수 만드는 수업을 왜 들으러 왔냐는 질문과 함께, 본부장을 관둔 게 그런 이유 때문이냐고 물었었다. 정확히 대답하지 않고 넘어갔기에, 그리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쪽 일 하실 줄 알고 더 열심히 가르친 건데…….”
“…….”
“아니었나요?”
장난스러운 말투였다. 이번에도 부담 갖지 말라는 듯이. 나는 푸스스 가느다란 웃음을 흘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딱히 그런 목적으로 온 건 아니고…….”
공방에 좀 다녔다고 관련 직종을 가질 수 있을 리가 없다. 처음엔 취미에 불과했고, 지금도 조향사가 되겠다고 다짐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경험 삼아 온 게 맞아요. 게다가…… 뭔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엔 좀 늦은 감이 있네요.”
뒷말은 내가 누누이 곱씹고 있던 생각이었다. 객관적으로 나이가 많진 않아도, 이제 와 새로운 시도를 하자니 두려움이 드는 건 사실이다. 아니, 정확히는 한 번도 미래를 그리며 살아 본 적이 없어서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염원하는 게 영 낯설었다.
“세진 씨 아직 스물아홉 살 아니에요?”
이희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내 나이를 어떻게 알았나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인터넷에 검색만 해도 출생 연도가 뜨지 않던가. 굳이 부정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자, 그가 샐쭉 미소 지었다.
“그 나이엔 뭐든 할 수 있어요.”
“하하…….”
상투적인 표현이었다. 이희나도 모르지 않는지 나를 따라 실없이 웃었다. 아마 진지하게 한 말은 아니었나 본데, 뒤이어 흘러나온 말만큼은 농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작년에 저희 이모가 병 때문에 수술을 하셨는데요.”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나지막이 운을 뗐다. 이희나는 데구루루 시선을 굴리며 언젠가를 회상하는 듯 보였다.
“수술 후유증이라고 해야 하나…… 금방 피로해지고 몸 쓰는 일을 못 하게 되셨거든요.”
“아…… 힘드시겠어요.”
“그렇죠, 뭐. 이제 나이도 있으시니까 다들 어떻게 지내려나 걱정을 많이 했고.”
모르긴 몰라도, 꽤 큰 병이었던 모양이다. 이희나는 지금은 다 완치됐다고 덧붙이며 엷은 미소를 띠었다.
“근데 최근에 공부를 다시 하신대요. 장애인 전형으로 고시를 치를 수 있어서, 지금부터 일하고 10년 정도 뒤에 정년 퇴임하면 연금이 나온다나 봐요.”
열심히 사는 분이구나. 딱 그 정도 감상이 들었다. 10년 뒤에 정년이면 나이는 아버지와 비슷할 텐데. 그때부터 새로운 무언가를 한다는 게 보통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제가 이 얘기 듣고 무슨 생각을 했냐면…….”
그가 살포시 미간을 좁혔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거나, 혹은 그 나이엔 뭐든 할 수 있다거나. 대충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이희나는 아연한 얼굴로 이렇게 얘기했다.
“와, 진짜 앞으로 살날이 너무 많구나.”
“…….”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정말 질색하는 표정을 짓던 이희나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전 이 일을 좋아하지만, 앞으로 몇십 년을 더 하라고 하면 약간 아득하거든요. 우리 앞으로 지금 산 것보다 세 배는 더 살 텐데, 지금 하는 일이 찰나에 불과할지 어떻게 알겠어요.”
그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익살스럽게 눈가를 찡긋했다. 딱히 틀린 말은 없었는데, 다른 무엇보다 유독 마음에 남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지금 산 것보다 세 배는 더 살 거라는 부분이.
“늦고 빠르고의 문제라기보단, 살면서 몇 년 정도는 헛짓거리를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헛짓거리라뇨.”
황당함에 웃음이 터졌다. 적나라한 표현에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는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부드럽게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기회가 되면 몇 년만 한 번 해보세요. 세진 씨 정말, 제가 본 누구보다 열심히 하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이희나의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 그는 비커에 담긴 향수를 공병에 옮긴 뒤 뚜껑을 꼭 닫아 테이블에 내려놨다. 라벨을 종류별로 보여 주며,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라고 말하기도 했다.
“실사용은 2주 정도 숙성시키고 하시면 돼요.”
네모난 유리병에 담긴 향수엔 ‘정세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따로 이름을 지어 줘야 했지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회에 젖어 향수병을 만지는 내게, 상냥한 목소리가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세진 씨.”
* * *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은 뒤엔 잠깐 온실에 들러 꽃을 구경했다. 사시사철 화사하게 심어 놓은 꽃들이 가라앉았던 기분을 한결 낫게 만들었다. 여기 달아 놓은 조명을 언젠가 쓸 때가 와야 할 텐데. 기회가 생기지 않으니 차일피일 미루게만 됐다.
권이도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저녁을 먹을 즈음에 퇴근했다. 현관까지 마중 나온 나를 보고 다정하게 웃다가 씻고 내려오겠다며 곧장 방으로 올라갔다. 그가 편한 옷차림으로 내려왔을 땐, 식탁에 한 상 가득 진수성찬이 차려진 뒤였다.
탕평채와 칠리새우, 그리고 유자 드레싱이 뿌려진 샐러드. 자잘한 밑반찬과 함께 밥을 반쯤 먹었을 때, 권이도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이 저녁 식사가 시작된 이후, 내가 내내 준비하고 있던 질문이었다.
“생각은 해봤습니까?”
주어는 필요 없었다. 기간은 이미 끝났고, 권이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 나는 숟가락을 식탁에 내려놓으며 권이도를 바라봤다.
“자격증 따려고요.”
며칠간 틈틈이 생각했다. 그다지 대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새로운 걸 해본다는 사실이 염려스럽긴 했으니까. 긴 시간 고민하고, 권이도의 확답까지 들었으니 더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회사는…….”
“…….”
“낙하산도 나쁘진 않겠더라고요.”
권이도의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나는 그와 시선을 맞춘 채 습관처럼 눈을 접어 웃었다.
“제가 언제 대표님 소리를 들어 보겠어요.”
거절하지 못할 거라면 흔쾌히 받아들이는 편이 마음 편하지 않을까. 내게도, 그리고 권이도에게도 말이다.
“잘 생각했어요.”
권이도는 그런 내 대답이 무척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짙은 눈동자에 기분 좋은 빛이 한가득 떠올랐다. 내가 할 대답은, 그게 끝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근데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그는 얘기해 보라는 듯 눈썹을 삐쭉 들어 올렸다.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참으로 여유로워 보였다. 나는 협상을 하듯 한껏 진지한 어투로 얘기했다.
“받기만 하면 죄송하니까, 원하는 걸 하나만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에게 받은 걸 다 합치면, 갚지도 못할 만큼 커다란 결과가 나오곤 했다. 아무리 대가 없이 주는 거라고 해도 그냥 받기엔 부담스러웠단 말이다. 물질적인 것들이 마냥 번거롭기만 했다면, 이제는 미안함과 함께 자그마한 고마움도 생겼다.
“저도 권이도 씨한테 뭔가 해주고 싶어서요.”
“원하는 거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권이도가 잠깐 눈을 내리깔았다. 늘 당당한 사람이 내 앞에선 간혹 이렇게 처연한 표정을 짓곤 한다. 물론 찰나에 불과했기에 나조차 길게 볼 수는 없었지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거면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선물도 좋고, 아니면 뭐…….”
“…….”
“몸도 괜찮고.”
장난처럼 덧붙인 말에 권이도가 나를 바라봤다. 당황스러운 건, 그가 정말 혹하는 표정을 지었다는 점이었다. 농담이었다고 정정해 주는 게 좋을까, 그런 고민을 하는 와중에 그가 픽 웃음을 흘렸다.
“몸으로 주면 정세진 씨가 손해일 텐데.”
진지한 어투였다. 미처 반박할 틈도 없었다. 그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나직이 이야기했다.
“정세진 씨 페로몬을 닮은 향수를 가지고 싶습니다.”
천천히 눈을 커다랗게 떴다. 달큼한 음성이 요구한 한 가지가 지나치게 로맨틱했다. 권이도는 보일 듯 말 듯 웃으며 고상하게 턱을 당겼다.
“시간이 얼마가 걸려도 좋아요. 만약 금전적인 지원이 필요하면 나한테 얘기하고, 그 외에도 요구 사항이 있으면 들어주죠.”
언뜻 들으면 그가 바라는 것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가 내게 해주는 것에 관한 이야기 같았다.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가지고 싶은 게 고작 내 페로몬 향이라니. 멍하니 눈을 깜박이자, 그가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이건 정세진 씨가 아니면 못 하는 일이에요. 그 페로몬은 우리 둘밖에 모르니까.”
“……그건 그렇지만.”
페로몬샘이 기형이기 때문에, 내 페로몬은 오로지 히트 사이클 때만 느껴졌다. 당연히 페로몬을 느껴 본 사람은 나를 제외하면 권이도가 유일했다. 나를 진료한 의사는 물론, 가족들 역시 특이 형질이 아닌 베타였으니까.
“이 정도는 돼야 정세진 씨가 생각하기에도 수지가 맞겠죠.”
헛웃음이 나왔다. 누가 사업가 아니랄까 봐. 주어진 기회를 활용하는 방식이 대단하다. 아마 그가 원하는 향수를 만들기 전까지는, 대표직을 내려놓을 수 없겠지.
“대답은?”
자신이 없다고 해볼까. 그리 생각했다가 관두기로 했다. 내가 먼저 제안해 놓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게 옳지 않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못 이기겠다는 듯 눈가를 찡긋했다.
“오래 걸릴 겁니다.”
“오래 걸리면 오래 걸릴수록 좋죠.”
뻔뻔하게도, 권이도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대답했다. 약속을 하겠냐며 새끼손가락을 펼쳐 오른손을 내밀기도 했다. 우리 사이에 테이블이 있었기 때문에 손가락을 걸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기대하고 있을게요. 정세진 씨가 만드는 향수.”
예의 그 당당한 미소가 가슴 언저리에 짙게 남았다. 기약 없는 바람이었으나, 반드시 지켜야만 할 약속이기도 했다.
그가 내어 준 회사에서 만들, 내 페로몬을 닮은 향수. ‘Sejin’의 론칭이 잠정적으로 확정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