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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억의 끝에 (46)화 (46/131)

46화. Origine du parfum(8)

잠에서 깨어났을 땐 더할 나위 없이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익숙한 온기가 온몸을 감싸고, 잠에 취한 와중에도 나긋이 풍기는 페로몬에 기분이 좋았다. 따뜻하고, 포근한 감각은 아늑한 안정감이 되어 나를 뒤덮었다.

본능적으로 꿈지럭꿈지럭 내 앞에 있는 품으로 파고들었다. 단단한 무언가가 나를 꼭 끌어안고, 등을 쓸어내리며 바짝 밀착했다. 간지러운 숨결에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가장 먼저 넓은 가슴팍이 시야에 들어왔다.

“…….”

느릿느릿 눈을 감았다가 떴다. 천천히 오르내리는 가슴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살이었다. 그와 달리 나는 큼직한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이불 속에서 얽힌 다리는 반대로 상대방만 바지를 입고 있었다.

나는 반쯤 풀린 눈으로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봤다. 도드라진 목젖을 지나 보인 것은, 곤히 잠든 권이도의 얼굴이었다. 곱게 감긴 두 눈엔 가지런한 속눈썹이 내려앉았고, 곧은 콧날과 입술은 공들여 빚어 놓은 것처럼 섬세했다.

아, 아침이구나. 그 사실은 환하게 밝아진 방 안을 보고 알았다. 커튼 틈새로 햇살이 비추는 바람에 불을 켜지 않았음에도 여기가 어디인지 뚜렷이 보였다. 잠든 건 권이도의 방이었는데, 장소를 옮겼는지 지금 누워 있는 곳은 내 침대였다.

그래서, 이 사람은 웬일로 같이 누워 있을까.

내게는 늘 다정한 그였으나 이렇게 편안히 눈을 감은 모습은 또 처음이었다. 긴장감이 사라진 표정은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목구멍이 간질거릴 만큼 미묘했다. 하염없이 멍한 눈으로 권이도의 얼굴을 구경해야 할 정도였다.

‘흣, 그만…….’

‘힘들면 자.’

‘그게…… 흐…….’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 대화를 나눈 게 주변이 온통 어두워졌을 때였나. 그 너그러운 허락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은 기억이 있다. 그때까지도 권이도는 내 안에서 빠져나오지 않았고 잡아먹을 것처럼 내 목덜미를 잘근거렸다.

그리고 곧장 잠이 들었으니,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온몸에 뻐근한 근육통이 가득하고, 그럼에도 피부나 이불이 보송보송한 걸 보며 대략 짐작할 뿐.

체력도 좋지. 나는 기절하듯 정신을 잃었는데 나를 다 씻기고 옷까지 입혀 잠자리에 누운 모양이다. 비록 하반신은 휑했으나 권이도의 티셔츠가 워낙 커다란 덕에 엉덩이까지는 다 덮어졌다. 그의 체온 덕에 춥지도 않았고 히트 사이클이 끝난 뒤라 몸 상태는 최상에 가까웠다.

나는 한참이나 가만히 그 잘생긴 얼굴을 구경했다. 어제, 짐승처럼 몰아붙이던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금욕적인 외모였다. 어떻게 자는 얼굴마저 이럴 수가 있는지. 딱히 얼굴을 밝히는 건 아니었는데, 가끔 권이도를 보면 그 생각이 뿌리째 흔들리곤 했다.

……그보다, 팔 저릴 것 같은데.

그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심스레 머리를 들어 올렸다. 단단한 팔을 옆으로 치우고 얽혀 있던 다리를 슬쩍 빼내었다. 그리고 상체를 일으키려는 순간, 잠든 줄 알았던 권이도가 나를 다시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

풀썩, 그의 품으로 무너졌다. 두근거리는 박동이 가까운 거리에서 느껴졌다. 권이도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눈을 크게 뜨자, 머리맡에서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다른 이유는 아니었고 아침부터 들리는 음성이 참 외설스럽게 느껴져서. 움찔거리며 어깨를 움츠리자 그가 팔과 다리로 내 몸을 꽉 옭아맸다.

“더 자, 세진아.”

참, 한가로운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둘째치고 권이도는 일을 나가야 할 텐데. 지금이 몇 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어나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권이도건만.

“출근 안 하세요?”

그래서 조그맣게 묻자 권이도가 자세를 고쳤다. 아마 가슴팍에 닿는 숨결이 조금 간지러웠던 모양이다. 내 정수리에 입술을 문지른 그는 티셔츠 위로 등허리를 쓸어내리며 사근사근 속살거렸다.

“5분만…….”

“…….”

“5분만 이러고 있죠.”

잠투정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정작 그 말을 하는 권이도는 잠기운이 다 날아간 것 같았지만. 등을 지분거리는 손길은 누가 봐도 졸린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는데.

사실, 마음 같아서는 5분이 아니라 한 시간을 이러고 있어도 좋을 듯했다. 그렇게 오지 않던 잠이 지금은 눈만 감아도 다시 나를 찾아올 기세였으니. 늘어지게 부리는 여유를 싫어할 사람은,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아무도 없지 않을까.

“……숨 막히는데.”

그런데도 괜히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중얼거렸다. 아예 거짓은 아니었고 숨 쉬는 게 조금 답답하긴 했다. 머리에 벤 팔은 딱딱한데다 간간이 전해지는 숨결이 머리칼을 간지럽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손바닥을 손톱으로 꾹꾹 눌러야 할 만큼 기분이 이상했다.

권이도는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몸을 살짝 떼어 냈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내려다본다. 내가 가만히 시선을 맞추자, 그의 입에서 간지러운 말이 흘러나왔다.

“이러고 있는 게 부끄러워요?”

“…….”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내가 느끼는 민망함을 그는 정확하게 꿰뚫어 봤다. 은근슬쩍 시선을 돌리려는데 이번엔 그보다 더 수위 높은 말이 나왔다.

“날 기다리면서 뒤까지 푸는 건 안 부끄럽고?”

“……음.”

그러고 보니 그랬지. 넘쳐흐르는 성욕을 참을 길이 없어서 평소라면 건드리지 않을 뒤에까지 손을 댔었다. 그걸로 모자라 권이도에게 전화를 걸어 빨리 오라며 칭얼칭얼 재촉까지 했고.

“좀…… 맨정신이 아니긴 했죠.”

그냥 순순히 시인하며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댔다. 권이도는 군말 없이 내 뒤통수를 매만졌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머리칼을 헤집는 감촉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가만히 눈을 감으면 다시 까무룩 깊은 잠에 빠져들 것처럼.

“……오늘은 언제 들어오세요?”

딱히 자면 안 되는 이유는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이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오랜만에…… 아니, 거의 처음으로 그와 함께 평온한 한때를 보내는 지금이. 그래서 가볍게 건넨 질문에 권이도는 특유의 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녁 먹기 전에 올 거예요.”

바쁜 게 끝났다더니, 전처럼 일찍 퇴근할 모양이다. 그렇게 되면 아마 당분간 수면제를 먹을 일은 없겠지. 이렇게 의존도가 높아지면 안 되는데……. 그리 생각하는 와중에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도 공방에 갑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순간을 아쉬워하듯 권이도도 그렇지 않을까 하고. 괜히 뻔한 질문을 하는 이유가 내가 잠드는 게 아쉬워서는 아닐까 하고.

“오전 중에 다녀오려고요. 숙제 검사받고 진도 나가려면 가능한 한 평일엔 매일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부지런한 수험생 같네.”

가늘게 웃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별거 아닌 대답에도 그는 퍽 기분 좋은 기색이었다. 나는 살짝 눈을 내리감으며 조그만 목소리로 운을 뗐다.

“희나 씨가 자격증 얘기를 하던데…….”

‘그럼 혹시 조향사 자격증엔 관심 없으세요?’

향수 공방에서 이희나가 내게 했던 말. 그는 지나가듯 말한 것일지 몰라도 그 이후에 내 관심사는 대부분 그쪽에 쏠려 있었다. 딱히 열정이 넘쳐서는 아니었고, 그냥 관심 비슷한 호기심이었지만.

“조향사 자격증이 있나 봐요. 국가 공인은 아니고, 그냥 민간 자격증으로. 뭐라도 하나 남겨 놓으면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 하더라고요.”

권이도는 내가 말을 잇는 동안에도 가만가만 뒷머리를 매만졌다. 부스스한 부분을 정돈해 주는 것 같기도 했고, 그냥 강아지를 만지듯 머리칼을 만지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슬쩍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권이도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

수려한 눈매가 순간 움찔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뜨더니, 조금 멍한 느낌으로 내 얼굴을 응시한다. 그 시선이 민망해서, 괜히 한쪽 눈가를 찌푸렸다.

“……왜 그러세요?”

“아니…….”

그는 느리게 운을 떼곤 잠깐 뒷말을 망설였다. 거리가 가까운 터라 짙은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치는 듯했다. 한 번, 두 번, 눈을 감았다가 뜬 그가 보일 듯 말 듯 입매를 늘어뜨렸다.

“내 의견을 물을 줄 몰랐거든요.”

그게 그리도 의아한 일이었을까. 아니, 정확히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른하게 풀린 눈이 다정한 빛을 한가득 띠었다.

“하고 싶은 게 생기는 건 긍정적인 일이죠.”

나직이 이야기한 권이도가 가만히 시선을 맞췄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물은 건데, 그는 더없이 진지한 표정이었다. 마치 내가 오랜 시간 갈등했단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전에 얘기했죠. 하고 싶으면 해야 한다고.”

‘하고 싶으면 해야죠.’

언젠가 권이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실제로 조향을 배우고 있으니, 결국엔 그의 말대로 된 것이었다. 빈말을 하지 않는 그답게 지금 하는 말도 빈말은 아닐 터였다.

“이왕 시작했으니 성과를 내는 건 좋다고 생각해요.”

“……그렇군요.”

사실 어찌 보면 답이 정해진 질문이었다. 권이도가 긍정의 대답을 하리라는 건, 처음 운을 뗄 때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단지 직접 입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모르는 척 물었을 뿐.

자격증을 한 번 따볼까. 크게 도움이 되진 않아도 언젠가 지금의 경험을 추억할 거리는 될 듯했다. 그때, 권이도가 내게 그런 기회를 줬었지. 딱 그 정도면 남겨 놔도 가치 있지 않을까.

“취미로 향수 사업을 하나 할 거예요.”

한창 그러한 생각에 잠겼는데, 권이도가 생뚱맞은 주제를 꺼냈다. 향수 사업? 그렇게 되묻기도 전에 그가 살짝 고개를 까딱했다.

“투자의 일종으로.”

“……투자 말씀입니까?”

그걸 그쪽이 왜 투자하냐고, 그런 의문을 내비치지는 못했다. 내 의문을 눈치챘는지, 그가 담담한 목소리로 설명을 덧붙였기 때문이었다.

“향이라는 게, 우리 삶에 굉장히 많은 영향을 끼치거든요. 모 자동차 브랜드에선 처음 운전석에 앉았을 때 맡아지는 향기가 자사 브랜드의 첫인상을 결정한다고 얘기했죠.”

나도 들어 본 적 있는 얘기였다. 자동차 브랜드 대표의 인터뷰 내용이다. 실제로 그 회사의 차는 카시트에서 맡아지는 냄새가 조금 독특했던 기억이 있다.

“선호도 시대에 발맞춰 가야 하지 않겠어요.”

그리 이야기한 권이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웃는 것처럼 휘어진 눈매가 왠지 모르게 의뭉스럽게 보였다. 이 얘기를 나한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타이밍에, 이런 이야기를, 굳이 내게 꺼내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적당히 경력 있는 책임자가 필요합니다.”

“…….”

본능적인 촉이라고 해야 하나. 그가 내뱉을 뒷말을 알 것 같았다. 역시나, 권이도는 여상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세진 씨가 총책임자로 와줬으면 해요.”

황당한 기분이 드는 것과 동시에, 헛웃음이 나왔다. 너무 터무니없는 얘기를 듣는 바람에 대꾸할 말은 금세 떠올랐다.

“……전 금융 쪽에서 일했습니다.”

“회사 업무가 다 거기서 거기죠.”

거기서 거기라니. 그게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부담 갖지 않아도 돼요. 정세진 씨는 그냥 하고 싶은 걸 다 하면 되니까.”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목덜미로 내려왔다. 살금살금 맨살을 덧그리다가 티셔츠 옷깃에 가려진 뒤쪽 목뼈를 매만진다. 기다란 손가락이 닿는 감촉에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원하는 향수를 만들어도 괜찮고…… 아니면 경영 쪽으로 일해도 되고. 마케팅 상품을 개발해 봐도 좋습니다.”

“……직업 체험이라도 해보라는 말씀으로 들리네요.”

“직업 체험?”

우스운 말을 들은 것처럼, 그는 픽 실소를 흘렸다. 그러면서도 내 말을 굳이 부정하진 않았다.

“괜찮은 표현이네.”

“농담도…….”

대체 누가, 회사 책임자 자리를 주고 이것저것 경험해 보라고 한단 말인가. 애써 웃음으로 때우려는 내게 그는 꽤 진지하게 물었다.

“설마 낙하산은 싫습니까?”

“…….”

차마 그렇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낙하산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눈을 찌푸리고 있어서. 그 모양 좋은 입술에선 내용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상한 목소리가 나왔다.

“주어진 기회가 있는데 아등바등 기어 올라가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누군가 들었다간 논란거리가 돼도 이상하지 않을 말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터뜨리자, 그가 티셔츠 위로 은근히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아니면 본부장까지 했던 분께 너무 약소한 자리인가?”

“그런 게 아니라…….”

손길이 이상하리만치 농밀했다. 척추뼈를 하나하나 덧그리며 내려오더니, 옷자락 아래 드러난 허벅지를 부드럽게 움켜쥔다. 움찔, 다리를 오므리는 순간 그가 한쪽 다리를 내 다리 사이에 끼워 넣었다.

“……저희 대화 중이지 않았나요?”

“대화 중이죠. 앞으로도 할 거고.”

티셔츠 속으로 권이도의 손이 파고들었다. 허벅지 옆에서부터 골반을 따라 올라오더니 이번엔 손가락으로 간질간질 등을 지분거리기 시작한다. 찌푸린 내 눈가에 입을 맞춘 그가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겸사겸사 몸의 대화도 하는 거지.”

“잠시만…….”

고작 등을 좀 만질 뿐인데 지나치게 온몸이 예민했다. 온종일 그와 몸을 섞은 터라 기분이 나른하게 풀린 터라 더 그런 듯했다. 자연스럽게 내 위로 타고 올라온 권이도가 쇄골 부근에 코를 파묻었다.

“뭐 하시는…… 흣.”

“그냥 말하면 당연히 안 들어줄 테니, 베갯머리송사라도 하려고요.”

살랑살랑 페로몬이 풍겨 왔다. 다리 사이로 들어온 무릎이 지그시 중심부를 눌렀다. 본능적으로 그의 등을 끌어안자 그가 티셔츠 속에 있던 손을 내 가슴께로 옮겨 왔다.

“아……!”

그가 밤새 괴롭힌 탓에, 유두가 조금 부어 있었다. 예민한 살결이 스치자 따끔한 감각과 함께 신음이 흘러나왔다. 쪽, 쪽, 드러난 목에 입을 맞춘 그가 피아노를 치듯 갈비뼈 부근을 어루만졌다.

“안 돼요…… 더 못 합니다.”

그의 뒤통수에 손을 얹은 채 몸을 축 늘어뜨렸다. 아랫배에 열기가 모였지만, 섹스를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히트 사이클이 끝난 직후인데다, 이미 모든 체력을 밑바닥까지 끌어다 쓴 이후였으니까.

“내가 지금 요구하는 건 섹스가 아닌데.”

그런데 권이도는 내 어깨에 뺨을 기댄 채 야살스럽게 웃었다. 눈매를 조금 가느스름하게 떴을 뿐인데, 명치가 바짝 옥죌 만큼 영향력이 엄청났다. 베갯머리송사를 하겠다던가. 협박보단 온건한 방법이었으나, 이 또한 평화로운 해결은 아니었다.

“사업 기반은 다져 놨고, 직원도 다 섭외해 놨어요.”

“……읏.”

“정세진 씨는 그냥…… 내킬 때 출근해서 보고 싶은 업무만 보면 됩니다.”

“그게 말이 되는…….”

“물론 정세진 씨 성격상, 막상 일을 하면 열심히 하겠지만…….”

“권이도 씨, 이거 좀……. 흣.”

“우선 출근만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간지럽다고 해야 할까. 깃털이 스치는 듯한 손길과 귓가에 닿는 입술이 감질나기 짝이 없었다. 분명 그럴 기분이 아니었는데도, 힘없이 늘어졌던 성기가 반쯤 발기할 만큼.

“어차피 거절 못 하는 거 알 텐데.”

“…….”

픽 웃으며 내뱉은 말엔 대꾸할 내용조차 없었다. 그의 말대로, 하기 싫다고 해서 거절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끝내 그가 내게 차 키를 쥐여 줬듯 비슷한 수순에 따라 출근길에 오르게 되겠지.

“정 부담스러우면 우선 자격증을 딸 때까지만 다녀 봐요.”

그는 자비로운 척 친히 기간까지 정해 줬다. 얼핏 듣기엔 짧은 시간처럼 느껴지는 말이었다. 과정을 이수하려면 최소 몇 달은 걸린다던데, 거의 수습 기간이나 다름없었다.

“연봉도 잘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내가 본부장으로 있을 때 얼마를 받았는지도 모르면서. 물론, 권이도라면 그것의 두 배를 아무렇지 않게 불러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그냥 취업한다고 생각해요.”

“취업이라니…….”

왜 그 말에 낯선 기분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처음 사회로 나가는 사람처럼, 이유 모를 긴장감이 덜컥 엄습했다. 여전히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는 내게 그는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예전처럼 일하고 싶잖아요.”

“…….”

움찔, 입술을 달싹였다. 그를 끌어안은 손에 힘이 풀리고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가 지금껏 건넨 어떤 말보다, 지금 들은 이야기가 가장 유혹적으로 느껴졌다.

“아무리 봐도…… 집에만 있는 게 적성에 안 맞는 것 같던데.”

그 말대로였다. 온실에서 차나 마시는 일상은, 그다지 살아 있는 기분은 아니었다. 근래엔 공방에 다닌다지만, 그 이전까지는 책을 읽는 게 일과의 전부였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넓은 집에서 단 한 사람 권이도를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다.

“나는 정세진 씨가 그 똑똑한 머리를 썩히는 게 아깝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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