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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억의 끝에 (43)화 (43/131)

43화. Origine du parfum(5)

긴 머리를 양쪽으로 예쁘게 땋은 권혜율은, 베이지색 멜빵 바지에 품이 넓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내 손바닥보다 작은 발에는 사이즈가 작은 어린아이용 슬리퍼도 신겨져 있었다. 분명 알파이긴 했으나, 아직은 발현 전이기 때문에 페로몬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 안녕.”

나는 반사적으로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벌써 와 있었구나. 그 사실에는 내심 놀라고 말았다. 만약 여기서 마주치지 않았다면 그가 있는 줄도 모른 채 방에서 시간을 보냈을 거다.

“우리 전에 만났는데, 혹시 기억나?”

계단을 올라 2층에 서자, 권혜율의 시선이 내 쪽으로 따라붙었다. 어머니인 권이경을 많이 닮아서, 눈만 보면 권이도와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 똑 닮은 얼굴로,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나를 관찰하기만 한다.

“…….”

“……왜?”

혹시 반말을 해서 기분이 상한 걸까. 그런 생각으로 되물었지만, 권혜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나를 등지고 휙 몸을 돌렸을 뿐. 그리고 내가 붙잡기도 전에, 그는 뛰듯이 걸음을 옮겨 3층으로 사라져 버렸다.

* * *

권혜율이 낯을 가린다는 사실은 이미 권이도에게 들은 바 있었다. 실제로 약혼식 날에도 눈이 마주치자마자 대놓고 고개를 돌려 버리지 않았던가. 낯 가리는 아이가 처음도 아니고, 어느 정도 충분히 예상했단 말이다.

“…….”

“…….”

그런데 설마, 밥을 먹을 때에도 말 한마디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달짝지근한 소스가 뿌려진 함박스테이크를 먹으면서도 권혜율은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음식을 꼭꼭 씹어 삼키는 모양새가, 차라리 내가 비켜 주면 조금 더 편하게 먹을 것 같단 생각이 들 정도다.

“……그, 혜율아.”

나는 포크를 내려놓으며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바르게 앉아 있던 권혜율이 느릿느릿 나를 바라봤다. 확실히 권이경을 닮았는데, 그래서인지 어린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똘똘하게 생겼다.

“삼촌은 다섯 시쯤 오신대.”

일곱 살이면, 시간 감각이 있는 나이던가. 윤 대리 아들은 바늘로 된 시계를 못 봤지만, 권혜율은 알아들을 것 같았다. 사실, 알아듣지 못한다고 해도 그다지 상관없었고.

“이거 먹고, 삼촌 오시기 전까지 뭐 할 거야?”

권혜율은 나와 식탁을 번갈아 보며 곤란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말을 거니까 불편한가 본데, 그렇다고 음식을 남기고 자리를 뜰 수는 없나 보다. 그 사실이 못내 미안했지만, 우선은 얼굴도장을 찍고 싶은 마음이 더 커다랬다.

“삼촌은 혜율이가 그림 보는 거 좋아한다던데.”

“……맞아요. 또 그림 볼 거예요.”

겨우겨우, 앳된 목소리가 대답했다. 나는 권이도가 소유했다고 알려진 그림 몇 점을 떠올리며 일부러 다른 이름을 불렀다.

“그림이면…… 고흐?”

“아니요.”

권혜율은 도리도리 고개를 젓고 다시 시선을 식탁으로 내렸다. 반 정도 남은 함박스테이크를 포크로 찍으며 들릴 듯 말 듯 대답하기도 했다.

“고흐 말고, 모네 거.”

소위 권이도 컬렉션이라고 불리는 미술품엔 세계 각지에 있는 유명 화가의 작품이 포함돼 있다. 고갱, 샤갈, 피카소와 방금 언급된 모네까지도.

웬만한 그림은 선호재단이 소유한 미술관에서 보관 중이지만, 고르고 고른 세 점만은 그의 집에 장식해 두었다고 했다. 아마 권혜율은 그 그림들을 보러 놀러 왔을 것이다.

“모네 그림이 제일 좋아?”

“네, 제일 멋있어요.”

좋아하는 그림 얘기가 나오니 대답이 시원시원했다. 문제는, 그 대답을 듣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림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푸르른 연못에 연꽃이 떠 있는, 밀도 높은 유화 하나가.

“…….”

그리 이상할 건 없었다. 모네 하면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수련이었으니. 그런데 그 많고 많은 수련 시리즈 중 왜 눈으로 본 것처럼 딱 한 작품이 떠오른 걸까.

“……그럼 이따 혜율이 구경할 때, 옆에서 같이 구경해도 돼?”

나는 그 미묘한 위화감을 떨쳐 내며 넌지시 권혜율에게 물었다. 그림을 같이 보겠다는 말에 그가 잠깐 망설이는 기색을 내비쳤다. 그러다 이내, 결심한 것처럼 야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대신 떠들면 안 돼요.”

“응, 알겠어.”

“시끄럽게 하면 감상하는 데 방해되니까, 꼭 조용히 해야 돼요.”

“응, 조용히 있을게.”

귀엽게도, 권혜율은 식사가 끝날 때까지 내게 주의 사항을 읊었다. 짐짓 엄하게 눈에 힘까지 준 게, 그림을 정말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에게 총 다섯 번 알겠다고 대답하고, 식사가 끝난 뒤에는 얌전히 있겠다며 새끼손가락까지 걸어야 했다.

“뛰지 마, 혜율아. 넘어져.”

권혜율은 식사 후 양치까지 마치고 가벼운 걸음으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길게 땋은 머리가 토끼처럼 팔랑팔랑 움직였다. 애들은 왜 움직이는 것도 귀엽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그림이 있는 방문 앞이었다.

“쉿.”

또 한 번 권혜율이 내게 주의를 줬다. 진지한 상황에 웃고 싶진 않은데, 입술에 가까이 댄 검지가 너무 귀여워서 입꼬리가 간질거렸다. 권혜율은 조막만 한 손으로 문고리를 붙잡고 살금살금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갔다.

“…….”

천장이 온통 유리로 되어 있는, 미술관 같은 공간이었다. 혜율이가 말한 모네의 그림이 가장 가운데에 있고, 좌우로 또 다른 그림 두 개도 있었다. 나는 멍하니 걸음을 옮기며 눈앞에 보이는 그림에 시선을 고정했다.

“정말…….”

정말로, 수련일 줄이야.

“이게 모네 그림이에요.”

팔을 좌우로 뻗은 것보다 더 커다란 그림이었다. 녹색에 가까운 파란 연못에 부평초와 연꽃이 유유자적 떠다니고 있었다.

분명 처음 보는 그림이었고, 매스컴엔 공개조차 되지 않은 작품이었다. 그림에 관심 없는 권이도조차 이 그림의 작품성만큼은 한눈에 알아보고 구매한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런 그림이, 내게는 왜 익숙하게 느껴졌을까. 언젠가 한 번 보았던 것처럼 그린 듯이 또렷이 떠올랐던 이유가 무엇일까.

“……왜요?”

넋을 놓고 있는 내가 이상했던지, 권혜율이 넌지시 물었다. 그럼에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의아한 목소리로 묻는다.

“오빠도 모네 좋아해요?”

“……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 말을 듣자마자 정신이 들었다. 오빠라니, 어쩜 이리 양심에 걸리는 호칭이 나왔을까. 나는 비스듬히 권혜율을 내려다보며 멋쩍게 눈을 찡긋했다.

“오빠 아니고 삼촌이라고 해야지.”

“삼촌은…… 우리 삼촌밖에 없는데.”

권혜율이 삐쭉 입술을 내밀었다. 투정을 부린다기보단 고민에 빠진 탓에 자연스레 나온 행동 같았다. 그는 한참 진지한 표정으로 있다가 불쑥 나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래서 모네 좋아해요?”

“……응, 좋아하는 편이야.”

그림엔 나 역시 문외한이었지만, 이 초롱초롱한 눈빛을 모르는 척하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자, 권혜율이 처음으로 반가운 기색을 내비치며 눈을 크게 떴다.

“진짜요?”

“…….”

아, 애들한테 거짓말하면 안 되는데. 이렇게 된 이상 지금부터라도 모네를 좋아해야 할 것 같았다. 아니, 적어도 눈앞에 있는 이 그림만이라도.

“제가요, 어릴 때 파리에서 미술관에 갔었는데, 거기 있는 동그란 벽에 수련이 걸려 있었거든요.”

내게는 조용히 하라고 그랬으면서, 권혜율은 먼저 신난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냈다. 그가 딱 한 마디 했을 뿐인데, 바람 빠지듯 웃음이 나왔다. 지금은 일곱 살인 그가 어릴 때라면, 기껏해야 여섯 살쯤 되었을까.

“이 방보다 넓은 방에, 저기부터 여기까지 다 수련이었단 말이에요.”

그렇게 커다란 수련이 걸려 있는 미술관이면, 파리에 있는 오랑주리 미술관일 것이다. 직접 가보진 않았지만 얘기는 많이 들어 봤다.

“…….”

아니, 얘기를…… 들었던 적이 없던가.

“그게 너무 멋있어서 엄마한테 사 달라고 했더니, 엄마가 그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걸 사 달라고 했어?”

“네. 엄마랑 갤러리 가면 엄마가 제가 고르는 그림 하나씩 사주시거든요.”

또박또박 말하는 와중에 ‘갤러리’만 본토 발음이었다. 권혜율은 도르륵 눈을 굴렸다가 조심스럽게 내 옷깃을 붙잡았다.

“오빠도 수련 좋아하면, 거기 있는 그림 오빠가 사면 안 돼요?”

“……음.”

권이경이 못 사는 거면 아마 나도 못 살 텐데. 금액적인 측면은 둘째치고, 도의적인 문제였다. 게다가 내가 가져와 봤자, 그림을 제대로 관리하지도 못할 거다.

“그…… 우리가 그걸 사 오면, 다른 사람들은 그 그림을 못 보게 되잖아.”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차분히 입을 열었다. 안 된다고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웬만하면 납득할 만한 이유를 말해 주고 싶었다.

“우리는 보고 싶을 때마다 파리 가서 볼 수 있으니까, 멋있는 그림일수록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게 미술관에 두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럼 혜율 미술관에 두면 되잖아요.”

“…….”

잠깐, 말문이 막혔다. 권혜율은 또랑또랑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파리는 너무 멀고, 비행기 타는 것도 힘드니까 혜율 미술관에 두면 우리도 보고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일곱 살짜리를 너무 얕본 모양이다. 논리정연하게 돌아온 의문을 도무지 반박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슬쩍 책임을 회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따 삼촌 오시면 같이 얘기해 볼까?”

“삼촌이랑요?”

“응. 삼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들어 보고, 그다음에 혜율이 생각도 얘기해 주자. 어때?”

미안합니다, 권이도 씨. 속으로 심심한 사과를 건넸다. 매달 어린 조카와 놀아 주는 사람이니, 이 위기를 잘 헤쳐 나가는 방법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도무지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삼촌 다섯 시에 오니까, 네 시간 남았어요.”

다행히 권혜율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시간 개념이 확실히 있는 모양이었다. 남은 시간까지 계산할 줄 아는 건 조금 놀라웠지만 말이다.

“혜율아, 혜율이는 평소에 놀러 오면 삼촌 오실 때까지 여기서 그림 구경만 해?”

“아니요. 서재에 가서 책도 보고, 간식도 먹고, 삼촌 방에서 낮잠도 자요.”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어 가며 말해 주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혼자 알차게 시간을 보내는구나 싶었는데, 그 말을 하는 표정이 별로 즐거워 보이진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권이도가 오기 전까지는 나름대로 심심했던 모양이다.

“오빠는 삼촌 올 때까지 집에서 뭐 해요?”

“오빠 아니라니까…….”

푸스스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차라리 아저씨라고 부르는 쪽이 훨씬 나을 텐데. 나는 벽면에 걸린 그림을 눈에 담으며 느릿느릿 이야기했다.

“혜율이랑 비슷해. 책 보고, 밥도 먹고, 가끔 산책도 하고.”

“심심하겠다…….”

역시, 어린아이에겐 혼자 있는 시간이 심심했던 모양이다. 착하게도, 권혜율은 이 집에 홀로 있을 나까지도 안쓰럽게 여기고 있었다. 나는 살며시 눈을 접어 웃으며 넌지시 혜율이에게 물었다.

“혜율아, 혹시 꽃 좋아해?”

오랜만에 온실 테이블에 차가 준비됐다. 늘 꽃차였지만, 이번엔 권혜율을 신경 쓴 탓인지 딸기를 넣어 달게 만든 과일 차가 올라왔다. 함께 차려진 부드러운 버터 쿠키 역시, 어린아이의 입맛을 고려한 메뉴였다.

소리 없이 우리를 따라온 이태성은 오늘만큼은 온실 문 앞에 뒷짐을 지고 섰다. 혜율이가 무서워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그는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에게 전혀 거부감이 없었다. 하기야, ‘그’ 권이경의 외동딸이니 평소에 경호원을 한두 명 봤으리라고.

“여기 언제 생겼어요?”

“온실?”

“네. 예전에는 이거 없었는데…….”

권혜율은 찻잔을 양손으로 감싸고 데굴데굴 눈을 굴렸다. 양옆에 한가득 심은 꽃을 구경하다가 테이블과 천장에 달린 조명을 꼼꼼히 살펴보기도 했다. 마냥 신기해하는 줄 알았더니, 퍽 진지한 말투로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꽃에 물 주기 힘들겠다…….”

“…….”

다시 말하지만, 일곱 살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어른스러운 나이인가 보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보면 오히려 나이 많은 어른보다 생각이 깊은 것 같았다. 말투나 어휘력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기서 오빠랑 비슷한 냄새 나요.”

권혜율은 그렇게 말하며 허공에 코를 킁킁댔다. 나한테 어떤 냄새가 났나 싶어 손등을 코에 가져다 대자, 권혜율이 미간을 좁힌 채 중얼거렸다.

“꽃 냄새…… 하얀색 꽃 같은 거.”

“……꽃?”

향료를 만져서 그런가. 그렇지만, 오늘 배운 향기는 플로럴 타입이 아니었다. 의아함에 눈을 깜박이는 사이, 그는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햇빛 냄새 나고, 아빠는 물감 냄새 나요. 그리고 삼촌은 나무 냄새.”

“…….”

단적인 설명이었지만, 아마도 페로몬일 것이다. 앞선 두 사람은 둘째치고, 권이도에게 맡았다는 냄새는 단순히 향기 따위가 아니었다. 애초에 향수를 잘 뿌리지도 않지만, 뿌린다고 해도 우디한 계열을 사용하지는 않는 사람이다.

물론 혜율이는 알파였으니, 발현 전에 페로몬 냄새를 맡은 건 이상하지 않았다. 나 또한 첫 히트 사이클을 겪기 전에 어렴풋이 페로몬을 느끼기는 했으니까. 다만, 그가 내게도 꽃 냄새가 난다고 말한 게 문제였지.

“…….”

히트 사이클이 얼마나 남았더라. 아마 조만간일 텐데, 날짜가 불규칙하니 가늠이 되질 않았다. 혜율이를 앞에 두고 몹쓸 꼴을 보일 수는 없으니, 바짝 긴장하고 있어야 할 터였다.

“저 이거 다 먹으면 서재에서 책 읽을래요.”

다행히 혜율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온실에 질려 했다. 그림은 몇십 분을 넋을 놓고 보더니, 빼곡히 심어진 꽃에는 금세 관심을 꺼버린다. 달큼한 딸기 차를 홀짝홀짝 마신 혜율이가 먹다 만 버터 쿠키를 냉큼 한입에 넣었다.

그 후에는 함께 1층 서재로 향했다. 아이가 읽을 만한 책이 있으려나 싶었는데, 혜율이는 알아서 마음에 드는 책을 찾아 소파에 앉았다. 글씨는 별로 없고 동양화가 가득 수록된 책자는, 놀랍게도 정확히 권혜율의 눈높이에 맞춰 꽂혀 있었다.

좋은 아빠가 될 자신이 없다면서. 사소한 부분 하나하나가 아이에게 불편함 없이 갖춰져 있었다. 가령 전용 슬리퍼가 준비되어 있다거나, 식단이 평소와는 다르다거나 하는 것들. 고용인이 챙겼을 가능성도 있지만, 왜인지 전부 권이도의 명령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

대략 30분쯤 지났을 때, 권혜율은 책을 다리에 얹은 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배부르게 밥을 먹고 디저트까지 챙겼으니, 잠기운이 밀려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나는 조심조심 그의 손에서 책을 빼내고, 곤히 잠든 혜율이를 품에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향한 곳은 다름 아닌 권이도의 방이었다. 삼촌 방에서 낮잠을 잔다고 했으니, 아마 그의 침대에서 재워도 될 것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권이도는 조카를 제 방에서 재웠다고 뭐라고 할 사람은 아니었다.

“쉬이…….”

혜율이를 침대에 눕히고 살살 가슴께를 다독였다. 입술을 살짝 벌린 채 새근새근 잠든 모양새가 절로 미소가 그려질 만큼 평화로웠다. 아이들은 어쩜 이렇게 착하고 예쁜지, 젖살이 통통한 볼까지도 퍽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두 시간…….”

권이도가 오기까진 앞으로 두 시간 정도. 나는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며 가물가물 눈을 감았다가 떴다. 방 안 가득 그의 페로몬이 퍼져 있던 탓에 수면제를 잔뜩 먹은 것처럼 머릿속이 몽롱하게 변했다.

홀린 듯, 혜율이의 옆에 쪼그리고 누웠다. 잠시만 눈을 감고 있자고 생각했는데, 눈꺼풀이 내려앉는 순간 수마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어린아이의 온기와 권이도 특유의 페로몬이, 긴장하고 있던 근육을 느슨하게 풀어 주는 듯했다.

그렇게, 나는 혜율이와 함께 나란히 잠이 들었다. 끝없이 밀려드는 잠기운에 져버린 건,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이었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 내 머리를 만지작거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미 몽중에 빠져 버린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빠는 언제까지 자?”

“……오빠?”

푸스스, 웃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내 뺨에 닿는 조심스러운 감촉도 함께였다. 내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자, 익숙한 목소리가 엄하게 얘기했다.

“안 돼, 삼촌 약혼자야.”

그 한마디엔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애정이 가득했다. 나는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만족감을 느끼며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운 한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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