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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억의 끝에 (42)화 (42/131)

42화. Origine du parfum(4)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직 남은 잠기운에 머리가 돌아가는 속도가 느렸기 때문이다. 밤새 봐야 할 거라니. 일이 많이 바빠서, 챙겨야 할 자료라도 있었던 걸까.

“지금은 다 보셨어요?”

내가 묻는 말에 권이도는 숨결 같은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손을 거둬들이며 다른 손에 쥐고 있던 넥타이를 목에 둘렀다.

“아뇨, 아마 평생 봐도 다 보진 못할 것 같군요.”

긴 손가락이 움직이는 모습은 고작 넥타이를 맬 뿐인데도 유려했다. 능숙하게 매듭짓는 모양새가 이상하리만치 야릇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무심코, 나도 모르게 입술이 움직였던 것 같다.

“넥타이…… 제가 매드릴까요?”

“…….”

멈칫, 권이도가 움직임을 멈췄다. 자고 일어난 탓에 목소리가 갈라졌지만 나도 권이도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켜 자연스럽게 그의 손에서 매듭을 가져왔다.

“해보고 싶은 매듭이 있었거든요.”

그는 스르륵 손을 내려 가만히 침대 위에 올려놨다. 나는 언젠가 직원이 해줬던 모양을 떠올리며 더디게 그 매듭을 흉내 냈다. 평상시에 하고 다니기엔 좀 과할지 몰라도 그 주인이 권이도라면 잘 어울릴 것이었다.

“오늘은 옷에 패턴도 없으니까 매듭이 독특하면 예쁘겠네요.”

단조로운 진회색 정장에 실크로 된 넥타이도 검은색이었다. 이 정도 포인트를 준다고 해서 크게 이상하지 않을 거라는 말이다. 그는 내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완성된 매듭을 보고 눈썹을 삐쭉 들어 올렸다.

“……이런 건 어디서 배웠습니까?”

왠지 모르게 가시 돋친 말이었다. 입매를 늘이며 덧붙인 말까지도 그러했다.

“보통, 남의 넥타이는 잘 못 매줄 텐데.”

그의 말대로, 매일 넥타이를 매는 사람들도 정작 타인의 넥타이는 잘 못 매주는 경우가 많았다. 제가 맬 때와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인데, 나와는 별로 상관없는 얘기였다.

“다니는 샵에서 직원이 해줬습니다.”

권이도가 눈을 들어 올렸다. 나는 그와 시선을 마주한 채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원래 한 번 보고 잘 배워서요.”

“…….”

그제야, 그는 표정을 부드럽게 풀었다. 넥타이를 가지런히 정리해 베스트 안에 넣은 그가 나긋나긋 칭찬했다.

“손재주가 좋네요. 엘드리지 노트를 한 번 보고 따라 하긴 힘든데.”

매듭의 이름까지는 몰랐지만 대충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그러다 새삼 갓 깨어난 차림새가 신경 쓰여 멋쩍게 뒷머리를 매만졌다. 권이도는 기분 좋은 미소를 띤 채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푸는 것도 직접 해줍니까?”

“……일찍 들어오시면 생각해 볼게요.”

실소를 흘리며 답하자,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한탄처럼 이야기했다.

“아쉽군요. 원래 입혀 줬으면 벗기는 것까지 한 세트인데.”

결국, 오늘도 일찍 들어오진 못할 거란 말이다. 나도 일 다닐 땐 저렇게 바빴던가. 고작 두 달 전의 일이 아득히 지난 과거 같았다. 권이도는 별다른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미안하지만 오늘도 아침은 혼자 먹어야 할 것 같다며 양해를 구했다.

그 사실이, 조금 서운했던 것 같다.

* * *

아침을 먹은 뒤, 나는 오늘도 권이도에게 받은 차를 타고 공방으로 향했다. 조수석엔 이태성이 앉았고, 그는 어제보단 덜 긴장한 느낌이었다. 아마 며칠이 지나면 나란히 온실에서 책을 읽던 것처럼 익숙해지지 않을까 싶다.

“어서 오세요.”

이른 시간임에도 이희나는 반갑게 웃으며 나를 맞이해 줬다. 뒤이어 들어온 이태성이 입구에 뒷짐을 지고 서자, “태성 씨도 안녕하세요.”라며 살갑게 말을 붙이기도 했다.

“숙제는 다 해오셨어요?”

“네, 여기…….”

이미 권이도에게 보여 주었던 노트인데, 검사를 맡게 되니 새삼 긴장됐다. 내가 노트와 함께 챙겨 온 향료를 내밀자, 이희나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사르르 미소 지었다.

“그건 가지셔도 돼요.”

어차피 수업료에 다 포함된 거라고, 그는 앞으로 자신이 주는 키트는 다 개인적으로 사용하면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노트를 한 장 한 장 넘겨 본 그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

“어때요, 냄새 많이 맡아서 머리 아프고 이런 건 없으셨어요?”

“네, 괜찮던데요.”

“다행이에요. 코가 되게 쉽게 피로해지는 기관이라 여러 가지로 신경 쓸 게 많거든요.”

대화를 나누는 지금도 공방에선 향긋한 냄새가 풍겼다. 천연 오일을 사용한다고 그랬던가. 그래서인지 거부감이 느껴지는 향은 아니었다. 페로몬과는 미묘하게 다르고, 보편적으로 파는 향수와도 미묘하게 다르다.

“후각이 예민하면 예민할수록 좋은데, 또 너무 예민하면 쉽게 피로해지니까.”

하나의 향수를 만들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백여 개가 넘는 원재료 향을 맡아 본다고 했다. 끊임없이 코를 써야 하는 만큼 두통을 느끼거나 힘들어하는 사람도 많다고. 물론 그 또한 훈련을 통해 차차 나아질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한다.

“잘 써오셨네요. 내용도 구체적이고 이미지화도 잘 돼서 이대로 향수 홍보 문구로 내걸어도 되겠는데요.”

다정한 미소만큼이나 조곤조곤한 음성도 상냥하기 그지없었다. 예의상 해주는 말이 분명한데, 그걸 알면서도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이희나는 노트를 마지막 장까지 모두 확인하고 빙긋 웃으며 이야기했다.

“오늘도 수업 끝날 때 어제처럼 향료 몇 개 드릴게요.”

본격적인 수업 시작에 앞서 이희나는 오늘 배울 내용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줬다. 플로럴 타입 향의 구조를 배운다면서, 수업 말미엔 간단히 후각 훈련도 해보겠다고 했다. 고작 나 혼자 듣는 수업인데, 발향 단계와 구조를 꼼꼼히 적어 놓은 프린트물까지 건네줬다.

솔직히 말하면 모든 과정이 재밌지는 않았다. 이론이야 외우기만 하면 되는 거고 조향 실습을 해보는 것도 이희나가 알려주는 대로 따라 하면 그만이었으니.

그런데도, 나는 수업을 듣는 내내 살아 있음을 느꼈다. 다른 무엇도 아닌 내 손으로 선택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고작 두 달이라는 시간을 백수처럼 보내다가, 바쁘게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는 점이 마냥 기쁘기만 했다.

“세진 씨.”

그렇게 모든 수업이 끝나고, 짐을 챙기는 내게 이희나가 가볍게 운을 뗐다. 이태성은 내 쪽으로 다가와 익숙하게 노트와 향료 따위가 담긴 쇼핑백을 건네받았다.

“저 궁금한 거 있는데,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되나요?”

“그럼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이희나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며 넌지시 질문했다.

“세진 씨는 향수 만드는 수업을 왜 듣고 싶어 하셨어요?”

퍽 뜬금없는 질문이긴 했다. 내가 잠깐 대답을 망설이자, 그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차분히 뒷말을 덧붙였다.

“보통 이런 건…… 향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재미 삼아 한두 번씩 들으러 오거든요. 아니면 연인들이 이색 데이트로 오기도 하고요.”

곱다란 양손이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느슨하게 묶고 있던 머리가 어깨를 따라 사르륵 흘러내렸다.

“그래서 사실 저는 세진 씨도 그냥 취미 삼아 한두 번 듣고 마실 줄 알았어요. 애초에 금융그룹 본부장까지 하시던 분이니까 이런 데 관심이 있을 거라곤 생각을 못 해서.”

“…….”

“근데 꽤 진지하게 들으시길래…… 괜히 궁금해지더라고요.”

말하기 싫으면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며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딱히 그런 건 아니었지만, 내 입으로 말하자니 쑥스러운 기분이긴 했다. 그간 기억 속에 묻어 놨던 무언가를 벌써 두 번이나 타인에게 말하게 된다는 게.

“……어릴 때 꿈이 조향사였거든요.”

느릿느릿 운을 떼자 이태성의 시선이 내게로 따라붙었다. 마치 그게 정말이냐고 묻는 것처럼. 나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웃으며 가벼운 말투로 얘기했다.

“꼭 되고 싶었던 건 아니고, 한때 막연히 가졌던 로망 정도예요. 그러다 우연히 좋은 기회가 생겨서 온 거고요. 별거 없죠?”

“와…… 근데 세진 씨랑 너무 잘 어울려요.”

동그랗게 뜬 눈을 보니 아부를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이희나는 나직이 감탄사를 흘리며 이태성을 향해 동의를 구했다. 물론, 이태성은 목석처럼 선 채 이희나에게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럼 일 그만두신 것도 조향사 되려고 그러신 거예요?”

“아, 그건…….”

이 사람이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나도 모르게 약지에 끼고 있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그가 권이도가 소개해 준 사람이라고 해서, 이태성처럼 대략적인 상황을 알고 있으리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이희나는 눈치 빠르게 질문을 거둬들였다.

“이번엔 정말 부담 드리려고 여쭤본 거 아니에요.”

그는 잠깐 내가 낀 반지를 바라봤다가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주제를 다른 쪽으로 돌린다.

“그럼 혹시 조향사 자격증엔 관심 없으세요?”

“자격증이요?”

“네. 국가 공인 자격증은 없고 민간 자격증이라면 있는데, 우선 그거라도 따보시는 건요?”

자격증이라.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부분이다. 애초에 제대로 조향사가 되려던 것도 아니고, 책을 읽던 시간에 다른 취미가 생겼을 뿐이니까. 그래서 괜찮다고 고개를 저으려는데, 그가 오른편에 놓인 책장을 가리켰다.

“뭐라도 하나 남겨 놓으면 나중에 다 도움이 되거든요.”

‘HUI NA LEE’라고 적힌 자격증이었다. 상패처럼 생긴 자격증 세 개가 쪼르르 한 줄에 놓여 있었다. 비단 조향사 자격증만 있는 건 아니었고, 화장품 제조 관리와 관련된 것들도 있었다.

“사실 자격증이 있어도 취업에 직접 도움이 되는 건 아닌데, 없는 것보단 낫더라고요. 어차피 제대로 된 실무는 입사 후에 배우고…… 아, 이건 세진 씨한테는 별로 상관없는 얘기겠네요.”

이희나는 멋쩍게 입매를 당기며 눈을 찡긋했다. 취업이라. 내게는 지나치게 낯선 단어였다. 민망한 얼굴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어쨌든…… 성과가 있으면 기분은 좋으니까.”

대답 없이 다시 책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프랑스 작가의 소설책 몇 권과 향수와 관련된 에세이 몇 권도 보였다. 스프링 노트가 한가득 꽂혀 있는 칸도 있었고, 시향지를 책갈피처럼 사용한 책도 간간이 보였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말을 끝으로 이희나는 대화를 마무리했다. 내일 또 보자는 말에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태성과 함께 공방을 나오면서도 이희나가 한 말들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올랐다.

* * *

그 후로 며칠, 왠지 모르게 바쁜 나날이 반복됐다. 나는 오전엔 공방에 갔다가, 오후엔 이희나가 내준 숙제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숙제할 방이 필요하겠다던 말대로, 권이도는 고용인을 시켜 해가 잘 드는 3층 방을 내 전용으로 내어 줬다. 하얀 탁자와 의자가 놓인 곳엔 온갖 필기도구가 종류별로 진열되어 있었다.

그렇게 숙제를 하다 보면 어느새 창밖에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다. 해가 많이 길어졌지만, 저녁 시간대가 되면 하릴없이 하늘이 컴컴해지는 것이다. 그때까지도 권이도는 퇴근하지 않기에, 나는 홀로 진수성찬 같은 식사를 하고 방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 후에는 또 오지 않는 잠과의 싸움이었다. 김 실장에게 부탁해 받아 온 수면제는 늘 그랬듯 눈곱만큼도 효과가 없었다. 달라진 건, 막연히 잠들려고 노력하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책을 읽거나 조향사 자격증에 대해 알아보며 시간을 보낸다는 점일까.

“……잠을 또 못 잤나 보군요.”

그렇게 한 주가 지난 월요일. 드디어 권이도가 아침 식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퀭한 얼굴로 내려온 나를 보며 미미하게 눈가를 찌푸렸다.

“그렇게 내 방에서 자는 게 불편합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얼굴을 구긴 모습조차 반갑게 느껴졌다면 이상할까. 나는 가느다란 웃음을 흘리며 피곤한 눈두덩을 문질렀다. 잠을 드문드문 자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밤에 뭘 좀 하느라 그랬습니다.”

“밤새는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네요.”

권이도는 담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은 아침 식사 자리에서 하기엔 지나치게 민망한 것이었다.

“미리 알았으면 같이 좀 새울 걸 그랬죠.”

“…….”

뭘 어떻게 같이 새울 거냐고, 그렇게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그와 밤새 할 만한 거라곤 굳이 입으로 듣지 않아도 뻔하기만 했으니. 가볍게 목을 가다듬는 내게 그가 젓가락을 손에 쥐며 이야기했다.

“오전 중에 혜율이가 올 겁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주에 권혜율이 온다고 했지. 그림을 보러 오는 거였지만, 그림‘만’ 보고 가진 않을 것이다.

“아마 정세진 씨가 공방에 다녀오면 집에 와 있을 거예요.”

어린아이를 혼자 둬도 되는 걸까. 그리 생각했다가 금세 고개를 저었다. 내가 집에 없다고 해도, 수많은 고용인이 그의 조카를 잘 보살피고 있을 테니.

“권이도 씨는 언제 퇴근하세요?”

“한…… 5시 정도면 퇴근하겠네요. 이제 바쁜 건 얼추 끝났거든요.”

그리 말하는 얼굴이 참으로 개운해 보였다. 나는 젓가락으로 더덕무침을 가져오며 오늘의 일정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오전에 공방에 다녀오고, 오후엔 혜율이를 보다가, 공방에서 내어 준 숙제는 자기 전에 하면 될 듯했다. 권이도가 이르게 퇴근한다면 오늘은 수면제를 먹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앞으로는 이렇게 늦는 일 없을 겁니다. 내일은 오전에만 잠깐 나갔다가 올 예정이고.”

“내일 무슨 일이 있습니까?”

“뭐…… 대충 그렇다고 해두죠.”

어차피 내일이 되면 알게 될 거라며, 권이도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사실 크게 궁금하진 않았기에 무어라 캐묻지는 않았다. 일과 관련된 부분을 들어 봤자,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

“혜율이가 버릇없게 굴진 않을 텐데, 만약 곤란한 상황이 생기면 나한테 연락해요. 어차피 낯을 많이 가려서, 웬만하면 얌전히 있을 겁니다.”

지난번에 내게 아무런 의무도 없다고 했던가. 불편한 일을 만들지 않겠다는 듯한 뉘앙스였다. 내가 권혜율을 책임질 이유가 없다는 말로 들렸는데, 그게 또 선을 긋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게 문제였다.

“……권이도 씨는 아이를 좋아하세요?”

넌지시 권이도에게 물었다. 언젠가 그가 내게 했던 질문이었다. 권이도는 무심히 시선을 들었다가 눈을 내리깐 채 입술을 달싹였다.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죠.”

모양 좋은 입술이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무언가를 회상하듯 꿈결 같은 표정이 된 그는, 이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근데, 지난번에 말한 것처럼 아직 좋은 아빠가 될 자신은 없어서.”

매사 자신만만하게 굴던 권이도가, 아이와 관련된 부분에선 영 그렇지 못했다. 예의상 겸손을 떠는 게 아니라 정말 자격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섣불리 아니라고 말해 줄 부분은 아니었기에 나는 그냥 가만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럼 다녀올게요. 공방 조심해서 다녀오고.”

식사가 끝나고, 권이도는 가벼운 인사만을 남긴 뒤 집을 나섰다. 나는 멀거니 그 뒷모습을 보다가 문이 닫힌 다음에야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오랜만에 온실이라도 가봐야지.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 * *

지난 일주일 사이 나는 이희나에게 꽤 많은 것들을 배웠다. 플로럴 타입의 향은 여러 가지 조향을 끝낸 상태였고, 현재는 오리엔탈 타입으로 넘어가 향을 분류하는 방법까지 배우는 중이었다. 후각도 훈련으로 발달시킬 수 있다더니, 이젠 권이도가 선물한 향수도 더 깊이 음미할 수 있게 됐다.

“세진 씨 오늘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수업이 끝났을 때, 이희나는 예의 그 발랄한 목소리로 내게 이야기했다. 혹시 데이트라도 하느냐는 말엔 무어라 답할 말을 찾지 못해 웃음으로 얼버무려야 했다. 권이도와의 사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 사실이 조금 헷갈렸던 탓이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뒤. 나는 새롭게 받은 향료와 노트를 들고 내 방으로 향했다. 권혜율은 아직 안 온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계단을 오르던 중이었다.

3층에서부터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조그만 인영이 나타났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난간을 꼭 붙잡고, 똘망똘망 동그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아이.

“…….”

“…….”

권이도의 조카인 권혜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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