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Origine du parfum(3)
첫 방문이었기 때문에 공방에서의 수업은 오리엔테이션에 가까웠다. 이희나는 앞으로 진행될 수업에 관해 설명해 주고, 내킬 때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이야기했다. 내가 미안한 표정을 짓자,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며 “괜찮아요. 두둑이 받았거든요.”라고 눈을 찡긋하기도 했다.
권이도는 정말 내가 저녁을 먹기 전에 돌아왔다. 공방에 다녀와 방에 틀어박혀 있던 나는, 고용인이 전달해 주는 말을 듣자마자 서둘러 현관으로 나왔다. 마침 실내로 들어오던 그가 반갑게 맞이해 주는 나를 보고 잠깐 멈칫했다.
“다녀오셨어요?”
“…….”
짙은 시선이 내 얼굴에 따라붙었다. 왜 그러나 싶어 고개를 기울이자 그는 입가를 가린 채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더니 보일 듯 말 듯 엷은 미소를 짓는다.
“진작 일찍 올 걸 그랬네요.”
권이도는 고용인에게 가방을 건네주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잔잔히 풍기는 페로몬 덕에 기분이 느슨하게 풀렸다.
“이렇게 열렬히 맞이해 줄 줄 몰랐는데.”
그렇게 말한 권이도가 슬쩍 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
순간, 키스하려는 줄 알았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온 얼굴은 입술이 아닌 목덜미로 향했다. 주인을 맞이하는 개처럼, 킁킁 냄새를 맡은 그가 의아한 어투로 물었다.
“향수 뿌렸습니까?”
“아…….”
괜히 멋쩍게 어깨를 움츠렸다. 왜 그러나 했더니. 나한텐 뭔가 다른 냄새가 났던 모양이다.
“아뇨. 향료 때문에 그럴 겁니다.”
“향료?”
“네, 희나 씨가 숙제를 내줬거든요.”
나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그에게 오른손을 펼쳐 내밀었다. 향기가 난다면 목보다는 이쪽이 더 짙게 날 터였다. 그는 순순히 고개를 숙여 목덜미에 그랬듯 손끝 냄새를 맡았다.
“종일 향료를 가지고 놀았더니 냄새가 뱄나 봐요.”
‘숙제를 하나 내드릴게요.’
공방에서의 수업이 끝나고, 이희나는 내게 손가락만 한 갈색 병을 건네줬다. 저마다 다른 향료가 담긴 병이었는데, 표면엔 이름이 적힌 라벨이 붙어 있었다. 개수는 총 16개였고, 그는 내게 각각 냄새를 맡고 설명을 적어 오라고 했다.
‘꼭 글이 아니어도 되고, 노래나 그림, 아니면 동작 같은 것도 괜찮아요. 대신 이 향을 맡아 본 적 없는 사람도 구분할 수 있도록 가능하면 자세하게 쓰는 게 좋죠.’
그리 어렵지 않은 숙제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냄새를 맡아 보니 헷갈리는 부분이 많았다. 차이점을 모르는 건 아니었고, 그 차이점을 남에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알 수 없는 정도.
“아, 향료…….”
권이도는 의미 없는 감탄사를 흘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무심한 얼굴로 눈썹을 삐쭉 치켜올린다.
“강사 이름이 이희나입니까?”
“…….”
아, 데자뷔. 분명 제 입으로 괜찮은 조향사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황당해하는 나를 눈치챘는지 그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름까진 몰라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 참으로 뻔뻔스러웠다. 픽 웃음을 흘리자 권이도가 나를 따라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먼저 걸음을 옮기며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씻고 내려올게요. 기다리고 있어요.”
오랜만에 그와 함께한 저녁 식사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즐거웠다. 많은 대화가 오가진 않았지만, 맞은편에 누군가가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분이 한결 나았다. 권이도는 차분히 공방에서의 일을 들어 줬고, 괜찮으면 제게도 숙제한 노트를 보여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나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노트를 들고 권이도의 방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들어오는 그의 방엔 역시나 우성 알파 특유의 페로몬이 가득했다. 머릿속이 몽롱해지는 기분이라, 잠깐 멍하니 방문 앞에 서 있어야 할 정도였다.
“이게 공방에서 받아 온 노트예요?”
권이도는 한 장 한 장 노트를 넘기며 내가 적은 내용을 꼼꼼히 살펴봤다. 그래봤자 ‘장미가 가득한 꽃밭을 지나가는 느낌. 날씨 좋은 날 햇빛 아래 잘 말린 옷 냄새.’ 따위의 내용인데 말이다. 서류를 검토하는 것처럼 진지한 표정인 탓에, 괜히 보고서를 올린 직원이라도 된 양 긴장이 됐다.
내리깔린 두 눈이 찬찬히 내가 적은 글씨를 따라 움직였다. 한쪽 다리를 꼰 모양새가 퍽 여유로워 보였다. 일할 때와는 달리 차분히 내려온 앞머리가 반듯한 이마를 살짝 가리고 있었다.
“잘 썼네.”
고작 한마디였는데, 그 칭찬에 기분이 들뜨려 했다. 나를 의식하지 않고 혼잣말처럼 흘러나온 목소리라 더욱 그랬다. 마지막 열여섯 번째 향료까지 읽은 권이도는 퍽 만족스러운 얼굴로 눈을 들어 올렸다.
“공방은 내일도 갑니까?”
“네, 평일에는 매일 가려고요.”
할 게 생겨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우선 일주일 정도 기초를 배우기로 했다. 향을 구분하고, 차례대로 배합해 보며 원하는 향수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희나가 말하길, 실제로는 더 복잡한 과정이지만 일단은 흥미 위주로 진행하겠다고 했다.
“숙제는 방에서 했어요?”
“네, 테이블에서…….”
“공부할 방이 하나 필요하겠군요.”
권이도는 홀로 결론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공방에 얼마나 오래 다닐지도 모르면서 방까지 내어 줄 필요는 없을 텐데. 그럴 필요 없다고 거절하려 했으나, 그가 주제를 돌리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이거, 정세진 씨 페로몬이랑 비슷할 것 같네요.”
그러면서 가리킨 건 내가 세 번째로 쓴 향료였다. 병에 있는 라벨을 따라 ‘White jasmine’이라고 적은 뒤, 여러 비유적인 표현으로 향기를 적어 놨었다. 노트를 한 장 더 넘긴 그는 이번엔 ‘Warm Cotton’이라고 적힌 페이지를 가리켰다.
“이것도 그렇고.”
“…….”
별거 아닌 행동이었는데, 왜 이렇게 간지러운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그가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면 목소리가 꿈꾸는 것처럼 감미로웠기 때문일까.
“그 옆에 있는 건 권이도 씨 페로몬이랑 비슷하던데요.”
‘Sandalwood’ 그렇게 적힌 페이지를 가리키자 권이도가 픽 웃음을 흘렸다. 사실, 대충 가장 비슷한 걸 골랐을 뿐이고 그의 페로몬은 도무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이었다. 지금 느껴지는 것만 봐도 머릿속이 녹진해질 정도로 매력적이지 않은가.
우리는 한동안 내가 적어 놓은 향료를 가지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온실에 가면 이런 향기가 난다느니, 새로 뽑은 차에선 이런 냄새가 난다느니. 이것과 이걸 섞으면 정말 말도 안 되는 향수가 나올 것 같다느니.
마치 소꿉장난이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별거 아닌 주제로 온종일 수다를 떠는 고등학생들처럼, 영양가 없고 의미 없는 말들로 시간을 보냈다. 오랜만에 마련된 대화 자리가 마음에 들어서 사사로운 잡담을 주고받는 것조차 나쁘지 않았다.
“불면증에 좋은 향은 없습니까?”
“음, 있긴 한데…….”
진정 효과가 있는 게 라벤더였던가. 그렇지 않아도 불면증 때문에 이미 온갖 향초를 종류별로 써보았다. 물론 제대로 효과를 본 건 아무것도 없었고, 숙면에 도움이 된 건 딱 하나였다.
“가장 좋은 건 권이도 씨 페로몬이라서요.”
그가 페로몬을 뿌려 주길 바라서 한 말은 아니었다. 그냥 생각난 김에 넌지시 이야기했을 뿐. 오늘은 네 덕에 잘 잘 수 있다. 그 정도 감사 인사를 하려고.
“오늘은 덕분에 푹 자겠어요.”
권이도는 내 말을 듣자마자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내게로 향해 온 시선에 여러 감정이 일렁였다. 이내, 눈을 한 번 감았다 뜬 그가 여상스러운 목소리로 운을 뗐다.
“내가 없어도 내 방에는 마음대로 들어와도 됩니다.”
모순되지 않는가. 2층 서재엔 들어가지 말라고 해놓고, 방에는 마음껏 들어오라는 게.
“잠이 안 오면, 내 침대에서 자고 있어도 되고.”
너그러운 허락이었으나 알겠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기껏 일하고 온 권이도가, 늘어지게 잠든 나를 보면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게다가 멋대로 그의 공간을 빼앗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권이도 씨는 어디서 주무시려고요.”
그래서 장난스레 말했는데, 그의 미소가 미묘해졌다. 그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미미하게 눈가를 찌푸렸다.
“새삼스러운 말을 하는군요.”
그의 시선이 침대를 향했다. 세 사람이 누워도 남을 만큼 커다란 침대였다.
“침대가 저렇게 넓은데…… 이제 와서 나랑 내외라도 하려고?”
“…….”
하기야, 알몸으로 뒹굴기까지 해놓고 한 침대를 쓰는 게 뭐 대수라고. 그래도 단순히 섹스를 하는 것과 같은 곳에서 잠이 드는 건 좀 다르지 않나. 정신없이 몸을 섞은 기억은 있어도 연인처럼 나란히 누워 있던 기억은 없단 말이다.
“……말씀은 감사합니다.”
거절하긴 애매하고, 그렇다고 승낙하기에도 곤란했다. 예의를 차려 웃음으로 때우려는 내게 그는 알 만하다는 듯 대꾸했다.
“절대 내 방에서 자진 않겠군요.”
이제 이 정도론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그가 눈치 빠르게 구는 게 어디 하루 이틀도 아니고.
“시간이 늦었네요. 외출하고 와서 피곤할 텐데 그만 자도록 하죠.”
권이도는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슬슬 졸리던 참이라 군말 없이 노트를 챙겨 일어났다. 그런데 방을 나서려는 내게 권이도가 대뜸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아닌가.
“내 침대에서 자요.”
“……예?”
그는 아무렇지 않게 내게 다가와 노트를 가져갔다. 다시 테이블에 노트를 내려놓은 그가 힐끗 침대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처음이 어렵지, 한두 번 자다 보면 정세진 씨도 익숙해지겠죠.”
“…….”
텅 비어 버린 손이 움찔 떨렸다.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머뭇거리는 나를, 권이도는 은근한 목소리로 꾀어내기 시작했다.
“내일도 공방에 가야 할 텐데 푹 자두는 게 좋잖아요.”
“…….”
“내 페로몬이 가장 좋다면서, 이 좋은 기회를 날려 버릴 생각입니까?”
사실, 혹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가 없는 방에 들어오는 거면 몰라도, 권이도가 자고 가라고 권유했으니 꺼릴 건 아무것도 없다. 다만, 한 가지 걱정스러운 건 모락모락 떠오른 민망함 정도.
“……같이 눕습니까?”
불을 끄고 침대에 눕는 과정이 지나치게 쑥스럽단 생각이 든다. 첫날밤을 치르는 신혼부부도 아니고,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연인도 아닌데 말이다. 함께 이불로 들어가야 한다는 게 이토록 의식되는 일일 줄은 몰랐다.
“나랑 더한 짓도 해놓고, 고작 그게 부끄러워요?”
권이도는 그런 내 생각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의아한 얼굴로 되묻곤 입가를 가린 채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었으니. 서늘한 눈매가 곱게 휘어지는 장면은 몇 번을 보아도 도무지 적응되질 않았다.
“기대하게 했으면 미안한데, 오늘은 내가 할 게 좀 남아서.”
“…….”
서운함……이라고 해야 할까. 순간적으로 부푼 기분이 사그라들었다. 안도감이 드는 한편 왠지 모르게 아쉽다는 생각도 들었다. 문제는, 그런 표정을 권이도에게 정확히 들켜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정세진 씨.”
가늘게 웃음을 흘린 그가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뺨을 매만지고 귀와 목 언저리를 차례대로 쓸어내렸다.
“오늘 왜 이렇게 귀엽게 굴지.”
“무슨…….”
목덜미가 달아오르는 듯했다.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그는 내 뒤통수를 고정한 채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쪽, 하고 떨어진 입술이 약간의 간격을 두고 조금 더 깊게 맞물렸다.
“…….”
스르륵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아랫입술을 살짝 베어 문 그가 혀로 입술 틈새를 간지럽혔다. 내가 파르르 어깨를 떨자 가느다란 웃음을 흘리며 부드럽게 혀를 밀어 넣는다.
다리에 힘이 풀릴 만큼 아찔한 기분이었다. 그가 다른 손으로 허리를 감싸지 않았다면 진작 휘청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를 단단히 옭아맨 그는 지금껏 하지 못한 행위를 다 하겠다는 듯 양껏 농밀한 입맞춤을 이어 갔다.
정신을 차렸을 땐, 나 또한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있었다. 고개를 틀어 각도를 바꾼 그가 장난스럽게 내 혀를 깨물었다. 아프지 않을 만큼 잘근거리다가 약을 발라 주듯 혀로 비비적거리기도 한다.
온종일 향긋한 향료와 있었는데도, 그에게 풍기는 페로몬이 가장 근사하단 생각이 든다. 숨결에 섞인 잔잔한 페로몬은 권이도 특유의 묵직함과 달큼함을 동시에 담고 있었다.
“……으응.”
나도 모르게 비음이 샜다. 그가 온 성감을 예민하게 만들어 주물럭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래 봤자 고작 키스일 뿐인데. 열렬히 몸을 섞은 것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아, 곧 있으면 또 히트 사이클이겠구나.
그런 생각을 할 즈음에야 그는 천천히 입술을 떼어 냈다. 젖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 입술은 못다 한 행위를 아쉬워하듯 두어 번 같은 위치에 문대졌다. 한 뼘 정도 거리를 넓힌 그가 내 머리를 쓸어 넘겨 주며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자고 있어요. 금방 일하고 올 테니까.”
이번엔 무어라 거절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자, 권이도도 만족스럽게 나를 놓아줬다. 온몸 가득 스며든 알파 페로몬이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아늑한 안정감을 안겨 줬다.
* * *
어느 정도 불편하리라는 염려와 달리, 나는 그의 침대에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푹신한 침구와 짙은 나무 냄새에 둘러싸여 가을비가 내리는 숲에 편안히 누워 있는 기분이었다. 분명 건조하디 건조한 페로몬인데, 어찌 이리 밀도 높은 향을 띠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렇게 잠이 든 다음에는 그 흔한 악몽 하나 꾸지 않았다. 요 며칠 불면증과 함께 나를 괴롭히던 마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수면제를 한 움큼 먹고도 고통스럽게 떠오르던 장면들은 권이도의 페로몬 한 번에 깨끗이 지워졌다.
할 수만 있다면 매일 이렇게 단잠을 취하고 싶었다. 수면의 질은 삶의 질과 직결되는지라 하루만 제대로 자고 일어나도 몸 상태가 확 달라졌다. 이 정도면 염치 불구하고 매일 그의 방에 찾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토록 개운하게 잔 게 얼마 만일까. 그런 생각으로 잠에서 깨어났을 땐, 누군가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고슬고슬한 머리칼을 만지다가 흘러내린 앞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 넘겨 줬다.
“…….”
나는 무의식중에 그 손에 얼굴을 문질렀다. 몸을 뒤척여 옆으로 돌아눕고 멀어지려는 손을 다시 붙잡아 끌고 왔다. 그대로 이마를 가져다 대자, 나직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리광은…….”
조그만 목소리였으나 귓가에 감기는 느낌이 참으로 또렷했다. 묵직한 음성은 중독될 것처럼 그 울림이 독특했다.
나는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았는지, 어슴푸레한 여명이 방 안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가만가만 눈을 깜박이자 기다란 손가락이 이마를 살짝 간지럽혔다.
“내가 깨웠습니까?”
권이도는 섬세한 손길로 내 얼굴선을 살며시 덧그렸다. 이마에서 눈썹, 반쯤 감긴 눈꼬리, 뺨을 지나 턱 아래까지.
“아침 먹을 때까지 더 자요.”
“…….”
벌써 나가는 걸까. 잠기운이 남은 시야로 그가 정장을 입은 모습이 들어왔다. 넥타이는 매지 않았고, 평소와 달리 셔츠 단추마저 두어 개 풀어 놓은 채였다.
“……안 주무셨어요?”
결코, 자고 일어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평소와 다를 거 없는 안색이었지만 본능적인 촉이 주는 신호가 그랬다. 나를 침대에 재워 두고, 그는 한숨도 자지 않은 채 출근 준비를 하는 것이라고.
“뭐…… 일부러 안 잔 건 아니고.”
역시나 권이도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혹시 내가 있어서 불편했나 싶었는데, 마냥 부드러운 눈빛을 보니 그건 또 아닌 듯했다. 귀한 것을 만지듯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어루만진 그가 살며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냥 뭘 좀 생각하느라.”
밤새 무슨 생각을 그리했을까. 늘 빈틈없는 얼굴이 오늘따라 유독 처연해 보였다. 속눈썹이 가지런하고 길어서인지, 아니면 가만히 다문 입술이 고와 보여서인지.
권이도는 예의 그 단정한 음성으로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자는 시간을 아껴서 볼 게 있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