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Origine du parfum(2)
그가 애써 신경 써 준 것이니 여러모로 그게 좋을 터였다. 사실상 깊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마음은 이미 기울었고, 자그마한 망설임이 남아 있었을 뿐이니까. 그리 큰 변화가 생기리라 기대하진 않지만, 가벼운 기분 전환 정도는 될 듯했다.
“만약 가게 되면 언제 가십니까?”
“글쎄요. 권이도 씨는 오늘 당장도 괜찮다던데. 오늘은 좀 그렇고 내일쯤?”
뻐근한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요새 불면증이 다시 도진 탓에 조금만 눈을 오래 쓰면 피곤함이 밀려들었다. 다행히 악몽을 꾸진 않았는데, 수면제를 다 털어 먹어도 아침까지 잘 수가 없었다.
잠이 잘 오는 향을 만들면 좋을 텐데…….
사실, 불면증의 해결책은 간단했다. 이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 그랬던 것처럼 매일 저녁 권이도의 페로몬을 느끼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바쁘다는 사람을 붙잡고 늘어질 수 없으니, 그와 비슷한 냄새로 어떻게든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이태성은 그렇게 대답하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내게 남은 수면제 개수를 헤아리며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조만간 김 실장에게 연락해야 할 듯했다.
* * *
권이도는 정말 내가 잠들 때까지 퇴근하지 않았다. 남은 수면제를 털어 먹은 게 새벽 3시, 그 후 눈을 뜬 건 6시였으니 세 시간도 채 자지 못한 게 된다. 잔뜩 피곤한 얼굴로 식탁에 앉는 나를 보고, 그가 삐쭉 눈썹을 치켜올렸다.
“……잠을 못 잤습니까?”
“네, 뭐…….”
나는 대충 대답을 얼버무리며 멋쩍게 시선을 피했다. 세수를 하며 얼핏 봤는데 오늘은 정말 안색이 좋지 못했다. 권이도가 보면 신경 쓸 텐데,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좀 설쳤습니다.”
“조금 설친 게 아닌 것 같은데.”
권이도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렇게 얘기했다. 눈가를 살짝 찌푸린 채 가볍게 묻기도 했다.
“아직도 불면증이 심합니까?”
“그냥…….”
나는 대충 얼버무리려다 말고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가 콕 집어서 ‘불면증’이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말하는 것만 들으면 꽤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뉘앙스다.
뭐…… 불면증 정도는 현대인에게 종종 있는 고질병이긴 하니까.
“심한 건 아니고. 가끔 그러네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여상하게 말했다. 심각하다고 말해 봤자 별로 득 될 것이 없었다. 권이도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오늘은 일찍 들어오죠.”
“예?”
“저녁 먹지 말고 있어요. 빨리 올 테니까.”
분명 이번 주까지는 바쁘다고 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가 일찍 들어온다면 나로선 좋은 일이었다. 오늘 즈음 김 실장에게 연락하려고 했는데. 어쩌면 그러지 않아도 될 듯했다.
“그래서, 공방은 생각해 봤어요?”
“아, 네. 괜찮으시면 오늘 다녀올까 합니다.”
아침 메뉴는 연어를 통으로 구운 스테이크와 샐러드였다. 겉은 노릇노릇한데 나이프로 슥 잘라 보니 안쪽은 육즙이 그대로 살아 촉촉했다. 나는 반으로 잘라 놓은 방울토마토를 하나 찍어 먹고 그를 보며 눈가를 찡긋했다.
“물론 이태성 씨도 같이요.”
“잘 생각했어요.”
권이도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느릿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살짝 턱을 까딱한 것이다. 표정 변화가 크진 않았지만, 평소에 워낙 무뚝뚝한 사람이라 웃을 때면 그 차이가 커다래 보였다.
“여기서 별로 멀지 않으니까 편할 때 가면 돼요. 시간은 정해진 게 없습니다.”
“그쪽도 일정이 있을 텐데…… 그렇게 아무렇게나 가도 됩니까?”
“일정?”
그는 별소릴 다 한다는 듯 되물었다. 픽 코웃음을 흘리는 모양새가 참으로 뻔뻔해 보였다.
“그런 건 다 비우면 그만이죠.”
“…….”
아무래도 두 번 갈 곳이라면, 오늘 가서 시간 약속을 정하는 게 좋을 듯했다. 오매불망 나만 기다리게 할 순 없으니, 일정을 확실히 해두는 게 서로에게 좋겠지.
“잘 다녀와요.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저 연락하라는 말은 이제 거의 외울 지경이었다. 내게 무슨 일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느냐마는. 저 걱정스러운 뉘앙스는 늘 변하지 않았다. 거기다 가만히 마주친 짙은 눈동자까지.
“……덕분에 재미있는 경험을 하겠네요.”
슬쩍 시선을 피하고 포크로 샐러드를 짓이겼다. 아버지와 함께 있었다면 당장 불호령이 떨어질 행동이었다. 그러나 권이도는 그저 간지러운 웃음을 흘리며 제 식사에 집중할 뿐이었다.
얼굴에 따라붙는 시선이 지나치게 낯간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권이도가 출근한 뒤, 나는 공방으로 가기 위한 간단한 채비를 마쳤다. 드레스룸에서 편한 옷을 찾아 갈아입고, 그에게 받은 차 키까지 챙겼다. 혹시 방해될까 싶어 서랍에 줄줄이 진열된 시계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중문 밖에는 이태성이 대기하고 있었다. 오늘도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던 그는 나를 보자마자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딱히 서두를 필요까진 없었는데, 빠릿빠릿하게 엘리베이터 버튼까지 누른다.
“고생하시네요.”
“……인사차 하시는 말씀인 건 아는데,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태성은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무언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들은 안 그러는데, 내가 하면 진담처럼 들린다는 이유였다. 진담이 맞다고 말해 주려고 했는데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차는 어떤 걸 타고 가십니까?”
“저쪽에 세워 둔 걸…… 아, 운전은 제가 할 겁니다.”
나는 가볍게 이야기하고 먼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권이도와 함께 한강에 다녀온 이후 얌전히 주차만 해둔 새하얀 세단으로.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자 이태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차 뽑으셨습니까?”
“아뇨, 받았습니다.”
부러움 반, 그리고 아연함 반. 누구에게 받았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그는 상대가 누군지 눈치챈 듯했다. 하기야, 이 정도 고가의 차를 선물할 상대가 권이도 빼고 누가 있겠느냐마는.
“선물 받은 차를 남한테 맡길 순 없잖아요.”
자연스럽게 운전석 쪽으로 향하자, 그가 차 앞에서 머뭇거렸다. 덩치가 커다래서 그런지 망설이는 모습이 지나치게 잘 보였다. 왜 저러나 싶어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 그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럼 제가 조수석에 앉습니까?”
“예, 그럼 어디 앉습니까?”
그는 말문이 막힌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내가 운전석에 앉으면 그가 앉을 수 있는 곳은 딱 두 군데밖에 없었으므로.
“뒷좌석에 앉으셔도 되고요.”
“…….”
묵묵히 조수석 문을 여는 모습이 참으로 어색했다. 구태여 토를 달지 않는 걸 보니 그간 내게 적응이 잘 되었나 보다. 눈치가 빨라서 좋다고 해야 할까. 처음엔 마냥 융통성 없는 줄 알았는데, 요새는 무인도에 떨어뜨려도 살아남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안전벨트부터 하세요.”
“…….”
차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는지, 이태성은 티 나지 않게 주변을 둘러봤다. 안전벨트를 매며 뒷좌석을 살피고, 정면을 보는 척 콘솔과 백미러도 살폈다.
“편하게 구경해도 되는데.”
푸스스 웃음을 흘리며 말했는데, 오히려 움직임은 더 딱딱해졌다. 꼿꼿하게 정면을 보는 모습이 참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얌전이 무릎 위에 주먹을 올려놓은 터라 조신하게 보이기도 했다.
“이것보다 비싼 차도 타 보셨으면서 뭘 그럽니까.”
“……그건 조수석이 아니지 않습니까.”
“원래 운전하는 쪽이 더 긴장하지 않나?”
기분 좋은 미소를 띤 채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역시나 승차감 하나는 끝내주는 차였다. 이태성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차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눈동자가 초롱초롱해졌다.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네요.”
권이도가 이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할까. 조수석을 내어 줬단 사실을 싫어할 수는 있지만, 내가 직접 운전하고 싶었다면 별말 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온실과 달리, 이 차는 이미 권이도와 공유한 공간이지 않은가.
“차를 본부장님이 직접 고르신 겁니까?”
“아뇨, 선물해 준 사람 센스예요.”
“역시…….”
그렇게 말하는 느낌이 영 미묘했다. 역시 권이도가 대단하다는 건지, 아니면 내가 골랐을 것 같진 않았다는 건지. 아마도 후자였는지, 그가 변명하듯 덧붙였다.
“본부장님은 차에 관심이 없으실 것 같았습니다.”
“맞아요. 잘 모릅니다.”
권이도는 내게 잘 맞는 차를 못 만났을 뿐이라고 하던데. 나도 그쪽으로 생각이 기울었지만 그냥 대충 긍정하고 말았다. 차를 좋아한다기엔, 권이도가 골라 준 이 하얀 세단만이 유일하게 내 마음에 들었으니까.
“저는 가게 앞에서 대기하겠습니다.”
그가 소개해 준 향수 공방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깔끔한 외관에 지하에는 주차장도 있어서 차를 가지고 왔음에도 그다지 번거롭지 않았다. 적당한 위치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오자, 나무로 된 간판이 가장 먼저 보였다.
“이태성 씨, 그거 알아요?”
“모릅니다.”
그게 뭐냐고 묻지도 않고 퍽 단호한 대답이었다. 나는 픽 웃음을 흘리며 느릿느릿 이야기했다.
“여기 가게 이름, 몽슈슈라고 읽는데 거기서 슈(chou)가 양배추예요.”
“……양배추요?”
“네, 양배추. 직역하면 나의 작은 양배추.”
처음 프랑스어를 배울 때 교수님이 가장 먼저 해준 얘기였다. 정확히는 자기야 정도의 애칭이었지만, 나는 거기까지 말해 주는 대신 유리문을 밀었다. 이태성은 황당한 얼굴로 뚫어져라 간판을 보고 있었다.
딸랑.
“어서 오세요!”
문에 달린 종소리와 함께 발랄한 인사가 들렸다. 나는 안으로 들어서며 찬찬히 주변을 둘러봤다. 벽면엔 갈색 병에 담긴 향료가 줄줄이 세워져 있고, 테이블엔 시향 용지와 여러 가지 공병이 놓여 있었다. 전체적으로 나무로 이루어진 인테리어는 아늑하고 따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중요한 건, 유리문을 기준으로 안쪽엔 온통 향긋한 냄새가 가득하단 점이었다.
“…….”
천천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꽃향기, 아니면 조금 더 상큼한 열매 향기라고 해야 할까. 머리가 아플 정도는 아니었고 딱 기분을 전환하기에 좋은 정도였다. 향수 가게를 안 가본 것도 아닌데, 여긴 유독 공기가 청량했다.
“어…… 정세진 씨?”
“……아, 안녕하세요.”
멍하니 그 향기에 취해 있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쪽을 바라봤다. 조심스레 내 쪽을 살피던 여자가 활짝 해사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오셨어요?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는데.”
딱 보기에도 선한 외모를 가진 여자였다. 부드러운 재질의 하얀 블라우스에 통이 넓은 베이지색 슬랙스를 입고 있다. 나보다 한참 작은 체구의 그는 내게 가까이 다가오며 살갑게 말을 붙였다.
“TV에서만 보다가 이렇게 뵈니까 새롭네요. 저는 이희나예요.”
예쁜 이름이네. 나는 그리 생각하며 그가 내민 손을 붙들었다. 키가 작다 싶더니만 손 크기도 나보다 한참은 작았다.
“정세진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네, 저도요.”
베타인가. 페로몬이 느껴지지 않는 걸 봐선 아마 베타일 것이다. 그럼에도 잔뜩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게, 누가 봐도 향을 만드는 사람다웠다. 어릴 적에 ‘조향사’를 생각하면 어렴풋이 떠오르던 이미지대로였다.
“저, 근데 밖에 서 계시는 분은…….”
이희나는 슬쩍 유리문 바깥을 내다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문을 등진 채 올곧게 서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이태성이었다.
“제 경호원인데, 앞에서 대기한다네요.”
“와…… 저렇게 서 계시면 사람들이 다 쳐다볼 텐데.”
그는 아연한 얼굴로 중얼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눈이나 코가 다 동글동글해서 인상도 둥근 게 아닌가 싶다. 슬쩍 내 눈치를 살핀 이희나가 넌지시 문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들어와서 기다리라고 말씀드려도 되나요?”
편한 대로 하라고 말하자마자, 그는 금세 유리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닫혔기 때문에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이희나가 이태성의 팔을 툭툭 두드리고 선하게 웃으며 안쪽을 가리키는 모습만 보였지.
딸랑.
“안에서 기다리시기로 했어요.”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태성은 묵묵히 공방 안으로 들어왔다. 비록 안으로 들어온 뒤에도 동상처럼 문 근처에 서 있었지만 말이다. 내일부터는 책을 가져와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가느다란 미성이 나를 불렀다.
“세진 씨는 이쪽으로 오시면 돼요.”
그가 가리킨 건, 마찬가지로 원목으로 된 의자였다. 입구를 기준으로 앞면에 바 형식의 테이블이 있고, 이희나와 내가 마주 볼 수 있는 구조였다.
“그…… 호칭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선생님?”
나는 의자에 앉아 이희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아무래도 배우러 온 입장이니 선생님이 적당할 것 같은데, 이희나의 의견은 그렇지 못했나 보다. 가늘게 침음한 그가 민망한 얼굴로 콧잔등을 찡긋했다.
“대부분 배우러 오는 분들은 희나쌤이라고 부르긴 하는데…….”
길게 늘어진 말꼬리가 그가 하려는 말을 대신하는 듯했다. 나한테 그 말을 듣기엔 어색한 모양이었다. 그 이유를 묻기도 전에 이희나가 깔끔하게 호칭을 정리했다.
“그냥 편하게 부르세요. 저도 세진 씨라고 부를 테니까.”
“그럼 희나 씨 정도로 부를게요.”
“그래 주시면 감사합니다.”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이 참으로 해말갛다. 구김살 없이 서글서글한 걸 보니, 앞으로 함께할 시간이 불편하진 않을 듯했다. 그러고 보면, 권이도가 괜찮다고 표현한 사람(비록 이태성뿐이었지만)들은 정말 다 대하기 편했던 것 같다.
“경호원분은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려 이태성을 바라봤다. 제게 하는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이태성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온실에 처음 따라올 때도 그러긴 했지만, 가만 보면 정말 우직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이 팀장님, 대답 안 해주실 겁니까?”
하는 수 없이 한마디 덧붙이자, 이태성이 흠칫 눈을 깜박였다. 그러곤 슬며시 인상을 찌푸리며 입술을 달싹인다. 아마 ‘팀장’이라는 호칭이 불만스러웠나 본데, 안타깝게도 무어라 항의하진 못했다. 그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무뚝뚝하게 대답했을 뿐.
“이태성입니다.”
가만히 있던 나까지 민망할 만큼 딱딱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이희나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넌지시 제안했을 뿐.
“태성 씨도 괜찮으면 와서 같이 들으세요. 거기 가만히 서 계시면 힘들잖아요.”
“아뇨, 괜찮습니다. 서 있는 게 편합니다.”
대답은 단호함을 넘어 냉랭하게 들렸다. 내가 한마디만 하면 앉을 게 분명했지만,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함부로 굴고 싶진 않았다. 아마 이태성의 성격상 정말 서 있는 게 편하기도 할 거고.
“그럼 나중에 내키면 같이 들으세요. 거기 의자 있으니까 다리 아프면 편하게 앉으시고요.”
다행히 이희나는 별다른 불쾌한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 무안함이나 짜증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느슨하게 묶었던 머리를 다시 고쳐 묶은 그가 책꽂이에서 얇은 노트 하나를 꺼냈다.
“대충 얘기는 들었는데…… 향수를 만들고 싶으시다고 했죠?”
노트엔 또박또박한 글씨로 여러 가지 용어가 적혀 있었다. 그는 노트를 돌려 내 쪽으로 내밀며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우리 수업의 목표는 결과적으로 세진 씨가 원하는 향을 하나 만드는 거예요.”
탑 노트, 미들 노트, 베이스 노트. 그리 적힌 글씨 깨알같이 설명이 적혀 있었다. 기본적인 단어였기 때문에, 나 또한 모르지는 않았다. 딱히 향수에 관심이 있지 않더라도, 이 정도는 샵에 있던 직원의 설명만 들어도 머릿속에 들어왔다.
이희나는 가만히 테이블에 손을 짚은 채 가벼운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만들어 보고 싶은 향이 있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