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억의 끝에 (35)화 (35/131)

35화. Quelques Fleurs(7)

오소소 소름이 끼쳤다. 갑작스레 튀어나온 반말은 둘째치고, 그가 뿜어낸 페로몬이 지척까지 다가온 탓이었다. 호흡으로, 피부로 들러붙은 페로몬은 의도하는 바가 딱 하나밖에 없었다.

“설마 내가 진짜 실수로 와인을 엎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

나를 발정시키기 위한, 저급하고 지저분한 페로몬이었다. 덕지덕지 들러붙는 감각은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낯선 것이었다.

나는 단 한 번도 알파가 상대를 ‘억지로’ 흥분시키기 위해 흘리는 페로몬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애초에 제대로 접해 본 알파 페로몬은 권이도가 처음이었으니, 이토록 불쾌한 기분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조금씩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폐부가 따끔거렸다.

“그냥 좋게 좋게 서로 즐기자고. 알 거 다 아는 사람들끼리 귀찮게 하지 말자. 응?”

“……지금 무슨 말씀을 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머리가 생각을 정리하는 속도가 느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이 당황스럽기도 한데, 자꾸만 속이 울렁거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런 일을 예상치 못한 것도 아니건만. 담담하게 대처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 일들이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상대는 남자였고, 나도 남자였다. 권이정이 아무리 페로몬을 흘린다고 해도 나는 페로몬 분비가 되지도 않는 우성 오메가였다. 이 정도 자극 정도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무시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지 마시고…….”

“야, 뭘 자꾸 이러지 말래.”

그런데도 자꾸만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권이정에게 잠식돼 까맣게 타들어 갈 것 같단 공포심이 생겼다. 눈앞이 컴컴하게 죽는 것처럼 그와 가까워질수록 정신이 아득해졌다.

“너도 이 판 좆 같은 거 알잖아. 지금 거절 못 하는 상황인 거 아니까 고소니 뭐니 말 안 하는 거 아니야.”

권이정의 말은 대체로 사실이었다. 그가 말하는 판이 얼마나 더러운지, 그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를 밀어 내거나 거절하면 추후에 어떤 불이익이 돌아올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저한테 그런 협박은 안 통합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사람이었다. 본부장이라는 직급은 내 손으로 내려놨고, 그 외에는 타격을 입을 만한 부분이 없었다.

게다가 나는 이미 권이도와 계약으로 묶인 몸이 아니던가. 권이정이 내게 해코지를 하려고 들면, 권이도가 최소한의 방어 수단은 되어 주리란 확신이 있었다. 그러니 지금 이 상황에서 굳이 권이정에게 휘둘릴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협박? 내가 언제 협박을 했다고 그래.”

그런데 왜 자꾸 무서운 기분이 드는 걸까. 뭐가 이렇게 두려워서 손이 덜덜 떨리는 걸까. 그는 아직 내게 손을 대지 않았고,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밀어 낼 수도 있을 텐데. 그가 제아무리 알파의 완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을 필요는 없으련만.

“내가 사내새끼 구멍엔 관심이 없는데, 권이도 그 새끼가 환장하는 거 보니까 한 번 맛이라도 봐 봐야겠거든.”

나는 간신히 다리를 움직여 그가 다가오는 만큼 뒤로 물러났다. 먹잇감을 모는 것처럼 서서히 거리를 좁힌 권이정이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대체 뭐 하는 놈이길래 그놈이 애지중지 집에 가둬 놓나 했더니……. 이 정도면 같은 게 달려 있어도 한 번은 할 만할 것 같단 말이지.”

그의 페로몬이 짙어질수록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가 딱딱 부딪치는가 하면 목구멍에서 신물이 올라오기도 했다. 금방이라도 욕지기가 나올 것 같아서, 있는 힘껏 어금니를 악물어야만 했다.

“씹, 그놈의 약혼식엔 가지도 못하게 하고…….”

“…….”

권이정은 적당히 거리를 둔 채 우뚝 제자리에 멈춰 섰다. 뒤로 물러나던 내가, 더 이상 물러설 공간이 없어 벽에 등을 기대고 섰을 즈음이었다. 자꾸만 호흡이 가빠져서 억지로 자세를 다잡는데, 권이정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정세진.”

‘정세진.’

목소리가 두 번 들리는 것 같았다. 언젠가 들었던 음성이 그의 부름 위에 덧씌워졌다. 아득히 멀어진 주변 소음에 권이정의 목소리만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너 어차피 도망 못 가.”

“…….”

“여기 원래 내가 쓰던 데라 아무도 안 온다고. 알아들어?”

“…….”

“이쯤 했으면 힘 빼지 말고 얌전하게 좀 굴자. 씨발, 오메가라는 게 애교가 없어, 애교가.”

눈앞이 까맸다가 하얗게 점멸하길 반복했다. 권이정의 페로몬이 내 목을 움켜쥐고 사지 끝까지 내모는 기분이었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처럼 체온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제 보니까 페로몬도 안 느껴지는데…… 이거 오메가 맞아?”

“…….”

“아니, 아니지. 그래, 오메가인지 아닌지는 별로 상관없지.”

권이정은 다시 성큼성큼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러더니 내 멱살을 잡아 억지로 아래로 끌어내렸다. 다리에 힘이 풀린 탓에, 크게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스르륵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싫으면 입으로 한 번 하든가. 혹시 알아? 잘 빨면 한 번은 봐줄지?”

억센 손길이 머리칼을 거칠게 헤집었다. 잘 세팅된 머리를 흐트러뜨린 뒤엔 뒤통수를 단단히 고정한 채 제 바지춤으로 끌어당긴다. 역겨운 페로몬이 더욱더 짙어지고, 바지 너머로 잔뜩 부푼 그의 성기가 보였다.

“성의껏 해, 성의껏.”

‘기업을 살리고 싶으면…….’

“능숙하게 하는 건 바라지도 않으니까 입으로 지퍼부터 열든가.”

‘창부처럼 굴어야지.’

“…….”

무릎 너머로 딱딱한 바닥이 느껴졌다. 모욕적인 자세라는 생각보다 속이 뒤집히는 감각이 더 생생했다. 입꼬리가 투둑 찢어지던 느낌, 억지로 입 안을 파고들던 물건과 목을 비집고 영역을 넓히던 그 억겁의 과정.

“…….”

멍하니 눈꺼풀을 떨었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 눈꼬리에 맺혔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 머리칼을 단단히 붙잡았던 권이정은 목울대를 꿀꺽 움직이며 연신 입맛을 다셨다.

“와, 우니까…… 더 꼴리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다. 입을 잘못 열었다간 내장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지만, 내가 울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었다.

‘이거 하나 똑바로 못 해?’

머리칼을 움켜쥐는 감각이 낯설지 않았다. 억지로 얼굴을 끌어당겨 바지춤에 문지르는 것도. 바지 너머 부푼 성기가 뺨에 닿고, 억세게 내 뒤통수를 잡아 고정하는 것까지도.

“뭐 해, 빨리 하지 않고.”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권이정의 허벅지에 손을 얹었다. 그를 유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감이 지독히 어그러졌기 때문이었다. 눈앞에 있는 상대가, 권이정이 아니라 내가 복종해야 할 다른 누군가로 느껴졌다.

“그래, 씨발. 처음부터 이랬으면…….”

그러나 그러한 기분은 잠시였다. 권이정이 양손으로 내 뒤통수를 붙잡은 순간, 그의 손이 거칠게 떨어져 나간 것이다. 내가 입을 뻐금거릴 새도 없이, 권이정의 페로몬이 훅 멀어졌다.

“……악!”

빡!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터진 것처럼 엄청난 소리였다. 바위가 깨졌다고 해도 믿을 법한 소리였는데, 그 거친 파열음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

나는 느리게 고개를 들어 올려, 내 앞에 드리운 그림자를 올려다봤다. 단조로운 색감의 검은 정장. 조금 밝은 색을 띠는 단추. 가슴께에 달린 화려한 브로치와 남자다운 목선 위에 보이는 익숙한 얼굴.

“……권이도 씨.”

“…….”

권이도는 나를 한 번 내려다보고 입매를 비튼 채 무언가 읊조렸다. 언뜻 보기에 욕지거리 같았는데,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늘 차분하고 침착하던 시선이, 지금은 분노로 뒤덮여 있다는 사실만 알아차렸지.

“이 미친, 여기가 어디라고 이게……!”

권이정이 버럭 소리치는 소리는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간 권이도가 멱살을 끌어당겨 다시 한번 크게 주먹을 휘두른 것이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가 돌아가고, 권이정이 쿨럭 피 섞인 침을 토해 냈다.

“…….”

고작, 한 대로 끝나지 않았다. 권이도는 권이정을 놓아주지 않고 몇 번 더 주먹을 휘둘렀다. 자비 없이 주먹질을 하는 모양새가 내게 다정한 모습을 보여 주던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전무님!”

뒤늦게, 화장실 안으로 이태성이 뛰어 들어왔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은 나를 보고 표정을 굳혔다가 아직까지도 권이정에게 분풀이를 하는 권이도에게 다가갔다.

“그러다 죽습니다.”

퍽! 그가 한 번 더 주먹을 휘둘렀다. 권이정은 이제 완전히 기절한 상태였다. 같은 알파에, 같은 남자인데,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이토록 무서웠다.

“전무님, 거기서 더 하시면…….”

“죽는다고?”

냉랭한 목소리에 차가운 페로몬이 한가득 쏠렸다. 그 분노의 대상이 나는 아니었지만, 나조차 움츠러들 만큼 강한 기운이었다. 권이정의 페로몬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협감에 나도 모르게 숨을 흡 들이마셨다.

“이 새낀 죽어도 쌀 텐데.”

권이도는 딱 ‘눈이 돌아갔다.’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분노로 일렁이는 두 눈은 이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낼 수 없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이태성을 개의치 않고, 다시 한번 손을 들어 올리는 걸 보고 알 수 있었다.

“……권이도 씨.”

나는 조그만 목소리로 간절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만하라고 말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이 상황이 진짜인지 가늠하기 위해서. 적당한 타이밍에 나타나 눈앞에 있는 권이도가, 진짜인지 아니면 환상인지 구분하기 위해서.

“여기, 여기는 어떻게…….”

그런데 말을 하려다 보니,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렸다. 나는 아무 짓도 당하지 않았고, 지금은 두려움도 들지 않는데. 권이도의 얼굴을 보는 순간 모든 공포가 씻은 듯 깨끗이 사라졌는데도 말이다.

“…….”

권이도는 화를 삭이려는 것처럼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쉰 뒤, 붙잡고 있던 권이정을 성의 없이 내던졌다. 옆에서 대기하던 이태성이 권이정이 쓰러지기 전에 반사적으로 몸뚱이를 받아 챘다.

“내 눈에 안 띄게 치워.”

차갑게 이야기한 권이도가 세면대로 다가갔다. 무얼 하나 싶었는데, 피 묻은 손을 벅벅 씻는 게 아닌가. 손에 남은 물기를 닦을 새도 없이,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내 쪽으로 다가왔다.

“…….”

“…….”

어떤 말을 들을까. 잠깐이지만 걱정이 되었다. 감당도 못 할 거면서 왜 따라왔냐고, 네 발로 스스로 걸어간 게 아니었냐고 나를 탓할 것만 같았다.

“세진아.”

그러나 권이도는 망설임 없이 무릎을 꿇고 내 앞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재킷을 벗어 내 어깨에 둘러줬다. 내 뺨을 감싸 얼굴을 꼼꼼히 살핀 그가 뒷머리에 손을 얹은 채 나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늦게 와서 미안해.”

“…….”

온몸의 긴장이 쭉 빠져나갔다. 멈췄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고, 차가웠던 손끝에 피가 도는 듯했다. 따사롭게 전해지는 온기가 그 어느 때보다 상냥해서, 무엇 하나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미안.”

권이도는 내 머리칼에 턱을 문지르며 내게만 들릴 만큼 조그맣게 이야기했다. 나는 손을 들어 권이도의 허리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푹 얼굴을 묻자, 권이도 특유의 체향이 한가득 전해졌다.

“아…….”

이루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벅찬 기분이었다. 그가 나를 구해 줬다는 고마움이 아니라, 내 두려움이 사실은 헛것에 불과했다는 안도감이 더 커다랬다.

그래서 편안히 눈을 감았다가, 향긋한 나무 냄새를 끝으로 까무룩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 * *

누군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 것 같았다. 조심스러운 손길은 고슬고슬 머리칼을 만지다가 느낌도 나지 않을 만큼 가볍게 이마에 닿아 왔다. 얼굴의 생김새를 확인하듯 가장자리를 덧그린 상대가 눈꼬리를 살짝 문지르며 눈가에 맺혔던 눈물을 훔쳐 줬다.

‘다리를 못 벌리면 입이라도 잘 벌려야지.’

그러나 따사로운 손길과 달리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는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심장을 칼로 얇게 저미는 것처럼 가슴 한편이 찌르르 아파 오는 듯했다.

‘이런 재주도 없이 뭘 하겠다는 건지…….’

얼굴을 매만지던 손길은 순식간에 억센 것으로 바뀌었다. 내 목을 붙잡았다가, 머리채를 움켜쥐고, 아플 정도로 고개를 뒤로 젖히게 했다.

‘얌전히 굴어, 정세진.’

그 한마디는 마치 족쇄와도 같았다. 저항할 기회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손과 발을 단단히 옭아매는 족쇄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힘없이 늘어져 그가 하라는 대로 무릎을 꿇는 것밖에 없었다.

‘씨발, 뭣도 아닌 오메가가…….’

장면은 계속해서 끝없이 바뀌었다. 아니, 이걸 장면이라고 이야기해도 좋을지는 모르겠다. 그저 끝없이 누군가 내게 속삭이고, 내 몸을 여기저기 만지며 지독히 나를 괴롭혔을 뿐이니까.

악몽을 꾸고 있구나. 그 사실을 깨닫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제는 일상이나 다름없는 꿈이었기에 큰 동요 없이 모든 게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인내심도 생겼다. 다만, 이번만큼은 꿈과 현실의 경계가 너무도 모호해서 그랬지.

‘대체 뭐 하는 놈이길래 그놈이 애지중지 집에 가둬 놓나 했더니…….’

권이정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기억에 남았다. 별거 아닌 말들이라고 치부하면서도, 나를 보는 눈빛까지 영상으로 찍은 것처럼 또렷했다.

“……으.”

그래서 자꾸만 구역질이 났다. 금방이라도 토기가 솟구쳐서 먹은 것도 없는데 모든 걸 쏟아 낼 것만 같았다. 화장실에선 정말 아무런 일도 없었건만, 강간이라도 당한 것처럼 배 속이 뒤집혔다.

“착하지…….”

상냥한 목소리가 차분히 나를 달래 줬다. 은은하게 쏟아져 내린 페로몬도 함께였다. 비에 젖은 나무 냄새, 그리고 묵직하게 감도는 익숙한 체취. 폐부 깊숙한 곳에 스며든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감각.

“괜찮아. 아무 일도 없어.”

나직이 중얼거리는 말이 너무도 상냥해서, 조금 전까지 들었던 나쁜 생각이 사르르 지워졌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머릿속엔 이제 단 하나의 생각만 떠올랐다.

“자자…….”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눈 깜박할 새에 져버릴 평온이 아니라, 오랜 시간 나를 달래 줄 위로였으면 좋겠다.

더 이상 악몽을 꾸지는 않았다. 그저 그간의 불면증을 설욕하듯 아주 오랜 시간 깊은 잠에 빠져들었을 뿐. 가만가만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상대는 내가 완전히 잠이 들 때까지 내 곁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 후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눈을 떴을 땐, 주변이 온통 조용했다. 나는 느릿느릿 눈을 깜박이며 한 번도 본 적 없던 낯선 천장을 응시했다. 새하얀 벽지와 불이 꺼진 조명. 내가 사용하던 방보다 훨씬 높은 천장까지.

“…….”

처음 보는 공간이었지만, 그렇다고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이유는 무척 사소했는데. 내가 있는 공간의 모든 곳에 익숙한 페로몬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자기 전에도, 잠든 와중에도, 내 곁에 머무르던 은은한 페로몬이.

“일어났어요?”

권이도는 침대에 걸터앉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와이셔츠에 넥타이만 걸친 차림이었고, 넥타이마저 느슨하게 풀어져 있다. 주변이 어두운 탓인지, 평소보다 더 나른한 분위기를 풍겼다.

“여기가…….”

“호텔이에요.”

아직 잠기운이 남은 머리가 앞서 일어난 일들을 차근차근 정리했다. 창립 기념식에 참석한 것, 권이정이 내게 와인을 엎은 것, 화장실에 따라갔다가 벌어진 피치 못할 사고까지도.

“집으로 가자니 보는 눈이 많을 것 같아서 우선 내가 쓰던 방으로 데려왔습니다.”

“…….”

“불편하면 얘기해요. 차를 준비하라고 할 테니까.”

권이도는 말을 하면서도 내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다정하기 짝이 없는 손길이었기에, 사라졌던 잠기운이 다시 밀려들려고 했다.

“더 잘 겁니까?”

“……아뇨.”

“졸려 보이는데.”

“아뇨…… 일어나야죠. 기념식도 아직이고…….”

가물가물,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잠투정 비슷한 대답에 권이도가 픽 웃음을 흘렸다. 그는 흐트러진 머리를 가지런히 정돈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념식이 끝난 지가 언젠데.”

“…….”

“더 자요. 깰 때까지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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