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Quelques Fleurs(6)
“……뭐야?”
“누구 보는 거야?”
숙덕거리는 말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민재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나와 권이도를 번갈아 보는 것도 느껴졌다. 어머니와 서영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고, 나는 얕은 숨을 내뱉으며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 냈다.
“…….”
심장이 쿵쿵 뛰는 듯했다. 목덜미가 홧홧 달아오르고,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가슴께가 뜨거웠다.
어쩌면 나를 보고 웃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재미난 생각을 했을 수도 있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발견했을 수도 있지. 그런데도 기분이 들뜨는 건 그와 지내는 사이 지나치게 뻔뻔해진 탓인 걸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자리에 앉았다. 뒤늦게 누나인 권이경이 나를 돌아봤지만, 그 역시 금세 관심을 꺼버렸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고, 그렇게 뛰기 시작한 심장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창립 기념식은 미리 고지된 순서에 따라 진행됐다. 사회자가 선호그룹의 그간 연혁을 말해 줬고, 부회장인 권상미가 간단한 인사말(권병욱 회장이 참석하지 못해 미안하단 사과와 내빈 여러분께 감사하단 내용이었다)과 임직원 시상식을 진행했다. 모든 과정이 끝난 뒤엔 3층짜리 거대한 케이크의 커팅식도 있었다.
아버지는 식의 1부가 끝나고 잠깐 휴식 시간을 가질 즈음 돌아왔다. 코끝을 스치는 담배 냄새에 고개를 들었던 나는, 한눈에 보기에도 수척해진 얼굴을 보고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눈두덩이 움푹 들어간 건 물론, 살도 무척이나 많이 빠진 듯했다.
“…….”
고작 보름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사회적 체면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아버지가 이런 자리에 이토록 근심 가득한 얼굴로 나타날 이유가 없는데.
그러나 어머니와 동생들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어머니가 잠깐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 그마저도 잠시였다. 하기야, 오랜만에 아버지를 뵙는 나와 달리 그들은 한집에서 늘 얼굴을 봐왔을 테니.
“…….”
그래서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입을 다물었다. 어디 편찮으시냐고 물어야 할 상황이었는데, 살갑게 말을 붙일 분위기가 아니었다. 얼어붙은 호수 위를 걷는 것처럼 자칫 잘못했다간 모든 게 와장창 깨져 버릴 것 같았다.
2부가 진행되는 내내 나는 복잡한 속을 달래며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아버지는 내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고, 그 사실이 오히려 나를 더 긴장케 했다. 화가 난 건지, 아니면 그냥 무시하는 건지. 혹은 다른 무언가인지, 도무지 가늠되질 않았다.
“그럼 저희가 준비한 음식 맛있게 드시고, 편안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끝내 모든 식순이 끝나고,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졌다. 따로 비워 둔 연회장 한 편엔 선호그룹에서 초청한 셰프들이 뷔페 형식으로 음식을 차려 냈다. 줄줄이 샴페인 잔과 핑거 푸드도 있었는데, 대다수 사람들은 그쪽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무리를 짓기 시작했다.
“세진이 너 따라오거라.”
아버지는 그제야 처음 내게 말을 붙였다. 가라앉은 목소리였지만 다행히 화난 기색은 아니었다. 나는 재킷을 단정히 정돈하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그를 뒤따랐다. 내게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어떤 용건이 있는 건지. 그 짧은 사이에,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회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비즈니스 미소를 지으며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순간, 놀라울 정도로 모든 상황이 이해됐다. 한데 모여 있는 서너 명의 사람들은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얼굴들이었으니.
“아니, 이게 누구야. 정철호 회장 아니야?”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고민하던 것들이 싹 사라지고 그 대신 무력감과 허무함만 남았다. 무의식적으로 헛웃음이 나오려고 해서, 남몰래 주먹을 꽉 움켜쥐어야 했다.
“이런 데서 얼굴을 다 보네. 이쪽은 그래, 자네가 애지중지 키운다던 오메가 아들이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착한 아들을 연기할 시간이었다. 인사조차 없던 아버지가 나를 데려온 것도, 마침 내 존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내게 할 말이 있어서도 아니고, 그날의 일을 언급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이름이 정…… 정 뭐더라?”
“……정세진입니다.”
나는 예의 바른 미소를 띤 채 살짝 묵례를 건넸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지만, 입력된 정보를 출력하는 것처럼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반복적으로 학습했기에, 내가 무얼 하면 되는지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아주 훤칠하게 컸네. 자네는 올해 몇 살인가?”
“이번에 스물아홉 됐습니다.”
인자한 아버지 밑에서 훌륭하게 큰 자식 정도면 충분했다. 입양되었지만 구김살 없고,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것처럼 살갑게 굴면 됐다. 누군가가 칭찬을 건네면 겸손을 떨며 나를 한 단계 낮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슬슬 장가가야겠어. 아, 오메가니까 시집이라고 해야 하나?”
아하하,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참으로 즐거워 보였다. 아버지는 내 자식을 누구에게 보내냐며 친근하게 내 등을 다독였다. 마음으로 낳은 자식이라 더 애달프다는 말엔 눈치껏 약지에 남은 반지 자국을 가려야만 했다.
“정 회장이 정말 사람이 좋다니까.”
“아휴, 아닙니다, 회장님.”
물밀듯 밀려든 공허함은 그 무엇도 채울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구멍으로 남았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인사치레에 감사히 반응하고, 내 쪽에서 몇 마디 빈말을 건네는 것만으로 이미 여력이 다한 기분이었다.
‘만약 참석하기 싫으면 그것도 편히 얘기해요.’
한창 웃고 떠드는 와중에 문득 권이도의 말이 떠올랐다. 이미 지나간 일이었지만,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때, 정말로 참석하기 싫다고 했다면. 그랬다면 권이도는 나를 자유롭게 만들어 줬을까 하고.
* * *
으레 목적이 있는 사람들끼리 모이면 저마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논점을 빙빙 도는 대화를 나누곤 한다. 서로 끝없이 근황과 칭찬을 주고받고, 이야기가 마무리될 즈음에야 비로소 본격적인 주제가 나오는 것이다. 이런 의미 없는 대화를 한 시간쯤 이어가면, 자연스레 정신력이 달리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제가 이번에…….”
유명 건설업 회장의 차남이라던가. 끽해야 나보다 한두 살 정도 많아 보이는 남자는 웬만한 회장들 버금가는 수다를 자랑했다. 죄 자랑투성이에 영양가 없는 정보만 모여서, 벌써 그에게 들은 가십과 스캔들만 열 손가락을 넘어갔다.
“대단하시네요. 아무나 하는 게 아닌데.”
“그렇죠? 역시 뭘 좀 아신다니까.”
아버지는 이미 한참 전에 최초의 목적이었던 회장과 담배를 피우러 사라진 뒤였다. 외국에서 들여온 시가를 피운다던가, 내게도 권했으나 눈치껏 뒤로 빠져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아, 이거 제 명함인데…….”
남자는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자연스럽게 내밀었다. 보통 가장 먼저 명함부터 주는데, 어지간히 수다를 떠느라 정신이 없었나 보다. 지금껏 많은 명함을 받은 건 둘째치고, 문제는 내게 그들에게 돌려줄 물건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거 어쩌죠. 제가 지금 명함이 따로 없는데.”
회사를 나왔다는 말은 처음 몇 번으로 충분했다. 본부장을 관둔 이유가 ‘다른 공부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도 질릴 만큼 충분히 많이 읊었다. 그렇다고 명함 자체를 거절할 수는 없으니 애써 미소를 띤 채 이렇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가 잘 챙겼다가 꼭 연락드리겠습니다.”
애초에 열에 아홉 정도는 예의상 건네는 명함이었다. 실제로 내게 연락이 오리라 기대하지도 않을 거고, 어설프게나마 얼굴도장을 찍어 둘 생각이겠지. 그러니 소속과 이름을 기억하는 것으로 내가 할 도리는 다한 셈이다.
그로부터 건설업 명함을 두 개, 금융권 명함을 세 개, 그리고 마지막으로 방송 3사 기자의 명함을 각각 하나씩. 안주머니가 두둑해진 나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며 뻐근한 눈을 매만졌다. 요 며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데다, 여러 사람과 대화하느라 잔뜩 진이 빠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게 한숨을 내쉬며 슬쩍 뒤로 물러났다. 마침 나와 대화를 나누던 남자가 또 다른 무리와 인사를 주고받고 있었다. 잠깐이나마 숨을 돌릴 타이밍이다 싶어 몸을 틀었는데, 때마침 내 뒤쪽에 지나가던 사람을 툭 건드리고 말았다.
“……어.”
축축한 느낌이 배 언저리에서 느껴졌다. 나와 부딪친 상대가 들고 있던 와인을 엎질렀기 때문이었다. 와인 특유의 달짝지근한 냄새와 함께 알싸한 알코올 향이 코끝을 스쳤다.
“아이고, 이걸 어쩌죠.”
느물거리는 말투로 말하는 상대는, 아까 화장실에서 마주친 권이정이었다. 한 손엔 비어 있는 와인 잔을 들고, 다른 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였다. 그는 제 손과 내 배를 번갈아 보곤 눈을 찡긋하며 미안한 얼굴을 해 보였다.
“옷이 다 젖었네. 괜찮으세요?”
이 사람이 왜 이쪽에 있지.
“……아, 네. 괜찮습니다.”
나는 반사적으로 대꾸하며 티 나지 않게 주변을 둘러봤다. 권이도는 아까부터 보이지 않았지만, 권상미와 권이경이라면 저 앞쪽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원래라면 권이정도 여기가 아니라 저쪽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필 와인이라 자국이 심하네요.”
그의 말대로 연한 색감의 베스트에 짙은 보라색 자국이 퍼져 나갔다. 많고 많은 샴페인을 두고 굳이 와인을 마시다니. 운이 나빠도 이렇게 나쁠 수가 없다.
“어떻게, 세탁비라도 드릴까요?”
“아뇨, 제가 실수한 건데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는 의미로 엷게 웃어 보였다. 어차피 내가 산 옷도 아니었고, 일을 크게 키워 봐야 득 될 것이 없었다. 아버지가 보면 모자란 놈이라고 욕을 할 테니, 그저 적당히 상황을 무마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가까이에 있는 몇몇을 제외하면 우리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저마다 이야기를 나누기 바쁜 데다, 권이정은 그다지 친해져서 메리트가 없는 상대였기 때문이다. 야망 있는 사람의 대다수는 이미 저쪽 권상미의 근처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그래도 어떻게 그러나요. 제가 옷을 망가뜨렸는데.”
그러나 권이정은 도무지 내 뜻대로 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와인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그가 덥석 내 팔을 붙잡은 것이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미간을 좁히자 그가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이야기했다.
“잠깐 화장실이라도 가죠.”
“…….”
물로 해결될 옷이 아니라는 건, 그 또한 알고 있을 텐데. 오히려 물에 젖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망가질 터다.
“저는 정말…….”
“정세진 씨, 알 만한 사람이 왜 이래요?”
입이 딱, 다물렸다. 그의 입에서 ‘정세진’이라는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가 내 이름을 아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닌데, 이름이 불리는 순간 등줄기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기껏 참석해 주신 손님께 무례를 저지를 수는 없죠. 같이 갑시다.”
아까 화장실에 느꼈던 것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발끝에서부터 타고 올라온 거부감이 목덜미를 콱 붙들었다. 서서히 숨통을 옥죄다가 산소가 부족할 즈음엔 가슴 언저리를 쿡쿡 찌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럼 이것만 놔주셨으면 합니다.”
“아, 손?”
겨우겨우 건넨 말에, 그는 그게 뭐 그리 어렵냐는 듯 팔을 놓아줬다. 구겨진 재킷을 바로 하자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리기도 했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네…….”
본능적인 촉이라고 해야 하나. 느낌이 좋지 않았다. 자꾸 나를 데리고 가려는 것도 그렇고, 괜찮다는데 억지로 밀어붙이는 것도 그렇고. 내가 예민한 것이겠지만, 그 모든 게 무언가 빌미를 만들려는 행동처럼 보였다.
“그럼 가죠. 물들기 전에 빨리 해결해야지.”
그럼에도 나는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자리를 비워도 상관없는 타이밍은 아니었지만, 여기서 소란을 일으킬 바에야 그 편이 훨씬 나을 테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러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점일까.
권이정과 함께 연회장을 나갈 때는 출입구에 서 있던 이태성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엉망이 된 옷가지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칠칠치 못하다는 듯한 시선이었는데, 정작 내 얼굴을 바라볼 땐 눈빛이 심각해졌다.
“…….”
“…….”
찰나의 순간 스친 시선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지만, 이태성은 날카로운 눈으로 나와 권이정을 번갈아 봤다. 그런 이태성을 눈치채지 못한 건지, 권이정이 가벼운 목소리로 얘기했다.
“차라리 방을 하나 잡아 줄까요? 어차피 호텔이니까 그게 나을 텐데.”
“아뇨, 그러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권이정이 앞서 걷고, 내가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여유롭고 느긋한 걸음걸이는 권이도와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달랐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뒤를, 이태성이 몇 발자국 뒤에서 조용히 따라붙었다.
* * *
권이정이 향한 곳은 연회장과 먼 곳에 위치한 화장실이었다. 왜 이렇게 멀리 가나 했는데, 내가 묻기도 전에 사람들이 보면 곤란하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 뉘앙스는 굉장히 미묘했지만, 나는 부러 모르는 체하며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렸다.
“정말 방으로 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
권이정은 그 질문을 과장 하나 없이 다섯 번도 넘게 했다. 내게 어떤 대답을 바랐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할 말은 “괜찮습니다.”밖에 없었다. 고작 옷 하나 망가졌다고 호텔 방을 잡고 싶지도 않고, 처음 보는 사람과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보기보다 고집이 세네. 하긴, 정세진 씨처럼 생긴 애들이 오히려 성질은 더 하더라고요.”
뭐가 그렇게 좋은지, 목소리에 신난 기색이 묻어났다. 나는 괜스레 샘솟는 불안감을 억누르며 그와 거리를 조금 더 넓혔다. 물론 내가 조금만 뒤처져도, 그가 귀신같이 빨리 오라며 재촉했지만 말이다.
“……화장실을 벌써 두 개나 지나친 것 같은데요.”
“응? 아, 저기 끝에 있는 곳으로 가려고요.”
그가 가리킨 건, 로비 구석진 곳에 있는 남자 화장실이었다. 그새 시간이 늦은 탓에 홀을 지키는 직원도 몇 명 되지 않았다. 마주치는 모든 사람의 인사를 가볍게 무시한 권이정은 화장실 앞에 도착하자마자 명령조로 이야기했다.
“들어가요.”
“…….”
티 나지 않게,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리 구석진 곳이라고 해도 돌아다니는 직원이 하나도 없지는 않았다. 실제로 나와 눈이 마주친 사람만 벌써 두어 명은 되었다. 게다가 모르긴 몰라도 이태성 역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을 터다.
그 사실을 되새기며 억지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이유 모를 불안감이, 권이정의 얼굴을 처음 봤을 때부터 계속해서 밀려들었다. 난생처음 만나 본 상대에게 이토록 두려운 기분을 느낄 이유가 없는데. 같은 남자 대 남자로서 웬만하면 해코지를 당할 만한 일도 없는데 말이다.
권이정과 함께 화장실로 들어갈 땐, 밖에서 무언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딱딱한 물체가 바닥에 부딪히는 것처럼 달그락거리는 소리였다.
“무슨 소리 나지 않았습니까?”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
그는 태연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내가 잘못 들었나 싶을 만큼 뻔뻔한 반응이었다. 온몸의 촉각을 곤두세운 채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자, 떡하니 입구에 버티고 선 권이정이 턱을 까딱했다.
“그거 재킷부터 벗어요.”
아까부터 말하지만, 뉘앙스가 이상하다니까. 정확히 말하면 나를 보는 저 눈빛이. 값어치를 매기려는 듯 위아래로 훑는 시선은 아버지가 나를 보는 것과는 또 다른 찝찝함이 있었다.
“……권이정 대표님.”
그래서 재킷을 벗는 대신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애초에 물로 빨 생각도 없었고, 그를 따라온 건 그냥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어차피 물로 지워질 자국도 아니고요.”
“뭐…… 그거야 당연히 알죠.”
권이정은 온유한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내가 한 발짝 더 뒤로 물러나자,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픽 웃기도 했다.
“뭘 순진한 척을 해? 너도 알고 따라왔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