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Quelques Fleurs(5)
“…….”
황당함에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그가 아무리 높은 위치에 있다고 한들, 내가 누군가에게 ‘야’라는 말을 들을 입장은 아니었다.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입을 다물자, 권이정이 입꼬리를 미묘하게 비틀었다.
“맞네, 너 권이도 그거지?”
“…….”
퍽 어이없는 표현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의미하는 바를 모르는 건 아니었으나,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 쓰기엔 지나치게 무례한 말이었다. 권이도도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했으나, 이런 느낌을 받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와, 이런 데서 마주칠 줄이야.”
권이정은 정말 의외라는 듯 눈가를 찡긋하며 웃었다. 아버지를 닮아 부드러운 인상이었는데, 이렇게까지 성격 나빠 보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매스컴에서 재벌의 정석이라며 에둘러 욕하는 게, 괜한 이유는 아닐 것 같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야, 뭘 그렇게 조용히 있어. 나 몰라?”
“……아뇨, 알고 있습니다.”
우선 침착하게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움직였다. 여전히 이유 모를 거부감이 들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는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만나 봬서 영광입니다. 권이정 대표님. 저는 해신금융그룹 전 본부장 정세진입니다.”
악수를 청하는 건 내 역할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정중히 인사했는데, 권이정이 재미있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아…… 오늘 모르는 척하기로 했던가?”
“…….”
“그래요, 그럼. 명성호텔 대표 권이정입니다. 이런 누추한 데서 마주치게 되어 유감이네요.”
언제 반말을 했냐는 듯, 그는 금세 고상한 말투를 구사했다. 악센트가 특이한 발음은 권이도와 비슷했으나, 그와는 달리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 그는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생글거리며 운을 뗐다.
“근데…… 오메가가 남자 화장실에 들어와도 되나?”
천천히 훑어보는 시선에 소름이 끼쳤다. 대놓고 품평하듯 나를 살핀 권이정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쩝, 입맛을 다시기도 했다.
“아니, 엄밀히 따지면 그렇잖아요. 오메가면 남자를 만날 텐데, 괜히 옆에서 볼일이라도 봤다가 민망한 상황이 생기면 어떡해. 바지를 까는 건 좀…… 장소가 여기면 안 되지.”
지저분한 페로몬이 스멀스멀 내 쪽으로 흘러왔다. 지적할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모욕적인 말을 들어서가 아니라, 그 페로몬이 내 목을 덥석 움켜쥐는 듯해서.
“…….”
분명히 말하건대, 영향을 미칠 만큼 짙은 존재감은 아니었다. 나는 우성이었고, 그는 삼 남매 중 유일한 열성이었다. 그가 아무리 페로몬을 뿌린다고 한들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숨이 막힐 정도로 원인 모를 긴장감이 드는지 모르겠다.
“아…… 아니면 그런 걸 기대한 건가? 우연히 알파라도 마주쳤으면 해서? 정세진 씨, 그래요?”
권이정의 말이 귓가에 윙윙거리며 울렸다. 그가 왜 이렇게 이죽거리는지, 왜 자꾸 나를 도발하려 드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고, 시야가 뿌옇게 흐려질 만큼 정신이 아득하게 변하고 있었다.
“벙어리도 아니고 아까부터 왜 대답이 없어. 이봐요, 정세진 씨. 지금 나 혼자 떠듭니까?”
“…….”
금방이라도 식은땀이 날 것만 같았다. 조금만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아차 하는 사이 정신을 잃을 것 같기도 했다. 그 불안한 기분은 권이정의 페로몬이 짙어질수록, 그가 내게 가까이 다가올수록 더 심화되었다.
“본부장님.”
“…….”
퍼뜩, 고개를 들었다. 권이정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이의 음성이 우리 사이를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느릿느릿 옮겨 간 시선엔 화장실 입구로 들어온 이태성이 보였다.
“말씀 나누시는 중에 죄송하지만, 서두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숨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가 이태성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저 둘뿐인 상황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으로 피가 제대로 도는 기분이었다.
“뭐야, 오메가라고 화장실까지 경호원을 데리고 다녀?”
권이정이 불쾌한 얼굴로 하는 말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티 나지 않게 숨을 몰아쉬며 이미 습관처럼 굳은 미소를 지었다. 부드럽게 눈을 휘자, 권이정이 눈썹을 삐쭉 올렸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다음에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제가 있어서 불편하셨을 텐데, 편히 볼일 보고 가시기 바랍니다.”
살짝 묵례를 건네고 이태성보다 먼저 화장실을 나섰다. 이태성도 권이정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나를 바짝 따라왔다. 입을 꾹 다문 채 걸음을 옮기던 나는,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마자 크게 휘청였다.
“……!”
이태성이 화들짝 놀라 내 팔을 붙들었다. 평소라면 괜찮다고 사양할 텐데, 이번만큼은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손끝이 벌벌 떨리는 게, 그가 없었다면 볼썽사납게 바닥에 주저앉았을 터였다.
“괜찮으십니까?”
“……아,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저 일방적으로 몇 마디를 들었을 뿐이고, 내게는 그다지 화를 낼 만한 내용도 아니었다. 그냥 나조차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신경이 곤두서서 그랬지.
“괜찮은데…… 잠깐만 이러고 있죠. 다리에 힘이 잘 안 들어가서.”
“…….”
그는 별반 힘들이지 않고 뒤에서 나를 받쳐 줬다. 엘리베이터가 로비 층에 도착했을 땐 조심조심 나를 부축해 안에 태우기도 했다. 내빈들만 사용하는 분리된 승강기라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후.”
나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며 차갑게 식은 이마를 매만졌다. 조금 더 편안하게 몸을 기대자, 이태성이 움찔하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바로 따라 들어오면 모양새가 이상할 것 같아서 망설였습니다.”
“……이태성 씨가 죄송할 게 뭐가 있습니까.”
내가 해코지를 당한 것도 아니고, 애초에 화장실까지 따라오는 경호원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태성도 권이정의 얼굴을 알아봤을 테니 곧바로 들어오기엔 더더욱 무리가 있었을 터다.
“고마워요. 덕분에 곤란한 상황은 피했군요.”
나는 억지로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몸을 바로 세웠다. 이태성은 여전히 내 두 팔을 단단히 붙든 상태였다. 이제 놔줘도 된다고 말하려는데, 그가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화장실에서 들은 말은…… 신경 쓰지 마셨으면 합니다.”
“들었습니까?”
“…….”
“들었군요.”
괜히 웃음이 나왔다. 아마 이태성은 내가 말 몇 마디에 휘청일 만큼 연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니 가만히 내 눈치를 살피며 변명 아닌 변명을 덧붙였겠지.
“엿들으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뭐…… 상관없습니다. 별로 대단한 말도 아니었고.”
“……이런 일이 자주 있습니까?”
“이태성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오메가라고 모욕적인 말을 내뱉는 건, 권이정뿐만 아니라 굉장히 많았다. 내 사회적 위치 때문에 말로 하지 못할 뿐, 뒤에서 입에 올리지 못할 소문을 주고받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애초에 아버지와 민재조차 남들이 들으면 인상을 찌푸릴 언사를 잔뜩 구사하지 않던가.
“남자가 오메가인 게 이상할 법도 하죠.”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이태성은 그제야 내 팔을 놓아줬다. 무어라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는데, 안타깝게도 한 걸음 내딛자마자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정세진?”
익숙한 향수 냄새가 느껴졌다. 미미한 아로마 향기와 헤어스프레이 따위의 인공적인 향. 불쾌한 종류는 아니었지만, 여러 인위적인 것들이 섞여 숨을 쉬기에는 조금 거슬리는 그 향기.
“정세진 너…….”
민재였다.
* * *
명성호텔에는 총 세 개의 홀이 있는데, 저마다 각각 다른 별자리 이름이 붙었다. 연회장이 있는 곳은 천칭자리를 뜻하는 리브라(Libra)홀이었고, 그 이름대로 천장에 별빛을 수놓은 것 같은 조명이 달려 있었다. 나는 그 아름다운 광경을 두 눈에 담으며 내 얼굴에 따라붙는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
조금 전,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민재는 연회장으로 향하는 내내 성난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척 보기에도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는데, 나로서는 그가 왜 이런 눈빛을 보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민재를 봤을 때, 어느 정도 평화롭게 헤어지지 않았던가.
이태성은 먼발치에서 그런 나와 민재를 따라왔다. 처음 우리를 마주친 순간부터 민재는 그런 이태성조차 날카로운 시선으로 살펴봤더랬다. 그게 한낱 경호원에게 보일 경계는 아니었기에, 솔직히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정세진 님, 정민재 님. 자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태성은 입구에서 대기했고, 우리는 호텔 직원의 안내에 따라 중앙에 있는 라운드 테이블로 향했다. 다른 가족들도 있을 줄 알았는데, 잠깐 자리를 비운 건지 덩그러니 빈 의자만 남아 있었다. 나는 그중 적당한 자리를 골라 앉았고, 민재도 내 옆자리에 주저앉았다.
“…….”
“…….”
또 한참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참다못한 내가 그를 바라보자, 도리어 민재가 흠칫 놀라 시선을 피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하게 꾸민 모습이 어머니와 똑 닮아 있었다.
“……옷 잘 어울린다. 확실히 머리 검은 게 낫네.”
나는 그가 불만을 표하기 전에 먼저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민재가 이런 곳에서 화를 내면, 아무래도 좀 곤란했으니까. 눈썹을 삐쭉 올린 민재는 그제야 평소처럼 삐딱하게 이야기했다.
“넌 그 옷 존…… 엄청 구려.”
그래도, 여기가 공적인 자리라는 자각은 있나 보다. 욕지거리를 쓰려다 말고 급히 말을 바꾼 걸 보면. 물론 이 옷이 구리다는 건 지나치게 심술스러웠지만.
“그보다 민재 너는 왜 혼자 돌아다니고 있었어. 다른 가족들은?”
“…….”
가족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민재는 다시금 눈을 치켜뜨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더할 나위 없이 심각한 어투로 목소리를 내리깐다.
“너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지내는 거야?”
“뭘 하고 지내다니…….”
영 생뚱맞은 질문이었다. 나야 항상 권이도 집에 머무르건만.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그 사정을 모를 리 없는 민재가 이런 말을 할 이유가 없는데.
“아주 호강하나 보다? 시계는 또 더럽게 비싼 거 찼네. 혼자 잘 먹고 잘사니까 좋아?”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비난은 날이 섰다기보단 투정에 가까웠다. 어린 시절부터 민재를 봐 온 나는 알 수 있었다. 정말 내가 잘사는 게 싫어서가 아니라, 제 맘을 알아주지 못하는 게 원망스럽다는 투였다.
“왜, 무슨 일 있었어?”
그래서 넌지시 물었는데, 민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잘근거리며 시선을 내렸을 뿐. 그러다 내 손가락을 응시하곤 들릴 듯 말 듯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딴 게 무슨 약혼이라고…….”
아마, 약지에 엷게 남은 반지 자국을 발견했나 보다. 내 추측일 뿐이지만, 약혼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미리 언질도 들었겠지. 그게 어떤 방식인지는, 나를 제외한 가족들만 알고 있을 터다.
“무슨 일 있는지는 아버지한테 직접 들어. 그 망할 새끼가 입막음을 단단히 시켜 놨으니까.”
“…….”
반사적으로 주변 눈치를 살폈다. ‘망할 새끼’라는 어감이 지나치게 거칠었기 때문이다. 짓씹듯 내뱉은 민재는 더는 대화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다른 쪽으로 휙 돌려 버렸다.
달래 주는 게 좋을까. 내가 잘살려고 약혼한 게 아니라고, 내 의지가 아니라는 걸 너도 알지 않냐고. 그런 것들을 이해시키고 사과하며 좋은 형, 좋은 첫째를 흉내 내는 게 좋을까.
“…….”
그러나 입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 잠깐의 망설임조차 아주 찰나에 불과했다. 그를 달래야 한다는 생각보다 더 커다란 의문이 머릿속에 한가득 남아 버리는 바람에.
망할 새끼는, 아마 권이도가 맞을 텐데. 그가 입막음시켰다는 건 대체 뭘까.
민재가 말하는 뉘앙스만 들으면 약혼 사실 말고도 다른 무언가가 있는 듯했다. 하나 아버지보다 입이 가벼운 녀석이 말을 못 한다는 건, 아버지에게 물어 봤자 답을 얻어 내기 힘들다는 말이다. 민재는 ‘입막음 당했다.’ 정도는 이야기하는 녀석이고, 아버지는 그러한 사실조차 일언반구 없는 사람이었으니.
가족들은 그 후 기념식이 시작될 즈음에야 겨우 나타났다. 홀 내부가 어느 정도 찼을 즈음이었는데, 정확히는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서영이만 테이블로 돌아왔다. 그들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어머니가 앉아 있으라며 손을 내저었다.
“됐어, 주변에서 이상하게 볼라.”
사실 우리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도 별로 없으련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내 맞은편에 앉으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얼굴이…… 많이 좋아졌구나.”
빨갛게 칠한 립스틱이 오늘따라 조금 과하지 않나 싶다. 화장이 좀 진한 것 같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안색은 별로 좋지 않았다. 나는 서영이와 민재를 한 번씩 둘러보고 차분히 대답했다.
“네, 뭐……. 워낙 잘해 주셔서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어머니는 잘 지내셨어요?”
“나야 항상 그냥 그렇지.”
이질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원래도 살갑던 사람들은 아니지만, 오늘은 무언가 조금 더 이상했다.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가 하면,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는 모습이. 원래는 나를 껄끄러워했다면 지금은 대하기 어려워한다고 해야 하나.
예를 들어…… 그래, 마치 권이도의 집에 있던 고용인들처럼.
“……아버지는 어디 가셨어요?”
가장 궁금한 사실을 묻자, 어머니는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눈가를 찌푸렸다. 쉰이 가까운 나이에도 주름 한 점 없는 얼굴이 지금껏 어머니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려 줬다. 잠깐의 침묵 끝에 어머니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아버지는…….”
그때였다. 조그만 기계음과 함께 단상에 선 누군가가 마이크에 대고 입을 열었다. 곧 기념식을 시작할 테니, 내빈 여러분들께서는 착석해 달라는 안내였다.
나는 무심코 단상과 가까운 또 다른 출입구로 시선을 돌렸다. 단상에 있던 사회자는 물론, 그 앞쪽에 앉은 사람들까지 한 번에 그쪽을 바라봤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몰려든 시선 속에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
선호그룹 일가족이었다. 부회장인 권상미, 그 자제인 권이경과 권이정, 그리고 마지막으로 권이도까지.
간혹 권가(家) 사람들을 보면 이따금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세상은 정말로 참 부조리한 일의 연속이라고. 부와 명예를 모두 갖춘 그들이 굳이 가질 필요가 없는 외적인 요소까지 모두 갖추었으니 말이다.
“인물들이 어쩜 저렇게 좋은지 몰라…….”
누군가 홀린 듯 중얼거린 말대로였다. 나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그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뇌리에 새겼다. 정확히는 그중 딱 한 명, 내 약혼자인 권이도를.
단조로운 색감의 검은 정장이 이토록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별달리 특징 없는 정장에 베스트 단추만 색이 독특했을 뿐인데, 그걸 입은 사람이 권이도라는 것만으로 특별해 보였다. 어깨를 반듯이 펴고 당당하게 걷는 모습은 나와는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사람 같기도 했다.
내가 오늘 아침, 저 사람과 한집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와 있었던 모든 일이 어쩌면 전부 내 상상에 의한 꿈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떼는 모습은 그 어떤 명화의 한 장면보다도 우아했으니.
정말 계약이 아니면 엮일 수 없는 상대였구나. 그리 생각한 내가 시선을 떼어 내려던 순간이었다.
“…….”
“…….”
눈이 마주쳤다. 아니, 마주쳤다고 느꼈다. 그리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음에도 그는 정확히 내 쪽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나는 숨조차 쉬지 못한 채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주변에서 무언가 웅성거리는 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는 짙은 눈동자를 내게 고정하고, 정지 화면처럼 그 자리 그대로에 멈춰 섰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절대 웃지 않는다던 권이도가, 내게는 늘 웃으며 대하던 권이도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린 것이다. 다정하고 상냥한 미소는, 단 한 번도 대외적으로 보여 준 적 없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