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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억의 끝에 (32)화 (32/131)

32화. Quelques Fleurs(4)

사람을 다룰 줄 안다고 해야 하나. 그게 아니면 돈으로 해결하려 든다고 해야 하나. 어느 쪽이건 결과는 비슷할 테니 권이도가 대단한 건 사실이었다. 그러니 이태성도 차마 부정하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겠지.

“……특별 수당이 없어도 해야 할 업무입니다. 고생이라고 표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제 입에 발린 말도 하시는군요.”

“…….”

나는 어이없어하는 이태성을 보며 기분 좋게 눈을 접었다. 황당해하는 얼굴이 이제야 좀 이태성다웠기 때문이다. 입가를 가린 채 웃음소리를 참자, 그가 퉁명스레 물었다.

“재밌으십니까?”

“뭐,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고…….”

여러 사람을 봤지만, 이태성은 또 새로운 인간상이었다. 애써 아부를 떨지 않는 점이 오히려 편하게 느껴졌다. 권이도가 사람 보는 눈이 좋은 건가. 어쩜 불편하지 않을 사람을 잘만 골라 왔다.

“오후에 출발합니까?”

“예, 식사 마치시는 대로 모시러 오겠습니다.”

나는 투명한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무심코 내리깐 시선 끝에 약지에 끼고 있는 반지가 보였다. 오늘은 이걸 빼고 움직여야겠지. 그 사실이 왠지 모르게 아쉽게 느껴졌다.

점심에 잠깐 사라졌던 이태성은 내가 식사를 마치자마자 옷가지를 들고 돌아왔다. 어디서 보고 있었나 싶을 만큼 놀라운 타이밍이었기에 그가 슈트 케이스와 구두를 내밀 땐 조금 얼떨떨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밖에서 기다리겠다며 현관을 나섰고, 나는 그에게 받은 옷을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색이 너무 밝은 거 아닌가.”

권이도가 고른 옷은 전체적으로 따뜻한 색감의 회색 정장이었다. 역시나 사이즈는 내 몸에 꼭 맞았고, 자로 잰 것처럼 바짓단도 정갈히 떨어졌다. 넥타이는 조금 더 짙은 색이었는데, 별다른 무늬가 없었음에도 포인트처럼 잘 어울렸다.

나는 정장을 멀끔히 차려입고 드레스룸에서 액세서리를 골랐다. 권이도가 기껏 옷을 챙겨 줬으니 그 외의 것들을 나름대로 갖춰 볼 요량이었다. 행커치프는 넥타이와 비슷한 색으로 하고, 넥타이핀과 시계는 굳이 튀지 않는 디자인으로 고르면 될 듯했다.

“이걸 쓰는 날이 오긴 하네.”

서랍에 가지런히 정돈된 물건들을 내 손으로 직접 사용하게 될 줄 몰랐는데. 내 것이라는 인식조차 없던 예전과 달리, 적어도 몸에 두르는 데 거리낌은 없었다. 이미 그에게 더 엄청난 것들은 많이 받았기 때문일 거다.

나는 마지막으로 향수를 뿌린 뒤 약혼반지를 빼 협탁 위에 올려 두었다. 그간 단 한 번도 빼지 않았기에 손가락에 엷게 자국이 남아 있었다. 모양새를 보니, 아마 오늘 기념식이 끝날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듯했다.

1층으로 내려와 현관을 나설 때는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차려입는 게 얼마 만인지. 아버지를 뵐 때도 정장을 입긴 했지만 무언가 느낌이 달랐다. 마치 권이도와의 약혼식을 위해 이른 아침부터 움직이던 그때처럼 말이다.

이태성은 중문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고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던 중이었다. 무심코 시선을 돌렸던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끔벅였다.

“…….”

“…….”

핸드폰 너머에서 뭐라 뭐라 말소리가 들렸다. 아마 갑작스레 침묵을 유지하는 이태성이 답답했던 모양이다. 나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가볍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전화 안 합니까?”

“……아, 네.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뚝, 전화를 끊은 이태성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자연스레 열린 문으로 들어가자, 그가 뒤늦게 나를 따라 문과 가까운 곳에 올라탔다. 그러곤 흘긋 내 쪽을 돌아보며 이야기했다.

“그 옷은…… 맞춤복입니까?”

“그렇지 않을까요. 권이도 씨가 고른 건데.”

그 눈 높은 권이도가 골랐으니 기성복은 아닐 터다. 기장이나 핏으로 봐선 치수를 재서 오더 메이드로 제작한 게 분명했다. 내 사이즈를 어떻게 알았는지가 의문이었지만, 그건 드레스룸에 걸린 옷들을 본 순간 물어봐야 했던 것이었다.

“……생각보다 더 잘 어울리셔서 놀랐습니다.”

입에 발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오늘 보좌로서 최선을 다할 모양이었다. 물론 잘 차려입은 모습이 나쁘지 않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정장이 안 어울리는 남자는 없죠.”

가볍게 대답하자마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이태성은 무언가 말하려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다가, 고개를 휘휘 저으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출입구와 가장 가까운 곳에 권이도가 타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세단이 세워져 있었다.

“운전도 이태성 씨가 하나요?”

“예, 오늘 제가 모시기로 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대답하며 익숙하게 차 뒷문을 열어 줬다. 놀랍게도, 비서 역할부터 운전까지 홀로 중요한 업무를 도맡아 하는 모양이다. 적어도 김 실장은 운전까진 안 했던 것 같은데, 특별 수당을 두둑이 받았길 바랄 뿐이었다.

언젠가 권이도가 했던 말대로, 이태성은 운전을 제법 잘했다. 정확히는 안정적이라고 해야 할까. 겉보기엔 거칠게 차를 몰 것 같은데, 실제로는 조심스러운 편이었다. 나는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바라보며 의미 없는 말들을 중얼댔다.

“시간 빠르네…….”

근래에 있던 모든 것들이 지나치리만치 현실감 없었다. 권이도와 약혼식을 치르고 그의 집에서 보내 온 나날들이 말이다. 눈 깜박할 새에 시간이 흘렀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봄의 한가운데였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썩 꺼져.’

“…….”

습관처럼 반지를 꼈던 왼손을 만지작거렸다. 손끝에 걸리는 게 없으니 아무래도 영 허전했다. 버릇이 생기는 건 금방인데, 한 번 몸에 익은 것들이 사라지기까진 왜 이리 오래 걸리는 걸까.

‘당분간 얼굴 보는 일 없을 게다.’

아버지를 떠올리면 가슴 언저리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끝없이 이어지던 잡념이 끊기고, 귓가가 먹먹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제는 고막도 다 나았고, 음식을 먹는 것도 어렵지 않은데 말이다.

나를 보고 무슨 말씀을 하실까. 그렇게 헤어진 뒤에 단 한 번도 내 생각을 안 했을까. 내가 건네준 USB는 정말 그렇게 쓰레기통 속으로 사라졌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에 해답은 없었다. 애초에 어떤 대답이 돌아오건 내게는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이미 일어난 일은 사라지지 않고, 아버지의 생각 역시 바뀌지 않을 테니.

“저는 밖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이태성이 가장 먼저 데리고 온 곳은 3층을 통으로 쓰는 샵이었다. 옷은 이미 다 입었으니, 아마 머리를 좀 만져 주지 않을까 싶다. 내가 가까이 가자 문을 열어 준 직원은 꾸벅 인사를 건네고 안쪽으로 나를 안내했다.

“정세진 님,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샵 내부는 약혼식 날 착장을 도와줬던 곳과 비슷했다. 여러 피팅용 옷들이 걸려 있고, 유리로 덮인 장식함엔 여러 액세서리도 있다. 화장품이 가득 놓인 곳을 지나 거울 앞에 앉자, 직원 하나가 능숙하게 머리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걸 권이도가 직접 신경 쓴 걸까. 미리 이야기가 끝난 것처럼 머리 모양을 만지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일전에 있던 약혼식 날에는 나를 두고 직원들끼리 토론이 벌어졌는데 말이다.

“머리 자르실 때가 되셨네요.”

상냥한 인상의 직원은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길게 내려온 앞머리를 정돈했다. 가르마를 타서 한쪽에 고정하고 스프레이를 뿌린 뒤 드라이기로 그 언저리의 볼륨을 살렸다.

“아휴, 워낙 두상이 예쁘셔서 제가 손질할 맛이 있네요. 머릿결 관리 따로 하세요?”

“하하…….”

이런 샵 직원들 특유의 립서비스는 몇 번을 들어도 도무지 적응되질 않았다. 특히나 이번에 말을 붙인 디자이너는 원래 다니던 샵의 수다스러운 직원만큼이나 말이 많았다.

머리를 깔끔하게 세팅할 때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사이 나는 머릿결이 좋다는 말을 총 네 번 듣고, 두상이 예쁘다는 말을 세 번 들은 뒤에, 다음에 머리를 자를 때 제게 오라는 얘기를 두 번이나 더 들었다. 제 개인 번호까지 적힌 명함을 건네줄 땐 그 열렬한 직업 정신에 홀로 감탄해야 했다.

“……이게 뭡니까?”

밖에서 대기하던 이태성은 내가 내민 명함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내 머리를 물끄러미 보기에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덧붙였다.

“이태성 씨 머리 자를 때 한번 오세요. 직원이 아주 친절합니다.”

그는 묵묵히 내가 내민 명함을 받아들었다. 필요 없다고 거절할 줄 알았는데, 친히 안주머니에 넣기까지 했다. 직원의 목적은 영업이었을 테니, 반 정도는 성공한 셈이었다.

“이제 호텔로 가는 거죠?”

“예, 더 들를 곳은 없습니다.”

선호그룹 창립 기념식은 명성호텔 리브라홀에 있는 대연회장에서 치러질 예정이었다. 명성호텔이 보유한 연회장 중 두 번째로 큰 곳으로, 테이블 구조에 따라 대략 4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다고 했다. 선호그룹 주요 임직원들과 관련 거래처 사람들을 불러 자유로운 분위기의 파티처럼 진행될 거라고, 이태성이 말해 줬다.

“이태성 씨는 권이도 씨 경호원이었는데, 저한테 붙어 있으면 이상하게 볼 사람이 있지 않을까요?”

그가 한창 운전하던 중에 묻자, 이태성이 백미러 너머로 나를 돌아봤다. 인제 보니, 그 또한 평소보다 더 꼼꼼히 머리를 정돈해 놓았다. 그는 숱 많은 눈썹을 찌푸리며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제가 경호로 있던 건 같은 경호팀들을 제외하면 잘 모릅니다. 그리고 저 같은 경호원 얼굴을 외우는 사람도 별로 없을 거고요. 본부장님도 누가 경호로 있었는지 못 외우시지 않습니까?”

“음…….”

나직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의 질문을 듣자마자 내 경호로 있던 사람들이 주르륵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보통, 곁에 두는 사람을 그렇게 모르던가.

“자랑은 아닌데, 저는 다 외우는 편입니다.”

“…….”

이태성은 침묵을 유지한 채 또 한 번 백미러로 나를 살펴봤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진 않았고, 그냥 복합적인 시선이었다.

“……모든 경호에게 저처럼 대하십니까?”

“이태성 씨처럼 대하는 게 뭡니까?”

“그거야…… 아니, 아닙니다.”

이번에도 싱거운 마무리였으나, 나는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저 그를 알아볼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에 권이도가 참 철저하다고 생각했을 뿐.

그 후 차를 타고 호텔에 도착했을 때, 나는 타이밍 좋게 앞차에서 내리는 한 무리를 발견했다. 익숙한 남자 두 명이 한 차에서 내렸고, 뒤에 있던 차에선 여자 두 명이 내렸다.

“…….”

가족들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마주치는, 내 식구들. 사이좋게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누가 봐도 단란한 가족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화목한 모습을 보니, 새삼 여러 의문이 떠올랐다. 왜 연락 한 통 없었을까. 그냥 나를 참여시키지 않기로 마음먹었던 걸까.

마친 외부인이라도 된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외부인이 맞으니 단순히 비유로 표현하기엔 어폐가 있을 터다. 내가 저 사이에 껴있었다면 참으로 이질적이었을 텐데. 날 때부터 가족인 사람들과 노력해도 가족이 못 되는 사람 사이엔 많은 간극이 있다.

“왜 그러십니까?”

“……별거 아닙니다.”

나는 애써 여러 감정을 지워 내고 이태성이 열어 준 뒷문으로 차에서 내렸다. 앞선 가족들의 모습을 보지 못했는지, 그는 의아한 눈으로 내 안색을 살폈다. 그 잠깐 사이에 표정이 썩 나빠진 모양이었다.

“몸이 안 좋으신 거면…….”

“아뇨. 그냥 좀 긴장해서 그래요. 괜찮습니다.”

애써 웃어 보이기까지 하자, 이태성이 눈가를 찌푸렸다. 마치 네가 긴장이라는 걸 하냐는 듯한 시선이었다.

“차는 발렛 맡기고 같이 올라가죠.”

“…….”

그는 호텔 직원에게 차 키를 건네고 묵묵히 내 뒤에 따라붙었다. 덩치 큰 경호원이 함께 있으니 왠지 모르게 든든한 기분이었다. 내게 해코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그냥 느낌이 말이다.

명성호텔 로비는 언제 봐도 참 화려했다. 특히 홀 중앙에 걸린 크고 요란한 샹들리에가. 줄줄이 달린 큐빅을 따라 빛이 부서지는 모습은 호텔을 찾는 손님들이 볼거리로 꼽는 것 중 하나였다.

분명 아름다운 광경이었는데, 왠지 모르게 시끄럽단 생각이 들었다. 정작 로비는 조용했고, 잔잔한 클래식만 은은히 들려왔는데. 아직 본격적인 인파에 휩쓸리기도 전에, 벌써부터 기력을 소모한 것처럼 지치고 있었다.

“잠깐 화장실 좀 들르죠.”

숨통을 좀 트고 싶었다. 연회장으로 들어가면 자리를 비울 타이밍이 나오지 않을 테니. 본격적으로 아버지를 보기 전에 잠깐 마음을 다잡을 시간이 필요했다.

이태성은 오늘 내 의견에 딴지를 걸지 않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멋대로 방향을 트는 데도 별다른 불만을 내비치지 않는 걸 보면. 애초에 시간은 넉넉했으니 나를 만류할 이유도 없었겠지만.

나는 그를 밖에 세워 둔 채 홀로 화장실에 들어왔다. 볼일을 보려던 건 아니었고, 손이나 씻고 안색을 좀 확인한 뒤 나갈 생각이었다. 다행히 안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나는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거울 앞에 섰다.

“…….”

단정히 정돈한 머리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눈썹과 눈매가 반듯하다는 걸 빼면 별반 특징 없는 얼굴이었다. 아버지는 봐줄 건 외모밖에 없는 놈이라며 나를 욕하지만, 정작 봐줄 만한지도 잘은 모르겠다.

이태성이 왜 미심쩍은 시선을 보냈는지 알 것 같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파리했으니. 나름대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건 자신 있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티 나게 속을 드러내고 있었을까.

크게 한숨을 내쉬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나조차도 왜 이리 안 좋은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본능적인 촉이라고 해야 하나. 오늘이 고달파질 것 같단 예감이 자꾸만 경고 신호를 보냈다.

물론, 괜한 염려였다. 나는 권이도의 약혼자가 아니고 그저 해신그룹 맏아들의 거죽을 썼을 뿐이니까. 누가 내게 말을 걸더라도 늘 그랬듯 착한 아들을 연기하면 그만이었다.

“후.”

크게 한숨을 내쉬고 손을 꼼꼼히 닦았다. 세수라도 하고 싶었지만, 물기를 뚝뚝 흘리며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마음을 좀 가다듬은 덕에 아까보단 안색이 훨씬 나아졌다.

그리고 핸드 타월로 물기를 제거하고 화장실을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문 바깥쪽 코너를 돌려는 찰나, 안으로 들어오던 누군가와 떡하니 마주쳤다.

“…….”

“…….”

페로몬이 느껴졌다. 아주 미미했지만, 그건 분명 페로몬이었다. 권이도의 것과는 달랐고, 빈말로도 좋은 느낌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눈을 내리깔고 있던 탓에 나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려 상대방을 확인했다. 고급스러운 원단을 사용한 정장 위로 화려한 브로치와 독특한 색감의 넥타이가 보였다. 그리고 나보다 아주 약간 높은 위치에 있는 얼굴은, 차마 몰라볼 수 없을 만큼 익숙한 것이었다.

“……아.”

권이정이었다. 선호그룹 둘째이자 권이도의 형이며 명성호텔 사장 자리를 맡고 있는 사람. 나와는 대화 한 번 나눠 보지 않았고, 약혼식 날에도 바쁘다는 핑계로 참석하지 않은 사람.

권이경, 권이정, 권이도. 선호그룹 삼 남매는 권이정 혼자만 다르게 생겼다는 평가를 듣는다. 권이경과 권이도는 부회장인 어머니를 닮았으나, 권이정은 홀로 아버지를 닮았으니까. 바늘 하나 들어갈 데 없이 냉랭한 외모인 두 사람과 달리, 권이정은 웃으면 나름대로 온화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런데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등줄기에 원인 모를 전율이 흐르는 걸 느꼈다. 등허리가 꼿꼿이 펴지고 뒷덜미에 오소소 솜털이 일어났다. 거부감, 혹은 또 다른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부감이 일순간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실례했습니다.”

겨우겨우 그 말을 뱉었지만 한 번 돋아난 소름은 쉬이 잠잠해지지 않았다. 왜 이런 기분이 드나, 그걸 고민할 수도 없을 만큼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그래서 그냥 몸을 옆으로 비켜섰는데, 귓가에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야.”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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