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Raison d'etre(8)
부당한 방식으로 권리를 취하고 싶지 않다. 그가 보여 준 다정함을 저버리고, 채우지 못할 갈증을 채우려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다. 아버지가 내게 시킨 건 도둑질이었는데, 부도덕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현실과 타협할 수는 없었다.
“……허.”
아버지는 헛웃음을 흘리며 순간 몸을 휘청였다. 반사적으로 부축해드리려 했지만, 그가 거칠게 뿌리치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난 내게 아버지가 짓씹듯 이야기했다.
“알파 하나 못 꼬셔서 씨도 못 배는 놈이, 이젠 그거 하나 제대로 못 해?”
지그시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퍽 모욕적인 말이었지만, 별달리 충격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내게 가지고 있는 인식은, 이미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권이도 씨에게 정식으로 협상 조건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이런 말밖에 없었다. 아니, 그래도 한 번 넘겨줬던 자료이니 이번엔 정식으로 요구해 볼 생각이었다. 그가 일방적으로 주는 게 아니라, 제대로 된 계약의 대가로 말이다.
“미리 약속한 자료를 달라고…….”
“그 입 다물지 못해?”
버럭 소리친 아버지가 들고 있던 USB를 바닥에 내던졌다. 그걸로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몸체를 구둣발로 짓밟기도 했다. 시근덕거리며 숨을 몰아쉰 그는 까드득 어금니를 갈며 눈을 번뜩였다.
“그 새끼가 달라고 순순히 넘겨줄 것 같아?”
“…….”
“넘겨줄 것 같았으면 진작 줬겠지. 그 자식은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는 거야. 우릴 등쳐 먹고 버리려고 한 거라고!”
아버지는 눈가가 시뻘게진 채로 연신 소리를 질렀다. 내게 바짝 다가와서는 어깨를 꽉 붙든 채 한마디 한마디 힘을 줘 내뱉기도 했다.
“내가 그런 뜬구름 잡는 소리나 듣자고 널 보낸 줄 알아? 네가 그 자식한테 자료 얘기를 하면, 그럼 그 자식이 더 꼭꼭 숨겨 놓지 않겠냐, 응?”
그 격한 반응에 도리어 당황한 건 나였다. 아버지의 초조함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우선 얘기해 보겠다는 말에 이토록 화를 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건 마치, 내가 권이도에게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지 않은가.
“뭐, 권병욱 회장이 별세를 해?”
“…….”
“그 노인네가 창창히 돌아다니는 걸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아직도 여기저기 좆질이나 하고 돌아다니는 알파가 그렇게 쉽게 죽을 것 같아?”
권이도가 내게 거짓말을 한 걸까. 물론 올해로 여든다섯이 된 권병욱이 여기저기 좆질을 하고 다니진 않겠지만 말이다.
“그 전에 우리 기업이 먼저 죽으면, 그럼 어떡하려고 그러냐.”
“아버지.”
순간, 나는 그의 눈에 스치는 혐오를 똑똑히 보았다. 내가 부르는 호칭에 그는 반사적으로 덜컥 거부감부터 내비쳤다. 그렇게 다정한 아버지를 연기할 땐 언제고, 내가 쓸모없다고 판단하자마자 속내가 드러난 것이다.
“……기업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생각한 그대로를 입 밖에 내뱉었다. 평소라면 결코 말하지 않을 내용이었고, 아버지가 불같이 화를 낼 만큼 시건방진 소리였다.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해결해 봤자 원인을 뿌리 뽑지 않으면 결국 똑같을 겁니다. 시스템 하나 빼 온다고 뒤집힐 상태였다면 이렇게까지 무너지는 일도 없었을 거고요. 도태된 경영 방식을 뜯어고치지 않는 이상 바뀌는 게 없다는 걸 아시잖아요.”
해신금융그룹이 무너지는 건, 근본적으로 아버지의 책임이었다. 수없이 많은 경영 비리를 묻어 둔 채 눈앞의 일에만 급급하여 먼 미래의 손해를 알아채지 못했다. 이미 충분히 바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쉬운 길을 찾겠다며 빙빙 돌아 여기까지 온 게 아닌가.
“오히려 멀리 봤을 땐 권이도를 등지지 않는 편이…….”
짜악!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고개가 오른쪽으로 돌아가고, 가만히 있던 몸이 순간 비틀거렸다. 번쩍 새하얗게 번진 시야는 고정되지 못한 채 바닥 언저리를 맴돌았다.
“네까짓 게 감히 훈계 질을 해?”
귓가에 이명이 들리는 듯했다. 물에 빠진 것처럼 아버지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울렸다. 뇌가 크게 흔들리면 이러할까. 눈앞이 핑 도는 감각이 낯설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지금, 쥐새끼처럼 그 자식한테 빌붙으라고?”
나는 내게 일어난 일을 인식하지 못한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약간의 간격을 두고, 왼뺨에서 알싸한 통증이 퍼져 나갔다. 살짝 달싹인 입술에선 비릿한 피 맛도 함께 느껴졌다. 한 번, 두 번, 눈을 깜박일 때마다 아득히 멀어졌던 현실감이 서서히 내게로 돌아왔다.
“…….”
뺨을 맞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버지에게. 감히 훈계 질을 했다는, 고작 그러한 이유로.
깨닫는 순간 놀라울 정도로 모든 통증이 밀려왔다. 뺨은 물론, 잘못 깨문 혀라든가, 아니면 너덜너덜하게 터진 입 안쪽 살 같은 것. 혹은 명치가 옥죄는 감각과 함께 딸려 온 극심한 욕지기 따위가.
“쓸모없는 새끼…….”
입 안에 피 섞인 침이 고였다. 목으로 넘기고 싶었지만, 자꾸만 치솟는 토기가 그 모든 걸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금방이라도 무언가 쏟아질 것처럼 가슴 언저리가 울렁거리며 아려 왔다.
“너 같은 걸 괜히 주워 왔지.”
느리게 들어 올린 시선에 무미건조한 눈동자가 보였다. 발끝에 채는 돌멩이를 보듯 감정이라곤 눈곱만큼도 담기지 않은 눈빛이었다.
“주제 파악을 해, 주제 파악을. 짐승도 키워 준 은혜를 안다는데, 넌 왜 항상 그 모양이냐. 내가 아니었으면 산 사람도 아니었을 놈이…… 태생부터 길바닥에서 구르던 게 경영에 대해 알긴 해?”
그래,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나는 차게 내리는 눈을 맞으며 죽었을 테니까. 이 자리에서 뺨을 맞는 게 아니라, 정말 길거리에 널린 돌멩이처럼 하찮은 존재가 되었을 테니.
“꼴도 보기 싫으니까 썩 꺼져. 당분간 얼굴 보는 일 없을 게다.”
그런데 왜, 그걸 알면서도 이렇게 억울한 기분이 드는 걸까. 아버지가 하는 모든 말들에 왜 이렇게 마음이 무너졌을까.
“……가보겠습니다.”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회장실을 빠져나왔다. 문이 닫히기 직전까지 아버지는 내게 그 어떤 인사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 사실이 서운하진 않았고, 대신 여러 가지 의문을 품게 했다.
‘쓸모없는 새끼…….’
묻고 싶었다. 내 존재의 이유는 무엇이냐고. 나는 그저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장기 말에 불과하냐고. 그럼 그러한 쓸모조차 없어진 지금은 대체 무얼 하며 살아가야 하냐고.
* * *
엘리베이터에 타면 누군가 마주칠까 싶어 높은 건물을 계단으로 내려왔다. 두어 번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지만, 난간을 붙잡은 덕에 볼썽사나운 꼴은 면할 수 있었다. 다행히 1층에 도착할 즈음엔 왼뺨의 통증이 많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
건물 가까운 곳에 서 있던 김 실장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늘 그랬듯 차 문을 열어 주고, 말없이 어디론가 사라졌을 뿐. 다시 돌아왔을 땐 손에 조그만 편의점 봉지를 들고 있었다.
“……이게 뭡니까?”
봉지가 차갑다 싶더니만 넓적한 팩에 담긴 아이스크림이 들어 있었다. 파란색 플라스틱 뚜껑이 달려 있고, 눈꽃이 그려진 겉면엔 ‘밀크셰이크’라고 쓰인 제품이었다. 나는 묵묵히 안전벨트를 매는 그를 보며 가느다란 웃음을 흘렸다.
“아직 아이스크림 먹을 날씨는 아닌데…….”
금방 생각나는 게 아마 이런 것밖에 없었나 보다. 나는 양손에 아이스크림을 쥐고 있다가 조심스레 부어오른 왼뺨에 가져다 댔다.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예.”
이럴 때 보면 김 실장도 표정을 너무 못 숨긴다. 적당히 웃어넘기면 될 텐데 미간 사이에 힘을 잔뜩 주고 있었다. 백미러로 보이는 눈매가 퍽 심각해 보여서 도리어 내 기분은 점점 더 괜찮아졌다.
그 후 집에 도착할 때까지 김 실장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아이스크림이 말랑하게 녹았고, 나는 멍하니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봤다. 평소라면 이런저런 잡생각을 했을 텐데, 오늘은 정말 아무런 생각도 들질 않았다.
유일하게 고민이 된 건, 권이도와 함께해야 할 저녁 식사였다. 그때까지 뺨이 가라앉으면 좋으련만, 아마 그럴 가능성은 적어 보였다. 원체 피부가 예민한 탓에 조금만 상처가 나도 유독 도드라지곤 했다. 그 때문에 옷을 벗으면 권이도가 남긴 자국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넘어졌다고 하면 믿을까.
사실,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었다. 우리는 분명 몸을 섞었지만, 그 이전보다 멀어진 사이가 되었으니. 평소처럼 식사를 같이하면서도, 저녁 식사 후 대화를 나누던 시간만큼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김 실장은 대문 앞에서 차 문을 열어 주고 한참이나 가만히 서 있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는데, 차마 입 밖으로 나오는 게 없나 보다. 괜찮다고 말해 주면 좋았으련만. 안타깝게도 내게 그런 여유는 남아 있지 않았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나는 딱 그 말 한마디만 하고 그를 뒤로한 채 초인종을 눌렀다. 이 집에 그렇게 오래 있었는데, 대문으로 들어가는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손에는 다 녹아 빠진 아이스크림을 달랑 들고, 왼뺨은 팅팅 부어서는 말이다.
끼익, 대문이 열렸다. 김 실장은 아직도 차에 올라타지 않고 있었다. 뒤통수가 따가울 만큼 신경 쓰였지만, 모르는 척 한 걸음 옮기려던 때였다.
“……도련님.”
기시감이 들었다. 언제였더라. 약혼식 날이었던가. 장지문이 좌우로 열리던 순간에 그가 나를 불렀던 그때처럼.
“들어가면 약부터 바르세요.”
고르고 골라 하는 말이 고작 저런 걱정이라는 게 우스웠다. 물론, 가장 어이없는 건 그 말을 듣고 우뚝 걸음을 멈춘 나였지만. 정말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겨우 말 한마디에 휘둘릴 괜찮은 척이었나 보다.
일부러 알겠다고 대답하진 않았다. 그냥 그대로 걸음을 옮겨 대문을 지나쳤을 뿐. 그런데 넓게 펼쳐진 정원을 보자마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
내 집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언젠가 권이도가 오피스텔에서 나를 데리고 왔을 때처럼, 이 으리으리한 저택이 평생을 살아온 안식처인 양 반갑게 느껴졌다.
나는 돌길을 따라 걸으며 잘 조경된 정원을 둘러봤다. 매일 온실에 갈 때마다, 점심 식사 후 산책을 할 때마다 질리도록 봐 온 곳이었다. 이른 새벽 정원사가 관리하고, 잘 정돈된 잔디엔 이따금 참새 같은 것들이 총총 뛰어다니곤 했다.
평화롭다고 해야 할까. 오늘 있었던 모든 일이 꿈만 같았다. 비록 아직도 귀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지만, 눈을 뜨면 다 사라져 버릴 환상일지도 모른다.
우선, 조금이나마 잠을 자볼까 했다. 수면제를 최대한 많이 먹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조용히 잠들 생각이었다. 악몽을 꿔도 좋으니 우선은 이 모든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 모든 계획은, 집 안으로 들어가 2층에 다다르는 순간 모조리 어그러졌다. 내 방으로 가는 어귀. 그곳에 선 한 사람이 나를 보며 이야기하는 바람에.
“이제 옵니까?”
“…….”
권이도가 아침과 똑같은 차림으로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벽에 기대어 선 채 누가 봐도 나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분명 출근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단정히 차려입은 정장엔 한 치의 흐트러짐조차 없었다.
“왜 여기에…….”
나는 멍하니 그와 시선을 마주한 채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 짙은 눈동자가 딱딱하게 굳는 걸 보곤, 반사적으로 고개를 푹 숙여야만 했다. 아, 망했다. 그런 생각과 함께 무서우리만치 냉랭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고개 들어.”
“…….”
흠칫, 어깨가 들썩였다. 모르는 척 그를 지나치려 했지만, 그보다 권이도가 더 빨랐다. 성큼성큼 내게 다가온 그는 우악스럽게 턱을 움켜쥔 채 내 고개를 억지로 들게 했다.
“…….”
“…….”
나무 냄새가 났다. 묵직하고 고요한 페로몬은 금방이라도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쏟아졌다. 그와 몸을 섞은 이후 더 예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갈무리하지 못한 감정이 짙게 흘러넘쳤기 때문일까. 어느 쪽이건 숨이 막힐 만큼 무거운 분위기인 건 사실이었다.
“정세진 씨.”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무서우리만치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
“누가 이랬습니까?”
별거 아니라고, 그렇게 대답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권이도의 인내심은 그리 길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떤 새끼냐고 묻잖아.”
붙잡힌 턱이 아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 강한 힘도 아니었는데, 권이도의 손이 닿는 부분이 뜨겁게 느껴졌다. 나는 억지로 그의 시선을 피하며 최대한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길바닥에서 넘어졌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대답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냥, 이런 변명으로라도 그가 넘어가 주길 바랐을 뿐이지. 당연히 권이도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또박또박 내뱉었다.
“내가 멍청한 질문을 했죠. 정세진 씨가 누굴 보고 왔는지 이미 아는데.”
그는 내 턱을 놓아주고 부어오른 뺨을 검지로 건드렸다. 내가 움찔 눈가를 찌푸리자 곧장 손을 떼어 내기도 했다. 아주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뜬 그가 조심스럽게 내 귓가를 어루만졌다.
“언제부터 손바닥이 길바닥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
“날 속일 생각이면 적어도 이런 얼굴은 보이지 말았어야지.”
귓바퀴를 어루만진 손이 눈가로 옮겨 왔다. 분명 아무것도 없을 텐데, 그는 엄지로 눈꼬리를 살살 어루만졌다. 그리고 내 뒤통수를 감싸 품으로 끌어당기며 나직이 이야기했다.
“울지 마, 세진아.”
“…….”
아무런 전조도 없이, 그 말을 듣자마자 눈물이 흘러내렸다. 주르륵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은 눈을 한 번 깜박일 때마다 점점 더 많아졌다. 대체 언제부터 이랬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못다 한 설움이 자꾸만 쏟아져 내렸다.
‘이 애비 얼굴에 먹칠하지 말거라.’
“……흐윽.”
그냥, 내가 잘하면 달라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 형질이건, 아니면 이 세상이건, 혹은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 있는 그들이건. 내가 조금 더 노력하면, 그래서 부족함을 티 내지 않으면, 언젠가 더 나은 상황이 되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노력했다. 성적은 늘 최상위권을 유지했고, 학교에선 조는 모습 한 번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사랑받는 아들을 연기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겸손을 가장한 여유까지 보였다. 누군가 칭찬을 건네면 이게 다 아버지 덕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역시 내 아들이라니까.’
선심 쓰듯 돌아온 말은, 언제나 가뭄 난 마음에 단비처럼 느껴졌다. 그게 빈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른 목을 축이듯 애정을 갈구하기 바빴다. ‘아들’이라는 한마디가 듣고 싶어서, 나라는 사람을 죽인 채 내가 맡은 역할에 충실했다.
“흡…….”
사랑받고 싶었다. 더 정확히는 가족이 되고 싶었다. 비록 그 끝엔 의무만 남더라도 잠깐의 만족감이 주는 위로를 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세상엔 애를 쓴다고 바뀌지 않는 것들이 있다. 페로몬이 없다고 베타가 되는 게 아니듯, 한집에 산다고 내가 그들의 진짜 가족이 되는 건 아니었다. 아버지가 내게 보여 준 애정은, 고작 말 한마디에 사라질 만큼 부질없는 것이었다.
‘세진이 너한테 혼사가 들어왔어.’
또 다른 가족을 얻을 기회에 감사해야 하는 걸까. 최후의 종착지는 인질과도 같은 결혼이었다. 나를 데려올 때부터 예정된 목표를 끝내 얻어 내고야 만 것이다. 그렇게 매몰차게 내몰린 내가 결국 권이도의 품 안에 안겨 있다.
“……흐윽.”
뭐가 그렇게 서럽냐고 물으면 대답할 수는 없었다. 이제 와 맞은 곳이 아팠던 건지, 그게 아니면 그냥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던 건지. 너른 품이 주는 온기가 마음을 무너뜨려서, 숨이 차오를 만큼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주 오랜 시간, 그는 숨죽여 우는 나를 끌어안았다.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은 서툴렀지만, 내게는 열 마디 말보다 커다란 위로가 되었다. 부드럽게 스미는 페로몬이 온전히 나를 향한 애정을 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