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Raison d'etre(7)
“…….”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단 사실을 알면서도, 파르르 눈꺼풀을 떠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나를 감싸던 아늑함은 사라지고,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머리가 차갑게 식는 듯했다.
변명…… 아니, 해명이라고 해야 하나. 왜 저걸 새카맣게 잊고 있었는지 나 자신의 멍청함에 어이가 없었다. 귀신에게 홀렸던 건지, 그게 아니라면 지나치게 여유를 부렸던 건지.
“…….”
차마 그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다. 조금 전,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그런 것들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당연히 화를 내겠지. 그게 아니라면 냉랭한 눈으로 야멸차게 나를 욕하겠지. 어떤 반응을 보이건 내게는 그다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정세진 씨.”
“……네.”
겨우겨우, 대답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는 비스듬히 나를 응시한 채 들고 있던 서류를 무릎 위에 내려놨다. 그리고 오랜 침묵 뒤에야, 예의 그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왜, 필요했습니까?”
“…….”
나는 그게, 권이도가 내게 건네는 마지막 자비라고 생각했다. 어떤 변명이든 해보라고 친히 기회를 주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가만히 입을 다문 채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자료 하나만 가져오거라.’
아버지가 시켰다고 하면 어떨까. 그런 선택지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권이도의 분노가 해신그룹을 향한다면 내 쓸모는 거기서 끝나는 것일 테니. 그냥, 탐욕스러운 약혼자가 되는 편이 차라리 나은 선택이 아닐까.
“……욕심이 나서 그랬습니다.”
핑계는 아무렇지 않게 나왔다. 목소리가 떨리지도 않았고, 표정을 무너뜨리는 일도 없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내게 권이도가 삐딱하게 되물었다.
“욕심?”
티 나지 않게 이불깃을 움켜쥐었다. 목구멍이 바짝 조여들었지만, 겨우겨우 얕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 와중에, 내가 그의 옷을 입고 있단 사실이 가슴이 아릴 만큼 미안하게 느껴졌다.
“……본부장을 관둔 게 아쉬웠거든요.”
‘아쉬운가 보네요. 본부장을 관둔 게.’
떠오르는 내용이 고작 이런 것밖에 없었다. 권이도와 한 번 나눴던 대화들이 머릿속에 한가득 떠올랐다. 본부장이 적성에 안 맞는다고 했지만, 권이도가 부디 그쪽을 거짓말이라고 생각해 주길 바랐다.
“그걸 가져가면…… 기업에서 한자리 꿰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아, 출세욕.”
그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내 이야기를 한 단어로 함축했다. 출세욕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이 모든 게 허무해졌다. 출세라니. 단 한 번도 바란 적 없는, 나와는 거리가 먼 단어였다.
“……내가 지난번에 했던 말 기억합니까?”
약간의 간격을 두고 그가 넌지시 이야기했다. 서류를 침대 위에 올려놓은 채 느릿느릿 속눈썹을 내리깔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그는 눈을 깜박이는 게 신기할 만큼 완벽한 외모를 갖고 있었다.
“선뜻 내어 주느냐…… 주지 말고 숨겨 놓느냐.”
그가 숨결처럼 내뱉은 말은 반쯤 이해되지 않았다. 그저, 재킷 안주머니를 뒤진 그가 무언가 꺼내 드는 모습만 뇌리에 각인됐지. 가지런한 손가락이 들고 있는 건, 내가 그의 비서를 통해 전해 줬던 USB였다.
“이 자료의 원본입니다.”
“…….”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무어라 반응할 새도 없이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그는 서류 위에 USB를 내려놓고 담담한 눈으로 나와 시선을 맞췄다.
“정세진 씨한테 주도록 하죠.”
“…….”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목소리가 나오지도 않았고, 그에게 시선을 떼어 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분명 화를 내리라 생각했던 권이도는 더할 나위 없이 너그러운 어조로 이렇게 이야기했다.
“필요하면 말하지 그랬어요.”
그걸로 끝이었다. 그는 곧장 침대에서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빠져나갔다.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그를 붙잡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눈을 커다랗게 떴다.
달칵, 문이 닫힘과 동시에 막혔던 숨이 쏟아지듯 터져 나왔다. 뒤늦게 밀려든 현실감은 무심코 지나쳤던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정세진 씨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 질문의 전제는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모든 걸 내어 주겠다고 말하는 내게 그는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겠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뭐…… 내가 내 손으로 준다면 얘기가 다르긴 하겠네요.’
“……하.”
떨리는 시선 끝에 권이도가 꺼내 놓은 USB가 보였다. 내가 직접 노트북에서 뽑아 그의 비서에게 건네준 것이었다. 삐, 이명이 들리는 귓가에 그가 미국에 가기 전 했던 말이 들리는 듯했다.
‘올 때 선물을 가져오죠.’
가져오겠다고 했다. 사 오는 게 아니라, 가져오겠다고. 내가 그에게 뭘 요구할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댔다. 눈앞에 놓인 성과가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아버지와 권이도, 그 누구도 배신하지 않고 네가 바라던 결과를 얻어 낼 수 있는 기회라고.
* * *
내가 살아온 삶에는 딱 두 번의 전환점이 있었다. 한 번은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눈이 오던 날, 맨발로 길거리에 뛰쳐나왔던 순간. 그리고 다른 한 번은 무작정 비싸 보이는 옷을 입은 남자를 붙잡아 다짜고짜 내뱉던 순간.
‘저 오메가예요.’
그날, 남자는 지저분한 오메가를 주웠고 맘씨 좋은 재벌이라며 언론의 찬사를 들었다. 건강 검진을 빙자한 피검사가 형질 검사였다는 건, 아버지와 나, 그리고 주치의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나는 따뜻한 잠자리와 먹거리를 얻었으니, 이제 와 그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기회라고 해야 할까. 순간의 선택이 미래를 좌지우지하는 경험은 그리 많지 않다. 설령 그러한 상황이 온다고 해도 미래에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가능성은 적었다. 나는 두 번의 선택을 모두 만족했지만, 때로는 더 나은 결정이 있지 않았을까 돌이켜 보곤 한다.
‘이 자료의 원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권이도가 내게 건넨 건, 단순한 USB가 아닌 해신그룹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열쇠였다. 그가 어떤 심정으로 내어 줬는지는 몰라도, 내게는 존재의 가치를 증명할 중요한 수단 중 하나였다. 하늘이 내린 동아줄을 잡을지 말지, 그건 오로지 내가 결정해야 할 일이었다.
“도착했습니다, 도련님.”
차는 부드럽게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멍하니 차창 밖을 내다보던 나는 김 실장의 한마디에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잡념을 모두 지워 낸 내 머릿속과 비슷하단 생각이 든다.
김 실장은 늘 그랬듯 자연스럽게 뒷문을 열어 줬다. 고맙다는 뜻으로 눈인사를 건네자, 그가 어쩐지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물었다.
“……밑에서 대기할까요?”
긴 시간 나를 봐왔던 사람답게, 말로 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게 있나 보다. 가령 오늘 내 용건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 같은 것.
“차 빼지 말고 근처에 계세요. 부탁드립니다.”
가볍게 건넨 말에 그는 꾸벅 인사한 뒤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나는 괜히 넥타이를 매만지며 천천히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해신금융그룹 본사. 아주 오랜만에 찾아온 아버지가 있는 회사였다.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는 길에는 익숙한 얼굴 몇몇과 마주쳤다. 일부러 사람이 많은 시간대를 피했건만, 우연이라는 게 참 야속하기만 하다. 멀리서부터 눈을 동그랗게 떴던 그들은 나와 거리가 좁혀질 즈음엔 저마다 반가운 얼굴로 크게 인사를 건넸다.
“본부장님! 이게 얼마 만이에요!”
윤 대리는 그중 가장 격한 반응을 보인 사람이었다. 로비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사 왔는지, 양손에 음료 캐리어를 들고 있었다. 나는 그런 윤 대리를 향해 습관처럼 살가운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네요, 잘 지냈어요?”
“아휴, 제가 본부장님 없이 어떻게 잘 지내요. 오늘 무슨 일로 오셨어요. 복직하신 거예요?”
“아뇨, 잠깐 볼일이 있어서.”
어깨를 으쓱하며 손가락으로 위층을 가리켰다. 윤 대리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아버지를 뵙기 위해 왔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화제를 돌려 보고자, 나는 윤 대리를 보자마자 가장 먼저 달라진 점을 언급했다.
“머리 잘랐네요. 잘 어울려요.”
“정말요?”
윤 대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원래는 허리까지 오던 머리가 지금은 턱에도 닿지 않을 만큼 짧아져 있었다. 윤 대리는 샐쭉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눈을 찡긋했다.
“애 키우면서 일까지 하려니까 머리 정리할 시간도 없더라고요. 다들 아깝다고 난리던데 본부장님이 잘 어울린다고 해주시니까 좋네요.”
“바쁘겠어요. 유치원 갈 때 되면 챙겨 줄 것도 많을 텐데.”
“말도 마세요. 애가 말이라도 잘 들으면 좋겠는데, 요새 얼마나 미운 짓만 하는지…….”
나는 윤 대리와 함께 엘리베이터로 향하며 이런저런 근황을 주고받았다. 윤 대리는 아들이 영 말을 안 듣는다며 잘 때가 제일 예쁘다는 말을 두 번이나 했다. 분명 막 걸음마를 떼었을 때도 비슷한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정작 그 말을 하는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였다.
“유치원 들어가는 기념으로 필요한 거 있으면 얘기해요. 비싼 것도 괜찮으니까.”
“와…… 본부장님 그러시면 저 진짜 큰 거 바라요.”
“얼마나 큰지 한 번 들어나 보죠.”
원래 직통 엘리베이터를 탈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잠깐 수다를 떠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게다가 음료를 들고 있는 탓에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기도 힘겨워 보였고. 이제 커피 심부름을 할 연차가 아니었음에도 윤 대리는 신입 사원을 시키는 법이 없었다.
“아휴, 아니에요. 본부장님한테 뭘 더 어떻게 받겠어요. 지난번에도 거의 혼수급으로 해주셨으면서.”
내가 그랬던가. 곰곰이 기억을 되살리며 경영기획팀이 있는 층수를 눌렀다. 뒤이어 회장실이 있는 층도 누르자, 윤 대리가 은밀하게 이야기했다.
“직원 생일 선물로 안마 의자를 주시는 분은 본부장님밖에 없을걸요.”
“뭐…….”
확실히 그런 적이 있긴 했다. 육아가 몹시 고돼 보여서 사 줬을 뿐이지만.
“그건 윤 대리 선물이었고, 이번엔 아들 선물이니까요.”
“정 그러시면 다음에 회사 데리고 왔을 때 한 번 놀아 주세요. 애기가 애 아빠보다 본부장님을 더 좋아해요.”
차마 알겠다고 대답할 수 없는 말이었다. 윤 대리가 아들을 회사에 데려왔을 때, 나는 권이도의 집에 있을 테니까. 아니, 어쩌면 권이도의 집이 아닌 내 오피스텔일지도 모르겠다.
“그…… 잠깐 기획팀 들를 시간 없으신 거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즈음, 윤 대리가 넌지시 물었다. 나는 미안하다는 의미로 그를 향해 슬쩍 눈짓을 보냈다. 눈꼬리를 축 내린 윤 대리가 내게 꾸벅 인사를 건네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맞다, 윤 대리.”
그리고 문이 닫히기 직전, 나는 막 생각난 것처럼 윤 대리를 불러세웠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눈가를 찡긋하며 이야기했다.
“다음에 만날 땐 본부장이라고 부르면 안 됩니다.”
얼핏 윤 대리가 서운한 표정을 짓는 게 보였다. 금세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기 때문에 정확히 보지는 못했지만.
나를 태운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회장실이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하나하나 높아지는 숫자를 보며 나는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USB를 꺼냈다. 우웅, 울리는 기계음이 점점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듯했다.
‘……회사에 다녀오려고 합니다.’
오늘 아침, 나는 아침을 먹는 권이도에게 이렇게 통보했다. 아버지를 만나러 간다고 하진 않았지만, 아마 그 또한 용건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니 무어라 묻는 대신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이렇게 이야기했겠지.
‘3일이 걸렸군요.’
‘…….’
그래, 3일이었다. 그가 내게 자료를 쥐여 주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을 이어 나간 게. 내가 온실에 가지 않고, 방에만 틀어박혀 마음을 다잡은 것도. 그와의 정사 이후 몸에 남은 흔적이 전혀 흐려지지 않을 만큼 짧은 시간.
‘……오후에 김 실장이 데리러 올 거고, 금방 돌아올 것 같습니다. 아마 권이도 씨보다 빨리 올 거예요.’
권이도는 그 말을 들었을 땐 조금 불쾌한 표정이 되었다. 입가에 걸렸던 미소를 지워 낸 채로 가만히 눈을 들어 올린 것이다.
‘왜 내가 준 차를 안 타고 김 실장이 옵니까?’
‘……차 키는 권이도 씨 방에 두겠습니다.’
선물을 받았으니 앞서 받은 차 두 대는 돌려줘야 했다. 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한 이상, 권이도도 이의는 없을 것이다. 설령 이의가 있다고 한들 이번엔 나도 양보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뭐…… 그래요.’
그러나 권이도는 생각보다 쉽게 내 말에 수긍했다. 내려놓았던 젓가락을 들어 올리며 무심히 이야기하기도 했다.
‘정세진 씨한테 필요한 게 차 키는 아니었겠죠.’
“…….”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나는 널찍한 복도를 지나 커다란 문 앞에 섰다. 똑똑, 노크를 건네자 안쪽에서 작게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세진입니다.”
손에 쥔 USB가 이상하리만치 무겁게 느껴졌다. 아버지는 금세 대답했고, 나는 애써 긴장되는 마음을 억누르며 회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약간의 가죽 냄새와 풀 냄새가 섞인 회장실은 구석진 곳에 비서가 관리하는 화초가 잔뜩 놓여 있었다.
“그래, 할 얘기가 있다고?”
아버지는 내게 결혼을 통보할 때처럼 잔뜩 초조한 얼굴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몸을 일으켜 내 쪽에 다가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문 앞에 선 내게 불쑥 다가온 아버지가 한껏 고대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성공한 게냐?”
“…….”
잠깐 고민이 됐다. 이제 와 망설이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알고 있으면서. 아버지에게 주기 위해 3일 전부터 미리 준비한 자료였건만.
“왜 대답이 없어, 응? 성공했냐니까?”
아버지는 그 찰나를 참지 못한 채 내 양어깨를 붙들었다. 부담스러울 만큼 가까이 다가온 그에게서 그간 맡지 못했던 담배 냄새가 났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해신그룹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을 때, 이따금 피우곤 하던 것이었다.
“……아버지.”
“그래, 세진아.”
내 선택이 과연 옳은 걸까. 다정한 대답에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탐욕스러운 눈에 가득 담긴 기대가 적어도 나를 향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나는 말 없이 그에게 들고 있던 USB를 내밀었다. 내 손에 들린 물건을 발견하자마자 아버지의 얼굴이 환하게 뒤바뀌었다. 금방이라도 환호성을 내지를 것처럼, 그가 이를 드러내며 웃으려던 찰나였다.
“선호그룹 재정 상태에 관한 자료입니다.”
“……뭐?”
기쁘게 밝아졌던 표정에 가늘게 금이 갔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혹은 그게 대체 지금 무슨 상관이냐는 듯.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꼈는지, 부리부리하게 뜬 눈에 더 이상 자애로운 기색은 없었다.
나는 가만히 눈을 내리깐 채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를 꾸며 냈다.
“권병욱 회장이 곧 별세할 것 같다고 합니다.”
언젠가, 권이도가 내게 해줬던 말이었다. 그룹의 덩치가 지나치게 커졌고, 회장님까지 오늘내일한다고. 아버지를 향한 선물 하나는 필요하지 않겠냐며 아무렇지 않게 해줬던 이야기들.
“권병욱 회장이 별세한 뒤엔 선호그룹이 해체될 거라는 경영주들의 의견도 정리해 놨습니다. 추가로 투자해서 이득을 볼 만한 계열사와 가망이 없는 계열사를 분리해서 문서화시킨 겁니다.”
그저 궤변에 불과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원한 게 고작 이런 것들이 아니라는 것도.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이런 것들 뿐이기에,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말도 이것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말씀하신 자료는 찾지 못했습니다.”
나는 끝내, 권이도를 배신하지 못했다. 권이도가 내게 건네준 USB. 아버지가 간절히 원하던 자료는 차 키와 함께 그의 방에 놓아두었다. 그에게 받은 선물은 향수로 충분했기에, 배가 터지도록 받은 무언가는 다시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옳았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