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Raison d'etre(6)
보편적인 특이 형질들은 사이클이 돌아오면 억제제를 복용하는 것으로 이겨 낸다. 열성의 경우 시판되는 억제제로 충분했고, 우성의 경우 의사의 처방에 따라 알맞은 억제제를 복용하는 것이 중요했다.
가끔 억제제를 먹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 대부분은 이미 기혼이거나 아니면 함께 욕구를 해소할 파트너가 있는 경우였다. 나는 전자도 후자도 아니었지만, 억제제가 듣지 않으니 늘 휴가를 내는 수밖에 없었다.
짧으면 한 달, 길면 반년. 사이클이 찾아오는 주기는 형질의 우열에 따라 달랐다. 우성이면 우성일수록 더 자주 찾아오고, 열성이면 열성일수록 더 드물게 찾아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우성 오메가로 매달 꼬박꼬박 히트 사이클을 겪었다. 그럴 때면, 방 안에 틀어박혀 들끓는 욕망이 잠잠해질 때까지 숨죽여 버텨야만 했다. 모든 소용돌이가 사그라지는 순간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순간순간을 버텨 냈다.
그렇게 히트 사이클을 보내면서도 누군가와 만나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알파를 만나야겠다는 생각도, 배 속에 고인 성욕을 해소해야겠다는 생각도,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는 말이다.
‘……만나는 분을 만드시면 어떻습니까.’
한 번은 김 실장이 진지하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답지 않은 오지랖이었고, 온갖 망설임과 머뭇거림 끝에 튀어나온 한마디였다. 내가 얼마나 갑갑했으면 그랬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연애를 하라는 말씀입니까?’
‘…….’
그가 긍정하지 못한 건, 아마 그 말의 의도가 ‘연애’를 뜻한 게 아니기 때문일 거다. 그리고 본부장의 자리에 있는 내가 누군가를 만나지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일 거고.
‘아직은 그럴 여유가 없군요.’
여유가 없다. 여러 의미가 담긴 핑계였다. 시간도 감정도 막연히 부족했으니, 이보다 더 적당한 표현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곁을 내어 주는 것 역시, 체력과 정신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한 일이 아니던가.
물론, 그게 연애가 아닌 단순히 섹스 파트너에 불과하다고 해도 말이다.
‘알파를 만나는 게 쉽진 않죠.’
히트 사이클을 제대로 보내기 위해선 단순히 관계를 맺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페로몬을 분출하고, 교류하며, 번식을 위한 조건이 모두 갖춰져야 한단 말이었다. 짐승 같은 과정이었을지언정 상대는 꼭 ‘알파’여야 했다.
‘애초에 소문이 안 날 만한 사람도 없고…….’
그러나 대개 특이 형질은 저마다 한자리씩 꿰찬 거물인 경우가 많았다. 베타보다 우월한 유전자를 타고난 이들이 오랜 옛날부터 주도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와 재산이 대물림하는 사회답게, 그들이 가진 형질 역시 아직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구시대적 귀족 문화가 다를 바 없었지만, 달리 이어지는 굴레를 끊을 방도도 없었다. 당연히, 내가 어느 회사의 누구를 만나건 업계에는 반드시 소문이 돌 터였다.
‘아시잖아요. 아버지가 뭐라고 하실지.’
특이 형질은 특이 형질 사이에서만 유전되기에, 베타가 끼어들 자리는 점점 줄어들기만 했다. 아버지가 오메가인 나를 주워 온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결혼과 출산이 수단에 불과한 사회에선 알파와 오메가라는 형질이 크나큰 메리트로 작용하곤 했으니까. 내가 오메가라는 형질에 감사하지 않으면서도 차마 원망하지 못하는 것도 그래서였다.
‘……죄송합니다.’
결국, 김 실장은 죄스러운 얼굴로 사과를 건넸다. 내가 걱정돼서 한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에게 괜찮다고 이야기해 주지 못했다. 제아무리 선의로 건넨 말이라 할지라도 불가능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만큼 무책임한 일도 없다.
‘흐, 으읏…….’
그러니, 히트 사이클을 온전히 본능대로 보낸 건 처음이었다. 권이도가 해줬던 페로몬 샤워 이후, 이토록 만족스러운 시간은 없었다. 종국엔 그가 싸지른 정액에 배가 부를 정도였지만, 그를 밀어 내고픈 마음도 들지 않았다.
‘아…… 권이도, 흑…….’
임신할 가능성은 없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권이도가 노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걸로 모자라 중간 즈음엔 친히 하지 않아도 되는 행동까지 제 손으로 해버렸고.
‘잠, 아, 흐응…….’
세 번인가, 아니면 네 번인가. 그가 내 안에 사정한 직후의 일이었다. 나 또한 셀 수 없이 많이 사정한 탓에 성기에선 이제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는 깊게 삽입한 성기를 쑥 빼낸 뒤, 별반 힘들이지 않고 내 몸을 뒤집어 침대에 엎어뜨렸다.
‘……하아.’
자세가 바뀌었음에도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래서 힘없이 늘어졌는데, 그가 내 허리에 팔을 감아 엉덩이를 들어 올리게 했다. 몹시 수치스러운 자세였으나, 진짜 수치스러운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아, 잠, 잠깐, 흣!’
여전히 벌어진 구멍에 성기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들어왔다. 처음 풀어 줄 때와는 달리 그는 한 번에 두 손가락을 동시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마디마디 손을 구부려 안에 가득 찬 정액을 부드럽게 긁어내기 시작했다.
‘왜, 흐읏…… 흡…….’
‘가만히 있어야죠.’
아랫배가 움찔움찔 떨렸다. 꿀렁이며 흘러나온 정액이 허벅지를 따라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그가 굳이 헤집지 않아도, 이미 자연스럽게 빠져나올 만큼 양이 많았단 말이다.
‘흣, 싫어…….’
나는 이불을 움켜쥔 채 포복하듯 앞으로 기어갔다. 물론 채 한 걸음을 떼기도 전에 그가 발목을 잡아 쭉 잡아당겼지만 말이다. 힘없이 무너진 나를 끌어안으며 그는 날개뼈 부근에 두어 번 입술을 내리눌렀다.
‘안이 너무 가득 차서, 이러다 정세진 씨 배가 터질 것 같던데.’
‘아흐, 흐응…….’
‘그런데도 싫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정액이 가득 차서 배가 터진 오메가는 들어 보지 못했다. 거짓말하지 말란 뜻으로 고개를 저었지만, 권이도는 다른 손으로 내 배를 꾹 누르기까지 했다.
‘……흐.’
그가 가위질하듯 구멍을 좌우로 벌렸다. 배에 힘을 주며 오므리려고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안에 있던 것만 더 새어 나올 뿐이었다. 권이도는 끝까지 날 놓아주지 않았고, 여유롭게 그 모습을 구경하기까지 했다.
‘……아쉽군요. 정세진 씨는 이걸 못 본다는 게.’
입맛을 다시며 하는 말엔 목덜미가 홧홧할 만큼 수치심이 들었다. 차라리 오줌 싸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게 나을 것 같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만…… 흣, 제발, 제발 그만…….’
그는 내가 간절히 빌기 시작했을 때야 구멍에서 손가락을 빼냈다. 물론, 그게 내가 애원해서인지, 아니면 안에 있던 걸 모두 빼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고생했다는 듯 내 배를 쓸어내리며 흘리는 웃음소리만 들렸을 뿐.
‘왜 매번 이것만 그렇게 싫어하는지…….’
큼직한 손이 엉덩이를 좌우로 벌렸다. 엄지로 입구를 덧그리던 그는 엉덩이골에 귀두를 문지르며 다시 삽입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아무런 예고 없이 성기를 뿌리 끝까지 삽입했다.
‘……아흐응!’
아프지는 않았다. 이미 길든 구멍은 아무런 무리 없이 굵은 성기를 한 번에 받아들였다. 잠깐 조여든 내벽을 즐기던 권이도가 뒤에서 나를 덮치듯 끌어안고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흑, 아, 천, 천히…….’
‘얼마나…… 후, 얼마나 더 천천히 해, 응?’
정액으로 가득하던 공간이 이번엔 그의 성기로 가득 찼다. 원래는 둘 다 가득했으니, 이쪽이 더 낫다고 해야 할까. 권이도는 성기를 빼내지 않고 내가 느끼는 부분을 꾸욱 꾸욱 짓눌렀다.
‘흐, 나, 흣…… 갈 것 같……은…… 아아…….’
몇 번째 느끼는 사정감인지, 그런 건 셀 수조차 없었다. 발기가 풀린 성기에서 물 같은 정액이 흐르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는 내 사정을 봐주지 않았고, 느긋하게 빼냈던 성기로 내가 느끼는 부분을 단숨에 쳐올렸다.
‘……흐…….’
그가 나를 머리끝까지 뒤덮는 기분이었다. 정액이 나왔는지, 아니면 나오지 않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온몸이 저릿저릿할 정도의 쾌감이 머리털이 삐쭉 설 만큼 강하게 몰아쳤을 뿐.
‘하아, 하아…….’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힘없이 숨을 몰아쉬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것 같아서 개처럼 혀를 내밀고 있기도 했다. 문제는, 권이도의 손이 이미 발기가 풀린 성기를 부드럽게 움켜쥐었다는 것 정도.
‘……아, 읏! 잠깐, 아…… 흐읏!’
한껏 예민해진 성기가 그의 손에서 마구 뭉개졌다. 젖을 대로 젖은 귀두를 문지르고 말랑한 기둥을 살살 주무른다. 솜털이 오소소 설만큼 자극적인 기분에, 정체 모를 배뇨감까지 밀려들었다.
‘아, 안 돼, 안 돼…….’
도망쳐야 할 것 같았다. 오줌을 싸는 게 덜 부끄럽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의 앞에서 실례를 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이미 온갖 체액으로 엉망이 된 침대에, 그런 것까지 흘리고 싶지는 않았단 말이다.
‘흡, 제발, 아, 흐으……!’
다급히 권이도의 손목을 붙잡았으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손을 움직였다. 힘이 어찌나 좋은지, 축 늘어진 몸을 한 팔로 단단히 고정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상체를 숙인 그가 밀착한 하반신을 비비적거리며 귓가에 속삭였다.
‘쉬이…….’
‘……!’
아랫배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사정할 때와는 또 다른 쾌감이 매질을 당한 것처럼 온몸에 쏟아져 내렸다. 한가득 차오른 배뇨감이 찰방 흘러넘침과 동시에, 그의 손에 잡힌 성기가 줄줄 말간 액체를 흘리기 시작했다.
‘……흐.’
한 번 나오기 시작한 무언가는 억지로 참으려 해도 참아지지 않았다. 정액도 오줌도 아닌 것이, 권이도의 손을 가득 적시고 침대로 흘러내렸다. 움찔, 움찔, 가늘게 경련하는 내게 권이도 특유의 나직한 음성이 전해졌다.
‘잘했어요.’
‘…….’
목덜미에 열이 오르는 듯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신음을 참는 동안, 권이도는 나를 꼭 끌어안고 어깨와 날개뼈 따위를 깨물었다. 마치 이갈이를 하는 짐승처럼, 온 피부를 잘근대며 드러난 모든 부위에 입술을 문질렀다.
‘욕 한마디 안 하는군요.’
‘……하.’
솔직히, 욕지거리가 나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변태 새끼라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이어진 뒷말로 모든 의욕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조금 기대했거든요. 정세진 씨가 하는 거면, 욕을 좀 먹어도 좋을 것 같아서.’
그렇게 고상한 목소리로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얌전한 섹스를 하리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토록 적나라하게 굴 줄은 몰랐다. 나는 헛웃음을 흘릴 기력도 없이 색색 소리를 내며 대꾸했다.
‘……그런 취향은 없어서요.’
‘그래요, 시간은 많으니까.’
‘그게 무슨…… 흐읏…….’
그가 다시 움직였기 때문에 짧은 휴식은 거기서 끝이었다. 그는 뒤에서 내 상체를 만지작거리며 내내 괴롭혔던 유두를 꼬집었다. 이러다 옷에 쓸리면 아플 것 같은데. 그리 생각함과 동시에 내 상체를 휙 들어 올리기도 했다.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제가 언…… 하읏!’
무어라 변명할 틈도 없이, 그가 허리를 강하게 쳐올렸다. 무너지려는 나를 억지로 붙잡아, 무릎을 세우게 한 채 뒤에서 끌어안기도 했다. 커다란 손으로 아랫배를 덮은 그가 다른 손으로는 내 턱을 붙잡아 입을 맞춰 왔다.
‘으응…….’
그가 깊이 삽입할 때마다 뱃가죽이 튀어나오는 기분이었다. 손바닥으로 꾹 누르고 있는 바람에 내벽이 더 자극되는 것 같기도 했다. 호흡을 이어 나가는 것도 힘이 드는데, 혀까지 섞기 시작하니 금세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성은 얄팍한 종잇장보다 더 가볍게 날아가 버렸다. 그가 넘겨주는 페로몬에 화답하듯, 내 페로몬 역시 넘실넘실 흘러나왔다. 아래를 헤집는 걸로도 모자라 입 안까지 헤집던 그는 내가 흘리는 타액을 모조리 빠짐없이 받아 마셨다.
그렇게 이어진 행위는 밤이 늦을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의식이 돌아올 때마다 어두운 정도가 달라졌으니, 시간이 뭉텅뭉텅 사라질 만큼 정신없는 섹스였단 말이다. 만약 체력이 떨어진 내가 잠들지 않았다면, 해가 뜰 때까지 이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세진아.’
의식이 날아가기 직전, 꿈과 현실의 경계가 애매한 가운데.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들이 나를 감싸고, 귀중한 것을 다루듯 온몸을 닦아 줬다. 중간중간 부드러운 입술을 내리누른 뒤엔 익숙한 체온과 페로몬에 둘러싸여 몸이 붕 떠오르기도 했다.
사랑받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늘 그려 왔던 안온함이 사실은 이런 거였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를 감싼 온기에 더 파고들었고, 또 그래서 아무것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무언가를 꼭 끌어안았던 것 같다.
눈을 떴을 땐, 주변이 온통 환하게 바뀌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풍경이 새카맣게 어두웠으니, 꼬박 하루가 지나 아침이 밝았다는 말이다. 수면제 한 알 없이 눈을 감았음에도, 근래에 꾸던 악몽 하나 꾸지 않고 개운하게 잠에서 깨어났다.
“…….”
서서히 돌아오는 의식이 하나둘 상황을 인식했다. 피부에 닿는 보드라운 이불이나, 흐리지만 익숙한 방 안 풍경 같은 것들. 분명 온갖 체액으로 엉망이 되었을 침대가, 이상하리만치 보송보송했다. 느릿느릿 눈을 깜박이자, 또렷해진 시야가 그제야 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곳이 권이도의 방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온몸에 스미는 페로몬도 권이도 특유의 묵직하고 관능적인 종류였다. 어제처럼 나를 흥분시키는 형태는 아니었으나, 잠기운이 남은 채로도 스멀스멀 만족감이 퍼져 나갔다.
이래서 푹 잠들었던 걸까. 둔탁한 근육통마저 잊힐 만큼 포근한 감각이었다. 히트 사이클이 끝날 때면 언제나 죽었다 살아나는 기분이었는데, 오늘은 평화롭게 쉬고 일어난 사람처럼 온몸이 나른하다.
시선을 천천히 다른 쪽으로 돌렸다. 옆으로 누워 있던 탓에 방 안 풍경이 한눈에 보였다. 내 방과 비슷하지만 조금 더 정적으로 꾸며진 공간. 채도가 낮은 인테리어가 권이도를 쏙 닮은 분위기를 풍기는 곳.
의외라고 해야 할까. 그는 내가 잠이 든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출근 준비를 모두 마쳤는지, 머리를 깔끔히 정돈한 채 몸에 꼭 맞는 정장을 입고 있다. 한쪽 다리를 꼬고 서류를 읽는 그의 손목엔 은색 메탈 시계 역시 채워져 있었다.
지금이 몇 시인진 모르겠지만, 참으로 완벽한 차림새였다. 온종일 그토록 난잡한 행위를 해놓고 배덕감이 느껴질 만큼 빈틈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 측면에서 보이는 얼굴도 어제와는 달리 우아하고 기품 있기만 했다.
문득, 그런 아쉬움이 들었다. 매끄럽게 이어진 콧대를 한 번 만져 볼 걸 그랬다고. 그가 내 모든 곳을 만지는 동안 나도 그의 입술 같은 곳들을 건드려 볼걸.
권이도 씨. 그렇게 부르려던 나는 무심코 시선을 돌려 협탁을 바라봤다. 조명이 있는 조그만 테이블, 그곳에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것들이 놓여 있어서.
“…….”
내 책장에 꽂혀 있던 소설책이었다. 내가 이 집에 들어와서 순서대로 가장 먼저 읽은 책. 전적으로 내 취향을 고려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읽었던 소설.
내 방에 있던 책이 권이도의 방에 있다는 건 문제 되지 않았다. 어차피 그의 물건이니, 그가 멋대로 가져와도 내가 상관할 바 아니었다. 다만, 저 책을 꺼낸 장소에 함께 숨겨 두었던 무언가가 문제였지.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권이도가 읽고 있는 서류로 눈을 돌렸다. 때마침, 고개를 돌렸던 그가 잠에서 깬 나를 보고 나지막한 탄성을 내뱉었다.
“아.”
“…….”
손끝이 차갑게 식는 듯했다. 눈앞이 캄캄하게 변하고, 변명을 내뱉어야 할 입술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들고 있는 서류, 구겨진 흔적이 남은 두꺼운 종이 뭉치. 영어로 빼곡한 한구석에 또렷하게 찍힌 선호그룹 마크까지.
“일어났어요?”
권이도가, 내가 그의 방에서 훔쳐 간 자료를 읽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