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Raison d'etre(3)
3일이 흘렀다. 권이도가 없는 시간은 첫날과는 달리 그리 허전하지만은 않았다. 나는 다음날부터 다시 온실에 갔고, 아무렇지 않게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온실에 조명을 달겠다던 약속대로, 권이도는 내가 본가에 가 있는 동안 사람을 시켜 대대적인 작업을 마쳐 놓았다. 전선을 따와 천장에 연결해서 밤이 늦은 시간엔 자동으로 켜지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어두울 때 와보진 않았지만, 눈으로 보지 않아도 충분히 예쁘리란 생각이 들었다.
“내일 무슨 일 있으십니까?”
“내일이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차를 마시던 중. 이태성이 뜬금없이 물었다. 향긋한 라벤더 향기를 맡으며 찻잔 위에 동동 뜬 꽃잎을 구경하던 즈음이었다. 아직은 개화 시기가 아닐 텐데, 그리 생각하며 되묻자 이태성은 저가 더 의아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전무님께서 내일은 출근할 필요가 없다고 하시던데요.”
“……음.”
내일 무슨 일이 있던가. 곰곰이 생각했지만, 떠오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권이도가 돌아오는 날도 아니었고, 내가 어디에 나가기로 한 날도 아니었다. 유일하게 짐작이 가는 부분은, 기껏해야 다 늦은 복지를 챙겨 주는 정도.
“뭐…… 쉬시면 되지 않을까요.”
권이도에게 생각이 있겠지. 그런 생각으로 얘기했는데, 이태성의 표정이 영 이상해졌다. 그는 나를 따라 라벤더 차를 한 입 마시고 눈가를 찌푸리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됩니까?”
“말씀하세요.”
읽던 책을 내려놓고 이태성과 시선을 맞췄다. 그는 큼직한 손으로 찻잔을 감싼 채 여전히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제가 본부장님을 경호하는 의미가 있습니까?”
“……음.”
나 또한 궁금하던 바였다. 권이도는 내게 무슨 의도로 이태성을 붙여 놨을까. 감시가 목적이 아니라면 이렇게 가까운 곳에 누군가 있을 필요가 없을 텐데.
“글쎄, 그건 고용주에게 물으셔야죠.”
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내가 고용한 사람도 아니고, 권이도의 속내를 어떻게 다 안단 말인가. 경호 겸 잔심부름꾼이라는데, 경호의 의미가 없다고 하면 심부름을 시키라고 할 게 분명했다.
“저는 별로 아는 게 없습니다.”
담담히 대꾸하자, 이태성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점심을 먹을 때가 되었기에 이태성도 제가 읽던 책을 챙겨 나를 따라 일어났다.
점심에는 본식에 앞서 얇게 저민 밤을 올린 타락죽이 나왔다. 말갛고 찐득거리는 식감이었지만, 끝맛이 고소하니 목 넘김이 나쁘지 않았다. 원래도 식전 요리가 꼭 있긴 했지만, 며칠 전을 기점으로 어쩐지 소화하기 쉬운 음식만 나오는 것 같단 생각이 든다. 마치, 그날 내가 체했단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3일 전. 권이도의 방에서 서류를 훔쳐 온 날. 나는 잠에서 깨자마자 전날 먹은 모든 걸 토해 냈다. 침대는 밤새 흘린 식은땀으로 엉망이었고, 안색 역시 파리하게 질려 볼품없었다. 만약 아버지가 봤더라면 이제는 정말 쓸모를 다했다며 내다 버리고 싶어 할 정도로 말이다.
구역질의 이유가 체기 때문이었을까. 그 사실은 아직까지도 조금 애매했다. 분명 소화가 안 되긴 했지만, 속이 울렁거렸던 건 그날 밤에 꾸었던 악몽 때문이었으므로.
‘주제 파악을 제대로 했어야지.’
꿈에서 마주친 권이도는 내게 단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은 냉랭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서늘한 눈매를 딱딱하게 굳힌 채 보잘것없는 벌레를 대하듯 나를 내려다봤다. 얼얼하게 부은 왼뺨보다, 날카롭게 쏟아지던 페로몬이 더 괴로웠던 것 같다.
내장을 칼로 난도질하는 기분이었다. 지금껏 내가 만나본 우성 알파는 권이도밖에 없는데. 그는 내게 성난 페로몬을 뿌린 적이 한 번도 없건만.
고작 꿈일 뿐인데도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감에 걸려 앓았던 어린 시절보다, 맨몸으로 페로몬을 맞는 그 순간이 더 고달팠다. 아프고, 괴롭고, 또 서러워서, 눈을 떴을 땐 온 얼굴이 눈물로 가득할 정도였다.
악몽이 원래 날이 갈수록 진화하는 것이던가. 아니, 모르는 남자에게 강간당하는 꿈보다는 권이도에게 냉대를 당하는 꿈이 훨씬 나으려나.
어쨌든 나는 속을 모두 비워 낸 후에 아무렇지 않은 척 식사를 하러 내려왔다. 그냥 본능적인 아집이었는데, 아픈 걸 티 내 봤자 내게 득 될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우연의 일치라고 해야 할지, 다행히도 그날 차려진 식사는 모두 죽 종류였다.
“내일모레 돌아온다고 했지…….”
나는 방으로 돌아와 소파에 앉은 채로 날짜를 가늠했다. 일주일이 제법 길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겪어 보니 턱없이 짧은 시간이 아닌가 싶다. 머릿속이 잔뜩 복잡한 바람에 생각을 정리하는 데만 온종일이 걸리는 기분이었다.
“…….”
내 방 테이블 위엔 여전히 권이도에게서 훔쳐 온 자료가 놓여 있었다. 도로 가져다 놔야 한단 사실을 알면서도 다시 그의 방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혹여나 고용인이 볼까 싶어 책장에 숨겨 두었다가도, 오후 시간대가 되면 굳이 내 손으로 꺼내 확인하는 습관까지 생겼다.
‘정세진 씨.’
권이도가 나를 불렀다. 평소처럼 다정한 말씨는 아니었다. 그건 뒤이은 싸늘한 한마디도 마찬가지였다.
‘이 일은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겁니다.’
“…….”
살면서 한두 번쯤 인생의 기로에 놓이는 순간이 오곤 한다. 내 경우엔 그게 여러 번이었고, 지금이 그중 또 한 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권이도를 배신하느냐, 아니면 아버지를 배신하느냐.
“……배신이라.”
픽 헛웃음이 나왔다. 저버릴 신의가 없는데 감히 배신이라는 단어를 쓰다니. 자아가 비대해도 너무 비대한 것이 아닌가.
권이도가 오기 전에 정해야 하는데…….
나는 그런 생각으로 뻑뻑한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근 3일간 제대로 잠든 시간이 세 시간도 되지 않았다. 수면제를 먹어도 잠이 안 오고, 한 번 잠이 들면 악몽을 꿀 것 같단 생각에 잠기운이 날아갔기 때문이었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침대 옆 협탁에 놓아둔 유리돔이 보였다. 약혼식 날, 권이도가 준 꽃다발을 예쁘게 꾸며 놓은 장식품이었다. 그 옆에는 풀잎 색 병에 담긴 향수도 보였다.
……역시, 돌려놓고 오는 게 좋겠지.
습관처럼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요 며칠 고민에 잠길 때면 무심결에 나오곤 하는 행동이었다. 이 집도, 이 방도, 그리고 옆에 치워 둔 차 키까지, 온통 권이도가 준 물건투성이다.
내가 아무리 근본 없이 태어나 자랐다지만, 지금 하려는 행동이 얼마나 양심 없는 짓인지는 알고 있었다. 이걸 고민하는 것부터가 몹쓸 짓이라는 사실도. 자꾸만 웅웅 울리는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진작 서류를 제자리에 돌려놨겠지.
‘짐승도 키워 준 은혜를 알건만…….’
“…….”
이 결혼의 목적은 해신의 재기를 위해서인데, 나라는 사람의 쓸모를 이렇게라도 존재해야 하는 건 아닐까. 내 존재의 이유가 곧 아버지의 지시이니, 언젠가 돌아갈 가족의 울타리를 위해 힘써야 하지 않을까.
애써 이성적인 판단을 가능케 해놓으면 마지막에 마지막 즈음 외면하던 불안감이 발목을 잡았다.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마무리를 지어야지. 그런 생각으로 벌써 3일이 흘렀다. 당장 행동하는 게 좋다는 걸 알면서도, 무언가 결론을 내릴 만한 엄두가 나지 않았다.
“…….”
결국, 나는 서류 뭉치를 들고 일어나 다시 책장 한구석에 티 나지 않게 숨겨 놨다. 권이도가 돌아오기까지 이틀.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은 결론을 내려야 할 터다. 이대로 덮어 두고 고민해 봤자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가 이태성에게 출근하지 말라고 했단 사실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 * *
저녁을 먹은 뒤엔 고용인이 받아 준 목욕물에 몸을 푹 담갔다. 거품이 몽글몽글 차오른 욕조에선 낮에 마신 차와 비슷한 라벤더 향기가 풍겼다. 라벤더에 진정 효과가 있다고 했던가. 딱딱하게 굳었던 뒷덜미가 느슨하게 풀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샤워를 마치고, 가운 하나만 입은 채 침대에 엎어졌다. 물기를 대충 닦은 탓에 머리카락은 여전히 축축한 상태였다. 옷을 갈아입고 누워야 한단 사실을 알면서도 물에 젖은 솜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약을, 미리 먹길 잘했지. 딱 적당한 타이밍에 졸음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득히 멀어진 의식 속에 온갖 지저분한 잡념이 하나둘 흩어져 갔다. 정체 모를 악몽에 대한 두려움 역시, 눈치채지 못한 사이 서서히 지워졌다.
그렇게 잠이 든 뒤엔, 자꾸만 지나치게 덥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을 쉴 때마다 더운 열기가 뿜어져 나와서,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목구멍이 뜨거웠다. 이렇게 더울 만한 날씨가 아닌데 이상하리만치 체온이 오르고 있었다.
꿈을 꾸는 건가?
처음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도 생생한 꿈을 꾸니 이 더위도 어쩌면 꿈의 일종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잠에서 깨어난 순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시원하게 변하겠지.
‘세진아.’
그래, 역시 꿈이었던 모양이다. 익숙한 음성이 나를 세진이라고 부르며 작게 채근했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나직한 목소리가 무겁게 내리깔렸다.
‘정세진.’
남자는 내 양 손목을 그러쥔 채 머리맡에 단단히 고정했다. 나는 저항할 생각조차 없는데, 마치 조금의 틈도 주지 않겠다는 것처럼. 다른 손으로는 허벅지를 붙잡은 그가 억지로 다리를 벌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씹질이 좋으면 말로 했어야지.’
분명 비꼬는 말투였는데, 기분이 나쁘다기보단 가슴께가 저릿했다. 변명을 내뱉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그에게서 벗어나지도 못했다. 그저 달뜬 숨을 몰아쉬며 가물가물 눈을 깜박였을 뿐.
‘다리 똑바로 벌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로는 상대가 누구인지 도무지 가늠되질 않았다. 분명 익숙한 음성인데, 이토록 차가운 말투는 여태껏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
‘……흐.’
그는 아무런 말 없이 다리 사이에 손을 밀어 넣었다. 주저 없이 은밀한 곳에 닿은 손가락이 질척거리며 아래를 파고들었다. 이미 축축하게 젖은 구멍을 확인하곤 멈칫하며 억눌린 목소리로 짓씹기도 했다.
‘이따위 취급을 받으면서…….’
숨을 크게 토해 냈다. 남자는 금세 손가락을 빼내고 내 허벅지를 단단히 붙들었다. 그가 손을 놓아줬지만, 내 양팔은 여전히 머리맡에 널브러진 상태였다. 헐떡거리며 숨을 몰아쉬는 순간, 커다란 무언가가 거칠게 아래쪽을 꿰뚫었다.
‘……!’
내장이 납작하게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좁은 내벽을 억지로 벌린 기둥은 적응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서서히 뒤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또 한 번,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단숨에 뿌리 끝까지 밀려 들어왔다.
‘아, 아파…….’
‘……아파?’
신음처럼 흘린 말에 남자는 반사적으로 움직임을 멈추며 되물었다. 그러곤 제 머리칼을 한 손으로 쓸어넘기고 픽 헛웃음을 흘린다.
‘여길 이렇게 세워 놓고…… 아프다고?’
커다란 손이 한껏 발기한 성기를 콱 움켜쥐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이미 선단에서 묽은 액이 질질 흘러나오고 있었다. 남자는 엄지로 귀두를 문지르며 깊게 쑤셔 넣은 성기를 크게 쳐올렸다.
‘흐, 으……!’
아랫배가 결렸다. 한계까지 벌어진 다리가 비명을 지르고, 억지로 벌어진 내벽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그런데도 이미 고조된 성감은 도무지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병신 되고 싶지 않으면…….’
‘아흑, 흐……!’
‘힘, 빼는 게 좋을 텐데.’
허벅지 안쪽이 파르르 떨렸다. 쥐가 난 것처럼 몸을 비틀자, 그가 도망가지 말라는 듯 내 골반을 바투 쥐었다. 찌걱, 빠져나간 성기가 내벽을 길게 긁으며 푹푹 밀고 들어왔다.
끝내, 나는 남자가 두어 번 더 삽입했을 즈음 사정했다. 울컥 터져 나온 정액을 보고 그가 무어라 모욕적인 말을 했던 것까지는 기억난다. 물건을 다루듯 나를 성의 없이 뒤집은 그가 날개뼈 사이를 꾹 누르며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후회할 거라고 했잖아.’
“허억……!”
막혔던 숨이 크게 터져 나왔다. 동시에 나는 발작을 일으키는 사람처럼 화들짝 눈을 떴다. 몸이 반으로 갈라지는 것 같던 고통이 사라지고, 대신 펄펄 끓는 물을 끼얹은 것처럼 온몸이 따가웠다.
“허억, 헉…….”
둥글게 몸을 웅크렸지만, 이미 퍼지기 시작한 열기는 멈출 수 없었다. 손끝으로 이불을 긁어 내고 어금니를 악문 채 마른침을 삼켰다. 배 속 가득 차오른 욕구와 질식할 것처럼 터져 나온 페로몬.
히트 사이클이었다.
* * *
심 교수는 내게 반년 정도 주기가 서서히 앞당겨질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대비할 방법은 없고, 그저 앞뒤로 일주일 정도는 바짝 긴장한 채 있는 게 좋을 거라고. 그의 말을 대충 넘겨 들은 건 아니었지만, 어차피 집에만 있으니 전보다 안일하게 굴었던 건 사실이다.
“흐…….”
그러나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오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그것도 아직은 일주일 넘게 주기가 남아 있는 상태에서. 물론 미리 예고하고 온다 한들 지금과는 별로 다르지 않았겠지만.
“아…… 으으…….”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열이 훅훅 밀려드는 바람에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이 관자놀이를 따라 흘러내렸다. 몸을 뒤척여 침대 시트에 얼굴을 묻자, 바짝 발기한 성기가 가운 깃에 문질러졌다.
“흐, 으…….”
본능적으로 아래를 만졌지만, 그럼에도 한참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다. 자꾸만 손에 힘이 빠져서 자위를 하는 것도 성에 차지 않았다. 헛손질을 하듯 몇 번 문지른 다음에야 개운하지 못하게 억지로 사정했을 뿐.
“……하아.”
시간이 몇 시쯤 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어둡지 않은 걸 봐선 적어도 해가 뜰 정도는 되었다는 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용인이 나를 찾아올 텐데. 내가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그는 방으로 들어올까, 아니면 그냥 포기하고 돌아갈까.
어느 쪽이건, 내게는 그다지 달가운 선택지가 아니었다. 이런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도 않았고, 그저 방에 방치된 상태로 있고 싶지도 않았다. 나조차도 모순이라고 여기는 감정 속에 흐릿한 시야로 굳게 닫힌 방문이 보였다.
‘하자품을 주워 와서…….’
“…….”
억지로 목구멍 너머로 신음을 삼켰다. 그 어떤 소리도 새어 나가지 않도록 이불을 끌고 와 머리끝까지 덮어 버렸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지만, 어떻게든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고 싶었다.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자꾸만 죄인처럼 숨어야 할까. 억울함이 밀려드는 반면 어쩔 수 없다는 단념도 함께였다. 늘 이렇게 지내 왔으니, 이제 와 탓한들 무엇이 바뀌겠느냔 말이다.
“……흐.”
울음 섞인 신음이 입술 틈새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이불 틈새로 보이는 방문은 여느 때와 같이 굳게 닫힌 상태였다. 내일이 될 때까지. 아니, 히트 사이클이 끝나기 전까지는 저 문이 열리는 일도 없겠지.
‘다녀올게요.’
헛웃음이 나왔다. 무심코 그 사람을 떠올려서가 아니라, 그를 떠올리며 느낀 감정이 그리움이라서. 딱 한 번, 온실에 있던 나를 찾아줬을 뿐인데, 이번에도 보잘것없는 기대가 생겨서.
느리게 두 눈을 깜박이며 설움을 삼켰다. 지나치게 과잉된 욕구는 고통보다 더한 괴로움이 되어 나를 괴롭혔다. 이틀…… 아니, 사흘 정도일까. 적어도 그 안엔 권이도가 집으로 돌아오겠지.
그런 생각으로 이불에 얼굴을 파묻을 즈음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다지 특별할 거 없는 소리였는데, 왜 그렇게 심장이 쿵 내려앉았는지 모르겠다. 겨우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여전히 굳게 닫힌 방문이 보였다.
“…….”
그냥, 막연히 바랐던 것 같다. 단 한 번도 열렸던 적 없는 문이 이번만큼은 열려 주길. 누군가가 나를 찾아와 이 갑갑함을 해소해 주길. 그리고 조금 더 바랄 수 있다면, 그 상대가 부디 내가 떠올린 그 사람이길.
깜박,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정지 화면처럼 이어지던 풍경에 자그마한 변화가 생겼다. 문고리가 서서히 내려가고, 굳게 닫힌 문이 달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나는 꿈을 꾸듯 멍한 기분이 되어 파르르 속눈썹을 떨었다. 방 안으로 들어온 누군가가 느리게 내 쪽을 바라봤다. 단정히 차려입은 정장과 묵직하게 풍기는 나무 냄새.
“……권이도 씨.”
권이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