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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억의 끝에 (22)화 (22/131)

22화. Raison d'etre(2)

그다지 로맨틱한 의도는 아니었다. 권이도가 내게 했던 것처럼 그에게도 기억에 남는 무언가를 만들어 주고 싶었을 뿐. 나는 이 넓은 집에서 권이도를 기다릴 테니, 그 또한 나를 떠올렸으면 해서.

“…….”

그런데 그는 금세 멍한 얼굴이 되어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가만히 눈을 내리깐 그가 손에 쥔 향수병을 응시한 채 입술을 달싹였다.

“그건…… 큰일이군요.”

큰일? 그렇게 묻지는 못했다. 숨결처럼 흘러나온 한마디가 정확히 귓가를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그럼 일을 못 할 텐데.”

“…….”

가끔, 지나치게 부끄러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농담이라곤 안 할 것 같은 얼굴로 저런 말이나 하다니. 이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이야기했다.

“다녀올게요.”

권이도가 떠난 집 안은 평소보다 세 배쯤 더 허전했다. 쓸데없이 모든 공간이 넓었고, 오전 시간대는 지루하다 여겨질 만큼 느렸다. 늘 그랬듯 책 한 권을 들고 온실로 향했는데, 하필 동행인인 이태성마저 멍하니 넋을 놓는 바람에 더 그랬다.

“……연봉이 올랐습니다.”

이태성은 귀신에 홀린 것처럼 딱 이 말 한마디만 내뱉었다. 무어라 더 물으려던 나는 그의 연봉이 오른 이유가 떠오르는 바람에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게 복지와 맞바꾼 수입이라는 걸, 굳이 내 입으로 말해 줄 필요는 없어 보였다.

점심 식전 요리로는 차갑게 조리한 성게알과 오징어 따위가 나왔다. 조금 시큼한 감이 있었지만, 입맛을 돋우기엔 썩 나쁘지 않았다. 살이 통통한 새우를 납작하게 구운 전도, 심심한 듯 고소하게 간을 한 육회도, 모두 전적으로 내 취향을 고려한 메뉴였다.

나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방으로 돌아와 막연히 시간을 보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차 키를 보며 권이도가 오면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이상, 그는 절대 차 키에 관련된 주제를 꺼내지 않을 테니까.

“일주일이라…….”

가만히 소파에 앉아 멀거니 허공을 응시했다. 그가 없는 일주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그림자처럼 머무르는 고용인조차 내게 간섭하지 않는 자유로운 기간.

‘자료 하나만 가져오거라.’

해야 할 일은 분명히 있었다. 대책 없는 명령이었으나 내게는 아무런 선택권도 없다. 할지 말지가 아니라 ‘어떻게 할지’만을 고려해야 하는 문제란 말이다.

죄책감이 드는 건 아니었다. 몹시 미안하게도 아직은 권이도를 향한 마음이 그렇게 깊지 않았으니까. 비록 간절히 입을 맞추고, 간지러운 말을 주고받는 사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단언컨대, 권이도 역시 내게 그만큼의 마음을 품고 있진 않겠지.

“……왜 하필 이럴 때 집을 비워.”

타이밍의 신이 있다면 지독히 장난을 좋아하는 성격일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면 나를 괴롭히는 게 취미라거나.

나는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나 발소리를 죽인 채 문으로 다가갔다. 이 방엔 나밖에 없었지만, 지금부터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내가 방을 나서 향할 곳은, 그가 들어가지 말라고 했던 2층 서재였으니까.

왜냐고 물으면 그냥 직감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그가 업무를 보는 장소, 내게 특별히 주의를 준 장소. 보통 중요한 자료는 그런 곳에 보관하기 마련이니까. 물론 나는 철두철미한 권이도가 낯선 약혼자가 있는 집에 그 어떤 것도 보관하지 않길 바랐지만.

“…….”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는 복도를 지나, 끝자락에 있는 서재에 다다를 때까지. 심장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더 빠르게 뛰었다. 바닥에 깔린 카펫 덕에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지만, 잘하면 두근거리는 소리로 들킬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서재 앞에 다다랐을 때. 나는 익숙한 나무 문을 보며 차갑게 식은 손끝을 매만졌다. 자꾸만 불안한 기분이 드는 이유가, 내가 지금부터 할 행위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 때문인지 확실치 않았다.

조심조심 서재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긴장감에 손이 식은 탓에 평소라면 차가울 쇠조차 지금은 미적지근하게 느껴졌다. 손에서 땀이 배어 나올 만큼 긴장해서, 아차 하면 손잡이를 놓칠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기다란 문고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이내, 작은 결심과 함께 적극적으로 움직이려던 찰나,

“…….”

철컥. 잘 내려가던 문고리가 중간에 멈췄다. 무언가에 고정된 듯 문이 열리긴커녕 제대로 다 돌아가지조차 않았다. 나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힘없는 웃음을 흘렸다.

서재는 이미 잠겨 있었다.

* * *

세상엔 분명 노력으로 안 되는 것들이 있다. 아무리 간절히 원한다 한들 상황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인 경우가 많았다. 예시를 꼽자면 수도 없이 많으니 굳이 한두 마디 덧붙일 필요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잠겨 있는 서재를 확인했을 때, 가장 처음 느낀 감정은 안도였다. 그다음엔 허무였고, 마지막엔 실망이었다. 무엇에 대한 실망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자료를 빼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아니었다.

최대한 노력했지만 찾지 못했다.

자료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멍청하고 무능한 아들이 될지언정 적당히 좋은 핑계였다. 아버지도 내게 별다른 도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을 터다. 권이도가 나를 신뢰하지 않는다는데, 대체 뭘 어쩐단 말인가.

-자고 있었어요?

다음 날 아침, 권이도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시간은 아직 일렀기에 미국은 아마 오후 6시쯤 되었을 거다. 나는 수면제를 두 알이나 먹고도 잠들지 못해, 밤새 뜬눈으로 침대를 뒤척이던 참이었다.

“아뇨…… 일어나 있었습니다.”

아, 목을 좀 가다듬고 받을걸. 볼품없이 갈라진 목소리가 이토록 민망할 줄이야.

“잘 도착하셨어요?”

-나는 잘 도착했는데…… 정세진 씨는 일어난 건지 안 잔 건지 모르겠군요.

“…….”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순간 멈칫했다. 쓸데없이 눈치만 빨라서는, 굳이 몰라도 되는 부분까지 알아차리곤 한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동안 전화 너머에선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불면증이 심합니까?

“아뇨, 어제는…….”

그냥 평소와는 달랐다고. 요새는 잘 잔다고 대답하려던 나는 문득 의아한 부분을 깨닫고 말을 멈췄다. 이 집에선 잠도 잘 잤고, 수면제를 들킨 적도 없는데, 권이도는 나한테 불면증이 있단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권이도 씨가 없어서 잘 못 잤습니다.”

그러나 나는 의문을 제기하는 대신 온화하게 말을 돌리는 걸 택했다. 구태여 따져 묻기엔 타이밍이 애매해졌기 때문이었다. 립서비스를 섞은 말이 나쁘지 않았는지, 그가 부드러운 어조로 얘기했다.

-내 방에서 자도 되니까 편한 대로 해요.

“네, 뭐…….”

빈말로도 괜찮다고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정말로 혹해 버렸기 때문에.

“그보다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가렸던 커튼을 활짝 젖혔다. 어슴푸레한 새벽빛에 푸르른 정원이 묘하게 신비로웠다. 창틀에 걸터앉아 창문을 열자, 아직은 서늘한 바람이 살며시 스며들었다.

-다른 게 아니고, 놓고 온 자료가 있어서 오후에 비서가 잠깐 들를 겁니다. 괜찮으면 정세진 씨가 좀 챙겨서 전달해 줘요.

“자료라면…….”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하던가. 그 말을 듣자마자 자세를 꼿꼿하게 세웠다. 정작 권이도는 특유의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평소처럼 이야기했을 뿐인데 말이다.

-내 방 테이블에 노트북이 하나 있을 텐데, 거기 꽂혀 있는 USB 뽑아서 비서한테 주면 됩니다.

“USB 말씀입니까?”

그 꼼꼼한 권이도가 웬일로 물건이 놓고 갔을까. 그것도 가는 데 10시간이 넘는 외국에 나가면서. 비서를 보낸다는 걸 보면, 비서 없이 혼자 출국한 걸까.

-네, USB. 괜찮으면 지금 가서 봐봐요.

열려 있던 창문을 다시 닫았다.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기도 했고,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권이도는 담담한 어투로 뒷말을 덧붙였다.

-전화 끊지 말고.

“……안 끊었습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가 뭘 알고 시키는 것도 아닌데, 쓸데없이 긴장할 필요는 없었다. 권이도가 말하는 자료는 내가 찾는 자료와는 당연히 다른 종류일 테고.

핸드폰을 귓가에 댄 채 복도를 지나 권이도의 방으로 향했다. 수화기 너머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나는 혹여나 숨소리가 들리진 않을까 바짝 긴장해야 했다. 문 앞에 다다랐을 땐, 습관적으로 노크를 하려다가 머쓱하니 손을 내리는 일도 있었다.

-아침은 먹었습니까?

달칵, 문이 열림과 동시에 권이도가 넌지시 물었다. 나는 훅 밀려든 페로몬을 만끽하며 느릿느릿 입술을 달싹였다. “아직이요. 권이도 씨는요?” 그렇게 묻자, 나긋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대꾸했다.

-곧 먹으러 가야 합니다.

“끼니 거르지 말고 드세요.”

아까 권이도가 뭐랬더라. 제 방에서 자도 되니까 편한 대로 하라고 했던가. 듣지도 않는 수면제를 먹는 것보다 염치 불고하고 신세를 지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잠깐 그의 페로몬을 맡는 것만으로 가물가물 눈이 감겼으니 말이다.

-있습니까?

“네, 검은색 USB 맞죠?”

테이블 위에 선호 로고가 그려진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아마 옆에 꽂힌 USB가 그가 말한 자료였나 보다. 나는 USB를 빼내고 무심코 그 옆에 쌓인 종이 더미로 시선을 돌렸다.

“이따 비서분께…….”

딱, 입술이 닫혔다. 비서분께 드리겠다고, 그리 말하려던 그 찰나였다. 목소리를 내던 목구멍이 바짝 조여들고 가슴 언저리에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명치가 옥죄였다.

-아침부터 번거롭게 해서…….

권이도가 무어라 하는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귓가가 먹먹하게 변해서 삐 하는 이명이 들린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그럼 잘 부탁한다며 전화를 끊었고, 나는 전화가 끊긴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 * *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정신없이 권이도의 방을 빠져나와 또 정신없이 방에 틀어박혔다. 고용인이 아침 식사를 하라고 부르지 않았다면 그대로 점심이 될 때까지 멍하니 있었을 터다.

그렇게 아침을 먹은 뒤엔, 속이 더할 나위 없이 불편했다. 늘 향하던 온실에 가고 싶지도 않았고 재미있게 읽던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방 안에 가만히 앉아 하염없이, 하염없이 시간을 죽였을 뿐.

권이도의 비서는 내가 점심을 다 먹은 뒤에야 찾아왔다. 꾸역꾸역 음식을 넘긴 탓에 체한 것처럼 배 속이 갑갑하던 참이었다. 아픈 티를 내면 권이도에게 연락이 갈 것 같아서, 아무도 몰래 방에서 끙끙 앓던 중이기도 했다.

“전무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비서는 30대 정도로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얇은 안경을 낀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김 실장을 닮아 있었다. 그는 내가 건넨 USB를 받아들고 조금 놀란 얼굴로 물어 왔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순간, 아차 싶은 마음에 억지로 미소를 그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있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안색이 그리 안 좋았을까.

“아뇨, 잠을 좀 설쳐서요. 괜찮습니다.”

자연스럽게 눈을 휘자 비서는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꾸벅 인사를 건넨 뒤 곧장 집을 빠져나갔다. 용건만 간단히. 누가 봐도 그 말을 실천하는 사람 같았다.

“……하아.”

나는 명치 언저리를 꾹 누르며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집 밖으로 나갈 기분은 아니었고, 묵직한 속은 점점 더 불쾌해졌다. 차라리 잠이라도 자면 좋으련만. 망할 불면증이 이럴 때까지 나를 괴롭힌다.

2층 가장 끝 방. 오가기엔 불편하지만, 개인 공간으로 두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

달칵, 방문을 닫았다. 이곳에 머문 지 얼마나 됐다고, 오로지 ‘내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가에 있던 방에서도, 스무 살부터 살던 오피스텔에서도, 이토록 아늑한 기분을 느낀 적이 없는데.

그럼에도 자꾸만 속이 술렁이는 건, 권이도의 말이 머릿속에 계속 떠올랐기 때문일까.

‘올 때 선물을 사 오죠.’

멍하니 테이블이 놓인 공간으로 걸음을 옮겼다. 침실과 분리된 오른편에 부들거리는 재질의 하얀 소파가 놓여 있었다. 권이도의 방과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구조. 나는 기다란 소파 대신 1인용 소파에 앉아 가만히 테이블을 응시했다.

‘갖고 싶은 건?’

“…….”

내가 정말 갖고 싶은 걸 말하면, 권이도 당신은 무슨 반응을 보일까. 히트 사이클을 도와주고 입까지 맞춘 상대에게 그는 어디까지 내어 줄 수 있을까.

‘나는 정세진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걸 줄 수 있는 사람이에요.’

조심스레 테이블에 놓아둔 서류를 들어 올렸다. 영어가 빼곡한 서류에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온갖 프로그래밍 용어가 가득했다. 여러 도식과 설명들은 모르는 단어를 제외해도 무얼 나타내는지 뻔했다.

“……적어도 이걸 주진 못하겠지.”

아버지가 바라던 자료였다. 정확히는 선호 전자에서 새로 출시하는 핸드폰과 관련된 보고서. 아버지가 권이도에게 받기로 했다던, 보안 시스템과 관련된 내용.

나는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 종이 뭉치에 얼마나 많은 정보가 들어 있는지는 몰랐다. 단지, 적어도 이걸 가져가면 최소한의 성의 표시 정도는 된단 사실을 알았지. 늘 모자란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아버지가, 어떤 표정을 내보일지 생생히 그려졌다.

‘역시, 이래야 내 아들이지.’

“…….”

어떤 정신으로 이걸 권이도의 방에서 가지고 나왔을까. 머리가 움직이기 전에 몸이 움직였고, 그가 며칠간 돌아오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애써 합리화했다. 가슴 언저리가 지끈거리며 아팠지만, 모르는 척 눈을 감았단 말이다.

도둑질이었다. 권이도가 알게 되면 당장 이 집에서 쫓겨날지도 모르는 도둑질. 그뿐만 아니라 약혼을 파기하고 손해 배상까지 청구할 수 있는 도둑질. 그가 돌아오면, 반드시 걸릴 수밖에 없는 도둑질.

‘밑져야 본전인데, 아무거나 말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서류를 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종이가 구겨질 것 같아서 나는 조심스레 들고 있던 것들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구석에 찍힌 선호그룹 마크가 미미하게 주름 잡힌 모습이 보였다.

역시, 늦기 전에 돌려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쩌면 이 서류가 아버지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을 수도 있으니까.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바에야 빈손으로 돌아가는 편이 신상에 이로울 테니.

‘쓸모없는 새끼…….’

배 속이 아프도록 뒤틀렸다. 몇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은 시선이 낙인을 찍은 것처럼 피부에 새겨졌다. 울렁거리며 파도친 바닥이 나를 머리끝까지 집어삼키고 목덜미를 옥죄는 기분이었다.

‘아니, 그놈은 반드시 널 버릴걸.’

버림받고 싶지 않았다. 그게 아버지건, 아니면 권이도건. 맨발로 눈길을 헤매던 그때처럼, 다시금 벼랑 끝에 내몰린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믿을 건 가족뿐이야.’

내가 아는 가족은 이런 형태가 아니었는데. 지금껏 바라고 욕망했던 울타리가 이다지도 가지기 힘든 종류였나 보다.

“…….”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억지로 먹은 식사가 문제였는지. 조금만 긴장을 늦추면 자꾸만 욕지기가 솟구쳤다. 속을 한 번 게워 내면 나으려나. 그리 생각하면서도 쉽사리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정세진 씨.’

차라리 아무것도 놓고 가지 말았으면 좋았을 텐데. 이미 잠가 놓은 서재처럼 보지 못할 곳에 꼭꼭 숨겨 놓지.

원망의 대상이 잘못됐단 생각은 있었으나 이성적인 사고가 되지 않았다.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들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지나치게 감정적이었다.

저녁은, 먹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이 상태에서 뭘 더 먹었다간 속이 망가져도 제대로 망가질 테니. 권이도에게 연락이 오면 그냥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고 얘기할 생각이었다.

몰래 훔쳐 온 서류를 테이블에 올려 두고 수면제 몇 알을 씹어 삼킨 뒤 침대로 들어갔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뒤엔 아주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몸을 웅크리기도 했다. 다행히 하룻밤을 지새운 덕에, 잠기운은 평소보다 이르게 몰려들었다.

그날, 나는 오랜만에 지독히도 끔찍한 악몽을 꿨다. 차가운 표정의 권이도가 아버지와 똑같은 눈으로 내 뺨을 때리는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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