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억의 끝에 (20)화 (20/131)

20화. Petit a Petit(10)

본가에서 내가 쓰던 곳은 현관과 가까운 작은 방이었다. 나를 내보내자마자 새로이 개조해, 지금은 고용인들이 묵는 공간이라고 했다. 안쪽에 조그만 화장실도 딸려 있으니 사용하기엔 나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저녁 시간이 될 때까지 말없이 응접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는 서재에서 나오지 않았고, 어머니 역시 2층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아마 집에 불이 나지 않는 이상 내가 있는 곳으로 내려올 일은 없을 터였다.

덩그러니 앉아 있길 두 시간. 창밖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해가 사라진 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이고, 어두운 공간에 추적추적 가랑비가 쏟아졌다.

‘훔치라는 게 아니야, 그냥 좀 빨리 보자는 거지.’

나는 하염없이, 하염없이 비 오는 풍경을 응시했다. 아버지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내가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의 무게를 달아 봤다.

‘네가 우리 기업의 영웅이다, 세진아.’

나는 영웅이 아니라 그냥 아들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그 간단한 소망 하나 들어주지 못한 아버지가 이토록 거창한 걸 기대한다. 내가 무얼 바라는지, 그런 건 묻지도 않은 채. 권리 없이 의무만 주장한다.

‘……권이도 씨가 알면 무조건 파혼당할 겁니다.’

애써 용기를 내서 말했지만, 아버지에겐 먹히지 않았다. 뭐 그런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 내 어깨를 다독였을 뿐.

‘파혼이라니. 너희는 결혼한 적도 없어.’

그래, 확실히 그랬다. 우리는 결혼하지 않았고, 그저 기약 없는 약속을 했을 뿐이라는걸.

‘잘 생각해야 해. 네가 이걸 안 가져온다고 이 혼사가 무사히 성립될 것 같아?’

‘…….’

‘아니, 그놈은 반드시 널 버릴걸.’

바닥은 계속해서 나를 잡아먹고 있었다. 깊은 웅덩이 빠진 것처럼 발목부터 천천히, 천천히 가라앉아갔다. 어깨에 올라온 아버지의 손이 추를 매단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믿을 건 가족뿐이야.’

물어보고 싶었다. 그 가족에 나는 포함되는 거냐고. 영웅이 되지 못한 아들도 거기에 자리가 있느냐고.

‘이제 본부장도 아닌 네가 그렇게 버림받고 나면 뭘 할 수 있겠어.’

나는 항상 코앞에 놓인 상황을 해결하며 살아왔다. 먼 미래를 고민하지 않았고, 당장에 갈등을 해결하며 살아왔단 말이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자꾸만 나중의 일을 짐작하게 됐다. 바다 위의 부표처럼 흔들리던 마음이 줏대 없이 뒤집히려고 했다.

‘너만 잘하면 돼. 만약 그놈이 널 내쳐도 너는 돌아올 곳이 있지 않냐.’

내게 정말 돌아올 곳이 있을까. 권이도에게 버림받아도, 혹은 파혼을 당해도, 아버지는 내게 실망하지 않을까. 이제 쓸모를 다했다고 미련 없이 내쳐 버리는 건 아닐까.

‘모자란 널 지금까지 키워 준 게 누군지 알고 있지?’

‘……그럼요.’

그걸 왜 모르겠어요.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나 같은 걸 주워 갈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텐데.

‘그래, 알아들었으면 됐어. 내 아들인데 당연히 현명해야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체한 것도 아니고,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닌데, 토할 것처럼 무언가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듯했다. 까딱 잘못하면 억눌려 있던 무언가가 빵 하고 터져 버릴지도 몰랐다.

‘정세진 씨한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권이도 당신에게 물을 걸 그랬다. 그러는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의 물건을 훔치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할 것 같냐고. 그랬다면 조금 더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 텐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 가랑비가 부슬비로 바뀌고, 울렁거리던 속이 간신히 진정될 즈음. 외출해 있던 민재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무심코 집 안에 들어왔다가 마중을 나온 날 보고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껏 치장한 모습이, 어머니의 성격을 그대로 빼다 박지 않았나 싶다.

“왔어? 일찍 들어왔네.”

“……너, 너!”

민재는 내게 삿대질을 하며 넘어갈 것처럼 입을 떡 벌렸다. 경악스러워하는 얼굴이 내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나 보다. 아버지도 무심하시지, 민재와 서영이에겐 내 소식을 전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너 왜 집에…….”

성큼, 가까이 다가온 민재에겐 희미한 아로마 향기가 났다.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는데, 금세 눈동자엔 이채가 떠오른다. 그는 왜인지 기대하는 얼굴로 대뜸 질문했다.

“파혼당했냐?”

“…….”

설마, 파혼이었으면 이 집에 들어오지도 못했을 텐데. 아니, 아마도 곧 당하겠지만.

“아버지가 부르셔서 저녁 먹으러 온 거야.”

내 한마디에 민재의 얼굴에 희망이 사라졌다. 이렇게 표정을 못 속이면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물론 곤란해지는 건 민재가 아니라 아랫사람이겠지만 말이다.

“염색했구나.”

나는 민재의 머리칼이 어두운색으로 바뀐 걸 확인하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소위 날티라고 해야 할까. 건방지던 인상이 제법 순하게 바뀌었다. 그래도 어머니를 닮아서, 생긴 거 하난 예쁘장한 놈이었다.

“잘 어울린다.”

“…….”

가볍게 건넨 칭찬에 민재가 휙 고개를 돌렸다.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흠흠 헛기침을 내뱉는다. 귓가가 발갛게 물든 모습을 보는 건,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그 옷은 뭐야? 처음 보는 건데.”

그는 기민한 눈매로 내가 입은 정장을 꼼꼼히 살펴봤다. 옷에 관심이 많은 녀석답게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단번에 눈치챘나 보다. 이 또한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핏이 레디투웨어가 아닌데…….”

안 그래도, 옷을 입으며 느낀 것이었다. 엷게 스프라이트 무늬가 들어간 밤색 정장은 기성복이라기엔 모든 부분이 내 체형에 맞춰져 있었으니까. 기장은 넉넉한데 허리는 크지 않다거나 하는 부분이.

“선물로 받았어.”

“선물? 누가…….”

인상을 찌푸린 채 묻던 민재가 똥 씹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내게 정장을 줄 사람이 누구인지 금세 떠올린 모양이었다. 나는 굳이 긍정하지 않고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민재는 방으로 올라가지 않고 나를 따라 응접실로 들어왔다. 손부터 씻고 오라고 하자, 자기가 어린애냐며 버럭버럭 성질을 내기도 했다. 반쯤 놀리기 위해 한 말이었는데, 투덜거리면서도 착하게 화장실에 다녀왔다.

“…….”

“…….”

당연한 일이지만, 같은 공간에 있어도 우리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새삼 근황을 묻자니 귀찮았고, 그렇다고 다른 주제를 쥐어짜기엔 체력이 부족했다.

“정세진.”

침묵을 참지 못한 쪽은 민재였다. 민재는 꼬고 있는 다리를 까딱이며 어쩐지 머뭇거리는 느낌으로 질문했다.

“……그 새끼가 잘해 주냐?”

아, 이런 주제는 좀 곤란한데.

“권이도 성격 존나 더럽다며. 업계에 소문 다 났는데 너도 들었을 거 아니야.”

“음…….”

낮게 침음하며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민재의 말대로 권이도의 소문은 나도 익히 알고 있었다. 실제로 겪은 권이도는 글쎄, 소문과는 무척이나 달랐지만.

“너한테 욕하고 그러는 거 아니지?”

“잘해 줘. 존댓말도 쓰고.”

“……그 새끼가 존대를 한다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민재가 눈을 크게 떴다. 잘해 준다는 말은 한 귀로 넘기고 존댓말을 한단 사실만 신기한가 보다.

“약혼식 때도 존댓말 썼잖아.”

“그거야 어른들 계시니까 그런 거겠지.”

민재가 말하는 어른이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런 이유는 아니었을 거다. 애초에 어른 취급을 해줬다면 아버지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도 않았을 거고.

“정말 잘해 줘. 말도 얼마나 상냥하게 하는데.”

“미친.”

권이도는 늘 내게 상냥하다 말하지만, 정말 상냥한 쪽은 권이도였다. 자연스럽게 존댓말을 써주고, 동등한 입장에서 나를 대해 준다. 이따금 보이는 고압적인 태도는 타고난 천성일 뿐이니 제외하고. 늘 꼭대기에 머물던 사람으로서 그렇지 않은 게 오히려 더 이상할 터다.

“……그래서 만족해? 지금 그 결혼 생활에?”

민재는 초조한 얼굴로 꼬았던 다리를 똑바로 풀었다. 다리를 달달 떠는 걸 보니 어지간히 긴장한 모양이다. 생긴 건 어머니와 같은데 불안할 때 나오는 버릇은 아버지와 비슷했다.

“야, 만족하냐고 묻잖아.”

엄밀히 따지면 결혼이 아닌 약혼이었다. 그마저도 우리가 정말 약혼자다운 하루를 보내는지는 미지수였고. 하지만 나는 그러한 사실을 지적하는 대신 적당한 선에서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역시 형 걱정해 주는 건 동생밖에 없네.”

“…….”

민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오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순식간에 표정이 차가워졌다. 꽉 다물린 입술이 비스듬히 비틀리고, 콧잔등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씨발, 형 같은 소리 하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누가 봐도 화난 발걸음이었지만, 나는 굳이 그런 민재를 붙잡지 않았다.

* * *

원래는 하룻밤 묵을 생각이었으나, 나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본가를 빠져나왔다. 아버지는 어서 가보라며 나를 재촉했고, 유일하게 민재만이 복잡한 얼굴로 입술을 짓씹었다. 그럼에도 붙잡지 못한 건 낮에 나와 나눴던 대화가 그때까지도 앙금으로 남았기 때문이겠지.

이미 퇴근한 기사 대신 운전은 김 실장이 도맡아 했다. 올 때도 데리러 왔으니 갈 때도 모셔다드리겠다면서 말이다. 나는 굳이 거절하지 않고 선뜻 김 실장이 운전하는 차에 올랐다.

“아, 권이도 씨 댁 말고 오피스텔로 가주세요.”

“……원래 사시던 곳 말씀입니까?”

차를 출발시키려던 김 실장이 기어에 손을 얹은 채 멈칫했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바라본다. 자신이 제대로 이해했나, 그게 헷갈리는 모양이었다.

“위치 모르시면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

장난처럼 말하자, 그가 군말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원래 아버지의 기사였기 때문일까 운전 솜씨가 수준급이었다. 원래 있던 기사보다 김 실장이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사람 시켜서 청소해 놓길 잘했네요.”

권이도의 집으로 들어가기 전, 나는 원래 살던 오피스텔을 처분하지 않았다. 정리하기 아쉬워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조만간 돌아오리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덩그러니 바닥에 나앉으면 아무래도 좀 곤란하지 않은가.

“본부장님.”

“저 이제 본부장 아닙니다.”

나는 그간 미뤄 왔던 말을 드디어 김 실장에게 이야기했다. 승진할 때마다 잘만 바꿔 부르더니, 백수가 된 뒤에는 영 바뀔 기미가 없었다. 그는 흘긋 백미러로 나를 살피곤 곧장 호칭을 정정했다.

“도련님.”

“……말씀하세요.”

픽,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도련님이라. 이따금 들을 때면 간지럽고 어색한 호칭이다. 이태성은 절대로 못 부를 호칭이기도 했고.

“왜 오피스텔로 가시는지 여쭤봐도 됩니까?”

김 실장은 퍽 걱정스러운 느낌으로 물었다. 내가 오피스텔로 가는 이유가, 권이도에게 가기 싫어서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 사실이 또 우스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권이도 씨가 저 괴롭히는 것 같습니까?”

문 집사는 얼굴이 좋아졌다던데, 민재와 김 실장은 왜 권이도를 의심할까. 하다못해 그 무심한 서영이조차 집을 나서는 나를 안쓰럽게 쳐다봤었다. 내가 그렇게 표정 관리를 못 한 건지, 아니면 이 사람들의 걱정이 과한 건지.

“아뇨, 사실…… 좋아 보이십니다.”

또 거짓말은 못 하는 김 실장이 순순히 사실을 고백했다. 최근엔 수면제도 안 찾지 않냐며, 말씀이 없기에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는 말도 함께였다.

“……수면제 많이 남았습니다.”

“…….”

“요즘 먹을 일이 없어서요.”

창밖에 다시 빗줄기가 거세지기 시작했다. 창문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이 길게 흔적을 남겼다. 김 실장은 와이퍼를 작동시키고 넌지시 물어왔다.

“오피스텔은, 종종 들르려고 그냥 두신 겁니까?”

“뭐, 그것도 있고…….”

비나 좀 맞으면 딱 좋을 것 같은데. 하필 옷이 이래서 그러면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돌아갈 곳은 있어야죠.”

무심코 속마음이 흘러나왔다. 김 실장은 아무런 대꾸 없이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그로선 할 말이 없는 것일지 몰라도, 무리해서 위로하려 들지 않는 게 내가 그를 편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였다.

그 후 집으로 갈 때까지 김 실장은 내가 별다른 질문을 건네지 않았다. 피곤하면 조금 주무시라고 그 말 한마디를 내뱉었을 뿐이다. 딱히 잠은 오지 않았지만, 나는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김 실장의 말에 눈을 떴을 때, 창밖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내가 비를 좋아하는 걸 아는 김 실장이 눈치껏 야외 주차장에 차를 댄 덕이었다. 그는 먼저 차에서 내려 우산을 펼친 채 뒷좌석 문을 열어 줬다.

“잔인하시네요. 맞는 건 안 되고, 보기만 해라?”

“비 맞으면 감기 걸립니다.”

은근슬쩍 말해 봤지만, 김 실장은 단호했다. 그러는 본인이야말로 맨몸으로 비를 맞고 있으면서.

“감기는 김 실장님이 걸리겠어요.”

나는 차에서 내려 김 실장이 들고 있던 우산을 가져왔다. 아마 입구까지 씌워 주려던 것 같은데 그렇게까지 에스코트 받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우산을 씌워 주며 운전석을 턱짓하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들어가세요. 운전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역시, 분위기를 잘 읽어서 좋았다. 괜한 실랑이를 해봐야 내가 물러서지 않을 걸 알기 때문이겠지. 나는 그가 운전석에 오르는 걸 확인하고 느릿느릿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결국, 이곳에 돌아왔다. 내가 본부장으로 일하던 그때처럼, 지금까지의 일이 모두 꿈결처럼 느껴졌다. 마음속에 피었던 여유 역시 눈치채지 못한 사이 서서히 사그라들고 있었다.

어차피 돌아올 곳이라면 처음부터 떠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안일한 마음가짐으로 다른 곳에 안주할 수 있으리라 꿈꾸지 말았어야 했는데.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비 냄새가 났다. 눅눅히 젖은 흙냄새, 싱그러운 풀 냄새, 습기 가득한 공기와 잔잔히 풍기는 나무 냄새.

“…….”

뚝, 걸음을 멈췄다. 밤이라 어두컴컴한 하늘 아래,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 누군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한 손에 우산을 들고, 왼 손목에 찬 시계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

“……권이도?”

빗소리에 묻힐 만큼 작은 소리였는데, 그는 곧장 고개를 들었다. 먼 거리에서 마주친 시선이 서서히 발목을 붙잡는 듯했다. 뿌리 내린 나무처럼 멈춘 나 대신, 이번엔 그쪽에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심장이 빗소리에 맞춰 뛰었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나는, 그가 딱 세 걸음 정도를 남겨 놨을 때야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왜,”

“…….”

“왜 여기에 있습니까?”

권이도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어두운 와중에도 그의 생김새가 또렷이 뇌리에 각인됐다. 섬세하게 그려 놓은 눈매, 오뚝한 콧날과 굳게 다물린 입술까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며, 그가 나직이 대꾸했다.

“그냥, 우연히.”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우산에 톡톡 부딪혔다.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라는데. 이 사람의 우연은 지나치게 필연적이지 않나. 고의적으로 만들어 낸 무언가를 과연 우연이라고 칭해도 되는 걸까.

“지나가던 길이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내가 살던 오피스텔에, 굳이 이 사람이 지나갈 이유가 뭐가 있으리라고. 그것도 홀로 우산을 들고 이 빗속에 서 있을 만한 사연이 없었으련만.

“정세진 씨가 언제 돌아올까 싶어서.”

“…….”

우습게도, 그 말을 듣는 순간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을 살아온 본가도, 나름의 안식처였던 오피스텔도 아닌, 단순히 권이도의 말 한마디에.

“조금 늦었네요.”

다정한 인사는 못다 한 아쉬움을 담고 있었다. 온종일 마주친 가족들도 보여 주지 않던 그리움이 권이도의 한마디에 가득 묻어났다.

“……비 맞는 거 좋아해요?”

나는 충동적으로 물으며 우산을 든 손을 아래로 내렸다. 툭 떨어진 우산이 빗물로 가득한 바닥 위에 뒤집어졌다. 한 발짝 그에게 다가가자 권이도가 내 쪽으로 우산을 기울였다.

“앞으로…… 좋아하게 될 것 같은데.”

그냥, 타이밍이 맞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신호가 통했다고 해야 할까.

스르륵 눈꺼풀이 감겼다. 시야가 완전히 차단되고, 권이도의 숨결이 바짝 가까워졌다. 온통 비 냄새로 가득하던 코끝에 향긋한 페로몬이 훅 풍겨 왔다.

입술은 아주 조심스럽게 맞닿았다. 우산 아래서 포개진 입술이 누구 것인지 모를 떨림을 한가득 담고 있었다. 빗줄기는 서서히 잦아들었지만, 우리는 한참 우산 아래를 벗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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