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억의 끝에 (19)화 (19/131)

19화. Petit a Petit(9)

높디높은 담벼락은 어릴 때 보았던 것과 전혀 변하지 않았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땐 회색의 벽이 얼마나 무섭던지. 이곳에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못한다는 두려움을 느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내 두려움은 반만 맞아떨어졌다. 처음엔 감금과도 같은 생활을 했지만, 나는 끝내 쫓겨나고 말았으니. 평생을 이 울타리 속에서 살 것이란 생각이 다행스럽게도 현실을 비껴간 것이다.

“본부장님.”

내 옆에 서 있던 김 실장이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괜찮으십니까? 그 질문에 나는 겨우겨우 담벼락 꼭대기에서 시선을 떼어 냈다.

“네, 괜찮습니다.”

본가였다. 아버지와 어머니, 민재, 서영이가 있는 본가. 내가 어릴 적부터 살아왔고 스무 살이 되자마자 타의에 의해 걸어 나온 아버지의 집.

“들어가죠.”

‘조만간 본가에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날, 김 실장의 말을 듣고 속으로 얼마나 많은 상상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버지가 나를 부르시는 이유가 뭘까. 혹시 민재가 사고를 친 건 아닐까. 내가 필요 없다는 이유로 권이도가 나를 돌려보내려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러한 예상과 달리, 김 실장은 떨떠름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이야기했다.

‘가족끼리…… 식사를 하자고 그러셨습니다.’

뜬금없는 말이었다. 뜬금없다 못해 당황스럽기까지 했고. 가족끼리 하는 식사 자리. 거기에 나를 부를 만한 이유가 없건만. 아버지가 말하는 가족엔 내가 들어가지 않을 텐데.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럼 그렇지. 용건은 따로 있었다. 단지 그게 김 실장의 입을 통해 전달될 말이 아니었을 뿐.

어쨌든 그러한 이유로 나는 오랜만에 본가에 도착한 상태였다. 권이도는 잠시 다녀오겠다고 말하자마자 별일 아니라는 듯 이렇게 얘기했다.

‘데려다줄게요.’

일도 바쁜 사람이, 시간을 어떻게 빼겠다고. 심지어 그 차를 운전하는 건 권이도가 아니라 그의 기사일 텐데.

‘아뇨, 김 실장이 데리러 오기로 했습니다.’

내 말에 표정이 안 좋아졌던 건, 단순히 잘못 보았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눈을 한 번 깜박이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질 불쾌함이었으니.

‘하루 자고 올 테니까, 그 김에 이태성 씨는 쉬라고 해주세요. 복지가 영 엉망이던데.’

장난처럼 건넨 말이었다. 가능하면 당일에 오고 싶었지만, 민재가 붙잡을 가능성을 무시하지 못했다. 두 번을 다녀올 바에는 한 번에 해결하는 게 낫기도 했고.

권이도는 내 말에 재미있다는 듯 웃고는 무척 간단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복지를 돈으로 주면 되겠군요.’

어쨌든 그러한 이유로 나는 오랜만에 정장을 입었다. 드레스룸에 준비된 것이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사이즈가 내 몸에 꼭 들어맞았다. 셔츠에 넥타이, 거기에 재킷까지 걸치자 제법 본부장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도련님 오셨어요?”

커다란 대문을 지나 잘 조경된 정원을 지나면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온다. 권이도의 집만큼 커다랗진 않았고, 그렇다고 작은 크기는 아니었다. 나는 현관까지 마중 나온 노인을 향해 반갑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오랜만에 뵙네요, 집사님.”

펑퍼짐한 치마를 입은 노인은 어린 시절 바쁜 부모님 대신 나를 키우고, 민재와 서영이까지 키운 사람이었다. 모든 고용인이 나를 외면할 때 남몰래 음식을 챙겨 주던 사람이기도 했다. 집을 나간 이후엔 연락할 일이 없어 얼굴을 보는 건 몇 년 만이었다.

“아유, 결혼 생활이 괜찮은가 봐요. 얼굴색이 엄청 좋아졌네.”

“하하…… 거기서 워낙 잘 먹어서 그런가.”

문 집사가 얼굴을 만질 수 있도록 살짝 허리를 굽혀 줬다. 이제는 나이가 있는 터라 뺨을 만지는 손길이 까칠까칠했다. 어린아이 다루듯 얼굴을 요리조리 돌려 본 문 집사는 뒤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잽싸게 물러났다.

“세진이니?”

어머니였다. 긴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리고 몸에 꼭 맞는 원피스를 입은 모습이 한 치의 흐트러짐조차 없었다. 늘 그랬지만, 꾸미기 좋아하는 공작새 같은 사람이었다.

“오느라 고생했어. 회장님은 서재에 계시니까 인사하고 오렴.”

어머니와는 항상 애매한 관계였다. 사이가 나쁘냐고 물으면 그렇지 않았지만, 사이가 좋으냐고 물으면 대답하지 못할 관계. 십몇 년을 함께 살았음에도 대화를 나눠 본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다녀올게요. 김 실장님, 그건 이분 드리면 됩니다.”

나는 김 실장에게 눈짓하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뒤 편에 서 있던 김 실장이 근처에 대기하던 고용인에게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밀었다. 권이도가 집에 가져가라며 들려 준 선물이었다.

“와인인데 실온에 두면 될 겁니다. 권이도 씨가 식사 때 마시라고 주셨어요.”

척 보기에도 값깨나 나갈 것 같은 와인은 그의 집에 있는 와인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것이었다. 술을 모으는 것도 취미인지. 널찍한 창고에 국가별, 연도별, 종류별로 와인이 분리되어 있었다. 눈이 돌아갈 만큼 진귀한 풍경이었으나, 그가 꺼내 든 병을 보았을 때보다 놀라진 않았을 거다.

‘……이걸 지금 주시겠다고요?’

‘네, 와인 싫어합니까?’

시가 오천만 원이 넘는 와인이었다. 가격이 문제가 아니라, 구하려고 해도 구할 수 없을 만큼 희귀한 술이기도 했다. 병에 붙은 라벨과 그 앞쪽에 적힌 숫자를 보고 알 수 있었다.

‘그냥 식사 자리일 뿐인데…… 너무 과분한 것 같습니다.’

‘과분하다니.’

권이도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딱 잘라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덧붙였다.

‘그 집에 제일 과분한 건 정세진 씨인데.’

똑똑.

“아버지, 정세진입니다.”

들어오거라. 육중한 나무 문 너머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책상이 아닌 서재 오른편에 선 아버지가 보였다. 골프채를 들고 한창 퍼팅 연습 중이었던 모양이다.

“찾으셨다고요.”

“그래.”

골프채의 헤드가 골프공을 툭 건드렸다. 데구루루 굴러간 공은 아슬아슬하게 홀 옆으로 빠져나갔다. 쯧, 혀를 찬 아버지가 내 쪽은 보지도 않고 이야기했다.

“그놈은?”

대뜸 본론이었다. 그는 골프공을 다시 제자리에 놓고 어깨를 움직여 자세를 잡았다.

“그놈이랑은 잘 지내고?”

“……네, 뭐.”

권이도의 앞에선 꼬박꼬박 존칭을 부르더니. 이제는 아무 거리낌 없이 ‘그놈’이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어하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적대심이 가득 느껴졌다.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툭, 곧게 굴러간 골프공은 이번엔 정확히 홀 안에 들어갔다. 아버지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골프채를 어깨에 걸쳤다.

“2세는 아직이냐.”

“…….”

느리게 눈을 내리깔았다. 아마 처음부터 가장 물어보고 싶은 부분이 이거였을 거다. 사이를 먼저 물어본 걸 감사해야 할지, 아니면 조금 더 근황을 살피지 않아 서운해야 할지.

“별다른 얘기는 없었습니다.”

“허.”

어이가 없다는 듯, 아버지가 크게 숨을 토해 냈다. 한껏 찌푸린 미간이 몹시 짜증스러워 보였다. 탁, 탁, 골프채로 어깨를 두드린 그가 천천히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기껏 히트 사이클도 지나서 불렀더니…….”

나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입을 꾹 다물었다. 분명 똑바로 서 있는데도 스멀스멀 바닥으로 잠기는 기분이 들었다. 어깨가 천천히 수그러들고,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고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것도 아직이고?”

“……그거라면.”

“쯧, 척하면 알아듣지 못하고.”

아버지는 한껏 인상을 구긴 채 책상을 뒤적거렸다. 너저분하게 쌓인 서류 틈에서 무언가 찾는 듯했다.

“암만 결혼이 아직이래도 한집에 살면 갈 데까진 갔을 거 아니야.”

그제야, 나는 아버지가 말한 ‘그것’이 뭔지 알 수 있었다. 요컨대 권이도와 섹스했냐는 거겠지.

“아버지.”

“얘기해.”

아버지는 여전히 나를 등진 채 서류를 뒤적였다. 몇 장을 뽑아 가지런히 정리하고 또 몇 장을 뽑아 옆에 내려 둔다. 아무래도 얼굴을 보고 대화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권이도 씨는…… 서류 정리가 끝나기 전까진 임신하지 않길 바라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내게 ‘정세진 씨에게 그런 걸 바라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했다. 히트 사이클이 왔을 때도 가만히 있던 걸 보면 나와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2세를 원하니, 서로의 바람이 반대가 된 게 아닌가.

“……뭐?”

아버지는 화들짝 놀라 서류를 든 채 나를 돌아봤다. 커다랗게 뜨인 두 눈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는 듯했다. 나는 주먹을 꾹 움켜쥔 채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녀 계획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더니, 그런 걸 바라지 않으신다고…….”

“그놈이 그런 말을 했다고?”

부리부리한 눈이 매섭게 나를 노려봤다. 당장 똑바로 대답하지 않으면 큰 불호령이 떨어질 듯했다. 물론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지만.

“네. 권이도 씨가 그랬습니다.”

“…….”

숨 막히는 침묵이 서재 내부에 엄습했다. 갑작스러운 고요함이었지만, 무어라 입을 열 수는 없었다. 그냥 시선을 내린 채 뒷말을 기다리는데, 아버지가 아드득 이를 갈았다.

“망할 놈이…….”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낼까. 내가 권이도의 아이를 가지면 아버지에게 대체 무슨 이득이 있으리라고.

“그래서 세진이 넌, 그냥 알겠다고 대답한 거야?”

“……네.”

“이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버럭 소리친 아버지가 골프채를 바닥에 내던졌다. 반으로 두 동강 난 파편이 바닥에 퉁 퉁 굴러다녔다. 그는 성큼성큼 내 쪽으로 다가와 양손으로 내 어깨를 덥석 붙들었다.

“그놈 의견이 중요한 게 아니야. 어떻게든 그 자식 애를 가져야 돼. 알겠어?”

부릅뜬 두 눈에 초조함이 가득 엿보였다. 이렇게까지 흥분할 일이 아닌데, 이상하리만치 과한 반응이었다.

“……그게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그게 마음대로 왜 안 돼, 응? 너네는 그 뭐야, 페로몬으로 성욕을 느낀다고 하지 않았냐. 넌 우성 오메가니까…….”

거기까지 말한 아버지가 잠깐 말을 멈췄다. 아마 내가 평소에 페로몬이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린 모양이었다. 아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다시금 귓가를 파고들었다.

“모자란 것.”

“…….”

티 나지 않게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이 페로몬 얘기는 아니었는데. 무어라 변명을 위해 입을 열었지만, 아버지가 신경질적으로 내 말을 끊어 버렸다.

“그럼 적어도 히트 사이클 때라도 뭘 했어야지. 우성 오메가씩이나 돼서 알파 하나 못 꾀는 게 말이 돼?”

엄밀히 따지면 꾀어내려고 노력한 적이 없었다. 아니, 만약 일을 치렀다고 해도 권이도가 원치 않으면 아이를 가지지 못했겠지만.

오메가가 임신하기 위해선 알파가 반드시 노팅을 해야 한다. 성기가 빠지지 않게 깊이 박아 넣고 오랜 시간 배 속을 채워야 한단 말이다. 중요한 건, 이 노팅이 오로지 알파의 의지로 이뤄진다는 점일까.

“서류 정리는 무슨…… 약혼 사실도 못 알리게 하는 놈이, 감히 서류 정리를 운운해?”

“……약혼 사실을 못 알리게 한다고요?”

내가 되묻자, 아버지가 내 어깨를 확 놓아 버렸다. 그리 큰 힘은 아니었으나 잠깐 비틀거리기엔 충분했다. 이내 자세를 바르게 한 나를 보며 그가 심각한 얼굴로 짓씹었다.

“선호 측에서 기사를 막고 있어.”

그리 이상할 거 없는 말이었다. 애초에 공식 발표는 한참 나중으로 미뤄 두지 않았던가. 하지만 아버지의 생각은 그게 아니었는지 성난 목소리가 뒷말을 이었다.

“이 바닥 소문이 얼마나 빠른지 알지? 소문이 나도 진작 났어야 하는데 업계고 언론이고 죄 쉬쉬하는 분위기야. 선호가 이렇게까지 완벽히 통제하는 이유가 뭐겠어, 응?”

“…….”

“너랑 결혼할 생각이 없는 거지. 그냥 인질로 데리고 있는 거라고. 그 망할 뱀 같은 놈이…….”

이제야, 아버지가 아이에 집착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버지는 해신과 선호를 잇는 연결고리가 갖고 싶은 것이다. 언론에 노출조차 하지 못한 이 시점에, 나와 권이도의 2세가 그 역할을 해주리라 믿을 테니까.

“……저를 인질로 해신에 요구할 게 있습니까?”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건 그걸 제외하고도 훨씬 많았다. 우선, 가장 먼저 이 결혼이 행해진 이유.

권이도는 나와의 결혼으로 무얼 얻었을까.

“그걸 모르니까 문제인 거지!”

버럭 소리친 아버지가 성큼성큼 서재 안을 걸어 다녔다. 같은 공간을 빙빙 도는 게, 어지간히 속이 갑갑한가 보다.

“세상에 공짜는 없어. 후계도 아니고 돈을 바라는 것도 아닌데 권이도가 너 따위 오메가를 어디에 쓰냔 말이야.”

타당한 의문이었다. 내가 권이도의 대화 끝에 늘 품고 있던 의아함이기도 했고. 문제는, 아버지가 가진 불안이 내가 가진 것보다 한참이나 커다랗다는 점일까.

“애초에 결혼이 아니라 약혼일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아버지가 연신 중얼거리는 말들은 대개 자신의 안일함과 권이도의 비겁함을 탓하는 내용이었다. 말만 들으면 권이도가 궁지에 몰린 아버지를 살살 꼬드겨 극악무도한 불공정 계약을 맺은 것처럼.

“아버지.”

그래서 나는 끝내 물어보고 싶지 않던 마지막 질문을 입에 올리기로 했다. 이 혼사가 계약이라는 걸 알면서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지 않던 한 가지 사실.

“권이도 씨가 뭘 준다고 그랬습니까?”

나는 정말 대가를 치르고 넘겨진 물건이구나. 사업 수단의 하나이고, 아버지에겐 기회를 잡을 카드였구나.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알고 싶지 않았다. 내가 단돈 몇 푼에 팔렸는지, 혹은 어떤 조건에 협상됐는지, 흥정을 얼마나 했는지 따위의 것을 직접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선호전자의 보안 시스템.”

하지만 무심하게도, 아버지는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대답했다. 우뚝, 제자리에 선 채로 탐욕스러운 눈빛을 드러내기도 했다.

“우리 기업의 오메가를 넘겨주면 선호에선 애플리케이션에 도입할 시스템 권한을 준다고 그랬지. 뭐…… 그 외에 건 네가 알 필요 없고.”

우리 기업의 오메가라. 그나마 ‘우리’라는 말이 붙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그런데 몇 날 며칠이 지나도록 연락 하나 없잖아. 내 쪽에서 먼저 연락하면 바쁘다는 핑계로 항상 무시만 하니…….”

“……계약서는 없습니까?”

혹시나 해서 물은 것이었다. 사업에 증거가 남는 계약은 필수니까. 그런데 아버지는 사색이 된 얼굴로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그 야비한 놈이 투자금을 줬어. 계약서는 유출되면 위험하니까 계약금 대신으로 챙겨 두라면서. 말은 번지르르하기에 철석같이 믿었더니 이 사달이 난 거 아니냐.”

아마도 아버지는 권이도의 말만 믿고 구두 계약을 맺은 모양이었다. 아버지답지 않게 안일한 행동이었으나, 상대가 권이도라면 그럴 만도 했다. 특유의 고압적인 말투로, 신뢰와 불안을 번갈아 주며 사람을 한계까지 내몰았을 테니까.

그래도 뭔가, 이상하긴 한데…….

“그사이에 혼사가 몇 개나 들어왔는지 알아? 선호까진 아니어도 괜찮은 곳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걸 다 거절하느라 우리 이미지가 얼마나 안 좋아졌는지는 알기나 해?”

아버지의 불안감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기막힌 타이밍에 온 기회였고, 놓치면 다시는 못 잡을 기회이기도 했다. 다만, 높은 성과엔 높은 위험이 따른다고 그만큼 감수해야 할 것들이 많아서 그랬지.

“이러다 그놈이 널 팽하기라도 하면…….”

“…….”

그 마지막 말에는 나조차도 머리가 식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머릿속에 그가 날 내치는 장면이 또렷이 떠올랐다. 냉랭한 눈동자나,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온 싸늘한 한마디까지.

‘너 따위를 믿지 말 걸 그랬지.’

“세진아.”

움찔, 고개를 들었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 시선을 땅바닥에 처박고 있던 모양이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자, 아버지가 다시 내 쪽으로 다가와 어깨를 붙잡았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말 기억하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버지가 할 뒷말을 언젠가 들은 적 있는 것처럼. 이 탐욕스러운 두 눈이 내게 할 말을 직감하는 것처럼.

“이 애비 말 잘 들어.”

나직한 서론은 선택권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당연히 고개를 끄덕여야 한다는 듯, 너그러운 목소리로 나를 북돋웠을 뿐.

“자료 하나만 가져오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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