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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억의 끝에 (18)화 (18/131)

18화. Petit a Petit(8)

무어라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섣불리 입을 열었다간 권이도의 기분을 더 상하게 할 것 같았다. 그는 찻물이 번지는 모습을 보며 테이블 위에 찻잔을 툭 내려놨다.

“별로 미안하라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것치곤, 기분이 아주 나빠 보이는데.

“…….”

이태성과 함께하는 시간은 권이도와 보내는 시간이 비하면 무척이나 짧았다. 끽해야 오전 몇 시간을 함께할 뿐이고, 각자 책을 읽느라 말을 나누는 일도 드물었다. 그와 반대로, 권이도는 매일 밤 나와 두어 시간씩 대화하지 않던가.

그런데 왜 기분이 나쁠까.

나는 그렇게 묻는 대신 테이블 아래에서 손바닥을 꾹꾹 눌렀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간질거리는 기분을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그가 내비치는 불쾌함에 의문이 들기보다 이해가 먼저 돼서 의식하지 못한 사이 입술이 움직였다.

“……온실에 조명을 달까요.”

그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마치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는 듯했다. 나는 괜히 민망한 기분을 느끼며 살짝 눈가를 찡긋했다.

“그러면 권이도 씨가 퇴근하고 나서도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까…….”

솔직히 궤변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말이 통할까, 잠깐 걱정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그저 이것밖에 없었다.

“대신이라긴 뭐하지만, 아직 여기서 그 시간대를 공유한 사람은 없거든요.”

“…….”

온실에 조명을 달면 해가 진 다음에도 이곳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다. 오는 길은 좀 어둡겠지만, 나란히 걸어오면 그리 무서운 것도 없지 않을까. 물론 이 모든 건 권이도가 내 말을 기꺼이 수락한 다음이겠지만.

“그게 싫으시면…….”

“아뇨.”

대답은 칼같이 돌아왔다. 그는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어색하게 목을 풀었다. 뒤이어 흘러나온 한마디는 귀가 간지러울 만큼 부드러웠다.

“그렇게 하죠.”

드러난 눈에 엷게 웃음기가 묻어났다. 언제 기분이 상했냐는 듯, 평소처럼 다정한 미소였다. 어쩐지 조금 민망해하는 것 같기도 해서, 그제야 조금이나마 안도감이 들었다.

“정세진 씨는 정말…….”

“상냥하다고요.”

장난스럽게 말하자, 권이도가 픽 웃음을 흘렸다. 한결 누그러진 분위기에 특유의 알파 페로몬이 잔잔히 감겨들었다. 누누이 생각하지만, 정말 상냥한 건 그쪽이라니까.

“그보다…… 벌써 퇴근하신 겁니까?”

오늘 아침, 권이도는 분명 아침 식사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일찍 들어온다는 말은 물론, 온실로 찾아오겠다는 말도 없었다. 옷차림은 여전히 정장 그대론데, 이 시간에 퇴근할 일이 뭐가 있을까.

“다시 나가 봐야 하는데, 잠깐 들른 겁니다. 정세진 씨한테 할 말도 있고 그 김에 겸사겸사.”

“할 말이요?”

“오후에 병원에서 주치의가 올 예정입니다.”

주치의라는 말에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히트 사이클이 있던 다음날, 지하에 있던 차고에서 권이도가 제안했던 페로몬 검사.

“1시쯤 온다고 했으니까 점심 먹고 곧장 검사받으면 됩니다. 오후에 딱히 일정 없죠?”

“네, 그런 건 없습니다.”

집에서 놀고먹는 사람한테 일정이 어디 있다고. 끽해야 정원을 좀 거닐 생각이었건만.

“아마 피검사를 할 텐데, 같이 있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

말만 들으면 내가 주사 맞기 싫어하는 어린애가 된 것 같았다. 페로몬 검사라고 해봤자, 권이도의 말대로 피를 좀 뽑아 가는 게 다일 텐데.

“걱정은 권이도 씨가 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맞아요. 그냥 내가 걱정돼서 온 겁니다.”

너무 아무렇지 않은 어조라 반박할 타이밍마저 놓치고 말았다. 그는 내가 내려놓은 시집을 가져와 첫 페이지를 살펴보며 이야기했다.

“그래서 가지고 싶은 건 생각해 봤습니까?”

“아, 그거…….”

차 키를 가져가는 조건으로 갖고 싶은 물건을 말하기로 한 게 벌써 일주일 전이었다.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무슨 물건을 고르면 좋을지 생각해 본 참이었다.

“지난번에 권이도 씨가 말씀하신 향수로 부탁드립니다.”

“내가 말했던 향수라면…… G사에서 나온 그거?”

“네, 그거.”

권이도가 만족할 만한 물건이면서, 나중에 뒤처리가 어렵지 않은 것. 책 따위를 말하기엔 서재가 너무도 넓으니 그가 말한 향수가 적당할 듯했다. 정확히 어떤 건진 모르겠지만, 먼저 이야기했다면 그의 눈에 찰 만한 물건일 테니까.

“똑똑하군요.”

그는 대뜸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시선은 여전히 시집에 고정된 상태였다.

“무슨 향수인지도 모르면서, 내 입에서 먼저 나왔으니 적어도 거절하진 않겠다고 생각했나 보죠.”

“…….”

움찔, 어깨가 들썩였다. 다행히 그가 책을 보는 중이었기에 동요한 티를 들키기 전에 자세를 바로 할 수 있었다. 그는 무척 의외라는 듯 의아한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아니라고 안 합니까?”

“……어차피 들킬 거짓말은 하지 말자 주의라.”

뭣 하러 아는 척을 한단 말인가. 그게 무슨 향이냐고 한 번만 물어봐도 금세 들켜 버릴 것을.

“갖고 싶진 않아도 궁금하다고 생각하긴 했어요. 권이도 씨가 잘 어울릴 것 같다길래 관심이 간 것도 있고……. 이걸로는 안 됩니까?”

“아뇨, 당연히 됩니다.”

그는 시집을 내려놓고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재미난 말을 들었다는 듯 흥미로 가득한 표정이었다.

“궁금하면 가져 봐야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권이도이기에 가능한 말이었다. 그라면 정말로 궁금한 모든 걸 가져 보고 말 테니까. 그럴 만한 돈도, 능력도 충분한 사람이었으니.

“내가 말한 향수는 은방울꽃을 모티브로 한 거예요.”

그는 예의 그 기품 있는 목소리로 나긋나긋 향수를 설명해 줬다. 매년 디자인이 바뀌어 새로 나오는데, 국내엔 딱 100개 정도밖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전 세계를 통틀어 4,500개밖에 없다는 말에는 나도 멋쩍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한정판이었군요.”

“구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고.”

그는 왼손을 들어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은색과 금색이 섞인 금속이 약혼반지와도 썩 잘 어울리는 시계였다. 아마 날짜를 볼 수 있는 제품인지, 그가 한쪽 눈가를 살짝 찌푸린 채 기간을 가늠했다.

“마침 예약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나직이 말꼬리를 흐린 권이도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한 일 자로 다물린 입술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날 때까지 열리지 않았다. 갑자기 왜 그러냐고, 그렇게 물으려는데, 그가 툭 내뱉었다.

“하나 물어보고 싶은데.”

“네?”

“정세진 씨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그것도 지금까지 하던 대화와는 전혀 무관한.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되묻자, 권이도가 그저 예시일 뿐이라며 뒷말을 더 했다.

“그 사람이 정세진 씨한테 뭘 좀 훔쳐 갈 건데, 그걸 잃어버리면 정세진 씨한테 오는 피해가 굉장히 커요.”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서 무얼 훔쳐 갈 거라니. 혹시 책 얘기인가 싶었지만, 그는 물어볼 틈을 주지 않았다. 그저 오른손으로 시계를 감싸며 무덤덤한 어투로 덧붙였을 뿐.

“이 경우에 선택지는 두 개. 선뜻 내어 주느냐, 아니면 주지 말고 숨겨 놓느냐.”

“…….”

“정세진 씨라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시선이 마주쳤다. 단순히 예시일 뿐이라기엔 권이도의 표정이 너무도 진지했다. 한껏 가라앉은 두 눈이 어떤 의미에선 가련해 보이기까지 한다.

“……저는, 일단 물어볼 것 같은데요.”

무엇을? 권이도는 그렇게 묻고 있었다. 옴짝달싹 못 하게 묶여 버린 것처럼, 그의 시선이 지그시 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나는 난감함에 눈꼬리를 내리고 느릿느릿 이야기했다.

“그게 왜 필요한지 물어보겠죠. 그 사람한테.”

무작정 훔쳐 갈 만큼 필요한 거라면, 나는 기꺼이 내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게 오는 피해가 얼마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랑하는 상대라면 뭐든지 해주고 싶을 테니까. 애초에 잃어버리면 안 될 만큼 소중한 걸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무작정 남의 걸 훔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서요.”

사랑은커녕 누군가와 연애 한 번 해본 적이 없는데. 구체적인 상대가 없음에도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상대가, 대체 뭐가 아쉬워서 남의 걸 훔쳐 갈까.

“일단 물어보고, 정 필요하다 싶으면 그냥 줄 것 같습니다.”

“…….”

“훔칠 정도니까 뭔가 사정이 있지 않을까요.”

거기까지 말하니, 문득 분위기가 너무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실이 이리도 따듯한데, 대화는 이리도 삭막할 수 있나. 심각한 이야기도 아니고, 단순한 가정에 불과한 것을.

“물론 손해를 보는 건 곤란하지만…… 그거 하나 주고 점수 따면 좋죠.”

마지막 말은 거의 장난에 가까웠다. 권이도가 웃어 주길 바란 건 아니지만, 분위기가 조금은 누그러졌으면 해서. 그런데 그는 어쩐지 멍한 얼굴로 읊조렸다.

“……그렇군요.”

민망한 기분이었다. 보잘것없는 대답을 그가 너무 진지하게 들어 주고 있다. 그래서 이런 것도 도움이 되냐고 물었는데, 그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흔쾌히 대답했다.

“그럼요. 아주 많이.”

“…….”

뭔진 몰라도 정말 도움이 많이 된 모양이었다. 그러니 저렇게 개운한 얼굴로 기분 좋게 웃을 수 있는 거겠지.

“일리 있는 말이네요. 정세진 씨는 사랑하면 퍼주는 타입인 것도 알겠고.”

“음, 뭐…….”

“근데 전 그거 못합니다. 퍼주는 거.”

픽, 웃음을 흘린 권이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것처럼 깔끔한 구둣발에 바닥에 떨어진 꽃잎이 납작하게 짓눌렸다. 아무리 봐도 고의라고밖에 보이지 않는 행동이었다.

“내 건 아무것도 뺏기지 말자는 주의라.”

“…….”

대체 어떤 사람이 간 크게 권이도의 것을 빼앗아 갈까. 잘못 훔쳐 갔다간 그보다 배로 책임을 물어야 할 수도 있는데.

“뭐…… 내가 내 손으로 준다면 얘기가 다르긴 하겠네요.”

그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상냥한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이 위로 가게 내민 손엔 아무것도 올라와 있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고민하기도 잠시. 그가 까딱, 손을 움직였다.

“그만 들어가죠.”

반사적으로 권이도의 손에 내 손을 올렸다. 약혼식 날 그랬던 것처럼, 그는 조심스럽게 내 손을 꼭 움켜쥐었다. 약간은 서늘한 체온이 더할 나위 없이 포근한 빛을 띠었다.

* * *

권이도가 말한 대로, 오후가 되자마자 주치의가 찾아왔다. 자신을 심 교수라고 소개한 여자는 선호병원에서 특이 형질과 관련된 과를 담당하는 의사였다. 그는 피를 뽑아 이런저런 검사를 진행하고, 어디 불편한 부분은 없는지 꼼꼼히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결과는 정상. 원래부터 이상했던 부분을 제외하면 별다른 특이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페로몬 농도도, 이런저런 건강 상태도, 그 어느 때보다 정상치를 웃돌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잠도 잘 자고, 먹는 것도 잘 먹었으니, 문제가 있으면 그거야말로 이상할 터. 주기가 안 맞는 건 좀 곤란했지만, 그와 관련해서 심 교수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이렇게 얘기했다.

‘보통 각인한 사이에서 일어나는 현상인데, 간혹 페로몬 상성이 잘 맞으면 상대방한테 맞춰서 주기가 조금씩 당겨지는 일도 있습니다.’

그 말을 할 때, 심 교수는 정확히 권이도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결국, 내 주기가 당겨진 게 권이도의 페로몬에 반응했기 때문이라는 거다. 그가 워낙 우성인 데다, 내게 알파 페로몬 면역이 없는 탓도 있다는 말도 함께였다.

‘아마 반년 정도에 걸쳐서 조절될 거고, 완전히 같아지면 안정기에 들어갈 겁니다.’

퍽 곤란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는 결혼한 사이가 아닌데, 주기가 같아지면 어쩐단 말인가. 권이도의 목적이 2세라면 반길 일이었지만, 그는 그런 걸 원하지 않는다고 진작 못 박아둔 상태였다.

‘건강엔 이상이 없으니…….’

심 교수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반사적으로 권이도의 시선을 피했다. 언젠가 이와 비슷한 말을 들었던 날, 아버지가 보여 준 반응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주기를 계산하는 것도 소용없는데, 권이도는 나를 얼마나 쓸모없다고 생각할까.

‘다행이군요.’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딱 한 마디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나직한 목소리는 아버지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럼 됐습니다.’

안도하는 느낌이었다. 실질적으로 해결된 문제는 아무것도 없는데. 심지어 히트 사이클의 유일한 해답이 억제제가 아니라 권이도의 페로몬이라는 말까지 들었건만.

어쨌든 결과는 무탈했고, 권이도는 비서의 연락을 받고 다시 회사로 향했다. 오늘은 저녁을 혼자 먹어야 할 거라며 미련이 남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기도 했다. 다시 말하지만, 식사는 혼자 해도 괜찮다니까.

“……근데도 아쉬운 게 문제지.”

후우, 한숨과 함께 욕조에 깊게 몸을 파묻었다. 따끈따끈한 물에서 모락모락 수증기가 올라왔다. 지난번처럼 향긋한 입욕제는 아니고, 소금인지 뭔지 무언가 풀어 놓은 것이었다. 권이도가 지시해 놓고 나간 덕에 고용인이 저녁 식사가 끝나자마자 준비해 주었다.

‘기다리지 말고 자요.’

속은 이루 말할 것 없이 복잡했다. 생각이 잔뜩 떠올랐다가, 다시 새하얗게 지워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가득 잡념으로 뒤덮이길 반복했다.

고민의 원인은 단 하나, 권이도였다. 불과 한 달 전까지 안면도 없는 상대이자, 이제는 내 약혼자가 된 권이도. 그가 내게 보여 주는 태도들이 이제는 부정할 수 없을 만큼 한 가지 사실을 가리켜서.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게 사랑은 아닐지언정 최소한 호감을 닮은 무언가인 건 확실했다. 나를 걱정하고, 챙기고, 아끼는 모습은 보편적인 애정의 모습과도 비슷했다.

솔직히, 모르고 있었다면 거짓말이다. 단순히 인정하지 못했을 뿐, 처음부터 그럴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었다. 도무지 계산이 맞질 않아 아닐 거라 부정하고 또 부정해서 그렇지.

문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그에게 감당 못 할 마음을 품으리란 예감 정도일까.

사람은 여유가 생기면 가장 먼저 마음을 줄 상대를 찾는다고 한다. 고독의 끝은 외로움인지라 공간이 남을수록 여백을 채우기에 급급해진다. 내게는 한 톨만큼도 남지 않았던 여유가, 이 집에 들어오면서 그를 담을 만큼 커다래지고 말았다.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그가 보여 준 불쾌함이 질투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의 시선에 반응해 끝내 자위까지 했을 때, 늘 혼자였던 히트 사이클을 그와 함께 보냈을 때, 아니면 그가 나를 위해 무리해서 시간을 내어 줬을 때.

짐작 가는 부분이 많으니 오히려 정답을 찾기가 어려웠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뚜렷한 해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

나는 고개를 들어 투명한 유리창 너머 하늘을 응시했다. 해가 뉘엿뉘엿 질 시간대라 보라색 물감을 풀어 놓은 것처럼 오묘한 색이었다. 욕조에서 하늘이 보였으면 좋겠다고, 언젠가 우스갯소리처럼 바라던 그대로였다.

‘세진아.’

그러고 보니, 나를 세진이라고 불렀지. 키스는 자연스럽게 했으면서 우는 걸 달래는 손길은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그런데도 귓가를 만질 땐 늘 있는 일인 양 능숙했고.

“세진이라고…….”

생각이 깊어지기 전에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젖은 머리는 대충 털어 내고, 가운 하나만 걸치고 욕실을 빠져나왔다. 바닥에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지만, 그다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타이밍 좋게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은 김 실장이었는데, 그 이름을 보는 순간 왠지 모를 긴장감이 들었다. 나는 울렁이는 속을 다스리며 애써 담담한 척 전화를 받았다.

“네, 김 실장님.”

-본부장님. 접니다.

몇 번이고 들은 호칭이었다. 이제 본부장 아니래도. 하지만 그 사실을 지적하기 전에, 김 실장의 딱딱한 목소리가 들렸다.

-조만간 본가에 들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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