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억의 끝에 (17)화 (17/131)

17화. Petit a Petit(7)

며칠간 나는 <향수의 기원>이라는 책을 읽느라 오전 시간을 보냈다. 그사이 이태성도 책 한 권을 다 읽었고,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땐 억울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요지는 왜 이런 슬픈 책을 추천했냐는 거였는데, 그래서 재미가 없었냐고 물으니 그건 또 아니란다.

그사이 한 가지 알게 된 게 있다면, 권이도가 서재에 있는 모든 책을 읽었다는 것이었다. 지나가듯 설마 다 읽은 거냐고 물었더니 ‘읽지 않은 책을 왜 꽂아 놓습니까?’라고 되묻는 바람에 알아차렸다. 괴물 같게도. 하루를 72시간으로 쓰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태성의 말에 따르면 권이도는 대체로 쉬는 날 없이 일을 나가는 모양이었다. 이태성이 팀장으로 있던 기간 동안 농땡이 피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나도 꽤 바쁘게 살았지만, 주말이 없다는 말에는 절로 경악하고 말았다.

물론 가장 당황스러웠던 건 ‘그럼 이태성 씨도 못 쉽니까?’라는 말에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은 순간이었지만.

“이제 자연스럽게 앉네요.”

오늘도 경호를 맡은 이태성은 내가 별말 하지 않았음에도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다. 그 행동에 스스로도 놀랐는지, 크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말이다. 나는 푸스스 웃음을 흘리며 그를 향해 대충 턱짓했다.

“농담이니까 편하게 있어요.”

오늘 고용인이 준비한 꽃차는 달짝지근한 향이 풍기는 매화꽃 차였다. 송이송이 말린 매화가 유리로 된 찻잔에 두둥실 떠다녔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맞은편에서 어색한 질문이 들려왔다.

“……꽃도 먹습니까?”

풉, 웃음이 튀어나왔다. 비웃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 말이 너무 조심스러웠던 탓이었다. 나는 입가를 가린 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꿀꺽 삼켜 냈다.

“아…… 미안합니다. 귀여워서.”

대번에 이태성이 표정을 굳혔다. 제법 험악한 포스였으나 내겐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다.

“먹어도 상관은 없는데, 맛있진 않을 테니까 웬만하면 먹지 마요. 사레들리지 말라고 띄워 주는 찻잎 같은 겁니다.”

하얀 꽃잎은 눈으로 보기에도 무척이나 예뻤다. 미관상 보기에도 좋으니 제 역할은 톡톡히 한 셈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먹어 버리기엔 좀 아깝지 않나 싶다.

이태성은 내 말대로 조심조심 차를 마셨다. 여전히 입에 안 맞는단 표정이었으나, 며칠 마시다 보니 어느 정도 적응이 된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물을 제외한 무언가를 이유 없이 마신 적이 없다고 그랬었지.

“지난번에 읽었던 책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길래 같은 작가 걸로 가져왔어요.”

들고 온 책 중 하나를 건네주자, 그가 불신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이번에도 슬픈 거냐고, 마치 그렇게 묻는 듯했다. 나는 정답을 알려 주는 대신 그냥 의뭉스럽게 웃었다.

“내용을 알고 보면 재미없잖아요.”

“……그럼 이것만 알려 주십쇼. 주인공 죽습니까?”

“글쎄요, 기억이 안 나는데.”

아마 주인공은 죽지 않을 거다. 대신 그의 연인이 죽던가.

“일단 보시면 압니다.”

“…….”

새카만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궁금하긴 궁금한가 본데 차마 물어볼 자신은 없나 보다. 한 번 더 물어보면 알려 줄 생각이었지만, 그냥 입을 다무는 게 나을 듯했다.

나는 가져온 책을 펼쳐 목차를 차례대로 훑었다. 이번에 읽으려는 건 불어로 된 조그만 시집이었다. 척 보기에도 새것 같았는데, 첫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볼펜으로 적어 놓은 글자가 보였다.

「사랑하는 이에게」

별로 특별할 건 없었다. 가장 처음 쓰인 ‘Mon Cher Amour’를 한국말로 적어 놨을 뿐이니까. 단지, 모음이 기다란 필체가 어딘지 모르게 익숙해서 그랬지.

오래 고민하지 않아, 나는 이 글씨의 주인이 권이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냥 간단한 이유였는데, 약혼식 날 꽃다발과 함께 놓인 카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은방울꽃의 꽃말을 적어 놓았던 카드에도 이것과 같은 필체가 남아 있었다.

팔랑, 페이지를 한 장 더 넘겼다. 첫 번째 시엔 아무것도 없었고, 두 번째 시에만 부분부분 메모가 남아 있었다. 처음엔 발음을 표시했나 싶었더니, 그게 아니라 몇몇 단어에 해석을 달아 놓은 것이었다.

“…….”

두서없이 적힌 문구들은 맞는 해석도, 틀린 해석도 있었다. 의역해야 할 부분을 대책 없이 직역하기도 했고, 아마도 관용어인 표현을 사실적으로 적어 놓기도 했다.

그리고 다섯 번째 시에서, 나는 이런 문구를 발견했다.

「나는 달 속에 있었다.」

“…….”

사랑에 빠진 기분을 여러 방면으로 써놓은 시였다. 권이도가 해석한 부분은, 아마 그가 이해한 뜻은 아닐 거다.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라는, 그런 관용어와 비슷한 의미가 아닐까.

멍하니 손끝으로 권이도가 쓴 글씨를 덧그렸다. 종이가 닿는 감각이 이상하리만치 이질적이었다. 왜 이렇게 눈앞이 뿌옇지. 그런 생각으로 눈을 깜박이는 순간, 종이 위로 무언가 뚝 떨어졌다.

“어…….”

비가 오나.

“……본부장님?”

먹먹한 귓가에 이태성이 화들짝 놀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걸로 모자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까지. 하릴없이 넘어진 의자가 우당탕 정신없이 뒹굴었다.

“왜, 왜 그러시는…….”

딱 한 방울 떨어졌던 빗방울은 뚝, 뚝, 종이에 짙은 흔적을 남기며 번져 나갔다. 조금 더디게 고개를 들자, 비인 줄 알았던 무언가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제야, 나는 이게 비가 아니라 내 눈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어디 아프십니까?”

“아…….”

한 손을 들어 무성의하게 눈가를 문질렀다. 눈에 뭐가 들어간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울컥 울음이 치솟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할 수 있는 건, 손바닥으로 눈을 가린 채 고개를 푹 숙여 버리는 것밖에 없었다.

“별거 아닙니다. 눈에 뭐가 들어가서…….”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냥 시집을 읽었을 뿐이고, 거기서 권이도가 써놓은 글씨를 발견했을 뿐이다. 눈물이 날 만큼 감동적인 구절도 없었으며,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쉬이 울어 버릴 만큼 감성적인 성격도 아니었다.

“눈에 뭐가 들어갔다고요?”

“……괜찮으니까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신경을 어떻게…….”

이태성은 크게 당황하며 테이블을 돌아 내 쪽으로 다가왔다. 휴지가 있나 찾는 듯했지만, 온실에 그런 게 있을 리가 만무했다. 괜찮다고, 그냥 책이나 마저 보라고 말할 생각이었는데 그가 먼저 불쑥 이야기했다.

“휴지 가져오겠습니다.”

“아뇨, 정말…….”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려던 때였다.

“정세진.”

익숙한 음성이 먹먹한 귓가를 파고들었다. 나직이 감겨드는 음성은 내가 아는 한 딱 한 사람밖에 없었다. 꽃향기로 가득한 주변에 나무 냄새가 섞이고, 언제부터였는지 모를 인기척이 성큼 가까워졌다.

“……전무님?”

“세진아.”

잔잔히 퍼지던 페로몬은 어느새 한 품에 안을 만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서늘한 체온이 내 손목을 감싸고, 그보다 억세게 얼굴을 가린 손을 떼어 냈다. 느릿느릿 눈을 깜박였을 때 보인 건, 권이도 특유의 짙은 눈동자였다.

“너 왜 울어.”

“…….”

우습게도, 그 말을 듣는 순간 다 멈췄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설움이 터진 것도 아닌데, 눈물샘이 고장 난 것처럼 조절이 되질 않았다. 주룩주룩 눈물만 흘리는 나를 보며 권이도가 큼직한 손으로 내 양 뺨을 감싸 쥐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온실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대로 자세를 낮추고 내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기도 했다. 옆에 서 있던 이태성이 입을 떡 벌렸지만, 그런 걸 신경 쓰는 기색조차 없었다.

“정세진 씨, 나 봐봐요.”

안타깝게도, 그의 얼굴을 보는 건 눈물을 멈추는 데 도움이 되진 않았다. 오히려 알 수 없는 기분에 목소리까지 막혀 버렸다면 모를까. 울음을 참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그가 내 뒤통수를 감싸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

토닥토닥, 어색한 손길이 등허리를 부드럽게 다독였다. 단 한 번도 타인을 달래 준 적 없는 사람처럼, 어설프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우스운 건 그런 손짓에도 정말로 설움이 가라앉았다는 사실이지만.

“저 전무님, 여긴 어떻게…….”

“그만 들어가 봐요.”

“……예?”

“퇴근하라는 말입니다.”

이태성은 한 박자 늦게 빠릿빠릿한 목소리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권이도의 품에 갇혀 보이진 않았지만, 아마 허리까지 깊게 숙여 인사했을 거다. 묵직한 발걸음이 성큼성큼 멀어지고, 나는 그의 옷깃을 그러쥔 채 이야기했다.

“……저 괜찮습니다.”

갈라진 목소리였지만, 확실히 울음기는 잦아들었다. 그제야 권이도의 페로몬도 차츰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내 등을 쓸어내렸다.

“아픈 건 아니죠.”

다정한 음성이 머리맡을 빙빙 도는 듯했다. 그의 손은 물론, 페로몬과 목소리까지. 온통 나를 위로하기 위해 주변을 맴돌았다.

“……네, 안 아픕니다.”

“무슨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럼 왜 울었을까…….”

“…….”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원래도 내게는 다정했던 사람이, 지금만큼은 정말 어린 아이를 대하듯 상냥하다. 이러니까, 자꾸만 내가 다리를 뻗는대도.

“……저 정말 괜찮습니다.”

그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살짝 고개를 들었다. 자세도 신경 쓰였고, 뒤늦게 부끄러움도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이도는 나를 놓아주는 대신 조금 더 강하게 제 품에 뒤통수를 고정했다.

“잠깐 이러고 있죠.”

“…….”

“울음 그친 거 아는데…… 그냥, 잠깐만.”

기다란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고 들어왔다. 사르륵 쓰다듬는 손길은 어깨가 움츠러들 만큼 야릇한 느낌이 있었다. 그는 양팔로 나를 꼭 끌어안은 채 가만히 내 머리칼에 뺨을 문질렀다.

권이도가 나를 놓아준 건,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내가 울음을 멈추고도 남은 설움을 모두 해소할 만큼 여유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는 몇 번이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고, 종국엔 귓가가 빨갛게 달아오르는 기분을 느끼며 눈을 꾹 감았다가 떠야 했다.

“정말 왜 울었는지 말 안 해줄 겁니까?”

그는 조금 전까지 이태성이 앉았던 의자에 앉아 차분히 나를 심문했다. 그래서 왜 울었냐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나 또한 이유를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냥 책을 보다가…….”

“주인공 연인이 죽은 게 슬퍼서?”

그의 시선이 내가 이태성에게 가져다준 책을 향했다. 정말 내용을 알고 있단 사실도 놀라웠지만, 나는 저 책 때문에 울고 있던 게 아니었다.

“아뇨, 제가 읽은 건 이겁니다.”

나는 손바닥만 한 시집을 가지런히 권이도에게 내밀었다. 잘 들고 있다 놓치는 바람에 구깃구깃 엉망이 된 책이었다. 아마 안쪽을 보면 눈물 때문에 글자도 조금 번졌을 거다.

“아끼시는 책인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

민망한 기분에 사과를 건넸는데, 권이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사과하지 말라는 등의 반응조차 없었다. 그저 무언가 놀란 눈으로 멍하니 시집을 바라봤을 뿐.

한참이 지난 뒤에야,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걸 읽었다고요?”

마치 일기장을 들킨 사람 같았다. 뭐, 엄밀히 따지면 굳이 다르진 않으려나. 이번엔 화를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의 준비를 하는데, 권이도는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정세진 씨, 혹시…….”

혹시?

“……아뇨, 아닙니다.”

“…….”

말을 하다 마는 게 사람을 미치게 하는 방법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마저 얘기해 달라고 따지고 싶은 기분이 드는 걸 보면.

내가 멀뚱히 그를 바라보자, 그가 미안한 얼굴로 눈가를 찌푸렸다.

“별거 아닙니다. 그냥 잠깐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어서.”

후, 한숨을 토해 내는 모습을 보니 무어라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전부터 느꼈는데, 저렇게 처연한 얼굴을 하면 웃을 때보다 더 거부하기 어려웠다.

“근데 정세진 씨.”

권이도는 이태성이 읽던 책을 들어 휘리릭 책장을 넘겨 봤다. 마지막까지 쭉 훑어본 그가 책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나를 마주 본다. 부드럽게 말려 올라간 입매가 왠지 모르게 음산해 보였다.

“찻잔이 왜 두 개입니까?”

“…….”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는 법 없이 정확하다. 대체로 안 좋은 기운을 감지하는 건 다른 무엇보다 본능이 빠른 법이었다.

“책은…… 그래, 정세진 씨가 두 권을 읽었다고 치고.”

그의 시선이 소설책과 시집을 번갈아 응시했다. 손끝으로 유리로 된 찻잔을 톡톡 건드렸다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다. 이내, 가볍게 코웃음 친 그가 마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잔심부름에 말동무가 포함된단 말은 안 했는데.”

“……그.”

툭, 말을 내뱉고도 마땅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당황하면 더 이상하니, 어떻게든 머리를 굴릴 수밖에. 결국, 그냥 생각한 그대로 입 밖에 꺼내기로 했다.

“이태성 씨를 몇 시간씩 세워 놓는 게 부담스러워서요.”

시원스럽게 트인 눈매가 가늘게 길어졌다. 속내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그러나 뒤이어 흘러나온 말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랐다.

“이름이 이태성입니까?”

“…….”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권이도 씨가 붙여 주셨잖습니까.’ 그렇게 이야기하자,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꾸했다.

“아, 이름까지는 관심이 없어서.”

참으로 권이도다운 이유였다. 내가 황당해하는 걸 눈치챘는지, 그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농담이고, 알고 있었습니다. 정세진 씨가 경호원이랑 같이 차 마시는 거.”

“……이름을 몰랐던 건 농담이 아니란 말씀이군요.”

“알아야 하나요?”

그걸 말이라고……. 아니지, 그러고 보니 민재도 경호원 이름을 다 못 외웠던가.

“미리 말 못 드려서 죄…….”

나는 사과를 하려다 말고 반사적으로 권이도의 눈치를 살폈다. 말을 멈춘 걸 칭찬하듯 그가 고개를 까딱였다. 마저 말해 보라는 의미 같았다.

“……근무 태만 같은 건 아니고, 제가 앉아서 책 보라고 했습니다. 아까 말한 것처럼 세워 놓고 있는 게 너무 부담스럽길래.”

같이 차를 마신다는 사실은 권이도가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내게 꽃차를 준비해 주는 사람은 권이도의 고용인이었으니까. 매일 두 잔씩 준비해야 하는데, 보고가 올라가고도 남았겠지.

“책은…… 마음대로 빌려줘서 죄송합니다. 멀뚱히 앉혀 놓으니까 그건 또 그거대로 불편하더군요.”

그러니까 이태성에게 잘못을 묻지 말아 달라는 얘기였다. 그가 소위 말하는 ‘갑질’을 할 것 같진 않지만, 사람 일이라는 건 만약에 경우를 대비해야 하는 거니까. 나 때문에 상황이 곤란해지면 꿈자리가 영 좋지 못했다.

“뭐, 사실…….”

권이도는 여유롭게 다리를 꼬며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기다란 검지가 움직이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다.

“경호원을 어디에 앉히건 그런 건 별로 상관없습니다. 애초에 정세진 씨한테 붙여 준 순간부터 내 사람은 아닌 거예요. 처음부터 불편하다고 얘기했으니 가능한 편한 길을 찾을 거라고도 생각했고.”

거기까지 말한 권이도가 눈을 들어 나를 바라봤다. 천천히 깜박이는 두 눈이 현실감 없이 아름다웠다. 기분 탓인가. 다시금 눈물이 나올 것 같다.

“게다가, 정세진 씨한테도 낮에 대화할 상대는 필요했겠죠.”

그는 너그러운 말투로 내 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얘기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두 배쯤 온화했고, 전혀 화나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뒤이은 말만큼은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거슬리는 건, 나와도 공유한 적 없는 장소를 다른 사람이랑 공유했다는 것 정도.”

“…….”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권이도는 이태성이 마셨던 잔을 들어 성의 없이 바닥에 부어 버렸다. 돌로 된 바닥에 찻물과 꽃잎이 엉망으로 흩어졌다.

“이건 생각보다 기분이 나쁘군요.”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