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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억의 끝에 (16)화 (16/131)

16화. Petit a Petit(6)

얼핏 좋은 조건 같았으나, 그 말을 하는 표정이 그렇지 못했다. 마음에 드니까 다시 승진시키라고, 그리 말하지 못한 이유도 그래서였다. 나는 확답을 주는 대신 은근슬쩍 주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그러고 보니……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부탁?”

부탁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권이도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가지런한 눈썹이 삐쭉 올라갔다.

“경호를 없애는 건…….”

“아뇨, 그게 아니고.”

의도치 않게 말을 끊었는데, 다행히 그는 불쾌해 보이지 않았다. 불쑥 말을 꺼낸 나만이 내심 놀라 입을 다물었을 뿐이다. 자꾸 이 사람이 편해지면 곤란한데, 자리를 내어 주니 자꾸만 다리를 뻗게 된다.

“서재를 좀 써도 될까 해서요.”

“……서재를요?”

“예, 제 방에 있는 책을 다 읽어서 더 이상 읽을 게 없거든요.”

오늘도 권이도가 출근하면 어김없이 이태성이 찾아올 터였다.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잔뜩 불편한 얼굴로 온실에 함께 가겠지. 그럴 거면 책을 두 권 챙겨 가는 편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서재…….”

금방 알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권이도는 곧장 대답하지 않고 망설였다. 나를 바라봤다가 고개를 돌린 채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내, 짧게 혀를 찬 그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요, 편한 대로 해도 됩니다. 1층에 있는 서재를 쓰면 되겠군요.”

1층이라. 내가 본 서재는 2층이었는데.

“책장이 높을 텐데 위쪽에 있는 건 직접 꺼내지 말고 고용인을 시키도록 해요. 사다리 위험하니까.”

“……네, 감사합니다.”

이 넓은 집에 서재가 하나만 있을 리는 없지만, 굳이 1층을 콕 집어서 이야기한 건 이상했다. 말은 ‘1층 서재를 써라.’지만 사실상 ‘그 외의 곳은 쓰지 마라.’라는 뉘앙스가 아닌가.

그런 의아함을 느끼기도 잠시, 때마침 권이도가 입을 열었다.

“지난번의 거긴 내가 일을 하는 곳이라.”

“아.”

어쩐지 책상에 사용감이 있더라니. 서재 겸 집무실이었던 모양이다. 그런 거라면 2층이 아닌 1층을 콕 집어 이야기한 것도 이해는 갔다.

“…….”

그런데 왜,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들지.

“슬슬 일어나죠.”

그는 식사를 마무리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지런히 놓아둔 식기가 그의 성격을 보여 주는 듯했다. 권이도를 따라 주방을 나서려는 순간, 그가 별안간 휙 뒤를 돌아 나를 바라봤다.

“정세진 씨.”

간혹, 미미한 기시감이 드는 순간이 있다. 예를 들어, 바로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그를 올려다보는 때라든가.

“혹시 몰라서 확실히 말해 두는데, 2층 서재는 들어가지 말아요.”

“……네?”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부분을 설마 권이도가 제 입으로 말할 줄은 몰랐기에. 그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무척이나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정세진 씨한테 위험한 물건이 많습니다.”

위험한 물건이라는 말에 곧장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 있는 무언가는, 다시금 권이도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이를테면, 총 같은 거.”

오싹, 소름이 끼쳤다. 정체 모를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기어 올라왔다. 스멀스멀 끼쳐 온 두려움은 가슴 한구석에 짙게 남아 둔탁한 통증을 안겨 줬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이상한 기분이었다. 단순히 말 한마디 들었을 뿐인데 총의 생김새가 또렷이 떠올랐다. 새카맣고 날카로운 손잡이와 잠금장치가 걸려 있는 방아쇠까지.

‘총은 진짜가 맞습니다.’

‘총알은 다 버렸지만.’

권이도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서랍에 총을 넣고 잠그던 일련의 과정이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어차피 들어갈 일도 없습니다.”

느리게 흘러나온 대답에 권이도의 눈매가 부드러워졌다. 그는 조금 안도한 얼굴로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더할 나위 없이 안온한 표정이었으나, 그 내면엔 약간의 불안감이 엿보였다.

“다행이군요.”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방을 나섰다. 가슴 한편에 남은 묵직함이 그의 뒷모습을 선명히 담아 두는 듯했다.

* * *

1층 서재는 2층에 있는 것보다 훨씬 커다랬다. 벽면이 모두 책으로 가득했고, 높은 곳에 있는 책을 꺼내기 위한 사다리까지 준비돼 있었다. 나를 서재로 안내해 준 고용인은 사다리를 쓰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곤 공손히 서재를 빠져나갔다.

나는 그곳에서 제목이 마음에 드는 책 두 개를 꺼내 온실로 향했다. 역시나 이태성이 따라붙었고, 그는 어제와 달리 군말 없이 맞은편에 앉았다. 비록 내가 책을 내밀었을 땐 벌레 씹은 얼굴로 표정을 굳혔지만 말이다.

“……이게 뭡니까?”

“책이죠.”

이걸 물은 게 아니겠지만, 그냥 그렇게 대답했다. 역시나 이태성의 눈에 불퉁한 기색이 스쳤다. 이런 말은 좀 미안한데,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는 모습이 어떤 의미에선 민재 같았다.

“심심하실까 봐 가져온 겁니다. 꼭 읽을 필요는 없으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그에게 한글로 된 책을 내밀고 다른 하나는 내 앞에 펼쳐 두었다. 흘긋 내 쪽을 살폈던 이태성이 멍하니 눈을 끔벅거렸다. 그 시선이 뭘 뜻하는지 알 법해서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이야기했다.

“프랑스어예요.”

“……아아.”

대학에 다닐 때 취미로 불어 교양을 들은 적이 있다. 기본적인 회화만 배웠지만, 꽤 흥미로웠던 터라 개인적으로 추가적인 공부를 했었다. 마침 권이도의 서재에 익숙한 언어가 있기에 반가운 기분으로 들고 온 참이었다.

한 가지 간과한 건, 언어는 사용하지 않으면 잊어버린다는 점일까.

예전엔 별 무리 없이 읽었을 내용일 텐데, 지금은 한 문장을 읽는 것도 시간이 걸렸다. 서술 구조가 헷갈려 다시 읽기도 하고, 모르는 단어가 나와 잠깐 브레이크가 걸리는 일도 빈번했다. 다행히 크게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기에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이었다.

“프랑스어도 하십니까?”

그게 그렇게 궁금했던지, 이태성이 눈까지 반짝이며 물었다. 불편한 티를 팍팍 내면서도 호기심은 참지 못했나 보다. 아마 외국어를 하는 사람에게 엄청난 동경을 품고 있는 건 아닐까.

“아뇨, 그냥 그림책 보듯 보는 겁니다.”

새로운 대화 주제가 생겼지만, 나는 모르는 척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는 잘하지도 못하는데 굳이 자랑할 필요는 없으니까.

“아니, 그게 무슨……. 차라리 그거 말고 이걸 읽으시죠.”

그는 황당한 얼굴로 아직 표지조차 넘기지 않은 책을 가리켰다. 적어도 읽는 시늉이라도 할 줄 알았더니, 내가 내려놓은 모양 그대로였다. 그 사실이 조금 우스워서 푸스스 웃음이 흘러나왔다.

“미안하지만, 그건 다 읽었습니다.”

“그럼 왜 가져오신 겁니까?”

“말하지 않았던가요? 이태성 씨 심심할까 봐 가져왔다고.”

“……전 심심하지 않습니다.”

“압니다.”

“그럼 왜…….”

아무래도 대화까지 나누면서 외국어로 된 책을 읽는 건 무리였다. 나는 방금 읽은 문장을 눈으로 훑으며 무미건조하게 운을 뗐다.

“그 책, 재밌는 편인데.”

“…….”

“웬만하면 첫 페이지라도 보지 그래요.”

이번에야말로 이태성은 입을 꾹 다문 채 책을 가져갔다. 팔랑, 첫 페이지를 넘기는 손길이 둔탁하기 그지없었다. 이제야 완전히 제대로 된 독서의 환경이 갖춰진 것이다.

코끝엔 유채꽃 향기가 감돌았고, 햇살은 더할 나위 없이 따뜻했다. 처음엔 버벅거리기 바빴던 문장 해석도 나중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비록 속도는 여전히 느렸지만, 내용이 재미있으니 괜찮았다.

첫 챕터를 읽으며 한 시간. 그리고 읽었던 내용을 다시 살펴보며 두 시간. 마침내 점심시간이 되어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눈이 빠져라 책을 읽고 있는 이태성을 발견했다.

왜, 그런 기분 있지 않은가.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다른 사람도 함께 좋아할 때 느끼는 뿌듯함.

“볼 만하죠?”

넌지시 질문하자, 이태성이 퍼뜩 어깨를 들썩였다. 그는 반쯤 읽은 책을 내려놓으며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뒤이어 들려온 대답은 민망한 기색을 한가득 담고 있었다.

“……네, 엄청.”

* * *

이태성에게 책을 빌려주고 싶었지만, 내 것이 아니라 그러지 못했다. 내일 마저 읽으라고 이야기하자, 그는 아쉬운 표정을 숨긴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산책을 마친 강아지 같아서,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꾹꾹 참아야 했다.

점심 메뉴는 아침과 비슷한 한식이었다. 곱게 간 흑임자죽으로 입맛을 돋우고 명태 무침과 탕평채, 잘 구운 채끝살 따위가 차려졌다. 후식으로는 수정과가 나왔는데, 적당히 달큼한 것이 마무리로 딱 제격이었다.

이태성은 고용인들과 점심을 먹고 돌아와 멀찍이 떨어져 산책하는 나를 따라다녔다. 명목은 분명 경호인데, 아무래도 감시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가 정말 인기척 없이 쫓아다녔다는 점일까.

권이도가 퇴근한 건,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간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식사 시간에 맞춘 그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며 샤워를 마치고 저녁을 함께했다. 분명 무리하지 말라고 말해 두었는데도, 어떻게든 일찍 퇴근한 느낌이었다.

“오늘은 뭘 했습니까?”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여느 때처럼 권이도의 방으로 향했다. 방 안 가득 차 있는 페로몬은 다행히 어제처럼 민감하게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오히려 안정감이 느껴지는 듯해서, 걱정을 한시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냥 늘 비슷해요. 오전엔 온실에서 책 보고, 오후에는 정원을 좀 걸어 다니고…….”

“서재는 봤고?”

“네, 고용인분이 사다리 쓰지 말라고 강조하시길래 손 닿는 데서 적당히 골라 읽었습니다.”

대화는 아침에도 나누는데, 이상하게 저녁엔 항상 느낌이 색달랐다. 권이도가 정장을 입고 있지 않아서 그런가, 조금 더 거리감이 좁혀지는 것이다. 그가 편안한 표정으로 내 얘기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경호원은 여전히 불편합니까?”

“뭐, 오늘은 그다지…….”

불편한 쪽은 내가 아니라 이태성일 텐데.

나란히 앉아 책을 읽었다는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혹시라도 고용주인 권이도가 그러한 행동을 못마땅하게 볼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나 편해지자고 억지를 부렸으니, 불똥이 튀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오늘은 무슨 책을 읽었어요?”

권이도는 대각선으로 몸을 돌린 채 기분 좋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평소엔 눈썹 앞머리에 힘이 들어간다면, 저녁엔 전체적으로 유순한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완벽한 외모라는 사실은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향수의 기원이라고…… 불어로 된 책인데, 혹시 아세요?”

그냥 가볍게 물은 것이었다. 서재가 얼마나 넓은데, 설마 그곳에 있는 책을 다 읽었으리라고. 제목이라도 알면 신기한 일이지.

그런데 권이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나긋나긋 이야기했다.

“?”

“…….”

우아한 불어가 귓가에 부드럽게 감겼다. 몇 개 안 되는 단어긴 해도, 발음은 물론 악센트까지 완벽했다. 놀란 내가 눈을 커다랗게 뜨자, 권이도가 사르르 눈을 접어 웃었다.

“알아요. 샤를이 쓴 거.”

“……불어 할 줄 아십니까?”

“대충?”

그는 가볍게 대꾸하고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가지런히 드리운 속눈썹이 길게 그림자를 만들었다.

“잠깐 배울 기회가 있었거든요.”

고작 시선 하나 내렸을 뿐인데,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 말을 내뱉는 얼굴이 너무도 애달파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발음이 정확한데…… 잘 가르쳤나 보네요.”

“워낙 똑똑한 사람한테 배워서.”

어깨를 으쓱한 권이도가 다시 엷게 미소 지었다. 좀 전까지 보였던 그늘은 어느새 깨끗이 지워진 상태였다. 이거 봐, 이 사람이 김 실장보다 잘 웃는다니까.

“향수를 좋아해요?”

권이도가 웃는 얼굴은 화사한 꽃이 만개하는 모습과도 같았다. 가만히 있으면 냉랭해 보이는 얼굴이, 웃는 순간 분위기가 바뀌는 것이다.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시간이 흐르는 걸 느끼지 못할 만큼.

“향수라기보단, 향 같은 거에 관심이 많습니다. 어릴 땐 조향사가 되고 싶어서…….”

나는 무심코 말을 하다가 퍼뜩 놀라 입을 다물었다. 남에게 말해도 좋을 꿈이 아닌데, 별생각 없이 이야기가 흘렀다. 조향사가 되고 싶다니. 말했다간 비웃음만 살 이야기를.

“잘 어울리는군요.”

“…….”

순간, 두 귀를 의심했다. 잘 어울린다니, 내가?

“정세진 씨한테 잘 어울리는 직업이에요. 금융 그룹 본부장보다 훨씬.”

깊이 고민해 봐야 했다. 저 말이 너에겐 본부장이 과분하단 말인지, 아니면 정말로 조향사가 잘 어울린다는 말인지.

“그러고 보니 G사에 매년 론칭하는 향수가 있던데, 관심 있으면 얘기해요. 나한테는 너무 꽃향기라 좀 그랬지만 정세진 씨는 잘 어울릴 테니까.”

하지만 아무리 들어 봐도 권이도의 말에 비꼬는 뉘앙스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거나, 네 페로몬 냄새나 제대로 맡으라거나 하는 얘기도 아니었다. 허황된 꿈을 꾸지 말라며 현실을 자각시켜 주는 말도 아니었고.

“이상하지 않습니까? 페로몬 향도 없는 사람이 향을 만든다는 게…….”

“페로몬 향?”

갑작스러운 질문에 권이도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소파 팔걸이에 팔을 괸 채 느긋하게 입을 열기도 했다.

“전에 말하지 않았나요. 정세진 씨 페로몬이 꽃향기랑 비슷하다고.”

약혼식 날, 그가 그의 누나에게 했던 말이었다. 꿈을 꾸는 것처럼 달큼한 말씨로, 사근사근 내뱉었던 한마디.

‘정세진 씨 페로몬이 꽃향기랑 비슷하거든.’

“애초에 페로몬은 향으로 취급될 게 아니지만…… 후각을 잃은 게 아니라면 향수와 상관인지 잘 모르겠군요.”

“…….”

나도 모르게 대답할 뻔했다. ‘그러게요. 그게 정말 무슨 상관일까요?’ 하고.

‘페로몬 냄새도 없는 게…….’

누군가 사과는 빨가니까 먹지 말라고 하면 처음엔 그게 왜 먹으면 안 되는 이유냐고 물어볼 거다. 그러다 그 말을 세 번쯤 들으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테고. 그런데 만약, 왜 안 되냐고 이유조차 묻지 못할 상황이라면.

‘터무니없는 소리 하지 말고 공부나 해.’

“……조향사라고 향수만 만드는 게 아닙니다. 식품에 향료를 첨가하는 직업군도 있어요.”

허벅지 위에 놓인 손을 꼭 쥐었다가 폈다. 약지에 낀 반지가 살갗에 살짝 자국을 남겼다. 권이도는 그건 몰랐다며, 가볍게 질문했다.

“정세진 씨가 하고 싶던 건 어느 쪽입니까?”

“저는…….”

아, 왜 이렇게 목이 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향 자체를 만들고 싶었던 거라.”

온 방 안에 퍼진 페로몬이 숨을 쉴 때마다 가슴께를 울렸다. 호흡으로, 피부로 느껴지는 권이도가 벅차오를 만큼 생생했다.

아마 어린 시절의 나는, 이러한 것들을 직접 향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찰나의 감각을 놓치기 싫어서 가능한 한 오래 보존하고 싶다고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풀이나 꽃 같은 게, 냄새가 좋잖아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흔적을 남긴다는 부분이 신기하기도 하고.”

나는 천천히, 내가 늘 느끼던 것들을 이야기했다. 비가 오는 날엔 냄새가 어떻게 바뀌고, 계절이 달라지면 공기에 무슨 냄새가 섞이는지. 그래서 꽃을 좋아하고, 고용인이 만들어 준 꽃차가 늘 향긋하고 기분 좋단 말까지.

권이도는 내 말을 끊지 않았고, 모두 들은 뒤에 이렇게 이야기했다.

“굳이 조향사가 되지 않아도, 향을 만드는 건 시간을 내서 해보면 재밌겠군요.”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내가 지금껏 들은 어떤 말보다 상냥했다. 그는 평소처럼 말했지만, 받아들이는 내 기분만큼은 평소와 달랐다. 찰방이며 차오른 감정은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위로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미처 물어보지 못했다. 히트 사이클도 오지 않았던 날, 우리가 처음 만난 약혼식 날. 당신은 내 페로몬을 어떻게 알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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