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Petit a Petit(5)
권이도는 아무 말 않고 있는데, 단순히 눈빛만으로 그런 생각이 든다. 이대로 긴장을 늦추면 그가 내게 무슨 짓이건 할 것처럼. 강렬한 예감이 구석구석 퍼져 나가는 듯했다.
“네, 지금 막…… 다 씻었습니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권이도는 그 조그만 움직임마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게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얇게 쌍꺼풀진 눈매가 가늘게 길어졌다.
“그래요, 그래 보이는군요.”
눈에서 코로, 코에서 입으로, 그리고 입에서 턱으로. 차근차근 내려간 시선은 마침내 목덜미 아래까지 내려갔다. 가운을 잘 여몄음에도 불구하고 벌거벗은 것처럼 수치심이 일었다.
“왜 그러고 열었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나직한 질문은 가만히 있던 나조차도 흠칫 놀랄 만큼 페로몬투성이였다. 어느 틈엔가 스며 나온 존재감이 온몸에 살금살금 들러붙었다. 조금 전까지 입욕제 향기로 정신이 없었는데. 이제는 권이도의 향으로 정신이 없다.
“왜 그러고 열었냐니…….”
다시금 되물으려던 나는 금세 권이도가 무얼 물어보는지 알 수 있었다. 막 샤워하고 나온 차림새로, 누군가 보면 자칫 유혹이라고 보일 정도의 가운 차림으로, ‘그러고’ 문을 연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 것이다.
“그냥…… 바로 연 것뿐입니다. 별다른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꾸만 목구멍이 말랐다. 할 수만 있다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들이켤 수 있는 건 페로몬뿐이었기에, 나는 얕은 숨을 내뱉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오해하면 어쩌지?
비록 억울한 상황이었지만, 그가 착각할 만한 상황이기도 했다. 하필 어제는 히트 사이클까지 겪었으니 몸이 달아 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뭘 기대했는진 모르겠지만…… 원하는 대로 해줄 생각 없으니까 알아서 처신해.’
순간, 꿈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머릿속을 웅웅거리며 울렸다. 냉정하게 뒤를 돌아 나가던 뒷모습 역시 바로 어제 일처럼 뚜렷하게 기억났다. 나는 다시금 목울대를 움직이고, 최대한 담담한 어투로 이야기했다.
“갈아입고 나오겠습니다.”
“…….”
“잠시만 기다리시면…….”
“아뇨, 그럴 필요 없습니다.”
권이도는 단호한 어투로 내 뒷말을 잘라 버렸다. 문을 닫기 위해 잡았던 문고리조차 그가 한 걸음 다가오는 바람에 놓치고 말았다. 그는 나 대신 문고리를 잡고 한결 누그러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장난이 과했군요. 별다른 의도가 없었다는 거 알아요.”
여전히 긴장감이 들었다. 주변을 맴도는 페로몬이 팽팽하게 당겨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권이도는 내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지만, 온몸이 그와 맞닿아 있는 것만 같았다.
“벌써 자나 싶어서 잠깐 왔던 겁니다. 얼굴 봤으니까 쉬어요. 늦었으니 이만 가보도록 하죠.”
그 말을 하고, 권이도는 망설임 없이 방문을 닫았다. 스르륵, 닫히는 문틈으로 그가 한숨을 토해 내는 모습이 보였다. 문이 닫히는 그 순간까지, 나는 숨조차 쉬지 못한 채 굳은 듯 그 자리 그대로에 서 있었다.
달칵, 방문이 완전히 닫혔다. 소용돌이치던 페로몬도 일순간에 뚝 끊겨 버렸다. 바짝 긴장했던 어깨가 느슨하게 풀어지고, 막혔던 숨이 한순간에 탁 튀어나왔다.
“하.”
나는 무너지듯 제자리에 쭈그려 무릎에 이마를 묻었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바람에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조차 없었다. 무릎 아래까지 길게 내려오는 가운이 애매한 부위를 절묘하게 덮고 있었다.
“……미치겠네.”
욕지거리가 턱 끝까지 차올랐다. 허벅지를 바짝 오므렸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배출되지 못한 페로몬이 온몸을 마구 들끓게 하고 있었다.
섰다. 사춘기 고등학생도 아니고, 무언가 야한 장면을 본 것도 아닌데, 권이도의 시선과 페로몬에 욕정하고 말았다.
아랫배가 뻐근하게 당기는 감각은 히트 사이클이 끝난 내가 느낄 만한 욕구가 아니었다. 어제 몇 번이나 사정해 놓고 발기할 일도 아니었고, 평소엔 아무렇지 않던 알파 페로몬에 반응할 일도 아니란 말이다.
“아…….”
무언가에 홀린 듯, 나는 손을 내려 가운을 헤집었다. 허리끈이 느슨해진 덕분에 앞섶을 벌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성기를 쥐자 달뜬 신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읏…….”
이 나이에, 자위를 할 줄이야. 그것도 만난 지 며칠 안 된 그런 알파를 반찬 삼아.
몸을 웅크리고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기다란 기둥을 쓸어내릴 때마다 등허리가 움찔움찔 떨렸다. 공기 중에 남은 알파 페로몬이 예민한 성감을 더욱더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하아…….”
어느새 나는 바닥에 엎드려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허리끈은 다 풀린 상태였고, 이마에 닿는 바닥은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손을 움직일 때마다 미끄덩거리는 프리컴이 질척이며 야한 소리를 냈다.
“흐…….”
조금만 더 하면 사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제는 히트 사이클 때문에 쉬웠던 걸까. 손을 움직이고 있는데도 모자란 기분이 들었다. 감질나게 스미는 권이도의 페로몬은 가장 중요한 순간에 결정적인 매개체가 되어 주지는 않았다.
“……아…….”
이제는 앞뿐만 아니라 뒤까지 젖어 가는 게 느껴졌다. 줄줄 새어 나온 애액이 허벅지를 타고 길게 흘러내렸다. 허벅지를 바짝 붙인 채 손을 빨리했지만, 여전히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세진아.’
“……흡.”
그러나 우습게도, 나는 권이도의 목소리를 떠올리기 무섭게 사정감을 느꼈다. 귓가에 입을 맞추고, 상냥하게 속삭이는 음성이 마치 실재처럼 나를 절정으로 내몰았다.
‘가도 돼.’
“흣…….”
정체 모를 목소리가 속삭이는 순간, 묽은 액체가 터져 나왔다. 어제 몇 번이나 사정한 탓에 투명하고 양까지 적은 정액이었다.
나는 몸을 옆으로 뉘여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잔잔히 퍼지는 쾌감의 여운은 허리가 잘게 떨릴 만큼 자극적이었다. 빠르게 뛰는 심장이 쿵, 쿵, 거센 소리를 냈다.
그러나 쏟아지던 충동이 가시자마자, 물밀듯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하아.”
이래서야, 권이도의 얼굴을 어떻게 본단 말인가. 앞으로 매일 밤, 페로몬으로 가득한 방은 또 어떻게 들어가고. 당장 마주 앉아 아침을 먹어야 하는 사이에, 이게 무슨 되바라진 짓인지.
“…….”
바닥에 흩뿌린 정액이 오줌을 싼 것처럼 부끄러웠다. 한차례 욕구는 해소했지만, 이제는 또 다른 문제와 직면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여전히 가라앉지 않은 아랫도리와, 권이도를 향한 죄책감 따위의 것을.
* * *
여러 우려와 다르게 나는 평소처럼 깊은 단잠을 자고 일어났다. 악몽을 꾸지도 않았고 중간에 깨어나는 일도 없었다. 역시 수면제보단 권이도 페로몬이 낫구나. 새삼 자각한 안정감은 이미 돌이키기엔 너무 늦어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는 권이도는 여느 때와 같이 완벽한 차림으로 아침 식사를 했다.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일을 나가는 모양이었다. 혹시 쉬는 날이 없냐고 물으려다가 매일 쉬기만 한단 사실이 민망해서 관두기로 했다.
아침 메뉴는 부드러운 소고기가 들어간 미역국이었다. 적당히 간이 된 국물은 고슬고슬한 쌀밥과도 무척 잘 어울렸다. 어제와 달리 꿋꿋하게 밥을 먹는 내게 그가 여상한 어투로 얘기했다.
“역시 한식이 낫군요.”
권이도의 시선은 내가 아니라 반쯤 비운 밥공기를 향하고 있었다. 왠지 잘 먹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듯해서, 괜스레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밥이 제일 낫긴 하죠.”
눈가를 찡긋하며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건 자신 있으니, 평소처럼 권이도를 대할 생각이었다. 내가 입만 다물면, 이 사람은 어차피 아무것도 모를 테니까.
“그래서, 경호원은 불편하던가요?”
다행히 권이도는 내게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 듯했다. 곧장 눈을 돌리고 다른 주제로 넘어간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문제는 그러한 주제 역시 그리 달갑지 않다는 거였지만.
“불편하진 않은데…… 아무래도 혼자 있는 것만 못합니다.”
“적응되면 괜찮을 겁니다. 가능하면 눈에 띄지 말라고 일러두죠.”
“……그러진 마세요.”
이 사람은 경호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눈에 띄지 않는다고 없는 게 되는 건 아닌데, 그게 정말 편하다고 느끼나. 왠지 물어보면 ‘그렇다.’라고 답할 것 같아서 굳이 확인하진 않기로 했다.
“만약 별로면 얘기해요.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그것도 괜찮습니다. 마음에 들어요.”
“…….”
순간, 권이도가 표정을 확 굳혔다. 어디서 기분이 상했는지, 시선이 가라앉은 듯했다. 이내, 그는 예의 그 냉랭한 얼굴로 물잔을 손에 쥐었다.
“어떤 부분이 특히 마음에 듭니까?”
“뭐, 여러모로…….”
역시, 손 크기는 둘이 비슷한가. 권이도가 손가락이 곧아서 잔을 쥐는 느낌이 퍽 달랐나 보다.
“대단하잖아요. 그 나이에 팀장까지 달고.”
“……무슨 말씀을 하는 겁니까?”
당장 떠오르는 게 없어 말했을 뿐인데, 권이도는 대번에 변색하고 되물었다. 잠깐 내 말이 이상했나 싶었지만, 뒤이은 한마디가 그의 표정이 바뀐 이유를 설명해 줬다.
“정세진 본부장님.”
“…….”
아, 이 호칭을 설마 오늘도 들을 줄이야.
“이젠 본부장도 아닌걸요.”
애초에 본부장이라는 직급은 내가 노력해서 얻은 성과가 아니었다. 대외적으로 차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줄 뿐, 아버지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을 거다. 권이도가 그만두라고 하지 않았어도, 언젠가 압박에 못 이겨 내려왔을 자리였고.
“아쉬운가 보네요. 본부장을 관둔 게.”
말없이 권이도를 마주 봤다. 여전히 물잔을 쥐고 있던 권이도가 시선을 내려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목울대가 움직이는 모습이 공들여 만든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다지 아쉽진 않습니다.”
정말 아쉽지는 않았다. 그저 조금 허전해서 그렇지.
“본부장이 별로 적성에 안 맞았거든요.”
그 자리에 오른 건 타의였을지 몰라도, 그곳에서 해낸 건 전부 자의에 의한 것이었다. 직접 일궈 낸 성과, 신뢰를 다진 동료들, 그리고 실제로 상승 곡선을 그리던 실적까지.
“새로운 본부장이 잘할 텐데요, 뭐.”
물론 허전하다고 해서 그게 돌아가고 싶단 의미는 아니었다. 그저 습관 된 무언가가 사라져 대체할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을 뿐.
“그렇군요.”
권이도는 내 체질에 대해 들었을 때처럼,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동정을 했다면 기만 같았을까, 건조하리만치 무던한 대답은 어떤 의미에선 위로처럼 느껴졌다.
“그럼 정세진 씨는 본인 적성에 뭐가 맞는다고 생각합니까?”
“…….”
왜 그 질문에, 다 잊어버렸던 장래 희망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잊고 산 지 한참이나 돼서 약혼식 날에나 겨우겨우 떠올렸던 것을.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 권이도 전무님은 지금 하시는 일이 적성에 맞으십니까?”
능청스럽게 되물었지만, 권이도는 픽 웃음을 흘렸다. 가소롭다는 듯한 미소였는데, 이유는 그다음 말에 있었다.
“대답하기 싫은가 보군요.”
“…….”
하마터면 표정이 무너질 뻔했다. 이 사람은 나에 대해 왜 이렇게 잘 알지. 아니, 사람 자체를 잘 파악하는 건가.
“적성이라…… 그런 건 생각해 본 적 없지만, 굳이 따지면 전무 자리는 잘 안 맞습니다.”
“……그렇군요.”
권이도의 대답을 그대로 따라 했다. 그가 진지하게 대답해 준 것도 의외였지만, 전무가 적성에 안 맞는다는 게 더 의외였다. 내가 보기에, 이 사람은 타고난 사업가 체질인데.
“차라리 부회장 자리라면 모를까.”
“…….”
음, 야망가라고 할걸.
“지금 선호그룹의 주축이 어느 계열사라고 생각해요?”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나는 곧장 한 계열사를 떠올렸다. 선호를 아는 사람이라면 열이면 열 같은 대답을 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선호물산 아닙니까?”
선호그룹에는 한 손에 꼽지 못할 정도로 많은 계열사가 있다. 선호물산, 선호전자, 선호전기에 선호생명, 그리고 연계 사업인 명성호텔과 광고 회사인 유일기획까지. 그 외에 재단 소유의 유치원과 미술관도 있지만, 역시 주축은 선호물산이었다.
“맞아요.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죠. 아무래도 자본이 가장 큰 곳이니까.”
그런데 권이도는 내 말이 틀렸다는 양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마치 식사 메뉴를 평가하듯 단조로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선호그룹이 와해되면 가장 먼저 각축장이 되는 건 선호물산입니다. 권력층이 분리된 후에는 선호전자가 근간 사업이 될 거고, 그럼 명실상부 부회장은 최고 책임자인 내가 되겠죠.”
그리 어렵지 않은 말이었는데, 머리가 이해하는 속도가 느렸다. 그가 내뱉은 첫 가정부터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호그룹이 왜 와해됩니까?”
절대 망하지 않는 기업은 없다. 딱 하나, 선호만 빼고.
선호그룹은 우리나라의 여러 대기업 중에서도 최고로 뽑혔다. 선호가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진다고,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정말 경제권을 꽉 쥐고 있는 독재자란 말이다.
그런데 그런 그룹이 흩어질 거라니.
“그리 놀랄 일은 아닙니다. 예상할 사람은 충분히 예상했고, 실제로 집안에서도 몇 번 얘기가 나왔어요. 덩치가 그렇게 커졌는데 회장님까지 오늘내일하시니, 그룹 하나 쪼개지는 건 별로 어렵지 않죠.”
“아니, 잠시만요. 권이도 씨.”
황급히 권이도의 말을 끊어 버렸다. 반사적으로 한 행동이었는데,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도 못 할 만큼 당황하고 말았다. 나는 곤란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권이도를 보며 이야기했다.
“제가 들으면 안 되는 얘기인 것 같습니다.”
권이도가 말하는 ‘회장님’은 선호그룹의 최고 책임자인 권병욱을 가리키는 게 분명했다. 대략 2년 전을 기점으로 대외 활동을 멈췄고, 현재는 요양 중이라고 알고 있었다.
알음알음 임종을 앞뒀단 말이 들리긴 하지만, 실제 손주인 권이도에게 ‘오늘내일한다.’라는 말을 듣는 건 무게감이 다르단 말이다.
“그냥 못 들은 걸로 할 테니…….”
“정세진 씨는 궁금하지 않아도, 정철호 회장은 궁금해할 텐데요.”
“…….”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어이가 없어서가 아니라 반박할 말이 아무것도 없어서.
“정세진 씨도 아버지를 위한 선물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제가 이 얘기를 아버지에게 하길 바라십니까?”
“글쎄, 그건 정세진 씨 선택입니다.”
의뭉스럽게 말했지만, 결국엔 가서 전하라는 말이었다. 결국엔 본인이 부회장이 될 거라는, 자신만만한 근거들을. 그걸 아버지가 알게 되면 권이도에게 대체 어떤 이득이 있길래.
애초에 권병욱 회장이 별세해 권상미가 회장이 된다고 해도, 권이도의 위로는 형제가 둘이나 더 있었다. 형인 권이정은 둘째 치더라도 누나인 권이경은 호락호락하게 부회장 자리를 내놓을 사람이 아니었다. 권이도의 주장대로 모든 걸 쉽게 얻어 낼 수 없다는 말이다.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사업은 정보 싸움이었지만, 오답보단 백지가 나았다. 확실치 않은 내용을 전하는 것보단 가만히 있는 쪽이 안전할지도 모른다.
“나를 완전히 믿지는 못하는군요.”
권이도는 조금 서운하다는 듯 입매를 길게 늘였다. 그 표정에 마음이 동하지 않은 건, 아무리 봐도 연기가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봐 온 권이도라면, 내가 전달하지 않을 걸 충분히 예상했을 것이다.
“그럼 재미없는 적성 얘기 그만하고, 다시 경호원 얘기로 돌아가죠. 그 사람이 마음에 들어요?”
왜 이런 얘기가 나왔나 했더니, 저게 시초였다. 분명 이태성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첫 뉘앙스가 저렇게 오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에 든다기보단…… 굳이 다른 사람으로 바꿀 정도는 아닙니다.”
적당히 과묵하고 다루기 쉬운 게, 웬만해선 껄끄럽지 않을 듯했다. 나를 좀 불편해하는 것 같긴 해도, 그걸 숨기려고 하지 않는 점이 나쁘지 않았고. 정확히는 숨기지 못하는 거겠지만 어쨌든.
“다행이군요. 혹시 나중에 마음에 들게 되면 이야기해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가, 무언가 이상하단 생각에 움직임을 멈췄다. ‘그건 왜요?’ 이렇게 묻자 권이도가 한쪽 입매를 비스듬히 올렸다.
“기특하니 다시 팀장으로 데려가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