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억의 끝에 (14)화 (14/131)

14화. Petit a Petit(4)

이태성은 정말로 권이도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중문 앞에 서 있는 모습이 신경 쓰여 들어오라고 하자, 이번엔 현관에 멀뚱히 서 있었을 뿐이다. 그 모습이 심히 거슬렸지만, 못 본 척 방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차라리 온실을 가죠.”

결국 나는 그를 대동한 채 여느 때처럼 온실로 향했다. 늘 다과를 챙겨 주는 고용인에게 차를 두 잔 준비해 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태성은 그런 날 흘긋 바라보고 로봇처럼 무뚝뚝하게 뒤를 따라왔다.

그리고 온실에 도착했을 때, 역시나 그는 입구에 선 채 더 들어오지 않았다. 바르게 뒷짐을 선 자세가 얼핏 문지기처럼 보일 정도였다. 권이도가 무슨 지시를 내렸는지는 몰라도, 저렇게 동상처럼 서 있으라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 팀장님도 들어오세요.”

“아뇨, 저는…….”

“못 나가게 감시당하는 기분인데, 들어오셨으면 좋겠습니다.”

곤란한 척 눈가를 찌푸리자, 이태성이 뺨을 씰룩거렸다. 누가 봐도 고민하는 얼굴로, 그는 결국 나를 따라 안으로 들어왔다. 성큼성큼 뒤를 쫓는 걸음이 권이도의 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테이블에는 고용인이 미리 세팅한 찻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처음엔 함께 따라와 차를 따라 줬지만, 내가 그러지 말라고 일러둔 뒤엔 소리소문없이 준비해 놓곤 했다. 그런데도 늘 차가 따뜻한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앉으세요.”

“…….”

나는 자연스레 테이블에 앉아 내 잔과 이태성의 잔에 차를 따랐다. 투명한 주전자에 들어 있는 꽃은 아무래도 목련인 듯했다. 꽃잎 색이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게, 신선하게 잘 관리한 모양이었다.

“서서 드실 겁니까?”

힐끔 이태성을 보며 물었다. 앉으라는 말에도 그대로 서 있던 이태성은 눈을 내리깐 채 내 시선을 피해 버렸다.

“전 괜찮습니다.”

“음…….”

평소라면 살살 구슬려서 앉힐 텐데, 이태성은 그런 게 통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융통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게, 잘해 주면 잘해 줄수록 뻣뻣하게 굴 가능성이 컸다.

“그냥 앉지 그래요. 어차피 거절 못 하는 거 알 텐데.”

그래서 그냥 권이도의 말을 따라 했다. 역시 효과는 직방이었다. 이태성은 한껏 똥 씹은 얼굴로 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차 키를 받던 나도 이런 표정이었을까. 새삼 권이도가 왜 그리 재밌단 반응을 보였는지 알 것 같았다.

“꽃가루 알레르기 같은 건 없죠? 수술은 다 제거한 것 같긴 한데 혹시 몰라서.”

“……예, 없습니다.”

그는 영 불편한 기색으로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두툼한 손과 앙증맞은 찻잔이 보기 드문 부조화를 이루었다. 손 크기는 권이도랑 비슷한 것 같은데. 모양의 차이인지, 아니면 익숙함의 차이인지 모르겠다.

“편하게 드세요.”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가지고 온 소설책을 펼쳤다. 책장에 꽂혀 있던 책 중 가장 마지막 시리즈였다. 이것만 읽으면 방에 있는 책을 다 읽는 터라, 권이도에게 서재를 써도 되냐고 물을 참이었다.

“…….”

팔랑, 책 넘기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내가 책을 세 장이나 넘기는 동안, 이태성은 차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책을 읽는 와중에도 그가 가시방석에 앉은 양 들썩거리는 게 느껴졌다.

내가 이 집에 들어와 가장 좋아하는 순간 중 하나였다. 꽃향기로 가득한 온실에, 꽃차 향기까지 부드럽게 감기는 순간. 아무런 잡념도 없이 책 속에 푹 빠져들어 현실감이 사라지는 순간.

평소엔 오전에 오지만, 오늘은 오후에 온 터라 해가 비치는 방향이 조금 달랐다. 미색의 종이 위로 늘어지는 햇빛이 잘게 부서지며 반짝였다. 눈이 좀 부신가 싶어 책을 대각선으로 세웠는데, 내내 조용하던 이태성이 입을 열었다.

“……하실 말씀이 있어서 앉히신 거 아닙니까?”

가만히 눈을 들어 이태성을 바라봤다. 어색하기 그지없는 눈빛이 불만을 가득 담고 있었다.

“아뇨, 사람 세워 놓고 책 읽는 취미는 없어서 앉힌 건데.”

이태성은 서 있는 게 편할지 몰라도, 나는 몇 시간 동안 누군가를 세워 놓고 싶지 않았다. 오늘 하루면 모를까, 앞으로도 계속 그래야 할 텐데.

“내일부터는 이 팀장님도 책 한 권 들고 오세요. 차는 계속 두 잔을 준비할 겁니다.”

권이도는 퇴근 후 자세한 얘기를 나누자고 했지만, 그런다고 무언가 바뀔 것 같진 않았다. 아마 무슨 억지를 부려서라도 경호원을 붙여 놓고, 내가 계속 거절하면 새로운 사람을 붙여 주겠지. 그럴 바엔 적당히 타협하고 받아들이는 쪽이 마음이 편했다.

“근무 중에 여유롭게 차나 마실 수는 없습니다.”

“근무의 일종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팔랑, 책을 한 장 더 넘겼다. 인간의 시야가 얼마나 넓은지, 눈을 내리고 있는데도 그의 얼굴이 구겨지는 게 똑똑히 보였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책을 내려놓고 이태성을 향해 친근하게 물었다.

“점심 식사는 하셨어요?”

그는 이건 뭔 개수작이냐는 듯 나를 노려봤다. 금세 눈에 힘을 풀었지만 불순한 눈빛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먹었습니다.”

“뭐 드셨는데요?”

“그냥 김밥을……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사람을 경계하는 들짐승도 아니고, 몇 가지 물어봤다고 경계심이 더 날카로워졌다. 짙고 시원시원한 이목구비가 한껏 날 서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싫으신 것 같아서, 이 팀장님이랑 대화나 좀 할까 했죠.”

“…….”

“일은 안 힘드십니까?”

내가 웃으면 웃을수록 이태성의 표정은 점점 더 안 좋아졌다. 표정만 보면 내가 일을 힘들게 만드는 주범으로 보일 정도다.

“할 만합니다.”

“대단하네요. 그 나이에 경호 팀장까지 하기 힘들 텐데.”

외관으로 보면 30대 초중반 정도려나. 권이도의 경호팀, 그것도 팀장을 맡을 정도이니 능력은 확실히 좋을 터였다.

“……이제 팀장 아닙니다.”

하나 이태성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했다. 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눈가를 한껏 찌푸리기도 했다.

“팀장직 내려놓고 업무가 바뀐 겁니다. 그러니까 이 팀장 말고 다르게 불러 주십쇼.”

“…….”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이 팀장직을 내려놓은 게 나 때문이라서, 이렇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그러나 이태성은 여전히 심각한 말투로 이렇게 얘기했다.

“사고 치고 좌천됐습니다.”

“……제 쪽으로 온 걸 좌천이라고 표현하시네요.”

“…….”

마주친 두 눈에 아차 싶은 느낌이 스쳤다. 웬만해선 동요하면 안 되는 경호원이면서, 쓸데없이 솔직한 반응이었다. 그는 마치 죄인이라도 된 양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실언했습니다.”

“아뇨, 장난이니까 그렇게까지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 굳이 따지면 틀린 말도 아니고.

“차 드세요. 식겠어요.”

“…….”

다시금 정적이 내려앉았다. 마땅히 대화를 이어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인데, 이번엔 이태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안 물어보십니까?”

“뭐를요?”

온실이 따뜻했기에 찻잔엔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었다. 나는 투명한 유리잔을 손으로 감싸 목련향이 남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태성은 내가 찻잔을 내려놓은 다음에야 주제를 꺼냈다.

“무슨 사고를 쳤는지…….”

우물쭈물 말을 흐리는 걸 보니 별로 달가운 주제는 아닌가 본데. 굳이 확인하려 드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 사람도 그렇고, 권이도도 그렇고.

“이태성 씨도 그겁니까? 물어보지 않길 바랐는데, 진짜 안 물어보니까 말하고 싶어진 거.”

“…….”

아니나 다를까, 이태성은 곧장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내 말이 정말 정곡을 짚은 모양이었다.

“별로 안 궁금합니다. 말하고 싶어도 참으세요.”

적당히 불편하지 않게 굴 예정이었지 속내를 듣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런 식으로 꺼낸 주제는 대개 열에 아홉쯤 껄끄러운 내용이 나오기 마련이니까.

“……웬만하면 다들 물어보시길래 여쭤본 겁니다. 말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다행히 그는 눈치껏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고개를 돌린 채 한숨을 내쉬는 모습이 조금 안도한 것 같기도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껄끄러운 화제이긴 했나 보다.

그 후론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나는 다시 책을 읽었고, 이태성은 여전히 좌불안석인 채로 살살 내 눈치를 보기 바빴다. 그가 몇 번이나 몸을 들썩였지만, 나는 일어나도 된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나자, 그가 드디어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다 식어 버린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잔뜩 인상을 찌푸린 것이다. 누가 봐도 입에 안 맞는 표정이었는데, 그는 사약을 마시듯 벌컥벌컥 찻잔을 비웠다.

“본부장님.”

“…….”

움찔, 어깨가 들썩였다. 분명 익숙한 호칭이었으나, 이 장소에서 듣기엔 지나치게 낯설었다. 느릿느릿 책에서 시선을 떼자, 아까처럼 무뚝뚝한 표정의 이태성이 보였다.

“……본인은 팀장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해놓고 저는 본부장입니까?”

내가 본부장을 관둔 걸 모르진 않을 테고. 이미 퇴사한 사람의 직급을 부르는 건 조금 가혹하다 싶다. 새삼, 내가 그를 팀장이라고 부른 게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죄송합니다. 마땅히 부를 호칭이 없어서.”

“이름으로 부르셔도 됩니다.”

“……아뇨, 그럴 수는 없습니다.”

“뭐…… 정 그러면 어쩔 수 없죠.”

흔쾌히 이야기하자, 이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두어 장 남은 책장을 넘겨 보며 대수롭지 않은 투로 이야기했다.

“말씀하세요, 이 팀장님.”

“…….”

마치 욕지거리를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내 앞에서 욕을 하진 못할 테니, 저게 최선이겠지만.

“……저녁 식사하실 시간입니다.”

“아.”

나는 가벼운 탄성과 함께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어쩐지 주변이 어두워지더라니 어느덧 6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근래에 해가 길어진 데다, 배가 고프질 않아 잊고 있었다.

“슬슬 먹으러 가야겠네요.”

책과 핸드폰을 챙겨 일어나자, 이태성도 나를 따라 일어났다. 안도의 한숨까지 내쉬는 게, 제법 불편했나 보다. 오늘 처음 봤지만, 아무튼 융통성 없는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가능하면 식사는 때맞춰 드셨으면 합니다.”

“……이태성 씨가 그걸 왜 챙깁니까?”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아 물었다. 하다 하다 권이도가 식사까지 챙기라곤 안 했을 테고. 수행원이 뭐하러 거기까지 신경 쓰냔 말이다.

“식사를 거르시면 전무님께서 걱정하시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

툭, 들고 있던 책이 떨어졌다. 파라락 넘어간 책장이 돌바닥에 부딪혀 구겨졌다. 이태성은 별반 놀라는 기색 없이 잽싸게 내가 떨어뜨린 책을 주워 들었다.

“……아, 고맙습니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책을 떨어뜨린 게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이태성의 말을 듣고 자연스럽게 떠오른 권이도와의 통화 때문에.

‘걱정하는 거 맞습니다.’

전화 너머로 페로몬이 느껴질 리도 없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께가 울렁였다. 권이도 특유의 묵직한 목소리가 귀를 통해 배 속 깊숙한 곳까지 전달된 느낌이었다. 목구멍이 조여들고 명치가 짓눌리는 감각은, 아버지에게 칭찬을 들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에게 ‘걱정’이라는 말을 듣는 건, 오늘이 처음은 아니었다. 저녁을 혼자 먹었을 때도 그는 서슴없이 걱정했다는 표현을 사용했으니. 그러나 이번에 그가 건넨 한마디는 지난번 경우와는 근본적인 무게부터 달랐다.

부담스러워야 했다. 이상해야 했고, 또는 낯설어야 했다. 그에게 차 키를 받았을 때처럼 왜 이러는지 이해되지 않았어야 한단 말이다.

“제가 식사를 거르면…… 권이도 씨가 걱정을 합니까?”

하지만 이 어색한 기분은, 아무리 숨긴들 결코 불쾌함은 아니었다. 만족감, 그리고 기대, 혹은 약간의 설렘이라면 모를까. 마치 내도록 그의 걱정을 바라고 있던 사람처럼.

“예, 어제도 점심을 걸렀다는 말만 듣고 전무님이 곧장 귀가하셨습니다.”

“어제…….”

나는 책을 꽉 붙잡으며 살포시 미간을 좁혔다. 어제라면, 권이도가 갑자기 히트 사이클이 터진 나를 온실에서 발견한 날이었다. 분명 늦는다고 했으면서 점심이 조금 지나 곧장 귀가한 날이기도 했다.

“권이도 씨한테 연락이 갔다고요?”

조금 놀라서 묻자, 이태성이 입을 다물었다. 내 반응에서 무언가 위화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최대한 자연스럽게 뒷덜미를 쓸어내렸다.

“아무리 그래도…… 점심 하나 걸렀다고 퇴근하진 않았겠죠. 이태성 씨가 뭔가 착각한 거 아닙니까?”

반쯤은 진심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밥 하나 굶었다고 나를 찾으러 왔으리라고.

“……아뇨, 확실합니다. 밥을 안 먹었냐고 되물으시곤 곧장 퇴근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대체 왜 그랬냐고, 이태성은 그런 느낌으로 나를 바라봤다. 마치 철없는 아이를 보듯 한심스러워하는 눈빛이었다. 이제야, 이 사람이 왜 나를 싫어했는지 알 것 같았다.

“……다음부턴 그러면 안 되겠네요.”

할 수 있는 말은 딱 그거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살갑게 웃어 버리고 마는 것. 의아함을 느낀들 티를 낼 수는 없으니 지금은 그냥 넘겨 버리는 수밖에.

“가죠, 이태성 씨도 식사해야 할 텐데.”

뒤에서 이태성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나는 먼저 온실을 나서며 뒤숭숭한 마음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머릿속엔 어제 나를 찾아왔던 권이도의 모습이 두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 * *

저녁 식사를 마친 뒤엔 욕조에 물을 받아 몸을 담갔다. 원래는 그럴 계획이 없었는데, 고용인이 직접 입욕제까지 풀어 주는 바람에 그렇게 되고 말았다. 설마, 목욕을 하실 거냐는 질문이 그런 의미일 줄은 몰랐지.

새하얀 펄이 섞인 입욕제는 은은하고 달콤한 향기가 가미된 배스 밤이었다. 장미와 자스민을 합친 것으로, 무릇 플로럴 계열이 그렇듯 산뜻하면서도 포근한 향이 일품이었다. 이다지 좋을 줄 알았으면 진작 쓸 걸 그랬다고, 새삼 반성할 정도였다.

나는 한참을 늘어져 있다가 목욕 가운을 걸친 채 밖으로 나왔다. 따뜻한 물에 오래 있어서 그런지, 온몸이 노곤해서 잠자리에 들면 딱 좋을 듯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권이도가 들어오지 않았을 텐데. 한 시간 정도 그의 페로몬까지 쐬면 아마 정말로 단잠을 자지 않을까 싶다.

“…….”

아니, 언제부터 거기에 의지했다고.

그간 악몽을 꾸지 않는 밤에 지나치게 익숙해진 모양이다. 이 집에 들어오면 심해질 줄 알았던 불면증마저 나아졌으니, 그의 페로몬을 기대하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원래라면 한 통씩 털어야 할 수면제도 지금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정신 차려야지…….”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며 방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자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이 흘러 있었다.

내가 이렇게 오래 있었나? 그런 생각으로 눈을 깜박이는 순간,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정세진 씨, 안에 있습니까?”

권이도였다. 특유의 나직한 음성이 방문 하나를 놓고 들려왔다. 시간이 꽤 흘렀더니만, 내가 목욕한 사이에 돌아온 모양이었다. 나는 당황스러운 기분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잠시만요.”

달칵, 망설일 것 없이 방문이 열었다. 열린 문틈으로 편안한 차림을 한 권이도가 보였다. 아, 진짜 오래 씻긴 했구나. 이 사람이 퇴근해 샤워를 마칠 때까지 멍하니 물속에 들어가 있었다니.

“제가 씻느라 소리를 못 들어서…….”

“…….”

“……권이도 씨?”

딱, 시선이 마주쳤다. 무심코 고개를 든, 바로 그 타이밍이었다. 짙은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치고, 권이도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아.”

그는 조그만 탄성과 함께 나를 위아래로 천천히 훑어봤다. 짙은 눈동자가 숨이 막힐 만큼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이윽고, 반듯한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방금 씻고 나왔습니까?”

“…….”

그 질문에 대답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자, 권이도의 시선이 더욱 짙어졌다. 차분하게 내려온 머리 아래, 여느 때와 다름없는 수려한 눈매가 보였다.

시선이 나를 만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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