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Petit a Petit(3)
생뚱맞은 제안이었다. 설마하니 이런 제안이 나올 줄 몰랐기에 나는 잠깐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권이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정세진 씨가 받고 싶은 걸 말하지 않으니, 나로선 주고 싶은 걸 주는 수밖에.”
그러니까, 그걸 왜 나한테 주고 싶냐고.
“……이번에도 권이도 씨 얼굴에 먹칠하지 않는 종류여야 합니까?”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권이도가 건넨 제안이 사실상 검토해 볼 가치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자동차 같은 걸 두 개나 받을 바엔, 내게 필요한 거 하나를 받는 쪽이 후처리가 편하기도 했고.
“그렇진 않은데, 적어도 갖고 싶은 이유는 설명할 수 있어야겠죠.”
“금액대는 아예 무관한가요?”
“다른 사람이라면 상한가를 묻는 거겠지만…… 정세진 씨는 하한가겠군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권이도가 픽 웃음을 흘렸다.
“무관합니다.”
쾌재를 불러야 할 타이밍이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하며 내가 무언가 쥐여 주려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회가 생겼으니 잡아야 했다.
“그럼 대신…….”
“대신?”
“생각해 보지 말고, 가져가는 걸로 하시면 안 될까요.”
“…….”
권이도는 순간 허를 찔린 표정으로 눈가를 찌푸렸다. ‘차 키는 다시 생각해 보겠다.’ 확실히 가져가겠다는 말이 아니라 여지를 남기는 말이었다. 누가 사업가 아니랄까 봐, 이런 데에서까지 말장난을 한다.
“예리한 면이 있네요.”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수려한 눈매가 부드럽게 접히는 모습은, 약혼식 날 보았던 것과 비슷했다. 방송에 나와서도 이렇게 좀 웃으면 좋을 텐데. 웃는 모습이 예쁜데 아깝지 않은가.
“한 가지만 물어보죠. 왜 그렇게 차를 싫어해요?”
“……싫어하는 건 아닙니다.”
차라면 평범하게 좋아한다. 권이도처럼 수집할 정도가 아닐 뿐, 나름대로 기호라는 것도 있었다.
“굳이 많이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뿐이에요.”
“많이 가지다니……. 보통 두 대를 많다고 합니까?”
지극히 권이도다운 기준이었다. 이 사람이 뭘 모르나 본데, 세 대 이상은 많은 게 아닌가.
“뭐 그래요. 정세진 씨 말대로 하죠. 가지고 싶은 걸 골라 오면, 차 키는 다시 가져가겠습니다.”
“……약속해 주셔야 합니다.”
“손가락이라도 걸까요?”
눈가를 찌푸린 그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누가 봐도 장난이었지만, 왜인지 장단을 맞춰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기다란 손가락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자 권이도가 놀란 듯 눈을 깜박였다.
“…….”
“……도장을 찍을 계약서가 없으니까.”
살짝 얽혔던 손가락은 엄지끼리 꾹 맞물린 다음에야 풀어졌다. 권이도는 손을 거둬들이지 않고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괜히 장난쳤나. 그런 생각이 들 즈음에야 그가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앞으로 약속할 땐 이렇게 하죠.”
“…….”
설마, 농담이겠지.
“어쨌든 일주일 동안은 임시로 쓰도록 해요. 정세진 씨도 외출하려면 차가 필요할 텐데.”
“네, 뭐…….”
남이 쓰던 건 안 쓴다는 말이 떠올랐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외출할 필요가 없다는 말 또한 목구멍 너머로 삼켜 버렸다. 사실, 차가 필요하면 본가에서 내 차를 가져와도 될 텐데. 쓸 일이 없어 아예 놓고 왔을 뿐이었다.
“아, 그리고.”
권이도는 다시 한번 시간을 확인하고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는 정말 나갈 시간인지, 차고 입구에서 비서로 추정되는 사람이 사인을 보냈다. 권이도는 대충 한 손을 들어 기다리라고 지시한 뒤 내게 고개를 까딱였다.
“조만간 의사한테 검사 하나 받아요.”
“검사요?”
“네, 페로몬 검사.”
권이도는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몸에 변화가 오는 게 그리 긍정적인 신호는 아닙니다. 억제제가 안 들으면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이 생길 텐데 히트 사이클 주기가 달라진 원인은 알아야죠. 정세진 씨가 집에만 있으면 모를까, 만약의 경우는 대비해야 하지 않겠어요.”
“…….”
“주치의 부를 테니까 페로몬 관련으로 간단한 검사만 몇 개 받아요. 병원이 편하면 병원으로 가도 됩니다. 어떻게 할래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언젠가 주치의인 최 교수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다. 다만 권이도가 먼저 이런 말을 꺼냈다는 게 놀랍고, 내가 집에만 있지 않으리라고 가정한 게 당황스러울 뿐.
“……권이도 씨가 편한 쪽으로 부탁드립니다.”
“그럼 집에서 받죠. 아무래도 병원은 정세진 씨도 왔다 갔다 하기 불편할 텐데.”
“네, 그럼 집에서 부르는 쪽으로…….”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는 나를 집으로 불렀지만, 한 번도 외출하면 안 된다고 말한 적은 없다. 차를 주면서도 ‘외출을 하려면 필요하다.’라는 말을 전제로 깔지 않았던가.
“……저 한 가지 질문이 있는데.”
“질문?”
권이도가 다시 시계를 확인했다. 언뜻 보니, 평상시라면 차를 타고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하라는 듯 나를 바라봤다.
“집 밖에, 자유롭게 나가도 되는 겁니까?”
“……?”
그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고개까지 기울이는 게, 정말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나 보다. 잠깐, 뜸을 들였던 권이도가 어쩐지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난 정세진 씨를 감금한 게 아닙니다.”
“…….”
왜일까.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한편이 저릿하니 아팠다. 누군가 비슷한 말을 했던 것처럼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권이도는 눈을 살짝 내리깐 채 조그만 목소리로 덧붙였다.
“정세진 씨 행동반경을 제한할 생각은 없어요.”
묻고 싶었다. 그럼 왜 집으로 들어오라고 했냐고. 내가 이 집에 들어온 게 그 쪽에게 어떤 이득이 있냐고.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묻지 못한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권이도가 정말 출근할 시간이 된 것 같았고, 둘째로, 마음 한구석에서 그러면 안 된다고 경고를 보내는 듯해서.
“슬슬 나가 봐야겠군요. 오늘은 정말 늦을 테니까 점심 잘 챙겨 먹고 쉬고 있어요.”
권이도는 그리 말하고 나보다 앞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의 뒤를 쫓아 걸으며 복잡한 속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손에 쥔 열쇠가 잘그락 요란스러운 소리를 냈다.
* * *
누군가 핸드폰을 가져온 건 점심시간이 지난 늦은 오후였다. 오늘까진 조심하잔 생각에 내가 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있을 즈음이기도 했다. 키가 크고 덩치가 좋은 남자는 현관으로 나온 내게 새 핸드폰을 내밀며 꾸벅 인사했다.
“전무님 경호원인 이태성입니다.”
핸드폰은 내가 쓰던 브랜드의 최신 기종이었다. 선호 전자의 제품을 줄 줄 알았는데, 취향을 존중해 주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반짝거리는 모양새가 참으로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토요일인데 고생하시네요.”
비서가 아니라 경호원?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예의상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본인을 이태성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감흥 없이 나를 살피곤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별로 특별한 것 없는 반응이었으나,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사람, 나를 별로 안 좋아하는구나.
“백업은 다 해뒀으니 확인하고 이상한 게 있으면 다시 말씀 주시면 됩니다. 이쪽은 원래 쓰시던 핸드폰인데, 혹시 몰라서 액정도 같이 고쳐 왔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아뇨, 전부 전무님 지시입니다.”
간혹 있었다. 제 상사의 주변 인물을 죄 껄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전무님’이라는 말을 할 때 그는 무척이나 자랑스러운 눈빛을 지었다. 권이도에 대한 존경심이 엄청난가 본데, 아무래도 약혼자로서 내가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하기야, 대단한 사람의 보좌로 있는 제가 이런 잔심부름을 하게 생겼으니, 이 상황이 못마땅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권이도 씨한테도 감사하단 말씀 전해 주세요.”
나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살짝 눈인사를 건넸다. 그가 곧장 나갈 줄 알고 한 행동이었는데, 그는 어딘가 껄끄러운 느낌으로 머뭇거렸다. 가만히 시선을 맞추자, 이태성이 마지 못해 입을 열었다.
“……전무님이 퇴근하기 전까지 수행원으로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수행원?”
“예, 운전이나 잔심부름 같은…….”
“…….”
표정이 점점 안 좋아졌다. 이태성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듣던 나까지도.
“……경호원이면 권이도 씨를 경호해야 하는 게 아닌가요?”
“저 말고도 경호할 사람은 많습니다.”
그거야 그렇겠지. 권이도 정도 되는 사람에게 보좌가 한둘이진 않을 테니까. 나도 본부장으로 일할 땐 경호원이 여럿이었으나, 번거롭단 생각에 소수만 데리고 다녔었다.
“그럼 집에서 계속 제 옆에 계시는 겁니까……?”
넌지시 물은 말에 이태성이 입을 꾹 다물었다. 긍정의 침묵은 아니었고, 이번엔 정말 제 입으로 말하기 싫단 느낌이었다. 이내, 은근슬쩍 시선을 피한 그가 정중하게 이야기했다.
“가까운 곳에서 대기하다가, 필요할 때만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
“……이태성 씨, 정확한 업무가 뭐라고요?”
“운전이나 잔심부름, 그리고 경호입니다. 그 외에 전무님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면 제 편을 통해 전달하셔도 됩니다.”
요컨대 정말로 잡일꾼이었다. 그의 본업이 경호원이라는 게 정말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권이도의 집은 설치된 보안 시스템만 열 손가락을 넘어간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무장 경찰이 출동하고, CCTV는 사각지대 없이 관리됐다. 당장 안에 배치된 경호 인력이 몇 명인데, 굳이 뭐하러 개인 경호원을 낭비한단 말인가.
“저 잠시…… 전화 한 통만 하겠습니다.”
나는 이태성을 그대로 둔 채 새 핸드폰을 들고 몇 발짝 멀어졌다. 내가 멀어졌음에도 그는 뒷짐을 진 채 각 선 자세로 서 있었다. 괜히 나까지 불편해지는 기분이었다.
“진짜 똑같네…….”
새로 산 핸드폰은 정말로 내가 쓰던 것과 완전히 똑같았다. 배경 화면은 물론, 전화번호부와 메시지 기록까지도. 나는 ‘권이도’라고 저장된 번호를 누르고 그와 통화가 연결되길 기다렸다.
뚜르르, 익숙한 신호음과 함께 나직한 음성이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왔다.
-네, 권이도입니다.
무뚝뚝한 목소리였다. 무언가 일을 하고 있던 건지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함께였다. 전화를 거는 건 처음인데.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인기척에 등허리가 빳빳하게 긴장됐다.
“정세진입니다. ……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
잠깐 정적이 맴돌았다. 바쁜가? 그런 생각도 잠시. 건너편에서 다시 권이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 있습니까?
왠지 모르게 다급한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하면 정말 달려올 것처럼. 나는 흘긋 이태성을 쳐다보고 소리를 낮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이태성이라는 분이 핸드폰을 가져다줬습니다. 말씀을 들어 보니 권이도 씨가 제 수행원으로 붙여 줬다고 하시길래요.”
-……아.
나직이 터진 탄성은 안도와 깨달음 두 가지를 담고 있었다.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목소리 역시 부드럽게 풀어졌다.
-마음에 안 들면 다른 사람을 보내죠.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
순간 말을 더듬을 뻔했다. 마음에 안 들면 다른 사람을 보내 주겠다니. 그게 그렇게 쉽게 할 말인가.
“권이도 씨가 오해하신 것 같은데, 정말 기사는 필요 없습니다. 잔심부름할 사람도 필요 없고요.”
-내가 주는 걸 다 받기로 하지 않았던가요.
“……사람은 물건이 아닙니다.”
권이도가 눈앞에 없는 게 다행이었다. 만약 눈앞에 있었다면 지금의 황당한 표정을 그대로 들켜 버리고 말았을 테니. 의도하진 않았지만, 어이없단 눈으로 그를 빤히 바라봤을 게 뻔했다.
“어쨌든 필요 없습니다. 권이도 씨한테 할 말이 있으면 전화로 하면 되죠.”
-전화라…… 오늘 경호원을 보내지 않았으면 정세진 씨가 나한테 전화할 일이 있었을까요?
“…….”
대답은 두말할 것 없이 ‘아니’였다. 일하는 사람에게 연락해야 하는 일 따위, 집에만 있는 내게 생길 리가 없지 않은가.
-방해되지 말라고 했으니까 데리고 있어요. 비서랑 경호는 많을수록 좋습니다.
“……전 비서도 두 명 이상 필요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일하게 데리고 다닌 게 ‘김 실장’입니까?
목소리가 음산하게 낮아졌다. 갑작스러운 감정 변화에 입을 다물자, 권이도가 조금 누그러진 어투로 이야기했다.
-원래는 경호 팀장으로 있던 사람입니다. 전직 유도 국가대표 출신이고, 운전도 잘합니다.
덩치가 좋다 했더니, 운동하던 사람인가 보다. 게다가 팀장이라는 직책까지. 그렇게 좋은 인재를 왜 나한테 붙여 주냔 말이다.
“저분은 권이도 씨한테 고용된 건데, 제 수발을 들면 어떡합니까…….”
-내가 고용한 사람을 내가 알아서 쓰겠다는데 그게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군요.
도무지 말이 통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웬만하면 누구 하나가 물러날 텐데, 나도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사람이 곁에 붙는 게 얼마나 불편한지, 오랜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권이도 씨, 수행원은 정말 필요 없습니다. 감시를 할 거라면 차라리 CCTV를…….”
-감시?
“…….”
아, 말을 이렇게 할 생각이 아니었는데.
-정세진 씨가 그렇게 생각하면 할 말은 없군요.
“……아뇨, 실언이었습니다.”
-아닙니다. 정세진 씨 마음 이해해요.
망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말로는 이해한다면서 말에서 느껴지는 뉘앙스는 전혀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권이도 씨, 저는…….”
-차라리 감시를 할 걸 그랬죠. 그랬으면 정세진 씨가 그렇게 오래 온실에 안 있었을 텐데.
입이 딱 다물렸다. 분명 냉랭한 목소리였음에도 기분이 나쁘기보단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뒤이은 권이도의 말을 듣는 순간 더 뚜렷해졌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했더니 말없이 쓰러져 있던 건 정세진 씨예요. 만약 내가 온실에 안 갔으면 종일 그러고 있었을 겁니까? 만약 온실이 아니라 정원에서 그랬으면, 그럼 정세진 씨가 나한테 연락했을 것 같아요?
나긋나긋 이어지는 목소리는 고저 없이 평온하기만 했다. 그렇기에 더 귀에 꽂혔고, 그래서 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많이 안 바랄 테니까 집 밖에 나갈 때만 데리고 다녀요.
……이 사람 왜 이렇게 나를 걱정하지?
-미안한데, 정세진 씨가 먼저 연락할 거란 생각이 도무지 안 드는군요.
곤란한 상황이었던 건 맞지만,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굴 부분은 아니었다. 더더군다나, 권이도와 내 사이라면 더더욱. 우리 관계는 그냥…….
‘우리가 비즈니스 관계도 아니고, 격식 차릴 필요 없어요.’
“……권이도 씨.”
-네.
“지금 걱정하시는 겁니까?”
-…….
무심코 질문이 튀어나왔다. 순식간에 고요해진 주변에 숨소리만이 수화기를 타고 전해졌다. 미미하게 들리던 부스럭 소리 역시 정지 버튼을 누른 양 뚝 끊겨 버렸다.
얼마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제야 권이도가 얕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제법이네요. 이런 식으로 말을 막을 줄은 몰랐는데.
퍽 김새는 답변이었다.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던 건지 목덜미가 뻐근하게 굳었다. 멋쩍게 어깨를 주무르는 동안 권이도는 대화를 대충 마무리했다.
-슬슬 끊어야겠군요. 집에 가서 자세히 얘기하고, 우선 경호원은 데리고 있어요. 아까 말했지만, 방해되진 않을 겁니다.
“……네, 뭐.”
그 잠깐 사이에 의욕이 팍 식어 버리고 말았다. 이따금 있는 일인데, 열을 내다가도 금방 해탈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래, 어차피 거절할 권리 따위는 없었지. 그런 생각으로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권이도가 느릿하게 운을 뗐다.
-그리고 오해할까 봐 하는 말인데…….
그는 말을 꺼내 놓고도 잠깐 뒷얘기를 망설였다. 무슨 소리를 하나 싶어 귀를 기울이자,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걱정하는 거 맞습니다.
뚝, 전화가 끊겼다. 뒤늦게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권이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뚜, 뚜, 이어지는 신호음이 멍한 귓가에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