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Deja vu(5)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나는 온실에 앉아 종일 소설책을 읽었다.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유리창을 때리는 빗소리가 대다수의 생각을 흐트러뜨렸다. 내 오랜 경험에 따르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일수록 깊이 파고들어 봐야 좋을 게 없었다.
비는 그때가 되어서야 조금씩 그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늘이 뚫린 것처럼 쏟아지던 빗줄기가 점점 가늘고 약해지고 있었다. 먹구름이 낀 하늘 역시 아까처럼 새카맣거나 흉흉하진 않았다.
그렇게 12시가 조금 지났을까. 핸드폰이 요란스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지잉 지잉 울리는 모양새는 부하직원이 사고를 쳤을 때보다 더 심각했다. 내심 놀라서 확인한 화면엔 온갖 울음 표시로 뒤덮인 메시지가 가득했다.
「본부장님 퇴사하신 거 진짜예요ㅠㅠ?」
「돌아오세요 본부장님 ㅜㅜㅜ」
「보고 싶어요!!!」
그간 함께 일했던 직원들의 연락이었다. 익숙한 이름도 보였고, 비교적 교류가 없던 이름들도 보였다. 내 퇴사 소식이 이제야 전해졌거나, 아버지가 새로운 본부장을 뽑아 자리에 앉힌 모양이었다.
아쉽다는 말은 물론, 내가 오길 기다리겠다는 말까지. 생각보다 많은 연락에 당황하기도 잠시, ‘본부장님 없는 회사를 어떻게 다니냐.’라는 말을 보고 웃음이 튀어나왔다.
“잘만 다닐 거면서.”
상사 하나 없어졌다고 크게 서운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오히려 잔소리하는 사람이 사라졌으니 홀가분함을 느끼면 모를까. 그래도 예의상 해주는 말들이 나쁘지 않아서, 한 명 한 명 답장을 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점심을 안 먹었다고 들었습니다.’
입맛이 없단 이유로 점심을 걸렀던 날, 권이도는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얘기했다. 정 귀찮으면 점심은 온실에 차릴 테니, 웬만하면 밥은 거르지 말라고.
실제로 다음 날, 온실에 틀어박힌 내게 고용인이 진수성찬을 들고 찾아왔다. 테이블까지 펼쳐 세팅하는 모습에, 무슨 일이 있어도 낮에는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한 게 이틀 전의 일. 식사를 거르지 않겠다고 약속한 뒤에야 그는 그 부담스러운 상황으로부터 나를 놓아줬다.
그 후로 나는 웬만하면 시간 맞춰 온실을 나서곤 했다. 그에게 밉보여 좋을 게 없으니 약속한 건 지켜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마침 빗줄기도 약해졌으니, 이 정도는 맞으면서 가도 될 듯했다.
‘저는 데리러 오라고 할 사람이 있잖아요.’
사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우산이 없다고 연락하면 권이도는 귀찮은 기색 없이 고용인을 보내 줄 거다. 요 며칠 지켜본 권이도는 그 정도 호의는 기꺼이 베풀 만한 사람이었다.
“뭐, 직접 오진 않겠지만…….”
그러나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을수록 반드시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존재했다. 나는 분수를 아는 사람이고, 권이도가 내게 그 정도 성의까지 보이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하는 말이, 고작 비를 맞아야 하는 위기 따위는 아닐 것이다.
‘연락해요.’
“…….”
그런데 왜, 내가 비를 맞으면 권이도가 싫어할 거란 생각이 드는 걸까.
비 오는 날은 좋아한다. 비가 내리는 소리도, 물방울이 떨어지는 모습도, 전체적으로 채도가 떨어진 풍경도, 모두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진귀한 것들이었다. 간간이 습기를 머금은 흙냄새를 맡으면 폐부가 청량해지는 기분도 썩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따금 정원 한가운데에 서서 내리는 비를 맞곤 했다. 부슬부슬 떨어지는 빗줄기에 젖어, 떠오르는 잡념을 모두 씻어 낸 것이다. 그런 나를 걱정하는 건, 오로지 김 실장밖에 없었다.
‘그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분명 김 실장밖에 없었는데…….
뿌옇게 흐려진 기억 속에 나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떠올랐다. 짙은 고동색의 눈동자, 그려 놓은 것처럼 수려한 이목구비. 그리고 머리 위에 드리운 우산 그림자까지.
‘정세진.’
“…….”
퍼뜩, 잔상이 깨어졌다. 머리가 핑 도는 감각에 나는 순간적으로 테이블을 붙잡았다. 심장이 쿵 내려앉고,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욕지기가 솟구쳤다.
미처 손을 쓸 틈도 없었다.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열기는 불이 붙은 것처럼 온몸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심장에서부터 아랫배, 하다 못 해 손끝까지. 뒷덜미가 뻣뻣하게 굳고, 달뜬 숨결이 허공에 흐트러졌다.
“흡…….”
꽃향기가 났다. 짙고, 밀도 높은, 내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러한 향기가.
파르르 떨리는 팔은 힘없이 무너지는 몸뚱이를 지탱하지 못했다. 폐부가 납작 짓눌려서, 나는 바르작거리며 돌로 된 바닥에 주저앉았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피가 점점 빠르게 뛰는 듯했다.
“으…….”
왜, 갑자기?
끝없이 이어지는 의문은 금세 또 다른 감정에 뒤덮여 버렸다. 허벅지가 배배 꼬이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표백됐다. 바짝 조여든 아랫배는 점점 차오르는 욕정을 담고 움찔움찔 경련했다.
“아, 안 돼…….”
히트 사이클이었다. 원래라면 이틀 뒤에 왔어야 할, 일정한 주기마다 찾아오는 오메가의 발정기. 단 한 번도 주기를 벗어난 적 없어서, 오늘은 아니리라 확신한 바로 그것.
고개를 푹 숙인 채 의자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차가운 철제조차 달뜬 열기를 식혀 주진 못했다. 그간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페로몬은, 마구 쏟아지는 비처럼 하릴없이 터져 나갔다.
‘정세진 씨 오늘…….’
‘히트 사이클, 아닙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권이도 당신은, 내가 이럴 거란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 걸까.
* * *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약해진 빗줄기가 다시 거세지고, 새카만 먹구름이 끊임없이 몰려들었을 즈음. 불덩이를 삼킨 듯 홧홧한 목구멍이 침을 삼킬 수조차 없이 바싹바싹 마를 즈음.
“하아, 하아…….”
심장은 쉴 새 없이 거친 소리를 내며 뛰었다. 아프도록 발기한 성기는 조금만 건드려도 사정할 것처럼 예민한 상태였다. 사방이 꽃으로 가득한 온실, 그것도 투명한 유리로 된 공간. 그런 곳에서 자위할 수도 없으니, 해소되지 못한 욕구는 마냥 쌓이기만 했다.
사실, 단순히 자위 정도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특이 형질, 그것도 우성의 사이클은 홀로 이겨 내기 버거운 짐승 같은 시기였다. 조금만 긴장을 늦추면 차오르는 욕구에 파묻혀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단 말이다.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전화해요.’
“……전화…….”
나는 기듯이 의자를 잡고 일어나 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다. 누구에게든 도움을 청하기 위함이었는데, 정작 핸드폰을 쥐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버렸다.
도움을 청하다니. 누구한테?
‘하자품을 주워 와서…….’
드문드문 사고가 끊겼다. 힘없이 추락한 핸드폰이 바닥에 부딪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쁜 숨을 토해 내며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병신 같은 놈. 너 같은 걸 주워 오는 게 아니었는데.’
“……흐…….”
대체 누구에게 연락하려고 했던 걸까. 히트 사이클이 왔다고 선뜻 도와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는데. 그나마 김 실장만이 아무것도 모른 채 꼬박꼬박 억제제를 가져왔건만.
아마 오늘이 지나기 전에 누군가는 나를 찾으러 올 것이다. 베타일 게 분명한 고용인은 내 모습을 보고 무슨 표정을 지을까. 권이도는 제 몸뚱이 하나 간수하지 못하는 나를 얼마나 한심하다고 생각할까.
“…….”
파혼당하면 어떡하지?
우습게도, 가장 두려운 부분이 그거였다. 권이도의 말을 무시하고 온실에 와버려서, 그가 나를 버리고 내칠까 봐. 그렇게 버림받고 돌아간 내게, 아버지가 또 한 번 쓸모없는 놈이라며 실망할까 봐.
분출되지 못한 성욕이 명치께에 고였다. 그렁그렁 맺혔던 눈물은 미처 삼키지 못한 채 손바닥에 짓눌렸다. 아래쪽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앞이고 뒤고 축축하게 젖어 엉망이었다.
나는 습관처럼 테이블 아래에 몸을 웅크렸다. 이런다고 숨어지지 않겠지만, 어떻게든 내 초라한 모습을 감춰 버리고 싶었다. 양팔로 머리를 감싸고 눈을 감아 버리자, 뺨을 타고 뜨뜻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아, 흐…….”
귓가가 먹먹하게 변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잘 들리던 빗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든 욕구를 해결하고 싶다는 충동 반, 남들 다 겪은 사이클 하나 견뎌 내지 못하는 나에 대한 자괴감 반. 그리고 누구를 향하는지 모를 정체 모를 두려움 조금.
“흑…….”
차라리, 이대로 아무도 오지 말았으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권이도에게만큼은 들키지 않을 수 있다면. 그런 생각으로 상체를 더 납작하게 숙이는 순간이었다.
끼익, 낯선 소리가 들렸다. 내 페로몬으로 가득 찬 공간에 청량한 비 냄새가 섞여 들었다. 쏴아아, 내리는 빗소리가 귓가를 울리고, 익숙한 걸음걸이가 서서히 내 쪽으로 가까워졌다.
“…….”
타박, 타박. 돌바닥을 밟는 소리는 내 심장이 뛰는 속도만큼이나 조급했다. 거의 뛰듯이 다가온 누군가는 정확히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미미하게 안도감이 섞인 한숨을 흘렸다.
“하…….”
나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 고개를 살짝 옆쪽으로 돌렸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단정한 바짓단이 보였다. 히트 사이클이 온 내게, 정장을 입고 찾아올 만한 사람.
“김 실장님……?”
“…….”
기분 탓일까.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내 페로몬으로만 가득하던 공간에 타인의 존재감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끊어질 듯 가느다란 숨결 속에, 묵직하고 그윽한 향기가 스며들었다.
“보통…… 이럴 때 비서 이름이 나오나.”
울림이 독특한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귓가에 쏙쏙 와 박혔다. 언제 숨 쉬는 게 어려웠냐는 듯, 호흡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조금씩 편안해진 숨결에 섞인 건, 젖은 나무와도 같은 묵직한 페로몬.
“……권이도 씨.”
그 말이 정답이라는 것처럼, 권이도의 페로몬이 한층 짙어졌다. 그는 재킷을 벗어 내 머리에 씌우고 늘어진 몸을 테이블 아래에서 끌어 내렸다. 이내 등과 엉덩이를 받친 손길이 나를 어린아이 들듯 번쩍 안아 올렸다.
“……!”
몸이 붕 떠오르는 느낌은 아주 어릴 때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반사적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자, 그가 나를 조금 더 세게 끌어안았다. 퍽 안정적인 자세였으나, 높이가 높은 탓에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했는데…….”
“…….”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랐죠.”
어딘지 모르게 자조적인 어조였다. 무어라 대답하고 싶었지만, 나오는 건 색색거리는 작은 신음뿐이었다. 권이도는 재킷을 머리 위로 끌어올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얼굴 안 보이게 고개 숙여요.”
“…….”
아무래도, 내 얼굴이 제법 이상했나 보다.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으니 몰골이 초췌해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내가 고개를 푹 숙인 걸 확인하고,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전무님!”
웅웅거리는 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지길 반복했다. 누군가 권이도에게 말을 거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는 들리지 않았다. 비가 우산을 때리는 소리, 젖은 흙을 밟는 소리, 권이도가 내뱉는 한숨 소리와 짜증 섞인 속삭임까지.
“고개 들지 말라니까.”
큼직한 손이 내 뒤통수를 단단히 고정했다. 얼핏 권이도의 비서로 추정되는 사람과 눈이 마주친 것 같기도 했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주변에 누군가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여긴 어떻게 알고 왔냐고, 그렇게 물을 생각이었다. 오늘 늦는다고 하지 않았냐고, 그렇게 물어볼 생각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등을 다독이는 순간, 터져 버린 설움이 그 모든 걸 앗아가 버렸다.
“나중에.”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손길은 우는 아이를 달래듯 조심스러웠다. 서툴기 그지없는 위로엔 아버지조차 보여 주지 않던 다정함이 서려 있었다. 조금은 서늘한 체온도, 차분히 내려앉는 페로몬도, 그 모든 것들이 눈가가 시큰할 정도로 따사로웠다.
“…….”
나는 원인 모를 눈물을 삼키며 이마를 그의 목덜미에 문질렀다. 꾸역꾸역 숨을 들이켜자, 권이도 특유의 체향이 한층 짙어졌다. 목구멍을 틀어막은 무언가가 히트 사이클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알 수 없었다.
“2층 아무도 못 올라오게 해.”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나를 끌어안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온실에서부터 집 안까지, 결코 가깝지 않은 거리를 쉬지 않고 걸어온 것이다. 그가 우성 알파의 근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향한 곳은 페로몬으로 가득 찬 자신의 방이었다. 평소에도 취할 것 같던 페로몬은 오늘따라 유독 더 예민하게 감겨들었다. 그는 헐떡거리는 나를 침대에 눕히고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겨 줬다.
“……흐.”
확실히, 우성은 우성이었다. 내가 조절하지 못하고 뿌린 페로몬도, 권이도의 페로몬에 조금씩 잡아먹혔다. 비를 맞은 나무처럼 묵직한 향기가 다디단 감미료라도 되는 양 끈적하게 얽혔다.
“억제제…….”
나는 다 쉬어빠진 목소리로 간신히 단어 하나를 내뱉었다. 지금이라도 말해야 부분이 있어서였는데, 미처 말을 잇기도 전에 그가 가볍게 대꾸했다.
“알아.”
뭘 안다는 걸까.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아니…….”
손을 뻗어 권이도의 소매를 그러쥐었다. 혹시라도 그가 나를 두고 가버릴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마비된 사고는,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가지 말고…….”
기다란 손가락에 얼기설기 깍지를 꼈다. 가지런하고 곧은 손가락은 보이는 것보다 굵기가 굵었다. 맨살이 맞닿은 탓일까. 다시금 뜨거워진 몸뚱이가 눈앞의 알파를 갈망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좀…….”
나는 그의 손을 가져와, 얼굴 가까이에 댄 채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나를 뿌리치는 대신 잡히지 않은 손으로 제 넥타이를 끌어 내렸다. 온몸을 적시듯 쏟아진 페로몬은 그 어느 때보다 적나라하게 피부에 들러붙었다.
“정세진 씨.”
가라앉은 목소리는 언뜻 경고처럼 들렸다.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권이도의 손가락에 입술을 문질렀다. 혀를 내어 한마디 정도를 핥아 올리자 더할 나위 없이 달큼한 페로몬이 느껴졌다.
아, 이렇게 좋은 거였구나. 알파 페로몬이, 이토록 중독성 넘치는 것이었구나.
“하아…….”
뚝, 무언가 끊기는 기분이었다. 그게 마지막 이성이었는지, 아니면 간신히 유지하던 수치였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순간 권이도의 페로몬 역시 한층 짙어졌다는 것 정도.
그를 붙잡지 않은 손으로 갑갑한 바지춤을 붙잡았다. 요령 없이 불룩한 부분을 주무르자, 아까부터 발기한 성기가 힘없이 사정했다. 울컥, 짙어진 페로몬에 권이도가 내 손목을 붙잡아 단단히 고정했다.
“잠까…… 읍…….”
눈 깜박할 새에 일어난 일이었다. 권이도가 나를 찍어누르듯 침대에 올라온 것. 멍하니 눈을 깜박이는 내게 망설임 없이 입을 맞춘 것. 빈틈없이 겹쳐진 입술로 말캉한 혀가 부드럽게 침입한 것.
“으응…….”
내 것인지, 아니면 권이도의 것인지 모를 타액이 흘러내렸다. 내 혀를 옭아맨 권이도는 입술로 직접 제 페로몬을 넘겨줬다. 입천장을 간지럽혔다가, 혀 아래쪽을 문지르는 감각에 허리 아래가 오싹오싹 떨렸다.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기분 좋은 키스였다. 비교적 서늘한 체온도, 서서히 뜨거워지는 입 안도, 모두 만족스럽기 그지없었다. 공기 중에 감도는 페로몬 역시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쾌감으로 다가왔다.
나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꾸물꾸물 하반신을 들썩였다. 손목이 고정된 탓에 움직일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었다. 또다시 부푼 아랫도리를 그에게 문지르자, 그가 목울대를 울리며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아!”
순간, 날카로운 송곳니가 내 혀를 깨물었다. 따끔, 느껴지는 통증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려 버렸다. 권이도는 달뜬 숨을 몰아쉬며 지그시 나를 내려다봤다.
“세진아.”
“…….”
가슴 언저리가 옥죄는 듯했다. 그의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그 장면이 너무도 현실감 없어서. 그리고 정체 모를 기시감이 자꾸만 목구멍 안쪽을 건드려서.
“충동질하지 마.”
그는 짧게 경고하고 다시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미처 감지 못한 시야로 내리깔린 속눈썹이 보였다. 단단히 붙잡았던 손목을 놓아준 그가 내 뺨을 살살 어루만졌다.
히트 사이클을 진정시키는 데는 알파 페로몬이 가장 좋다고 했던가. 나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른 채, 생명수처럼 페로몬을 받아 마셨다. 권이도는 나를 밀어내지 않았고, 대신 몇 번이고 호흡을 섞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