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Deja vu(4)
금요일 아침. 일기 예보에도 없던 거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공기 중의 습도가 높아졌기 때문일까, 권이도의 페로몬이 유달리 선명한 하루였다. 묵직하고 그윽한 페로몬은 아침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피부에 밀도 높게 들러붙었다.
“오늘은 좀 늦을지도 모릅니다.”
권이도는 오늘도 완벽한 차림으로 출근 준비를 마치고 현관 앞에 섰다. 짙은 회색의 원단에 허리선이 높게 빠진 정장은 푸른빛이 감도는 넥타이와 무척 잘 어울렸다. 수려한 눈매를 살짝 찌푸린 모습마저 잘 찍어 놓은 화보처럼 보였다.
“혹시 몰라서 2층은 다 비워 두라고 했으니까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전화해요.”
“……?”
2층은 왜? 그렇게 묻고 싶었으나 그보다 먼저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지난 며칠간 말해야지, 말해야지 하고 말하지 못한 것이었다.
“저 권이도 씨 번호 모릅니다.”
권이도의 번호를 모른다. 그는 연락하라고 말했으나, 내게 연락할 수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차를 보내겠다는 말은 김 실장이 전달했고, 그 이후엔 항상 한 집에 머물렀으니까. 고용인은 알지도 몰랐지만, 다른 이에게 묻기에도 모양새가 영 이상하지 않은가.
“내 번호를 모른다고요? 그럴 수가…….”
그는 말을 꺼내고도 잠깐 뒷말을 망설였다. 움찔, 찌푸린 얼굴에 아차 싶은 기색이 가득했다.
“……있겠군요.”
콩트도 아니고 도대체 무얼 하나 싶다. 내가 피식피식 웃자, 권이도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그는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하고 까딱 고갯짓을 보냈다.
“핸드폰 줘봐요.”
“아, 방에 놓고 와서…… 제가 알려 드릴게요.”
아침을 먹을 땐 핸드폰을 가지고 내려오지 않는다. 급하게 연락이 올 곳도 없고, 손에 들고 다니기에도 번거로우니까. 그렇다고 올라갔다 내려올 순 없으니 내 번호를 알려 주는 게 나을 터였다.
“핸드폰 주시면…….”
“…….”
“…….”
“…….”
“……권이도 씨?”
내밀었던 손을 살살 흔들어 보였다. 멀거니 내 손바닥을 보던 권이도가 가만히 눈가를 찌푸린다. 그는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내게 건네주는 대신 잠금을 해제했다. 지난번에 차에서 보았던 것과는 다른 기종이었다.
“번호.”
“010…….”
화면은 보이지 않았다. 열한 자리 숫자를 모두 부른 뒤에야 ‘뚜르르’ 미약한 신호음이 흘러나왔을 뿐. 두 번 묻지 않고 전화를 끊은 권이도가 핸드폰을 다시 안주머니에 넣었다.
“전화 걸어 놨으니까 이따 확인해요.”
“네, 뭐…….”
이 사람 지금, 저장 안 한 것 같은데. 그리 생각하기 무섭게 그가 핑계처럼 덧붙였다.
“차에서 저장할 겁니다.”
의심스러운 대답이었다. 표정은 덤덤하기 그지없는데, 무언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분위기가 그러했다. 포커페이스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 가끔은 이렇게 속내가 훤히 읽히곤 한다.
“최대한 빨리 올 테니까 방에서 쉬고 있어요. 정 힘들면 내 방에 들어가 있든가 하고. 가능하면 온실은 가지 말아요.”
권이도는 대답을 바라는 것처럼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마음 같아선 알겠다고 해주고 싶었지만, 떠오르는 건 오직 의문뿐이었다.
“오늘 뭐가 있습니까?”
마치 기념일을 까먹은 연인이 된 것 같았다. 권이도가 이러는 걸 보면 뭔가 있나 본데, 안타깝게도 짐작 가는 부분이 하나도 없다. 2층을 비워 놓을 이유는 무엇이며, 내가 힘들어서 권이도의 방에 갈 이유는 또 무엇인지.
“평소보다 더 걱정……하시는 것 같은데, 그럴 만한 일이 뭐가 있나 싶어서요.”
걱정. 그 단어를 말하고 나니 뒤늦게 알 것 같았다. 지금껏 권이도가 나를 돌아본 이유는, 미련이 아닌 걱정이었다는 사실을. 집 안에 있는 내게 그가 걱정할 만한 일은 단 하나도 없는데도.
“정세진 씨 오늘…….”
그는 무언가 갑갑한 듯 단정히 맨 넥타이를 만지작거렸다. 길고 곧은 손가락 아래, 두드러진 핏줄이 손등 위로 드러났다. 키가 커서 그런가, 손도 무척이나 커다랗다.
“히트 사이클, 아닙니까?”
“네?”
깜박, 시선이 마주쳤다. 짙은 고동색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나를 바라봤다. 얇게 쌍꺼풀진 눈매는 내리깔린 속눈썹마저 관능적으로 보였다.
“그게 무슨…….”
히트 사이클이라니, 갑자기? 그 생각과 함께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제가 남자라 임신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그래도 우성이니까 주기만 맞으면 괜찮을 겁니다. 마침 히트 사이클도 일주일밖에 안 남았고…….’
아, 그때 그거.
“오늘이 아니라 내일모레입니다. 이틀 뒤.”
나는 담담히 대꾸하며 머리로 날짜를 가늠했다. 우성은 대체로 주기가 정확했고, 나도 예상 날짜를 벗어난 적은 없었다. 그 덕에 지난 몇 년간 미리미리 회사에 병가를 낼 수 있었고.
“이틀?”
그런데 권이도는 어딘가 떨떠름한 기색으로 창밖을 내다봤다. 저 또한 우성이니 주기의 정확성을 모르지 않을 텐데, 비 내리는 풍경을 응시하는 시선이 영 개운치 못했다.
“……그렇군요.”
결국, 애매한 어투가 대화를 대충 마무리했다. 이제는 정말 나가야 할 시간인지, 그는 시계와 나를 번갈아 보고 현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마 중문 밖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에 있는 차고로 내려갈 터다.
“어쨌든… 연락해요. 이 번호는 바로 받으니까.”
아무래도, 세간에서 권이도를 잘못 평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매스컴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드높은 명성만큼이나 프라이드가 높고 까탈스러운 사람이랬으니. 하지만 지금의 권이도는 그러한 평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내가 지금 제안하는 걸로 보입니까?’
“…….”
음, 아예 멀진 않던가.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추적추적 빗방울이 떨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화창했는데. 소나기도 아닌 것이 갑작스럽기 그지없었다. 하늘이 새카만 걸 봐선 웬만해선 그칠 것 같지도 않다.
“온실에서 책이나 읽을까…….”
권이도가 없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지극히 한정적이었다. 방에서 쉬거나, 아니면 온실을 가꾸거나. 여차하면 수영장이나 피트니스룸에 가도 되지만, 내 소유도 아닌 공간을 마음대로 즐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방에 들러서 책과 핸드폰을 가지고 온실로 가야지. 어제 읽다 만 소설책을 마저 읽으면 얼추 두어 시간은 때울 수 있을 거다. 이후엔 꽃을 좀 돌보다가 막연히 비 구경이나 할 생각이었다.
‘오늘은 좀 늦을지도 모릅니다.’
또, 하루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괜스레 속이 갑갑했다. 이 집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권이도 없는 시간이 무료하게 느껴지는지. 아무리 인간이 적응의 동물이라지만, 이건 좀 과한 게 아닌가 싶다.
“얼마나 늦으려나.”
가능하면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 내일모레가 되어 히트 사이클이 오기 전에 권이도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으니. 내가 반편이 오메가라는 사실과, 그 또한 이미 눈치챘을지도 모를 그러한 하자를.
* * *
내가 머무는 권이도의 집은 그가 소유한 집 중 가장 으리으리한 저택이었다. 어릴 적 살던 본가보다 커다랬고, 전체를 살피려면 반나절이 꼬박 걸릴 만큼 광활했다. 모든 곳을 둘러보진 않았지만, 조경에 신경 쓴 정원조차 웬만한 공원만큼이나 넓었다.
정원을 지나 돌이 깔린 길을 따라 걸으면 권이도가 이야기한 온실이 나온다. 새하얀 나무로 프레임을 만들고 벽면과 천장을 유리로 가공해, 얼핏 카페로도 보일 만한 작은 집이었다. 꽃은 물론, 테이블과 의자도 있어서 시간을 보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우산 하나, 그리고 소설책 한 권.
오늘도 빗소리를 따라 도착한 온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화로웠다. 좌우로 아기자기한 꽃들이 심겨 있고, 조금 깊이 들어가면 허리께까지 오는 나무들도 있다. 중앙에 놓인 테이블은 상판을 대리석으로 만들어 화병과 스탠드 따위로 장식해 놓았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 온실에서 광합성을 하는 데 쓰곤 했다. 심어진 꽃을 관리할 필요도 없으니, 주변을 구경하다 적당히 책을 보며 시간을 죽이는 것이다. 대략 사흘 전부터는 권이도의 지시에 따라 고용인이 매일 다른 종류의 꽃차까지 가져다줬다.
“……어.”
물이 떨어지는 우산을 들고 몇 발짝 안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이 시간대엔 혼자여야 할 온실에서 정체 모를 인기척이 느껴졌다. 오늘은 비가 오니 다과도 필요 없다고 일러뒀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멈칫하기도 잠시. 고개를 돌리는 순간, 화단 근처에 쭈그리고 있던 상대와 눈이 마주쳤다.
“…….”
“…….”
어색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서로를 탐색하는 시선은 경계심과 호기심을 띠고 오랫동안 그 자리 그대로에 머물렀다. 어색한 공기 속,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나였다.
“……안녕하세요.”
흙이 묻은 목장갑과 지저분한 앞치마. 나이는 50쯤 되었을까. 서글서글한 인상에 피부색이 건강한 남자였다. 이 보안 좋은 집에 도둑이 들 리도 없고, 기껏 들어와 꽃을 훔쳐 갈 이유도 없으니 그가 누구인지는 뻔한 일이었다.
“처음 뵙네요. 온실 관리해 주시는 분이죠?”
“아이고.”
그는 앓는 소리를 내며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아이고, 아이고, 반복해서 내뱉는 모습이 무척이나 당황스러워 보였다. 손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 낸 그가 허겁지겁 주변에 늘어뜨린 물건을 정리했다.
“예, 예. 여기 관리하는 정원삽니다. 아휴, 오늘은 안 오실 거라고 들었는데…….”
갑작스러운 만남이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놀랄 일은 아니었다. 농땡이를 피우고 있었다면 모를까, 성실하게 흙을 정리하고 있지 않던가. 거기다 말하는 것만 들으면 내가 오지 않으리라 생각해서 화단을 가꾸고 있었다는 뉘앙스다.
“잠시만요, 금방 치울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아뇨, 천천히 하셔도…….”
“아이고, 아닙니다. 죄송해요.”
굽실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문득 얼마 전에 봤던 장면이 떠올랐다. 약혼식 예복을 맞추던 날, 민재를 향해 연신 사과를 건네던 직원들의 모습이.
“음…….”
나는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손에 든 우산으로 바닥을 긁어냈다. 온실에 가겠다는 말에 고용인이 제발 비를 맞지 말아 달라며 쥐여 준 장우산이었다. 새카맣고 커다란 우산은 사용한 흔적도 보이지 않는 새것이었다.
“아휴, 이게 왜 이래…….”
여기 사람들은, 왜 이렇게 나를 어려워하지.
처음 방을 안내해준 사람은 물론, 주방장부터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정원사까지. 권이도의 집에 있는 모든 고용인은 지나치게 나를 조심스러워하는 경향이 있었다. 내게 일정 거리 이상 접근하지 않거나, 우연히 마주치면 황급히 자리를 뜨는 모습을 보고 알 수 있었다.
“그…… 저는 가볼 테니까 편히 쉬십쇼. 실례 많았습니다.”
정원사는 금세 주변을 정리하고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손에는 도구들을 잔뜩 들고, 도망을 치듯 재빨리 걸음을 옮긴다. 온실 밖엔 여전히 거센 비가 내리는데, 우산이나 우비는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만요.”
“예?”
파드득, 정원사가 어깨를 들썩였다. 설마하니 불러 세울 줄 몰랐는지, 얼굴에도 잔뜩 당혹스러움이 서려 있다. 내가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무척이나 과한 반응이었다.
“비가 많이 오는데…… 우산 없으세요? 아니면 뭐 우비라든가.”
나는 부러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어쨌든 지나치게 긴장하니 조금이라도 경계심을 허물어야겠다는 의도에서였다. 정원사는 멋쩍게 눈가를 찌푸렸다가 흠흠 헛기침을 내뱉었다.
“예, 예. 제가 온실 담당이라 우비는 따로 없고…… 저 정도는 그냥 맞고 가면 됩니다.”
“올 때는 어떻게 오셨어요?”
“아, 그때는 비가 많이 안 와서…….”
결국, 올 때도 그냥 맞고 왔다는 말이었다. 우산을 쓰고 안 쓰고는 자기 마음이라지만, 지금 내리는 비는 맞으면서 가기엔 무리가 있었다.
“일단 들고 있는 것부터 정리하죠.”
나는 소설책과 우산을 옆구리에 끼우고 그의 손에 들린 도구를 전부 빼앗아 왔다. 정리를 도와주려고 그런 거였는데, 내 손이 닿자마자 그의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아이고, 흙이 묻으시는데! 아니, 이걸 어째…….”
고작 분무기와 모종삽 따위를 가져왔을 뿐인데, 그는 내가 똥이라도 만진 양 굴고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며 허둥대는 모양새가 보기에 썩 좋지는 않았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모습을 보니 괜히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제가 들고 있을 테니까 하나씩 가방에 넣으세요. 거기 다 들어가죠?”
“예, 예, 잠시만요……. 아이고…….”
그는 더듬거리는 손길로 제 허리에 찬 가방을 열어젖혔다. 부피가 꽤 된다 싶더니, 원예 도구를 전부 수납할 수 있는 가방이었나 보다. 이런 게 있으면 진작 여기다 넣을 것이지. 의미 없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 그는 빛과 같은 속도로 내 손에 있는 도구를 정리했다.
“아휴, 이 지저분한 걸…….”
그다지 지저분한 흙은 아니었다. 안쪽에 수도가 있으니 거기서 씻어 내면 되기도 했고.
“이제 이거 쓰고 가세요.”
거의 떠넘기다시피 그에게 억지로 우산을 쥐여 줬다. 목장갑을 끼고 있던 터라 새카만 손잡이에 마른 흙이 덕지덕지 묻었다. 정원사는 튀어나올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내 손과 얼굴을 번갈아 봤다.
“아니, 이걸 절 주시면 그, 사모…… 아니, 사장님은…….”
사장님이라. 고민의 흔적이 보이는 호칭이었다. 보아하니 베타 같은데, 남자가 남자의 약혼자라는 사실이 아무래도 영 어색하겠지.
“괜찮으니까 쓰고 가세요.”
“아무리 그래도 제가 어떻게…….”
“저는 데리러 오라고 할 사람이 있잖아요.”
일부러 주어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내가 연락을 넣으면, 그 많은 고용인 중 한 사람 정도는 나를 데리러 올 테니. 연락처를 모른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그건 정원사가 알 필요 없는 부분이었다.
“전 괜찮습니다.”
“아…….”
선한 눈동자가 데구루루 굴러갔다. 창밖을 내다봤다가, 다시 우산을 살펴봤다가. 곧바로 우산을 돌려주지 못한 건, 손잡이가 지저분해졌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 그래도 오늘 사장님이 늦으실 텐데…….”
“…….”
……사장님?
“물론, 부르면 오시겠지만, 아니, 그래도…….”
어버버 흐리는 말들은 잘 들리지 않았다. 사장님, 그 한마디에 한가득 의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설마하니 나를 부르는 건 아닐 테고. 그러니까, 내가 부르면 권이도가 날 데리러 올 거라고?
“……자꾸 그러시면 저도 민망해집니다. 정말 괜찮으니까 가보세요.”
내가 강경히 얘기하자 그가 입을 딱 다물었다. 우산은 다음에 달라는 말에는 무어라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책을 읽어야겠다는 말로 그를 내쫓고, 손에 묻은 흙을 탁탁 털어 냈다.
‘오늘은 안 오실 거라고 들었는데…….’
그 말을 누구에게 들었을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온실에 올지 안 올지, 그 사실을 알 만한 상대는 오로지 한 사람뿐이었으니.
“내 이미지가 어떻길래…….”
그러고 보면, 이 집에 처음 온 날에도 권이도는 고용인에게 나를 귀찮게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 한마디로 모든 이들이 조심할 리는 없으니, 그에게 무언가 다른 언질을 들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애초에 그들이 나를 피하는 모습은 무시보단 꺼리는 느낌에 가까웠다. 내게 무례를 저지르면 큰일이라도 나듯, 한껏 날을 세운 상태였단 말이다.
“따돌림…… 뭐 그런 건 아닌가 본데.”
분위기를 읽는 데에는 익숙했다. 집에서, 그리고 회사에서. 나는 온갖 종류의 적대심과 마주했다.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이질감과 낙하산이라는 낙인은 지우려야 지울 수 없는 흉터와도 같았다.
그러한 과정에서 배운 건, 오로지 나를 향한 평가를 면밀히 살피는 법뿐이었다. 나를 어려워하는지, 아니면 불편해하는지, 혹은 싫어하는지 따위의 것들. 내 위치에 맞는 태도를 보이기 위해서였고, 내 주제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집에서, 나는 정말 약혼자 대우를 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