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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억의 끝에 (8)화 (8/131)

8화. Deja vu(3)

이 결혼은 달콤한 사랑의 결실이 아니었다. 기업과 기업 사이의 약속이었고, 갑을이 분명한 계약이었다. 그가 원하는 것도 다정한 부부가 아닌 똑똑한 후계일 게 분명했다.

“제가 남자라 임신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그래도 우성이니까 주기만 맞으면 괜찮을 겁니다. 마침 히트 사이클도 일주일밖에 안 남았고, 병 같은 것도 따로 없습니다.”

오메가의 임신 확률은 성별에 따라, 그리고 우열에 따라 달라진다. 남자보단 여자가 높고, 열성보단 우성이 높은 게 보통이었다. 나는 남자였지만 동시에 우성이었으니 하자는 있어도 임신엔 문제가 없을 터였다.

“권이도 씨 러트에 맞추는 게 좋긴 한데, 약을 쓰는 건…….”

“정세진 씨.”

권이도는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화가 난 것 같진 않았고, 기분이 상한 것처럼 보이긴 했다.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그가 입매를 늘어뜨렸다.

“그때 섹스하자는 말을 낭만 없이 하는군요.”

“…….”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지금 하셔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걸 입 밖에 낼 만큼 눈치 없지 못했다. 무언가 심사가 뒤틀린 건 분명한데, 그게 그의 호의를 매도했기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친절하게 대해 주시니 확실히 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나는 그 말 한마디를 내뱉고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입 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그러나 상냥하게 굴던 권이도보다 이쪽이 더 익숙한 건 사실이었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정세진 씨가 사과할 일은 아닙니다.”

그는 눈가를 찌푸린 채 단호하게 내 말을 부정했다. 그럼 표정이라도 좀 풀면 좋으련만, 여전히 심기가 불편한 얼굴이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그는 나를 보며 물었다.

“아이를 좋아합니까?”

“네, 뭐……. 좋아하는 편입니다.”

아이라면 꽤 예전부터 좋아했다. 간혹 부하직원이 아이를 데려오면 그 사랑스러움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린아이 특유의 순수함은 보고 있는 나조차도 기분이 좋아지곤 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윤 대리 아들이 곧 유치원에 간다던데. 그 앙증맞은 모습을 떠올리자 입가가 느슨하게 풀렸다.

“그래요, 정세진 씨라면 좋은 아빠가 되겠죠.”

권이도는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분위기를 환기했다. 여유롭게 다리를 꼬며 양손을 무릎 위에 얹기도 했다. 방금 샤워하고 나왔음에도 왼손엔 나와의 약혼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정세진 씨 마음은 이해하지만. 저는 아직 좋은 아빠가 될 자신이 없군요.”

“…….”

혹시, 그렇지 않다고 말해야 할 타이밍일까. 어차피 육아는 권이도의 역할이 아닐 텐데.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권이도는 여유로운 낯으로 뒷말을 더 했다.

“그렇다고 내 애를 다른 사람 손에 맡길 생각도 없고…… 자녀 계획은 정식으로 결혼한 뒤에 다시 정했으면 합니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럼 결혼은 언제 하는지, 내가 집으로 들어올 이유가 있었는지, 그런 것들을 물어볼 수도 없었다. 내가 눈을 깜박이는 순간, 그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 때문이었다.

“정원에 온실이 있습니다.”

짙은 눈동자가 얘기했다. 그와 관련된 주제는 여기서 끝이라고.

“관리인을 시켜서 꽃 같은 걸 심어 놨는데, 원하는 게 있으면 직접 심어도 좋아요.”

“……꽃 말씀입니까?”

“네, 기르는 건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됩니다.”

“…….”

“좋아하잖아요? 꽃.”

머리가 복잡했다. 말문이 막히는 경험은 살면서 몇 번 해본 적이 없는데, 권이도를 만난 이후 자꾸만 이런 기분을 느끼곤 한다. 속이 울렁거리고 목구멍이 옥죄는 감각은 일종의 위기감과 비슷했다.

“네…… 좋아합니다.”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볼까?

냉정히 생각하면 그리 이상할 거 없는 일이었다. 나는 권이도가 선물한 꽃다발을 소중히 챙겨 왔고, 꽃구경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대답했다. 약간의 관심만 있다면 내 기호를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단 말이다.

하나 그렇게 넘겨짚기엔 이런저런 것들이 마음에 걸렸다. 가령 그가 준비한 은방울꽃이라거나, 내 입맛에 맞는 식사라거나, 정원에 마련된 온실 같은 것들.

나는 조건 없는 다정함에 기뻐할 만큼 무지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 결혼은 적선이 아니고 권이도는 이해가 맞아야 움직이는 사업가다. 그가 내게 바라는 게 있는 건 분명한데,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설명이 부족했군요.”

멍하니 있는 내게 권이도가 숨결 같은 목소리로 운을 뗐다. 무릎 위에 얹어둔 손가락을 톡톡 움직이기도 했다. 별거 아닌 동작조차 그가 권이도이기 때문에 유려해 보였다.

“조건이 없다고는 안 했습니다.”

“……예?”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그가 내뱉은 말 때문이 아니라, 온갖 감정으로 뒤섞인 시선 때문에.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눈빛은 그가 두어 번 눈을 깜박임과 동시에 사라져 버렸다.

“서류 정리가 끝나기도 전에 임신부터 시킬 생각은 없습니다. 날짜에 맞춰 의무적으로 섹스하는 취미도 없고, 정세진 씨에게 그런 걸 바라지도 않아요.”

“그럼 원하시는 건…….”

“정세진 씨.”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단순히 이름이 불렸을 뿐인데 불호령이라도 들은 양 긴장이 됐다. 권이도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무미건조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언제부터 그렇게 이 결혼에 관심이 많았습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질문은 아니었다. 마냥 방관하던 나를 질책하는 말이라면 모를까.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입을 다물자, 그가 차분히 입술을 움직였다.

“조건 없는 친절이 부담스러운가 본데, 그럴 거면 이 약혼 자체를 거절했어야죠.”

“…….”

“정세진 씨처럼 똑똑한 사람이 이게 수지가 안 맞는 결혼이라는 걸 모를 리도 없고, 이제 와 그러기엔 늦은 감이 있군요.”

권이도의 말대로 결혼 자체는 일방적으로 한쪽만 유리한 승부였다. 선호그룹과 연이 닿은 것만으로 해신은 이미 충분히 이득을 본 셈이었으니. 그렇기에 대가가 따르리라 생각했고, 나는 그걸 ‘우성 형질을 낳되 언제든 팽할 수 있는 다루기 쉬운 오메가’라고 결론 내렸다.

“고작 후계자 따위를 원했다면 정세진 씨보다 좋은 조건의 오메가가 많았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딱 한 마디로 내가 세운 가정을 와르르 무너뜨렸다. 미처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고, 내가 가장 먼저 가졌던 최초의 의문이었다.

권이도는, 왜 많고 많은 기업 중 굳이 다 망해 가는 해신을 선택했을까.

“간단한 얘기예요.”

깊어지려던 생각은 권이도의 한마디로 끊겨 버렸다. 절묘하게 맞닥뜨린 시선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내게 고정됐다. 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잘 그려 놓은 그림이라도 해도 믿을 법한 모습이었다.

“나는 바라는 게 있지만 그걸 지금 말하고 싶지 않고, 원하는 걸 얻기 전까진 정세진 씨가 내가 주는 모든 걸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얼핏 듣기에도 온갖 모순으로 가득한 말이었다. 내게 바라는 게 있다면 그는 아무런 대가 없이 손짓 하나로 모든 걸 취할 수 있는 사람이다. 괜히 시간 아깝게, 이것저것 쥐여 주며 타이밍을 잡아야 할 필요가 없단 말이다.

“아니면, 받아 달라고 애걸하길 바랍니까?”

집요하게 들여다보는 시선은 관찰과 경계, 혹은 약간의 미련마저 느껴졌다. 여태껏 친절하게 굴었으면서, 어조는 아버지를 대하던 모습처럼 거만하다. 고압적이고 오만한 태도는 기분이 나쁘다기보단 당연해 보였다.

“……아뇨,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 모습을 보자, 머릿속이 깨끗하게 정리됐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이 모든 게 결국엔 부질없는 과거가 되리란 확신 때문이었다. 어차피 쓸모를 다 하면 권이도는 미련 없이 나를 버릴 텐데. 그의 의도를 파악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권이도 씨 말씀 이해했습니다. 제가 너무 성급하게 굴었어요.”

때로는 포기가 그 무엇보다 나은 해결책이 되곤 한다. 그간 착한 아들로 지내며 내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던 단 하나의 방법이었다. 너무 많은 사실을 직시할 필요도, 사소한 것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다. 적당히 흘러가는 대로 지내는 게 나라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생존 방법이었다.

“……이해가 빨라서 좋군요.”

권이도는 지나치게 사무적인 어투로 대꾸했다. 말로는 다행이라고 하면서 표정은 전혀 달가워 보이지 않았다. 잠깐 눈을 내리깔았던 그가 별안간 조그만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말 나온 김에, 가볍게 차부터 시작하죠.”

차? 그렇게 물을 필요는 없었다. 어느새 입매를 말아 올린 그가 나긋나긋 이야기한 것이다.

“일주일 내로 정세진 씨가 갖고 싶은 차를 세 대 골라오는 거로.”

장난감을 사주겠다는 듯 가벼운 어조였다. 내 시선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그는 너그러운 얼굴로 고개를 까딱였다.

“세 대보다 많아도 괜찮습니다.”

“……그 차라는 게, 설마 자동차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럼?”

내심 아니길 바라고 건넨 질문이었다. 그렇다고 권이도가 코웃음을 칠 줄은 몰랐지만.

“내가 설마 녹차 따위를 사줄까요?”

그는 배포를 좀 키워 보라며 친히 조언까지 덧붙였다. 자칫 무시처럼 들리는 말엔 약간의 뻔뻔함이 묻어났다. 내가 눈가를 찌푸리자, 그가 아무렇지 않은 투로 이야기했다.

“종류는 상관없지만 적어도 내 얼굴에 먹칠은 하지 말아야겠죠.”

“…….”

“기사가 필요하면 함께 붙여 드리겠습니다.”

도무지 거절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권이도는 완고했고, 우리는 앞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이제 와 필요 없다고 말하면 내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할 터였다.

“대답은?”

“그…….”

나는 눈을 내리깔고 조심스레 말을 골랐다. 너그러운 눈매가 차분히 내 뒷말을 기다렸다. 어찌 보면 기대하는 시선 같기도 했다.

“세 대는,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많다고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고작 세 대가? 그리 묻는 목소리에도 의아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기야, 권이도가 소유한 차만 두 자릿수를 웃돌 텐데. 이 정도 소비는 보잘것없이 느껴지겠지.

“차에 관심이 없어서요.”

부담스럽다기보단 번거로운 쪽에 가까웠다. 그다지 갖고 싶지 않았고, 애초에 타고 다닐 곳도 없었다. 게다가 이 결혼 생활이 끝나면 어디에 처분하기도 애매하지 않은가.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권이도 씨가 좋아하는 차로 한 대만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기사도 필요 없고요. 제가 면허가 있거든요.”

최대한 권이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이야기했다. 시선을 맞추고 눈을 휘며 살갑게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상냥하게 웃는 것쯤은 숨을 쉬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이왕 선물해 주시는 거니 잘 쓰면 좋잖아요.”

“…….”

권이도는 나직이 침음하며 턱 언저리를 만지작거렸다. 고민하는 것처럼 가늘어진 눈매가 내 얼굴을 집요하게 훑어본다. 약간의 간격을 두고 그가 느긋이 입매를 말아 올렸다.

“협상을 잘하는군요.”

여유로운 미소였다. 성과가 나쁘진 않구나. 나는 그 사실에 안도하며 굳었던 어깨를 늘어뜨렸다. 별거하지도 않았는데 권이도와 있으면 자꾸만 긴장감이 들곤 한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습니다. 시간도 늦었는데, 남은 얘기는 내일 하죠.”

권이도는 습관적으로 손목을 확인했다가 시계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눈가를 찌푸렸다. 상황에 맞지 않게 ‘그’ 권이도도 실수를 한단 사실에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입가를 가린 나를 보며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실소했다.

“……그만 일어납시다.”

* * *

권이도와의 대화는 논점을 중심에 놓고 그 주변을 빙빙 도는 것과 비슷했다. 그는 원하는 걸 말하지 않았고 나는 아주 조금의 힌트도 얻지 못한 채 방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말해 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면 그는 아예 말해 줄 생각 자체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나마 알아낸 건, 그가 바라는 게 특이 형질로 태어날 후계가 아니라는 사실 정도일까. 다리나 벌리고 살지 않아 다행인 건지, 오메가 구실마저 못하게 돼서 불안해해야 하는 건지. 어느 쪽이건 그다지 달가운 상황은 아니었다.

“속을 모르겠네…….”

나는 김 실장이 가져다준 수면제를 먹고 푹신한 침대에 누워 권이도를 떠올렸다. 저녁을 혼자 먹게 해서 미안하다는 권이도. 꽃이 시들면 다시 사주겠다는 권이도. 나를 위해 온실을 마련하고 이제는 차까지 사주겠다는 권이도.

보는 사람이 없음에도 권이도는 나와의 약혼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있었다. 내게 말을 낮추지도 않았고, 폭언을 퍼붓거나 강압적으로 굴지도 않았다. 이따금 엷은 미소를 지을 때면 내게 호의에 가까운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

거기까지 생각하니 잠깐 말도 안 되는 가정이 떠올랐다. 혹시라도 그가 내게 호감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비현실적인 가정이.

물론 그러한 착각은 아주 짧은 찰나에 불과했다. 권이도 정도 되는 사람이 뭐하러 내게 마음을 품는단 말인가. 무언가 교류가 있었으면 모를까, 약혼식을 기점으로 처음 만난 사이인데.

가만히 눈을 감자, 그윽한 나무 냄새가 한가득 느껴졌다. 그의 방에 오래 머문 탓에 온몸이 권이도의 페로몬으로 범벅이었다. 가을비가 내리는 숲에 서 있는 것처럼, 묵직한 향기가 숨결에 스며들었다.

신기한 기분이었다. 익숙할 리 없는 페로몬에 불쾌함은커녕 안정감을 느낀다는 게. 가슴 언저리를 포근히 감싸, 고요한 체향에 흠뻑 빠져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든다는 게.

금세 잠기운이 쏟아졌다. 하루를 꼬박 지새운 몸은 밀려드는 잠의 수마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깜박깜박 멀어지는 의식 속에, 오늘은 악몽을 꾸지 않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 * *

그 후로 며칠간, 나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권이도와 아침을 함께했다. 매일 같은 시간에 기상하는 권이도는 편한 차림새인 나와 달리 모델처럼 멋들어진 모습으로 식탁에 앉곤 했다. 와이셔츠에 단추를 굳게 잠근 베스트는, 니트 따위를 입고 있는 내겐 과분한 감이 있었다.

그는 무언가 먹는 모습마저 우아했는데, 특히 젓가락을 쥐는 모양새가 교과서에 나올 것처럼 정석적이었다. 반찬을 옮기는 단순한 동작이 그토록 품위 넘칠 수 있다니.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간간이 시선을 빼앗길 정도였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요.’

출근을 하기 전, 권이도가 늘 건네는 말이었다. 경호원과 고용인이 빼곡한 집에 일이 있어 봐야 얼마나 있으리라고. 그 말을 하고도 두어 번 고개를 돌리는 모양새는 마치 미련처럼 보였다.

어쨌든 이러한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권이도에 대해 여러 가지 부분을 알게 됐다. 그가 평소엔 정말 표정이 없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대화할 땐 종종 웃는다는 것, 고용인이 그를 무서워한다는 것과 그의 말이 이 집에선 곧 법이라는 것.

그리고 혼자 밥을 먹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이 한낱 빈말은 아니었다는 것까지.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비단 아침뿐만은 아니었다. 권이도는 매시간 칼 같이 퇴근해, 샤워를 마치고 나와의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식사가 모두 끝난 뒤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의 방에서 대화까지 나누었다.

‘오늘은 뭘 했어요?’

이야기의 주제는 대개 낮 동안 내가 무얼 했는지에 관해서였다. 정원을 산책하고 책을 읽는 게 전부인 일상을 그는 매일 다른 얘기를 듣는 양 흥미로워했다. 특히, 내가 온실을 언급하면 그 냉랭한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는 모습이 썩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괜찮은 생활이었다. 그의 집에 들어온 이후 컨디션은 가히 최상에 가까웠다. 그간 꿔왔던 악몽을 꾸지 않았고, 스트레스를 받을 만한 상황도 생기지 않았다. 늘 챙겨 먹던 수면제 한 알보다, 두어 시간 묻혀 오는 권이도의 페로몬이 숙면에는 훨씬 도움이 됐다.

그렇게 딱 나흘 만에 나는 권이도의 퇴근을 기다리는 약혼자가 됐다. 언제 눈치를 봤냐는 듯, 그와의 대화 역시 즐겁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넓은 집에 나와 교류할 상대는 오로지 권이도밖에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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