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Deja vu(2)
식사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대화는 없지만 어색하지 않았고 배고프지 않았음에도 요리는 입에 딱 들어맞았다. 너무 자극적이지 않게 준비한 메뉴들은 아침 겸 점심으로 빈속에 먹기에도 적당했다.
권이도는 정말 식사만 하고 집을 떠났는데, 집을 나서기 전 고용인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고 갔다. 얼핏 들어보니 내게 방을 안내해 주고 귀찮게 하지 말라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이쪽 방을 쓰시면 됩니다.”
권이도의 집은 위로 3층 지하로는 1층이 있는 단독 주택으로, 내가 쓸 곳은 정원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2층 맨 끝 방이었다. 무뚝뚝한 얼굴의 고용인은 친히 문까지 열어 주고 안에 있는 물건을 마음껏 사용해도 된다는 말과 함께 방을 떠나 버렸다.
“……호화롭네.”
딱, 처음 느끼는 감상이 그거였다. 침실과 소파를 분리해 놓은 건 물론, 안쪽에는 개인 욕실과 드레스룸까지 있다. 방이라기보단 또 하나의 집 같은 장소. 골방을 주리라곤 생각지 않았지만, 이토록 사치스러운 공간이 제공될 줄은 몰랐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방 안쪽으로 들어왔다. 전체적으로 새하얀 색감의 인테리어는 원래 살던 집보다 안락하고 포근한 분위기를 풍겼다. 하늘하늘한 커튼이나 구석에 장식된 화분 따위에서 작은 것 하나하나 공들인 티가 난다.
내가 이런 걸 좋아했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모든 가구가 다 취향이었다. 하다 못 해 푹신하지만 무게감 있는 침구까지도. 센스가 좋은 건지, 아니면 운 좋게 맞아떨어진 건지. 약혼식 때부터 느꼈지만, 이런저런 놀라움의 연속이다.
드레스룸에 다다라서도 내 감상은 변하지 않았다. 줄지어 걸린 옷가지는 둘째치고, 서랍 한 편엔 손목시계와 넥타이핀까지 있다. 설마하니 잘못 가져다 놓은 건 아닐 테고. 내로라하는 고가 브랜드를 이렇게 갖춰 놓을 이유가 뭐가 있을까.
“어차피 쓰지도 않을 걸…….”
이제는 백수가 되어 버린 내겐 너무도 과분한 물건이었다. 아니, 원래도 이토록 비싼 액세서리엔 관심이 없긴 했지만.
그다음 향한 곳은 커다란 욕조가 있는 욕실이었다. 입욕제를 종류별로 두었다는 말대로 찬장에 여러 목욕용품이 줄지어 나열돼 있었다. 동그란 건 거품이 나는 제품인가 본데…… 유리병에 담긴 건 소금인가?
“…….”
멍하니 욕조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그 언저리를 손으로 짚자 대리석 특유의 찬 기운이 훅 올라왔다. 그대로 고개를 들어 올리자 천장에 달린 유리창 너머 탁 트인 하늘까지 보였다.
권이도의 말대로 입욕제를 풀고 몸이라도 담그고 싶은 욕조였다. 마침 날씨가 좋으니 하늘만 구경해도 시간은 참 빠르게 흐르리라. 아니, 반대로 비가 오더라도 물방울이 튀는 것조차 예쁠지도 몰랐다.
‘욕조에서 하늘이 보이면 좋겠어요.’
내가 그걸…… 누구한테 말했더라.
손을 쭉 뻗어 푸르른 풍경을 반쯤 가려 봤다. 손가락 사이로 나타난 구름은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창문 바깥으로 흘러갔다. 얼핏 떠올랐던 기억 역시 눈을 깜박임과 동시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팔자 좋다.”
여유로운 한때였다. 아무것도 신경 쓸 필요 없이 맘 편히 쉬기만 하면 되는 그런 시간. 때 되면 차려 주는 밥을 먹고, 퇴근한 권이도를 맞이하면 되는 무탈한 하루.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미래가 마치 어제 일처럼 구체적으로 그려졌다.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뻔하디뻔한 지루함의 연속이었다. 나는 시린 눈을 꾹 감았다 뜨며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취미라도 하나 만들어 둘 걸 그랬다고.
* * *
권이도는 밤이 늦을 무렵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소설책을 반쯤 읽을 즈음이었고, 김 실장이 유리돔을 씌운 꽃을 가져다준 다음이었다. 집을 나설 때처럼 완벽한 차림으로 돌아온 그는 현관에 선 나를 보며 잠깐 멈칫했다.
“…….”
“……다녀오셨어요?”
어색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뜻 모를 시선을 보내던 권이도가 입술을 살짝 달싹였다. 무언가 말할 것처럼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기까지. 찰나의 순간이 억겁과도 같았다.
“왜.”
“…….”
“왜 나와 있습니까?”
“……?”
깜박, 눈을 감았다가 떴다. ‘오셨다는 말을 들어서요.’ 그리 대꾸했으나, 권이도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속눈썹을 가늘게 떨었을 뿐.
한참이 지난 뒤에야 그는 특유의 고상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굳이 마중을 나올 필요는 없습니다.”
고용인에게 가방을 건네주는 모습이 어쩐지 불쾌해 보였다. 미묘하게 찌푸린 미간마저 그가 기분이 상했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나는 왼손에 낀 반지를 응시한 채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하시면 내일부턴 방에 있겠습니다.”
그냥, 최대한 살갑게 굴려고 했을 뿐이다. 우선은 약혼자이니 무언가 친근한 모습을 보여 줘야 할 것 같아서. 그래서 고용인에게 언질을 해두었고, 권이도가 왔다는 소식에 방에서 나온 참이었다.
그런데 이런 걸 바란 게 아니라면 얌전히 방에서 책이나 보는 쪽이…….
“불편한 건 아닙니다.”
“…….”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언제 표정을 구겼냐는 듯, 권이도가 심각한 얼굴로 나를 마주 봤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다시 한번 강경하게 덧붙인다.
“불편하지 않아요.”
“네…… 뭐.”
두 번이나 말할 필요가 있나.
“그럼 마중 나와도 되겠네요.”
지그시 시선을 맞추고 습관적으로 눈을 휘었다. 권이도는 한결 표정을 누그러뜨리곤 나를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얼핏 보이는 입꼬리가 조금 올라간 것 같다면 착각일까.
권이도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가는 내내 그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바른 걸음걸이와 곧은 어깨가 그의 완벽한 성미를 보여 주는 듯했다. 일을 다녀왔으니 지칠 법도 한데. 어쩜 머리카락 하나 흐트러진 구석이 없다.
그가 걸음을 멈춘 건 계단과 멀지 않은 방문 앞에서였다. 그를 지나칠지, 아니면 함께 들어가야 할지. 그걸 고민하는 내게 나직한 부름이 건네졌다.
“정세진 씨.”
“네?”
새카만 시선이 내 몸쪽을 향했다.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살펴본 그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방에 있는 옷이 별로던가요?”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으나, 그 속내를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지금 입은 옷들은 방에 준비된 게 아닌 캐리어에 챙겨 온 내 것이었으니. 옷이 그렇게 많았는데 이게 그중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새삼 그의 눈썰미가 감탄스러웠다.
“그냥 입던 옷이 편해서요.”
권이도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래도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나 보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 지었다.
“옷은 마음에 듭니다. 아, 시계도요.”
“…….”
그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 도드라진 목울대가 한번 가볍게 움직였다.
“괜한 질문을 했군요. 입어 보지도 않았을 텐데.”
……어떻게 알았지?
“사이즈 맞게 사둔 거니까 가능한 한 입도록 해요. 그 방에 있는 모든 물건은 정세진 씨 겁니다.”
권이도는 그리 말하고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누가 봐도 대화를 끝내려는 모양새라, 나도 그를 지나쳐 방으로 가려던 찰나였다.
“혹시 바쁩니까?”
답이 정해진 질문이었다. ‘바쁘겠습니까?’ 그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권이도는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 방문을 반쯤 열어젖혔다.
“안 바쁘면 들어오지 그래요.”
열린 문틈으로 짙은 페로몬이 흘러나왔다. 우성 알파가 머무는 공간답게 취할 것처럼 묵직한 향이었다.
“잠깐 얘기나 하죠.”
“…….”
나는 권이도를 한 번, 방문을 한 번 쳐다보고 남몰래 숨을 가다듬었다. 이렇게 야심한 시각에 알파와 오메가가 한 방에서 나눌 대화는 뻔하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 * *
권이도의 방은 내 방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커다란 방엔 침대와 소파밖에 없었고, 생활감이라곤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모노톤의 침구와 단조로운 인테리어는 깔끔하다 못해 삭막하기까지 했다.
권이도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샤워부터 하겠다며 욕실로 들어갔다. 내게는 편히 앉아 있으라고 말했는데, 이 넓은 방에서 편한 공간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나는 소파와 침대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욕실이 잘 보이는 소파에 앉았다.
“페로몬…….”
누가 우성 아니랄까 봐, 방 안 가득 알파 페로몬이 넘쳐 났다. 웬만한 오메가였다면 개다래나무 향에 취한 고양이처럼 해롱거렸을 터였다. 권이도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텐데. 무슨 생각으로 여유롭게 나를 두고 들어갔을까.
“뭐…… 씻으면 좋지.”
나는 다리를 꼬고 멀거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히 알면서도, 그다지 긴장은 되지 않았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빨리 끝내 버리는 게 나을 테니까.
그래도 가능성을 높이려면 히트 사이클 때 하는 편이 좋지 않나.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느릿느릿 고개를 돌린 곳엔 아까의 정장 대신 편한 옷차림을 한 권이도가 보였다. 향긋한 체취 때문인지, 아니면 자연스레 내려온 앞머리 때문인지. 분위기가 다른 사람 같았다.
“차라도 드리고 들어갈 걸 그랬군요.”
권이도는 느긋하게 걸어와 내 대각선 소파에 앉았다. 거리가 가까워지자마자 들이마신 숨결에 여러 냄새가 섞였다. 페로몬은 우드 계열인데, 샴푸는 코튼 계열이라니. 썩 나쁘지 않은 조합이다.
“저녁은?”
“먹었습니다.”
고용인이 차려 준 식사는 역시나 내 입맛을 전적으로 고려한 메뉴였다. 한식 위주의 식단에 국물이 자작한 갈비찜이 있었고, 반찬의 가짓수도 많았다. 심심하게 무친 나물이나 달큼한 매실차도 웬만한 한정식집 버금가게 맛있었다.
“주방장이 요리를 잘하더라고요.”
“다행이네요. 걱정했는데.”
걱정?
“내일부턴 오늘처럼 늦진 않을 겁니다. 별일 없으면 저녁을 같이하죠.”
권이도는 그렇게 말하고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조각처럼 완벽한 외모가 현실감을 앗아 갔다. 그건, 뒤이어 흘러나온 목소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혼자 먹게 해서 미안합니다.”
“……예?”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다른 무엇도 아닌 그의 입에서 나온 사과 때문에. 살다 살다 선호그룹 차남에게 미안하단 말을 들을 줄은 몰랐는데…… 그것도 고작 식사를 혼자 했다는 이유로.
“아뇨…… 괜찮습니다. 바쁘셔서 그런 걸…….”
떠듬떠듬 입술을 움직였다. 손이라도 내젓고 싶었지만, 주먹을 꾹 쥐는 것으로 참아 냈다. 무표정한 얼굴이 조금이지만 시무룩해 보여서, 안 어울리게 귀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정말 괜찮습니다. 제가 어린애도 아니고.”
밥을 혼자 먹는 것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겸상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가 이토록 겸연쩍은 표정을 지을 일이 아니란 말이다.
“굳이 무리하실 필요…….”
“무리하는 거 아닙니다.”
권이도는 단호한 대답과 함께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마중이 불편하지 않다던, 아까의 그 표정 같았다. 안 그렇게 생겨서, 혹시 부부 관계에 환상이라도 있는 걸까.
“그러지 말고…… 차라리 아침은 어떠세요?”
눈가를 찡긋하며 말하자 그가 선선히 되물었다. 아침? 그렇게 묻는 목소리에 의아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저녁은 권이도 씨 일정에 지장이 갈 수도 있으니까, 오늘처럼 아침을 같이 먹죠.”
“…….”
“저도 한 끼는 같이하는 게 좋고…….”
뒷말은 반쯤 빈말이었다. 굳이 따지면 누군가와 함께 먹는 편이 좋지만, 상대가 권이도라면 사양하고 싶었다. 오늘은 어색하지 않았을지라도 다음에도 편하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그게 배웅해드리기도 편하니까요.”
“…….”
말을 끝냈음에도 권이도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고요한 눈동자로 가만히 내 얼굴을 마주 봤을 뿐. 말실수했나? 그런 생각이 들 즈음에야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여전히…….”
상냥하군요.
뒷말은 아주 조그맣게 흘러나왔다. ‘여전히’라. 내가 언제 또 권이도에게 상냥하게 굴었더라. 정말 상냥한 건 내가 아니라 그쪽 같은데.
“괜히 무리해서 일어날 필요는 없습니다. 아침엔 푹 자도록 해요.”
“아, 원래 아침잠이 없는 편이라…… 별로 무리하는 건 아닙니다.”
가뜩이나 불면증까지 있는데 한가로이 늦잠이나 잘 생각은 없었다. 출근하던 버릇이 있어서 새벽이면 눈이 떠지기도 했고.
“……그래요, 그럼.”
권이도는 헛기침을 내뱉으며 대화를 대충 마무리했다. 아까와 다름없는 무표정이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기뻐 보였다. 아무래도 배우자에 대한 환상이 있는 게 분명했다.
“잠은 좀 잤습니까?”
이야기는 금세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내가 대답을 망설이자, 권이도는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가 바뀌었으니 적응까진 시간이 걸리겠죠.”
딱히 그래서 안 잔 건 아니었건만. 마땅히 핑계 댈 말도 없어서 괜히 뻑뻑한 눈두덩을 문질렀다. 권이도는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가 아차 싶은 얼굴로 다시 거둬들였다.
“…저녁에 정세진 씨 비서가 왔었다죠.”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어투였다. 마치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는 것처럼. 나는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놓고 온 물건이 있어서 가져다줬습니다.”
“놓고 온 물건이라면…….”
“권이도 씨가 주신 꽃다발이요.”
중요한 건 수면제 쪽이었지만, 굳이 그 사실을 말하지는 않았다. 불면증이 있다고 밝혀 봐야 내게 득이 될 건 없으니까.
“오래 보관할 수 있게 가공해 놨거든요. 방에 있으니까 한번 보러 오세요.”
살갑게 웃으며 말했는데, 권이도의 표정이 영 이상했다. 그는 제 입가를 가렸다가 애매하게 고개를 돌린 채 눈가를 찌푸렸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다음에 또 줄 테니까, 만약 시들면 버리도록 해요.”
“……예, 감사합니다.”
웬만하면 무언가 더 받고 싶진 않은데. 그게 꽃이건 아니면 다른 물건이건.
“남는 시간엔 뭘 했습니까?”
“별건 안 했고, 방에 책이 있길래 좀 읽었습니다.”
“책이라면, 어떤 걸?”
“그냥 소설책을…….”
고분고분 대답하다 보니 무언가 이상했다. 이 사람, 정말 ‘대화’나 하자고 나를 부른 건가?
“방 위치는 불편하지 않고?”
“네, 괜찮습니다.”
“다행이네요.”
특유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라디오를 틀어 놓은 것처럼 감미로웠다. 방송에 나올 땐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실제로 들으니 발성부터 남다르다.
“인테리어를 다시 했는데 그 끝방만 천장에 창문을 낼 수 있다더군요. 3층을 주자니 오가기 번거로울 것 같아서 그냥 그 방으로 했어요.”
“창문이라면…… 욕실에 있는 그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그거.”
다 마른 머리칼이 사르르 이마에 흩어졌다. 눈가에 닿는 게 거슬렸는지, 그가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욕조에서 하늘이 보이면 좋잖아요.”
“…….”
그 좋은 걸, 왜 권이도 씨 방이 아닌 제 방에 하셨나요. 안 그래도 과분한 방을 인테리어까지 다시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나를 위해 준비된 모든 것들이 과하다 싶을 만큼 완벽했다. 후계를 생산할 오메가에게 원래 이 정도는 해주는 건지. 권이도에겐 별거 아닌 씀씀이라는 걸 알면서도 무언가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방은 다 마음에 듭니다. 전부 취향에 맞더라고요.”
살짝 떠보기 위해 건넨 말이었다. 그저 운 좋게 맞아떨어진 건지, 아니면 정말 잘 알고 있는 건지.
권이도는 입꼬리를 올린 채 이렇게 대답했다.
“좋아하실 것 같았습니다.”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정말로 내가 좋아해서 기쁘다는 듯이. 질문의 성과를 내기엔 참으로 모호한 답변이기도 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셔도 됩니다. 책이라든가, 옷이라든가, 아니면 뭐 차 같은 것도 괜찮고.”
“아뇨, 그렇게 일방적으로 받을 수는…….”
말을 하다 보니 저절로 뒷말이 흐려졌다. 권이도는 금방이라도 괜찮다고 말할 것처럼 눈가를 움찔했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권이도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럼 조건을 먼저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조건?”
“네, 조건.”
일방적이라니. 우스운 말이었다. 그 모든 건 결국 일종의 투자일 텐데. 권이도가 내게 해주는 만큼 내가 해줘야 할 일이 분명히 있으련만.
“아직 자녀 계획에 관해 듣지 못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