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억의 끝에 (6)화 (6/131)

6화. Deja vu(1)

난생처음 만난 상대를 마냥 애틋한 눈으로 쳐다볼 이유가 뭐가 있을까.

권이도와 만난 이후 내 머릿속엔 온통 그의 생각밖에 없었다. 내리깔린 시선, 그리고 입가에 걸린 엷은 미소, 이따금 전해지던 페로몬 같은 것들이 쉴 새 없이 눈앞을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권이도는 보이는 것처럼 손이 차갑고, 그럼에도 간간이 상냥한 표정을 짓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아버지에겐 안하무인처럼 굴더니 내가 곤란해지자 곧장 도와주는 것까지 그러했다. 다정한 건지, 아니면 냉정한 건지. 고작 하루로는 그 기준을 바로 세우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의문을 꿈결 삼아 밤새 지나간 하루를 곱씹었다. 이미 동나 버린 수면제 대신, 가슴 한편에 남은 기억이 꿈과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흐트러뜨렸다. 끝내 잠이 들진 못했지만, 악몽을 꾸는 것보다 훨씬 나은 새벽이었다.

“선호 측에서 차를 보내 준다고 합니다.”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자마자 찾아온 김 실장은 어쩐지 초췌한 얼굴로 권이도의 소식을 알렸다. 눈 밑이 퀭한데 옷차림은 어제와 같은 걸 보니, 지난밤 아버지에게 온갖 신경질을 들은 게 분명했다.

“고생하시네요.”

“…….”

이럴 때마다 김 실장도 참 대단하지 않나 싶다. 싫은 소리 하나 없이 묵묵히 내 옷가지를 챙기는 걸 보면.

“따로 더 챙기실 건 없습니까?”

“네, 그거면 됩니다.”

권이도의 집에 가져갈 짐은 조그만 캐리어 하나면 충분했다. 필요한 건 고용인을 시키면 그만이고, 애초에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 그거였다.

‘정세진 씨 생활에 필요한 건 저희 쪽에서 챙겨 놓겠습니다.’

별반 대수롭지 않단 투였다. 거기다 친절히 덧붙이던 뒷말까지.

‘맨몸으로 와도 된다는 말이에요.’

하기야, 갑자기 들어오라고 했으니 그 또한 생각이 있었겠지.

“딱히 아까울 것도 없고…….”

9년을 산 곳이지만, 살림살이는 많지 않았다. 끽해야 버리지 않은 전공 서적과 몇몇 소설책이 전부일까. 드레스룸에 가지런히 걸린 옷들도 그다지 미련이 남는 물건은 아니었다.

“수면제는 꽃이랑 같이 저녁 즈음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권이도에게 받은 은방울꽃은 김 실장이 오래 보관할 수 있게 가공해 놓는다고 했다. 건조제를 뿌려 유리돔을 씌운다던가. 대충 물에 꽂을 줄 알았는데, 과할 정도로 정성스러운 대우였다.

“차는 몇 시쯤 온답니까?”

“곧 도착할 것 같습니다.”

“그럼 슬슬 내려가 있죠.”

약혼반지가 있는 걸 확인하고, 김 실장보다 먼저 집을 나섰다. 당분간 돌아올 일 없는 곳이었으나 아쉽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김 실장은 약간의 텀을 두고 엘리베이터에 타는 나를 조용히 뒤따랐다.

우웅, 엘리베이터가 이동하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참 미묘했다. 시간이 멈춘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곳과 완전히 차단된 기분이기도 하고. 멍하니 기계음에 집중하는 내게 조심스러운 부름이 들렸다.

“본부장님.”

음, 나 이제 본부장 아닌데.

“말씀하세요.”

“따로 뵙고 갈 분은 없으십니까?”

“뭐…….”

낮게 침음하며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내 좁아터진 인간관계를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가족들을 안 보고 가도 되겠냐는 말을 돌려 말한 듯했다.

“김 실장님만 봤으면 됐죠.”

장난처럼 말했지만, 사실은 진심이었다. 환송받지 못할 바엔 차라리 아무런 배웅 없이 떠나는 게 낫다. 평생 가버리는 거면 모를까, 요란스럽게 이동할 필요는 없었다.

“어디 팔려 가는 것도 아닌데요.”

가볍게 흘린 말에 그는 말문이 막힌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게 아니라는 변명조차 없는 걸 보니, 차마 거짓말은 못 하겠는 모양이다. 그게 또 김 실장다워서 괜히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덧붙였다.

“아시잖아요.”

“…….”

“피할 수 있는 건 피해야죠.”

어떤 말을 들을지 뻔한데, 구태여 내 발로 찾아가고 싶진 않았다. 이런 날에는 조용히 넘어갔으면 했고, 아무리 나라도 항상 괜찮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이쯤 하면 내가 할 도리는 끝난 것 같으니, 이건 김 실장도 이해해 줘야지.

“죄송합니다.”

“사과를 들으려던 건 아닙니다.”

띵, 엘리베이터가 1층에 다다랐다. 나는 한 발짝 앞서 걸으며 뻐근한 눈두덩을 문질렀다. 옷을 좀 더 신경 써서 입을 걸 그랬나. 항상 정장만 입었더니 넥타이 없는 차림이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진다.

바깥 공기는 아직도 추운 기가 남아 쌀쌀했다. 어제는 그래도 따뜻하던데, 누가 환절기 아니랄까 봐 날씨가 변덕을 죽 끓듯이 부렸다. 겉옷을 입길 잘했네. 그런 생각으로 고개를 드는 순간, 별안간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쳤다.

“…….”

“…….”

일순, 얼굴이 구겨졌다. 오늘만큼은 조용히, 그 작은 바람이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뒤늦게 상대를 발견했는지, 김 실장이 얼떨떨한 말투로 내뱉는 목소리도.

“……도련님?”

“야, 정세진!”

민재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성큼성큼 내 쪽으로 걸어왔다. 머리는 잔뜩 흐트러지고, 옷차림도 평소와 달리 수수하다. 뒤쪽에 주차된 스포츠카는 아무리 봐도 민재의 실력(주차선이 이상했다)이 분명한데, 운전도 못 하는 녀석이 왜 직접 차까지 끌고 왔을까.

“너 씨발…….”

코앞까지 다가온 민재가 위아래로 나를 훑어봤다. 분을 이기려는 듯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입술을 짓씹기도 했다. 이런 얼굴을 할 땐, 무언가 단단히 심통이 난 것임을 알고 있다.

“무슨 일이야?”

“…….”

대답 대신 민재는 여전히 성난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어머니를 닮은 눈매가 매섭게 올라갔다.

“……너 지금 그 새끼 집 가냐?”

그 새끼라 함은, 아무래도 권이도를 말하는 거겠지. 아버지조차 높임말을 쓰는 상대에게 썩 버릇없는 호칭이었다.

“가는 길이었어. 왜?”

“그걸…… 야, 그걸 몰라서 물어?”

“모르니까 물어보지. 왜 그러는데?”

혹시 연락을 했었나 싶어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 그러나 시간을 나타내는 숫자 아래는 부재중 전화는커녕 메시지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민재는 캐리어와 나를 번갈아 보며 삐딱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배은망덕한 새끼.”

“뭐?”

뜬금없는 말이었다. 민재에게 들을 말은 더더욱 아니었고. 황당한 마음에 눈을 깜박이자, 얼굴을 구긴 민재가 톡 쏘아붙였다.

“넌 가족들도 안 보고 그냥 가냐?”

가족? 그렇게 되묻지는 못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헤집은 그가 눈썹을 올리며 덧붙인 것이다.

“정서영이랑 나는 몰라도 부모님은 뵙고 가야 할 거 아니야. 어떻게 아버지 얼굴도 안 보고 갈 생각을 해? 아버지 서운해하시는 거 몰라?”

“……아버지가 그래? 내가 안 보고 가서 서운하다고?”

“씨발,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버럭 소리친 민재가 고개를 옆으로 휙 돌렸다. 얼굴이 새빨간 걸 보니, 본인도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린단 걸 자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뒤에 있는 김 실장도 아는 사실인데, 아버지는 그런 걸로 서운해할 사람이 아니었다.

“어쨌든 아들이라는 새끼가…….”

“민재야.”

나직이 운을 떼며 왼손으로 눈가를 뒤덮었다. 후우, 한숨을 내쉬자 울렁거리던 속이 조금 진정됐다. 아무리 나라도 항상 괜찮을 수는 없다니까. 왜 꼭 마지막에 와서 사람을 뒤집어 놓을까.

“그럼 어제 대기할 때 보러 왔어야지.”

어제, 나는 세 시간을 넘게 대기실에 있었다. 그동안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고, 김 실장만이 유일하게 내 식사와 안부 따위를 물어 왔다. 아버지가 줬다던 작은 향수만이 일방적인 소통의 전부였단 말이다.

“약혼식 끝날 때까지 가만히 있다가 왜 이제 와서 그래.”

“…….”

민재는 입을 꾹 다문 채 조용히 손에 낀 반지를 노려봤다. 기분이 나쁘다기보단 흡사 억울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 짧은 숨을 토해낸 그가 어딘가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거야 그 새끼가…….”

탁,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것도 그때였다. 그리 큰 소리도 아니었는데, 민재는 뭐에 놀란 사람처럼 입을 다물었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주변에 타박, 타박, 구둣발 소리가 울려 퍼졌다.

“…….”

홀린 듯 고개를 들어, 조금 전 차에서 내린 상대를 확인했다. 이토록 정갈한 걸음걸이는 내가 아는 한 단 한 사람밖에 없었으므로. 느리게 옮겨 간 시선 끝에 재킷을 가다듬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 계셨군요.”

딱 한 마디였지만, 분위기를 바꾸기엔 충분했다. 기품 있는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고, 그 당당한 모습이 위압감을 안겨 줬다.

“……권이도 씨.”

그는 여유롭게 걸어와 정확히 내 앞에 멈춰 섰다.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새카만 시선이 올곧게 나를 향해 온다. 가을비를 맞은 나무가 이러할까. 묵직한 페로몬이 가슴 언저리를 저릿하게 만들었다.

“여긴 어쩐 일로…….”

“어쩐 일이냐니.”

권이도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빚어진 이목구비가 오늘따라 유독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심지어는 가만히 눈을 깜박이는 게 신기할 정도로.

“데리러 오겠다고 얘기한 걸로 아는데요.”

가볍게 대꾸한 그가 무심히 김 실장을 바라봤다. 내 말을 전달하지 않았느냐고, 그리 묻는 것처럼. 애꿎은 김 실장 대신 대답은 내가 했다.

“차를 보내 주신다고 하셨죠.”

설마하니 직접 찾아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권이도는 바쁜 사람이고, 나를 데리고 가는 건 아랫사람을 시켜도 충분하니까. 하나 권이도의 생각은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 차를 타고 왔으니 틀린 말은 아니군요.”

“……바쁘지 않으십니까?”

“바쁩니다.”

정말 바쁘다는 듯, 그는 소매를 걷어 손목에 찬 시계까지 확인했다. 언젠가 권이도가 찼다는 이유로 크게 화제가 되었던 그 시계였다.

“그러니 이만 갔으면 하는데…….”

길게 늘어진 말꼬리는 정확히 민재를 보고 멈추었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던 민재가 얼굴을 확 일그러뜨린다. 권이도는 특유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제안을 가장한 통보를 건넸다.

“형제간의 대화는 나중에 하죠.”

일부러일까. 그는 거만한 눈으로 지그시 민재를 내려다봤다. 작게 코웃음을 치며 보일 듯 말 듯 입매를 끌어올리기도 했다.

“이런 건 동생이 양보해야지.”

아, 일부러 그러는 거 맞네.

“……김 실장님. 민재 좀 집에 데려다주세요.”

나는 권이도의 팔을 잡으며 자연스레 민재의 앞을 가로막았다. 흘긋 내 왼손을 바라본 권이도가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민재는 모욕을 당한 것처럼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상태였다.

“민재야, 남은 얘기는 다음에 하자.”

주먹을 꾹 쥔 걸 보니, 조금 더 있다간 물불 가리지 않고 폭발할 터다. 더 늦기 전에 적당히 상황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너 우리나라 면허도 없는데 웬만하면 운전하지 마. 급한 일 있으면 전화로 하고…….”

잠깐 고민이 됐다. 이 말을 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하고. 그러나 민재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입술이 먼저 움직이고 말았다.

“아버지한테 안부 전해 드려.”

“…….”

“형 갈게.”

이번에야말로 민재는 어금니를 악문 채 고개를 숙여 버렸다. 가늘게 떨리는 입매가, 조금이지만 안쓰러워 보였다.

* * *

권이도의 차는 운전석과 뒷자리가 분리된 프라이빗한 세단이었다. 원래 이런 차종이 아닌데, 개인적으로 내부를 개조해 만든 모양이었다.

권이도는 손수 차 문을 열어 주고, 옆좌석에 타자마자 서류와 태블릿 PC를 오가며 업무를 시작했다. 중간중간 전화도 받았는데, 내가 못 알아들을 거라 생각했는지 영어로 대화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알아들은 티를 낼까 하다가 그냥 관두기로 했다.

“날이 좋죠.”

얼마나 지났을까. 세 번째 통화를 끊은 권이도가 대뜸 내게 말을 걸었다. 마침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던 터라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네요.”

눈이 시린 이유가 단순히 잠을 못 자서는 아닐 만큼 화창한 날이었다.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새하얀 게, 당분간은 비 소식도 없을 듯했다.

“잠을 못 잤습니까?”

“……?”

나는 뒤늦게 고개를 돌려 권이도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그가 느긋이 내 얼굴을 살펴봤다. 시선이 닿을 때마다 어쩐지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었다.

“피곤해 보여서요. 어제보다.”

“……아.”

언제부터 편하게 표정을 드러내고 있던 걸까. 피곤한 티를 내지 않는 건 나름대로 자신 있었는데.

“피곤하진 않고…… 그냥 잠을 좀 설쳤습니다.”

굳었던 얼굴을 애써 부드럽게 누그러뜨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이기도 했지만, 권이도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저 서류를 무릎에 내려놓고 단조로운 목소리로 얘기했을 뿐.

“집에 가면 우선 밥부터 먹죠.”

그리 이상할 거 없는 말이었다. 그 말이 함께 먹자는 의미처럼 들리지만 않았다면.

“아침을 안 먹었을 것 같아서 정세진 씨가 좋아하는 요리로 준비해 놓으라고 했습니다.”

“……혹시 해서 묻는데, 같이 드시나요?”

“…….”

반듯한 눈썹이 일그러졌다. 왠지 모르게 불만스러운 표정이라 황급히 변명을 덧붙였다.

“바쁘다고 하셨던 것 같아서요.”

“정세진 씨랑 밥 먹을 정도는 됩니다.”

타이밍 좋게 권이도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내게 양해를 구한 권이도는 이번엔 딱 한 마디 만에 전화를 끊었다. 지금은 바쁘니 비서를 통하라는 성의 없는 통화였다.

“아무튼, 식사가 끝나면 욕조에 몸이라도 담갔다가 좀 자도록 해요.”

“…….”

“입욕제도 종류별로 있으니까, 좋아하는 향으로 골라 쓰고.”

뭐랄까.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와 똑같은 반지를 보는 순간, 가슴께가 옥죄일 정도로.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왜 이렇게 친절하게 굴지.

암만 우리가 약혼한 사이라고 해도, 모든 건 계약에 의한 결과였다. 잘 보여야 하는 쪽은 나고, 멋대로 휘둘러도 되는 쪽은 권이도란 말이다. 그런데 왜, 이 사람은 자꾸만 자신이 을인 것처럼 구는 걸까.

“그리고…….”

권이도는 느리게 서두를 꺼내며 보일 듯 말 듯 눈가를 찌푸렸다. 어쩐지 멋쩍은 표정이었는데, 뒷말을 듣는 순간 표정 따위는 상관없어졌다.

“말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네?”

“우리가 비즈니스 관계도 아니고, 격식 차릴 필요 없어요.”

순간 물어볼 뻔했다. 우리가 왜 비즈니스 관계가 아니냐고.

“아뇨, 말은 천천히 놓겠습니다.”

좋은 기회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가 잘해 주는 걸 기뻐하진 못할망정, 그 이유가 무엇인지 의심이 생겼다. 분명 적당히 가식을 부려야 할 텐데. 권이도의 앞에서는 그게 쉽지 않았다.

“……제가 존댓말이 더 편하거든요.”

구질구질하게 변명했지만, 권이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혹시 기분이 상했나 싶어 살펴본 얼굴엔 다행히 불쾌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아차 싶은 얼굴이었다면 모를까.

“그래요, 천천히 편해지면 되니까.”

글쎄요, 안 편해질 것 같은데.

뒷말은 겨우겨우 목구멍 너머로 삼켜 냈다. 죄송합니다, 그 한마디에 권이도의 얼굴에 살짝 금이 갔다. 그는 다시금 서류를 들어 올리며 나직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말은 천천히 놔도 되는데, 그 죄송하단 말은 하지 말죠.”

“…….”

“내가 사과 듣는 걸 안 좋아해서.”

이건, 처음부터 죄송할 짓을 하지 말란 의미일까. 그의 배경을 생각하면 살면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이 ‘죄송합니다.’일 텐데.

“정세진 씨가 미안해할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한결 상냥해진 목소리가 귓가에 부드럽게 감겼다. 여전히 차분한 음성이었고, 페로몬이 실린 것처럼 뚜렷하기까지 했다. 괜히 명치가 울렁거리는 기분이라, 시선을 창밖으로 옮기며 말을 돌려 버렸다.

“……길이 많이 막히네요.”

부자연스러운 화제 전환이었지만, 권이도는 지적하지 않았다. 그저 거의 다 왔다며 졸리면 눈을 붙이라고 했을 뿐. 금세 조용해진 차 안엔 그가 서류를 넘기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

분명 졸리지 않았는데, 주변이 고요하니 잠이 쏟아졌다. 끔벅끔벅 눈을 감았다가 뜨는 동안, 머릿속엔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가령 알파 페로몬이 아늑하다거나, 히트 사이클이 얼마 안 남았다거나 하는 것들.

그러다 문득 다 늦은 의문 하나가 몰려드는 잠기운을 쫓아냈다. 별건 아니었고, 그저 사소한 위화감 정도.

권이도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어떻게 알고 준비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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