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Nouveau Depart(5)
본능적으로 등허리를 곧추세웠다. 지금까진 방관하듯 있었지만, 자녀 계획과 관련된 조건이라면 들어 둬야 했다. 게다가 권이도의 말에는 왠지 모르게 사람을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조건은 두 가집니다.”
차분한 눈매가 여유롭게 모두를 둘러봤다. 기대에 찬 얼굴들을 지나 바로 옆에 앉은 나까지.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친 두 눈이 지금까지와 다른 부드러운 빛을 띠었다.
“첫째, 정세진 씨가 당장 내일부터 내 집에 들어와서 살 것.”
대답하라는 건가?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권이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는 금세 표정을 지우고 이번엔 아버지를 향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둘째.”
지금이야말로 민재가 말했던 미래가 그려지는 순간이었다. 생판 모르는 알파 새끼한테 다리나 벌리고 사는 것. 당장 집으로 들어오라는 이유도 아마 아이를 좀 더 쉽게 갖기 위해서겠지.
“해신그룹 본부장 자리를 관둘 것.”
“…….”
잠깐 권이도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상입니다.’ 그렇게 이어진 말도 마찬가지였다. 황망하게 눈을 깜박이는 우리에게 그는 퍽 자비로운 어투로 덧붙였다.
“이의가 있다면 들어는 보겠습니다.”
“……그, 권이도 씨.”
당황스러운 마음에 순간적으로 권이도의 팔을 붙들었다. 사소한 행동이었으나 권이도는 물론, 손을 올린 나조차도 놀라고 말았다. 아무리 약혼식 내내 손을 잡고 있었어도 이렇게 막 건드려도 되는 사이는 아니건만.
“죄…….”
“죄송하지 않아도 되니까 얘기부터 듣죠.”
그는 단호하게 내가 건네는 사과를 끊어 버렸다. 어색하게 들어 올린 손을 다시 제 팔 위에 올려놓기도 했다. 지그시 시선을 맞춘 그가 깔끔한 눈썹을 찌푸렸다.
“조건이 마음에 안 듭니까?”
설마하니 너까지 그럴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다. 나를 언제 봤다고 이런 눈빛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자녀 계획에 관해…… 이야기하시려는 줄 알았는데요.”
나는 분명 그가 결혼으로 얻고 싶은 내용을 이야기할 줄 알았다. 이를테면 아이를 몇 명 낳아야 한다거나, 양육권을 어떻게 해야 한다거나 그런 것들. 수지가 맞지 않는 오메가를 골랐다면 그의 목적은 단연 2세뿐일 테니까.
“글쎄요.”
그러나 권이도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대답을 미적거렸다. 내 손등을 톡톡 건드리며 입꼬리를 말아 올리기도 했다.
“그건 추후에 나랑 둘이 논의하죠.”
“……둘이?”
턱, 말문이 막혔다. 둘이 논의하겠다는 말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장난처럼 덧붙인 뒷말 때문에.
“아직 미숙한 아이들도 있는데, 가족들을 모아 놓고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아서.”
이건 알아서 잘하라는 신호일까. 아니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조크일까.
둘이 논의하겠다는 말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자세한 계약 내용을 정하려면 히트나 러트 사이클 주기를 필히 공유해야 할 테니. 그러기 위해서는 여럿이 모인 자리보단 조금 더 사적인 공간인 게 낫긴 했다.
진짜 문제는 그가 내민 두 번째 조건이었다. 내가 본부장 자리에서 물러나는 건 권이도에게 그 어떤 이득도 되지 않는다. 암만 후계를 위한 결혼이라 한들 최소한의 지위조차 없는 나를 도대체 어디에 쓴단 말인가.
“…….”
아, 혹시 그런 건가.
간혹 있었다. 구시대적 사고로 배우자가 집에서 내조만 하길 바라는 사람들이. 나를 에스코트해 주려던 기사처럼 권이도도 나를 그런 식으로 여기는 건 아닐까.
“흠흠, 전무님?”
잡념을 깨트린 사람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목을 한 번 가다듬곤 느물거리는 말투로 이야기했다.
“세진이가 일개 직원도 아니고, 본부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그만두면 저희도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눈빛은 강경한데, 얼굴은 생글생글 웃고 있다. 곤란함을 어필하면서도 권이도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다.
“게다가 원래는…….”
“그럼 정세진 씨한테 묻도록 하죠.”
세 번째. 말이 끊긴 아버지가 입가를 파르르 떨었다. 무시당하는 걸 병적으로 싫어하는 그로선 이 정도면 많이 참았다 싶다. 그런 아버지를 뒤로하고 권이도는 나를 보며 물었다.
“정세진 씨, 본부장으로 계속 일하고 싶습니까?”
기회를 주는 듯했다. 그렇다고 하면, 선뜻 그러라고 할 것처럼. 물론 내가 해야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아뇨.”
“…….”
“말씀하신 조건에 맞추겠습니다.”
희비가 교차했다. 권이도의 표정은 예상대로였지만, 아버지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뿌듯하게 웃을 줄 알았던 아버지는 왜인지 못마땅한 눈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의아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늘 내게 권력을 쥐여 준 걸 탐탁잖게 여겼건만. 본부장이라는 직급도 주변 시선을 의식해 달아 줬을 뿐, 언젠가 쓸모를 다하면 직접 거둬 갈 예정이었을 텐데.
“그렇다는군요.”
거보라는 듯 권이도가 입매를 늘어뜨렸다. 표정 변화가 크지 않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정확히 전달됐다. 아버지는 애써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일을 관두는 건…….”
“정 회장님.”
네 번째. 아버지의 얼굴에 금이 갔다. 주름진 눈가가 딱딱하게 굳는 걸 보니, 이 자리가 끝나면 김 실장의 고생길이 열리겠구나 싶다. 그건 이어진 권이도의 질문으로 더 확실해졌다.
“내가 지금 제안하는 걸로 보입니까?”
부회장인 권상미도 갖춰 주던 예우를 권이도는 흉내조차 내지 않았다. 갑을 관계를 명확히 하겠다는 듯, 여상한 목소리로 덧붙였을 뿐이다.
“안 된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자리라고 생각하셨다면 유감이군요.”
“…….”
“한 그룹의 총수씩이나 되는 분이 그 정도 상황 판단이 안 되면 곤란하죠.”
가식적이고 친근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박살 났다. 아들의 독재를 막을 법도 하건만, 권이도의 가족은 그 어떤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동등한 입장이 아니니 당연한 결과일까.
“대충 알아들으신 것 같은데…… 건배나 한번 할까요?”
권이도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샴페인 잔을 들었다. 나는 가족들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잔의 가느다란 부분을 어루만졌다. 저마다 불쾌함이 드러나는 표정들은 그리 보기 좋은 풍경이 아니었다.
“약혼 축하는 아까 했으니까, 오늘부로 은퇴할 정세진 본부장님을 위해?”
“……!”
아버지가 입술을 깨물었다. 모욕적인 언사도 모자라, ‘오늘부로’라는 갑작스러운 시간 제약 때문이었다. 이제는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을 보면서도 권이도는 뻔뻔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정 회장님 덕분에 좋은 기회를 잡았습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건대, 상이 엎어지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어서 잔을 맞대라는 듯 재촉하는 모습은 누가 봐도 도발하는 사람의 그것이었으니.
“알아주시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인내심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가까스로 표정을 갈무리하고 잔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내키지 않는단 얼굴의 가족들과 영 속을 알 수 없는 선호그룹 식구들. 불유쾌한 건배가 일방적인 협상의 성사를 알렸다.
* * *
식사는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이어졌다. 정원에 땅거미가 질 즈음이었고, 꽃과 함께 장식된 조명이 하나둘 주변을 밝힐 즈음이었다. 눈이 시릴 만큼 아름다운 풍경은 가족들의 표정을 누그러뜨리기에 충분했다.
“근데 정세진 씨.”
디저트를 반쯤 먹었을 때, 권이도의 누나가 입을 열었다. 선호그룹 부사장이자 권혜율의 엄마인 그는 권상미와 꼭 닮은 우성 오메가였다. 길게 내려온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그가 가벼운 목소리로 질문했다.
“오메가 맞죠?”
시선이 느껴졌다. 선호그룹 식구들이 의아해하는 시선, 아버지와 어머니가 혀를 차는 시선, 민재의 그럴 줄 알았다는 시선과 서영이의 방관하는 시선까지.
“우성 오메가라고 들었는데, 페로몬이 전혀 느껴지질 않네요.”
“…….”
그러니까, 향수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대도.
“오메가 맞습니다. 우성이고요.”
나는 최대한 담담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내게 있는 하자를 어떤 식으로 설명해야 할지, 그런 건 이미 수백 번 시뮬레이션해보았다. 그들이 원하는 오메가의 기능엔 문제가 없다는 것도 간결히 어필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다만 제가…….”
“꽃 냄새에 코가 무뎌졌나 보네.”
그런데 말을 이으려는 순간,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가 뒷말을 빼앗았다. 유일하게 시선을 보내지 않던 권이도였다. 권이도는 눈을 내리깔고 보일 듯 말 듯 엷은 미소를 띠었다.
“정세진 씨 페로몬이 꽃향기랑 비슷하거든.”
꿈결 같은 말씨였다. 조금 전까지 아버지를 몰아붙이던 사람이라고 보이지 않을 정도로. 권이도 정도 되는 알파가, 고작 향수 따위에 속을 리가 없는데.
“게다가…….”
나는 멀거니 권이도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반듯한 눈썹뼈 아래, 그려놓은 것처럼 정갈한 콧대가 보였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얼굴.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만큼 냉랭한 얼굴이 자꾸만 다정해 보인다면 착각일까.
“내 약혼자 페로몬을 다른 사람이 알 필요는 없지.”
권이도는 그리 말하며 넌지시 동의를 구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가벼운 물음엔 무언가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권이도의 누나 역시 남편과 시선을 교환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뭐, 네가 그렇다면 상관없지만.”
허무할 정도로 간단한 해결이었다. 애초에 큰 관심은 아니었는지 내게 쏠렸던 시선들이 하나둘 흩어졌다. 아버지는 뿌듯한 미소(향수가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를 지었으나 나는 이게 아버지의 공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
이 사람은 왜 나를 도와줬을까.
세간에선 권이도를 이렇게 묘사한다. 고압적이고 권위적이며 공과 사 구분이 뛰어난 만큼 냉철한 사람이라고. 정확히는 업계 소문이었지만, 대부분 사실에 근거한 내용일 게 분명했다.
그런 권이도가 내게는 벌써 두 번째 자비를 베풀고 있었다. 한 번은 그의 팔을 건드렸을 때, 그리고 다른 한 번은 조금 전 그의 누나에게서. 그것도 내 페로몬이 꽃향기와 비슷하다는, 그런 간지러운 말까지 해가면서.
“하고 싶은 말이 있는 표정인데…….”
생각에 잠기는 바람에 무심코 적나라한 눈길을 보낸 모양이다. 내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그가 선택지를 내밀었다.
“지금 할래요, 아니면 내일 들을까요.”
“…….”
아, 내일.
“……별거 아닙니다.”
당장 내일 들어오라고 했던가. 하루아침에 거처를 옮기게 됐지만, 이렇다 할 불만은 생기지 않았다. 상대도 모르는 약혼식에 결혼보다 이른 동거. 비정상적인 과정이었으나 오히려 정상적인 과정이 더 드물었으니.
“그래요, 나중에 둘이 얘기합시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포크로 디저트를 톡 건드렸다. ‘둘이’라는 말에 입 안이 달아진 탓이었다. 사실은 내가 타인의 외모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던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가슴 한편이 저릿저릿했다.
그로부터 10분쯤 지났을까. 식기를 내려놓은 권상미가 슬슬 일어나자는 말로 자리를 정리했다. 권상미와 아버지가 악수를 나누는 동안, 대기하고 있던 김 실장이 가까이 다가와 어깨에 코트를 걸쳐 줬다.
“자택으로 가시겠습니까?”
“음, 원래는 본가로 갈까 했는데…….”
흘긋 가족들의 얼굴을 둘러봤다. 서영이는 그나마 괜찮은데, 다른 사람들의 표정이 영 좋지 못했다. 특히나 민재는 평소보다 더 매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집으로 가는 게 낫겠네요.”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김 실장은 차마 부정하지 못하고 애매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애써 내뱉은 말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을 거다. 부탁한다는 의미로 웃어 주려는데, 뒤쪽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정세진 씨.”
일부러인지, 권이도는 정확히 민재의 눈초리를 가로막고 섰다. 눈치를 살피던 김 실장이 입구에서 기다리겠다며 뒤로 물러났다. 정원을 밝히는 불빛이 어슴푸레하게 권이도의 얼굴을 비췄다.
“괜찮으시면 좀 걸을까요.”
* * *
정원에 딸린 산책로는 한 바퀴를 빙 돌아 다시 식장으로 돌아오는 구조였다. 판판한 돌길을 따라 조성된 조경이 걷는 내내 눈요기가 되었다. 원래는 개방된 곳인가 본데, 미리 손을 쓴 건지 오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권이도는 산책로에 들어온 이후 내게 그 어떤 말도 건네지 않았다. 춥진 않겠냐며 코트를 살펴본 게 그가 보인 마지막 반응이었다. 그러는 본인은 정작 외투도 없는 예복 차림이면서 말이다.
“…….”
“…….”
타박, 타박, 돌바닥을 밟는 소리가 선명했다. 주변이 고요한 터라 조그만 풀벌레 울음까지 또렷이 들려왔다. 권이도의 구두를 한 번, 내가 신은 구두를 한 번. 느릿느릿 시선을 옮기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길을 참 예쁘게 꾸며 놨네요.”
어떤 의도로 산책을 권했는지 몰라도, 대화를 주선해야 하는 쪽은 나였다.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노력해야 하는 것도, 그에게 잘 보여야 하는 것도 하나도 빠짐없이 온통 내 역할이다.
“조명이 있어서…… 별로 어둡지도 않고.”
“…….”
“봄이 되면 더 예쁘겠어요.”
최대한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다. 평소와 달리 긴장이 됐지만, 그렇다고 실수할 만큼 미숙하지도 않았다. 적당히 사근사근 굴다 보면 적어도 나쁜 첫인상을 남기지는 않을 테니까.
“날이 풀리면 꽃을 심을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권이도는 지그시 눈을 맞춘 채 예의 그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밤공기와 어울리는 음성이 그의 페로몬처럼 깊이 있었다.
“봄에는 봄꽃을, 여름에는 여름꽃을, 가을에는 가을꽃을.”
“…….”
“아직은 조경 공사가 끝나지 않아서 전부 완성된 건 아닙니다.”
만약 선호그룹 자제가 아니었다면, 배우 같은 걸 해도 괜찮지 않았을까. 발성이 좋은 터라 한마디 한마디가 무게감 있게 귓가에 감기는데.
“완성되면 한 번 와야겠네요.”
차가워진 귀 끝을 문지르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권이도의 시선이 머리꼭지에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나도 작은 키가 아닌데, 권이도는 나보다 반 뼘은 더 커다랬다.
“오늘…….”
그는 넌지시 운을 떼고 잠깐 말을 골랐다. 아니, 정확히는 무언가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던 그가 아무렇지 않은 투로 이야기했다.
“대기가 길었을 텐데, 지루하진 않았습니까?”
“아…… 괜찮았습니다. 덕분에.”
짙은 눈동자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덕분에? 그렇게 묻는 것처럼.
“꽃구경에 시간 가는 줄 몰랐거든요.”
정말이지, 지루하지 않았다. 가지각색의 꽃들을 구경하느라 전에 없는 편안함을 느꼈으니까.
“꽃다발도 감사합니다. 괜찮으시면 내일 댁으로 갈 때 가져갈까 하는데…….”
장식된 생화는 몰라도 은방울꽃은 김 실장이 챙겨 뒀다. 원래는 집에 가져갈 예정이었으나, 거처를 옮기는 김에 함께 챙겨 갈까 고민 중이었다. 그래도 되겠냐고 허락을 받으려는데, 권이도의 표정이 영 이상했다.
“……권이도 씨?”
“…….”
그는 처음 내 손을 잡았을 때처럼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주위가 어두운 탓인지, 얼핏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한 번, 두 번, 눈을 깜박인 그가 간신히 입매를 끌어올렸다.
“정세진 씨.”
“…….”
“우리 내일도 봅시다.”
새삼스러운 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당장 내일부터 한집에 살게 될 텐데.
“내일은 권이도 씨 집에서 뵙겠네요.”
우리는 당연히 내일도 만나게 될 사이였다. 내일뿐만 아니라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매일매일 얼굴을 보게 되겠지. 굳이 다음을 약속하지 않아도 결혼을 약속한 이상 그럴 터였다.
“이렇게 된 거…… 조금 늦었지만 통성명을 다시 하죠.”
장난스레 말하자, 권이도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나는 그에게 오른손을 내밀며 아까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정세진입니다.”
반쯤 농담처럼 건넨 악수였다. 분위기를 풀 겸, 이 민망한 기분도 해소할 겸.
“……권이도입니다.”
그런데 그는 무언가 망설이는 기색으로 내 손을 마주 잡았다. 눈을 살짝 내리깔며 더할 나위 없이 그리운 미소를 짓기도 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정세진 씨.”
“…….”
그 말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이유 모를 기시감에 멍하니 권이도의 얼굴을 바라봤을 뿐.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가,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보듯 따사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