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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억의 끝에 (4)화 (4/131)

4화. Nouveau Depart(4)

대기는 생각보다 꽤 오래 이어졌다. 지나치게 일찍 집을 나선 데다, 부르기 전엔 대기실에서 있으라는 아버지의 지시 때문이었다. 그래도 상대와 인사는 나눠 봐야 할 텐데. 통성명을 하긴커녕 얼굴을 볼 기회조차 없었다.

“본부장님.”

대기실에 콕 틀어박힌 나와 달리 김 실장은 바쁘게 안팎을 오가며 아버지의 말을 전달했다. 한 번은 대략적인 식순을 알려 줬고, 또 한 번은 간단히 먹을거리를 가져다줬으며, 다른 한 번은 태블릿 PC로 권이도의 정보를 띄워 줬다.

그리고 이번에 그가 내민 건, 조그만 립스틱 크기의 공병이었다.

“회장님께서 주신 겁니다.”

“…….”

굳이 열어 보지 않아도 안에 담겼을 내용물이 충분히 짐작 갔다. 가만히 몸체를 만지는 내게 역시나 예상했던 한마디가 건네졌다.

“페로몬 향수입니다.”

페로몬 향수라. 이런 건 그다지 효과가 없다고, 아버지께 몇 번이나 얘기했건만.

“곧 부를 테니 식이 시작되기 전에 뿌리고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김 실장은 담담히 말하면서도 어쩐지 멋쩍은 낯을 하고 있었다. 이런 말을 하는 게 미안하다는 듯, 작게 한숨을 삼키기도 했다. 나는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아 보고 가느다란 웃음을 흘렸다.

“열심히 고르셨나 봐요.”

무겁지 않은 향기가 정말 페로몬처럼 자연스러웠다. 페로몬을 못 느끼는 베타들을 위해 인위적으로 특이 형질의 향을 낸 제품. 지금껏 많은 향수를 봐왔지만, 개중엔 가장 그럴싸하지 않나 싶다.

“김 실장님이 고르셨어요?”

“…….”

김 실장은 말없이 안경을 추켜 올렸다. 그가 곤란할 때면 알게 모르게 나오는 버릇이었다. 침묵은 곧 긍정이라고, 아버지의 지시를 받고 직접 발품을 팔았던 게 분명했다.

“마음에 들어요. 잘 쓰겠습니다.”

예의상 건넨 말이었지만, 실제로 향 자체는 좋았다. 뭐, 페로몬적인 효과가 없다는 건 베타인 그가 굳이 알 필요 없는 일이니까.

손목에 찬 시계를 끌어 내려 혈관이 지나가는 윗부분에 향수를 뿌렸다. 지그시 양 손목을 맞대는 동안, 김 실장은 묵묵히 내가 하는 양을 지켜봤다. 나는 향긋이 남은 잔향을 목덜미에 바르며 김 실장에게 물었다.

“더 뿌릴까요?”

“……아뇨.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어딘지 모르게 심란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가 지난 일주일 내내 나를 보던 시선이었다. 깊이 파고들면 이유를 알겠지만, 부러 들여다보려고 한 적은 없다.

“그…….”

가볍게 운을 뗀 김 실장이 한참 망설였다. 말하라는 의미로 눈을 들자, 그제야 어색한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이런 게, 의미가 있습니까?”

“…….”

꽃향기가 이리도 자욱한데. 무뎌진 후각은 낯선 냄새를 기가 막히게 잡아챘다. 차분하고 온화한 향기는 오메가인 내게 결코 페로몬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글쎄요.”

잠깐의 눈속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노력.

“향기 없는 꽃에 향수를 뿌린다고 나비가 꼬이진 않죠.”

곧장 노크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우리 사이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김 실장은 입을 다물었고, 나는 그를 뒤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으로 들어온 직원이 약혼식의 시작을 알렸다.

“정세진 님, 준비하실게요.”

방 안쪽에 있는 장지문은 예상대로 정원과 연결된 출구였다. 직원 두 명이 문 옆에 섰고, 또 다른 한 명이 이런저런 사소한 것들을 알려 줬다. 가령 문이 열리면 신랑분이 데리러 온다거나, 손을 잡고 이동하면 된다거나 하는 내용이었다.

“어려운 건 없으니까,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시면 돼요.”

모든 게, 리허설이 아닌 진짜였다. 그토록 오랜 시간을 대기시키더니, 끝내 누구도 보지 못한 채 약혼식을 치르게 된 것이다. 뭐, 봤다고 한들 별반 달라지는 것도 없었겠지만.

“혹시 뭐 궁금하신 거 있으세요?”

“아뇨, 괜찮습니다.”

손목에 찬 시계를 정리하고 옷매무시를 똑바로 가다듬었다. 뒤쪽에서 대기하던 김 실장이 재킷 뒤쪽의 구겨진 부분을 펴주었다. 마지막으로 넥타이까지 손보자, 직원이 양옆에 있는 이들에게 눈짓했다.

“도련님.”

문이 열리기 직전, 오랜만에 듣는 호칭이 나를 붙잡았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김 실장의 목소리는 또렷이 전해졌다.

“잘하고 오시기 바랍니다.”

별말을 다 한다 싶다. 내가 잘하리란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걱정하지 마세요.”

장지문이 좌우로 열리기 시작했다. 좁은 틈새로 스며든 햇살은 눈가가 시큰거릴 만큼 따사로웠다. 시린 눈을 꾹 감았다 뜨자, 열린 문 너머로 널찍한 풍경이 펼쳐졌다.

“이제 도련님이라고 불릴 나이도 아닌걸요.”

가장 먼저 보인 건, 흐드러지게 만개한 꽃들이었다. 눈처럼 새하얀 꽃잎이 주단을 대신하고, 다채로운 색감의 생화가 하객이 있어야 할 곳을 장식했다.

화사하고 찬란한 오색의 정원 속, 눈이 부실 정도로 푸르른 봄의 한가운데.

그곳에 그가 있었다.

“…….”

첫인상은 그랬다. 단정히 넘긴 머리가 깔끔했고, 베스트까지 차려입은 예복이 우아했으며, 자로 잰 듯 딱 떨어지는 걸음걸이가 고상해 보였다.

방송으로, 혹은 신문으로, 무수히 봐왔던 얼굴이 이리도 우월한 것이었을까.

우습게도 나는 소매 끝에 달린 커프스마저 특별하다고 느꼈다. 고급스러운 음각이 새겨진 구두 역시 온전히 그를 위한 것이라고 여겨졌다. 이 모든 게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남자는 몸에 걸친 모든 걸 완벽히 소화해 내는 재주가 있었다.

“……정세진 씨?”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한 건 단순히 그의 외모에 감탄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모 프로그램에서 절대 웃지 않는 기업인으로 꼽힌 그가 엷은 미소를 띤 채 손을 내밀어서였지.

“권이도입니다.”

젖은 나무처럼 묵직한 페로몬은 기품 있는 목소리와도 썩 잘 어울렸다. 고작 향수 따위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존재감. 인위적으로는 만들어 내지 못할 향기가 발끝에서부터 나를 옭아맨다.

그건, 조금 전 뿌린 향수가 부끄러워질 정도의 감각이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위압감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마주친 시선을 피하는 것도, 그에게서 눈을 돌리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낯선 알파에 대한 두려움인지, 아니면 처음 보는 우성을 향한 호기심인지. 빠르게 뛰어대는 심장이 자꾸만 이성적인 사고를 불가능하게 했다.

“실물이…… 훨씬 잘생기셨네요.”

그러나 오랜 시간에 걸쳐 버릇된 미소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습관적으로 눈을 휘고, 권이도가 내민 손에 내 손을 얹었다. 손가락이 닿는 찰나의 순간, 짙은 눈동자가 파도처럼 일렁였다.

“정세진입니다.”

“…….”

그는 한참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금방이라도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얼굴로 아주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을 뿐. 왜 그러냐거나, 무슨 문제가 있냐거나. 그런 질문을 건넬 수도 없었다.

“……확실히.”

커다란 손이 서서히 내 손을 그러쥐었다. 조금 강하다 싶을 만큼 붙잡았다가, 이내 깨지는 물건을 다루듯 힘을 풀어낸다. 서늘하기 그지없는 체온이 이상하리만치 포근히 다가왔다.

“실제로 보는 게 낫군요.”

“…….”

기시감이 들었다. 아니,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햇살이 지나치게 강해서, 아니면 권이도의 페로몬이 서글프게 넘어와서. 생전 처음 보는 내게 그가 이런 시선을 보낼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사진이 안 받는단 말을 많이 듣죠.”

장난스레 대꾸했으나 권이도의 표정은 괜찮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억지로 유지하는 무표정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안면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상대가 내게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게. 단순히 사진보다 실물이 나아서라기엔 이래저래 걸리는 부분이 많건만.

하지만 그러한 위화감을 지적하기엔 장소도 상황도 썩 좋지 않았다. 우리는 약혼을 할 사이지만, 사실상 동등한 입장은 아니었으니. 그저 그가 나를 고까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 거다.

“그거 압니까?”

한 박자 늦게 권이도가 입을 열었다. 그는 내게서 시선을 돌리며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무슨…….”

그가 걸음을 옮기는 바람에 나는 무어라 묻지 못한 채 그를 뒤따랐다. 우리는 나란히 꽃으로 뒤덮인 길을 걸었고, 단상에 다다를 때까지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비스듬히 보이는 얼굴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가득했다.

* * *

약혼식은 마치 결혼식처럼 진행됐다.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예물을 교환하고, 두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케이크를 커팅했다. 오른편엔 부모님과 민재, 서영이. 그리고 왼편엔 선호그룹 일가족. 하객만 없을 뿐 그 형태는 결혼식이나 다름없었다.

권이도는 처음 동요하는 모습을 보인 이후 내내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내 손에 반지를 끼워 줄 때 잠깐 머뭇거리긴 했지만, 그마저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작은 변화였다. 아마 내뱉는 숨을 듣지 못했다면 가까이 있는 나도 몰랐을 터였다.

그가 끼워 준 반지는 선호그룹에서 준비한 것이었는데, 중앙에 박힌 보석이 아무리 봐도 큐빅은 아니었다. 아마 다이아몬드, 혹은 다른 무언가. 어느 쪽이건 약혼반지로 쓰기엔 과한 감이 있었다.

“두 사람의 약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모든 식이 끝난 뒤, 샴페인을 터뜨리며 두 가족의 식사 자리가 시작됐다. 사실상 상견례였고, 실질적으로는 기업 간 신뢰를 다지는 미팅이었다. 나란히 앉은 나와 권이도, 그 앞에 두 가족이 마주 앉은 모습에, 기자가 있었다면 연방 셔터음이 들렸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사돈을 맺게 돼서 영광입니다. 권상미 부회장님.”

아버지는 드물게 굽신거리는 얼굴로 선호그룹의 비위를 맞췄다. 민재는 묵묵히 식사만 이어 갔고, 그건 서영이도 마찬가지였다. 유일하게 어머니만 평소와 같았는데, 그마저도 긴장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영광은요. 저희 아들이 선택한 집안이니만큼 저희 쪽에서도 기대가 큽니다.”

선호그룹 부회장이자 권이도의 어머니는 전형적인 기업인의 얼굴을 하고 아버지를 대했다. 무리하게 과한 칭찬을 건네지도 않았고, 자만하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겸손을 떠는 일도 없었다. 그저 으레 성공한 이들이 그렇듯 느긋하게 아버지의 아부를 받아쳤을 뿐이다.

“아쉽게도 둘째가 참석을 못 했는데, 해신 측에서 양해해 주셔서 다행이군요. 부디 이번 거사가 두 기업 모두에게 이점으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하하, 일 때문인 걸 어쩌겠습니까. 예, 부회장님. 절대 실망하게 해드리는 일 없을 겁니다.”

권상미의 옆에는 그의 남편이 앉았고, 나란히 권이도의 누나 부부와 일곱 살배기 딸아이도 있었다. 저 조그만 아이가 그 드물디드문 여자 알파라던가. 형질 검사 결과가 나오던 날, 매스컴의 주목을 한 몸에 받은 기억이 있다.

그보다 저거…… 썰어 줘야 할 것 같은데.

제 얼굴만 한 스테이크와 씨름하는 모습이 못내 가엽게 느껴졌다. 조그만 손에 나이프를 쥐긴 했는데, 아무래도 영 성과는 없어 보인다. 자리가 가까우면 접시라도 바꿔 주련만. 그런 생각으로 눈을 가늘게 뜰 즈음이었다.

“…….”

퍼뜩,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하필 멍하니 있던 터라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동그란 눈이 크게 뜨여지고, 꽉 다물었던 입술이 살짝 달싹인다.

내가 해명하기도 전에 아이는 토라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마치 제 부족함을 창피해하는 것처럼 뽀얀 뺨이 씰룩 움직였다. 괜스레 미안한 기분을 느끼는 와중에, 누군가 풋 웃는 소리가 들렸다.

“혜율이가 낯을 좀 가리죠.”

“……아.”

권이도였다.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던 건지, 그는 흥미로운 눈으로 나와 아이를 번갈아 봤다. 그래, 이름이 권혜율이었지. 선호재단이 소유한 미술관의 이름을 따 혜율이라고 지었다는 기사가 올라왔었다.

“매형. 혜율이 고기 좀 썰어 주세요.”

권이도는 민망해하는 나를 두고 아무렇지 않게 제 가족에게 얘기했다. 한창 문화재단 후원금에 관해 대화하던 남자가 권혜율의 접시로 시선을 돌렸다. 권이도의 누나 역시 퍼뜩 권혜율을 살펴봤다.

“우리 혜율이 고기 못 먹고 있었어?”

“아니야, 먹고 있었어.”

“그래? 그럼 남은 건 아빠가 잘라 줄게.”

상냥한 미소는 누가 봐도 딸아이를 사랑하는 아빠의 그것이었다. 권이도의 누나는 자꾸 해 버릇해야 는다며 그를 만류했지만, 그마저도 애정이 듬뿍 담긴 잔소리에 불과했다. 그토록 냉철한 기업인이라 평가받던 이들도, 지금은 그저 평범한 가족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부사장님 부부는 금슬이 참 좋군요.”

아버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칭찬했다. 괜히 내 쪽을 보며 감회에 젖은 얼굴을 해 보이기도 했다.

“우리 세진이도 어릴 땐 나이프 다루는 게 익숙지 않아서 고생 많이 했는데……. 그렇지, 여보?”

“그럼요. 당신이 가르쳐서 지금 이렇게 는 거지.”

“제가 저희 세진이 데려와서 제 자식처럼 아주 살뜰히 키웠거든요. 이렇게 전무님한테 보내려니까 마음이 아프고 그럽니다.”

퍽 다정한 대화였다. 남들이 들으면 정말 화목한 가정이구나, 그렇게 여길 정도로.

“지금이야 세진이가 이렇게 번듯하지만, 어릴 땐 얼마나 챙겨 줄 게 많았는지…….”

“…….”

먹고 있던 음식이 모래알처럼 까끌까끌하게 느껴졌다. 얼마 남지 않았던 식욕도 이제는 단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가만히 눈을 내려 내 앞에 놓인 접시를 바라봤다. 가지런히 썰어 놓은 음식은 어릴 적 아버지에게 받은 교육의 성과가 맞았다. 아니, 정확히는 사흘 밤낮을 굶어 가며 살기 위해 배웠던 예절이라고 해야 할까.

“아이들은 뭐든 미숙한 법이죠.”

먹먹한 귓가에 나직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아까부터 느낀 건데, 권이도는 쓸데없이 발음이 좋았다. 페로몬이 실려서 그런지, 조금 오묘한 느낌이기도 했고.

“바른길로 갈 수 있게 돕는 게 당연히 부모가 해야 할 일이고.”

왠지 모르게 가시 돋친 말이었다. 하나 그렇게 느낀 건 나뿐인지, 아버지는 신난 목소리로 맞장구쳤다.

“오, 권이도 전무님 교육관이 저랑 잘 맞는군요. 나중에 아주 훌륭한 아빠가 되실 겁니다.”

아들의 배우자에게 하기엔 조금 과한 존대가 아닌가 싶다. 우스운 건, 그 모습에 아무런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단 사실이었지만.

“말 나온 김에, 어떻게 저희 세진이랑 자녀 계획은…….”

쟁그랑.

아버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질적인 소리가 대화를 갈라놨다. 묵묵히 있던 민재가 포크를 접시에 떨어뜨리는 소리였다. 민재는 발개진 얼굴로 잽싸게 다시 포크를 쥐었다.

“죄송합니다.”

어색한 정적이 테이블에 붕 떠올랐다. 매섭게 눈을 치켜떴던 아버지가 흠흠 헛기침을 내뱉었다.

“저희 애가 아직 학생이라 이런 자리가 익숙지 않아서…….”

“아뇨, 이해합니다.”

두 번째, 아버지의 말이 끊겼다. 이번엔 상대가 권이도였기 때문에 아버지는 입가를 떨며 온화한 표정을 유지했다. 권이도는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고 나긋한 동작으로 잔을 내려놨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아이들은 미숙한 게 많다고. 아까 보셨다시피 제 조카도 식기 다루는 게 익숙지 않거든요.”

순식간에 일곱 살 어린이와 동급이 된 민재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에도 대놓고 항의하진 못하겠는지, 분을 참기 위해 고개를 숙여 버렸다. 물불 가리지 않는 그일지라도 이런 상황에선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하, 하하……. 이해해 주시니 다행이군요.”

오랜 시간 기업을 경영한 사람답게, 아버지는 민재보다 훨씬 표정 관리에 능했다. 민재에게 냅킨을 건네주던 어머니도 애써 웃는 낯을 유지했다.

권이도는 그런 그들을 보며 가볍게 운을 뗐다.

“자녀 계획을 물으셨던가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나를 제외한 가족들을 쭉 훑어보곤 담담한 어투로 뒷말을 덧붙였을 뿐.

“뭐, 이 약혼식이 계약의 일종이라는 걸 모르시는 분은 없을 거고…….”

왜 아니겠는가. 이토록 그럴싸한 예식을 치르면서도 아버지가 저자세로 나오는 이유가 있는 것을.

“말 나온 김에 조건이나 얘기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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