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Nouveau Depart(3)
‘세진아.’
사위가 어두웠다. 누군가 내 귓가를 어루만지고, 엄지로 뺨 언저리를 문질렀다. 살금살금 목까지 내려간 손길은 움푹 들어간 곳을 누르다가 서서히 멀어졌다.
‘세진아.’
또다.
또 그 남자였다.
‘정세진.’
‘…….’
대답을 해주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미묘한 압박감이 나를 짓눌렀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 너머 안개처럼 흐릿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기업을 살리고 싶으면…….’
남자는 느리게 손을 뻗어 내 뒷덜미를 쓸어내렸다. 큼직한 손이 뒤통수를 감싸고 머리채를 거칠게 움켜쥔다. 하릴없이 넘어간 고개 탓에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창부처럼 굴어야지.’
그 말을 이해할 새도 없었다. 눈 깜박할 새에 다가온 살덩이가 좁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투둑, 한계처럼 벌어진 입꼬리가 찢어질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으웁…….’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목까지 차올랐던 구역질은 혀뿌리를 누르는 감각에 막혀 버렸다. 느릿느릿 밀고 들어온 성기가 입천장을 긁으며 안으로 전진했다.
‘입 똑바로 벌려.’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이토록 차게 느껴질 수 있을까. 눈치채지 못한 사이 맺힌 눈물은 미처 삼키기도 전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생리적인 눈물이면 좋았으련만. 안타깝게도 그 안엔 갈무리하지 못한 감정도 담겨 있었다.
‘정세진.’
남자의 부름은 마치 재촉과도 같았다. 어서 빨리 똑바로 빨라는 재촉, 울 시간에 조금이라도 성의를 보이라는 재촉. 내가 뭘 잘못했냐고, 나한테 왜 이러냐고. 그렇게 따져 물을 시간도 없었다.
‘우으…….’
목이 억지로 열리는 감각은 언제나 등골이 오싹할 만큼 생경하다. 고개를 뒤로 빼고 싶었지만, 머리채를 잡은 손은 약간의 퇴로마저 완벽히 차단한 상태였다. 꾸역꾸역 밀고 들어온 귀두가 안쪽 깊숙한 곳까지 제 영역을 넓혀 갔다.
‘후…….’
남자는 기어코 뿌리 끝까지 처박은 뒤에야 삽입을 멈췄다. 낮은 숨소리와 함께 그가 천천히 허리를 뒤로 물렸다. 찌걱, 반쯤 빠져나간 성기가 조금 더 가차 없이 목구멍을 꿰뚫었다.
‘욱……!’
코끝에 음모가 스쳤다. 갑작스러운 구역감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확 오므렸다. 머금고만 있던 성기에 앞니가 닿고, 남자가 움직임을 멈춘 채 내 머리채를 내던졌다.
‘……!’
깜박, 장면이 바뀌었다. 이번에 나는 딱딱한 바닥에 누워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갑작스레 바뀐 상황에 당황하기도 잠시. 어디선가 고양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이런 건 또 처음인데…….’
낯선 손길이 허벅지를 더듬었다. 벌레가 기어가듯 소름 끼치는 감각이었다. 내 다리를 좌우로 벌린 남자는 키득키득 웃는 소리를 내며 하반신을 밀착했다. 그리고 아래쪽에 무언가 닿았다고 느낀 순간,
‘아악……!’
끔찍한 통증이 파도처럼 범람했다. 좁은 입구를 파고든 성기는 마치 불덩이처럼 뜨겁게 내벽을 건드렸다. 뭉툭한 선단이 안쪽을 쳐올릴 때마다 내장이 마구 뒤틀리는 듯했다.
‘아, 아…… 흐윽…….’
나는 본능적으로 그에게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상체를 바르작거리는가 하면 소리를 지르거나 붙잡힌 다리를 비틀기도 했다. 그러나 상황은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씨발, 가만히 안 있어?’
뜨문뜨문 이어지는 장면들은 대체로 죽고 싶을 정도의 수치로 점철됐다. 커다란 손이 내 목을 움켜쥐는 느낌, 무지막지하게 뺨을 갈기는 감각, 그래도 안 되겠다 싶었는지 몸을 뒤집어 개처럼 엎드리게 하는 것까지.
‘헉, 허억…….’
벌어진 입에서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흘렀다. 혀를 잘못 깨물었는지, 약간의 피 맛도 함께였다. 내 머리통을 바닥에 처박은 상대는 성기를 뿌리 끝까지 삽입한 채 역겨운 숨결을 흘렸다.
‘……하, 그 새끼랑 잔 거 맞아? 구멍이 씹, 아다 같은데.’
‘아, 흑…….’
‘괜히, 헉, 힘이나 빼게 만들고…….’
몸이 반으로 갈라지는 감각이 지나치게 뚜렷했다. 앞으로 기어가려 했지만, 그는 자비라곤 없는 몸짓으로 나를 짓눌렀다. 모자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바닥을 긁는 손끝에 핏방울이 맺혔다.
‘걸레 같은 새끼……. 봐, 너도 좋으니까 이렇게 조이는 거 아니야.’
‘허윽, 악……!’
‘페로몬도…… 후, 끝내주네.’
속이 잔뜩 뒤집히는 기분이 들었다. 몸이 흔들릴 때마다 명치 안쪽에서부터 욕지기가 솟았다. 그러다 끝내, 헛구역질을 시작하는 나를 보며 남자는 숨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솔직히 기대도 안 했는데…….’
그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뒤이은 한마디가 저항할 의지를 모두 앗아 갔다는 사실.
‘……가 ……이거였을 줄은…….’
‘…….’
먹먹한 귓가를 파고든 음성은 마치 사형선고처럼 잔인했다. 나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추자, 더없이 만족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진작 이럴 것이지.’
그 후엔 익숙한 내용의 반복이었다. 남자는 아래가 너덜거릴 즈음에야 사정했고, 성기가 빠져나간 입구에선 주르륵 피 섞인 정액이 흘러내렸다. 스멀스멀 차오른 모멸감은 갈 곳 잃은 원망과 함께 존재감을 잃었다.
‘가끔 붙어먹자고. 응?’
‘……흐.’
모든 게, 끝난 기분이었다. 아래에서 느껴지는 통증보다 심장을 통으로 들어낸 것 같은 감각이 더 고통스러웠다. 눈물이 쉼 없이 흘러서, 고장 난 것처럼 호흡이 가빠졌다.
대체로 악몽은 거기서 끝이었다.
“……!”
번쩍, 눈꺼풀이 뜨였다. 뒤바뀐 풍경 너머로 익숙한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두어 번 눈을 깜박이고, 차게 식은 손끝을 움찔거렸다. 참았던 숨을 크게 몰아쉬자, 그제야 주변 공기가 생생히 느껴졌다.
아, 꿈이었구나.
그 사실을 깨닫기 무섭게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갔다. 멈췄던 피가 도는 것처럼 굳었던 근육이 느슨하게 이완됐다. 더디게 고개를 돌린 곳엔 ‘1회 1정’이라고 쓰인 약통이 보였다.
“……언제 잠들었지.”
어제, 집으로 돌아온 나는 샤워를 마치자마자 곧장 잠자리에 들었다. 자기 싫다는 생각 반, 자야 한다는 강박 반. 긴 고민 끝에 후자가 승리했고 약통을 손에 쥔 채 물도 없이 수면제를 씹어 삼켰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 지금껏 보지 못한 새로운 악몽이었다. 끽해야 무섭기만 하던 지금까지와 달리 이번 악몽은 오물이라도 뒤집어쓴 양 불쾌했다. 아무리 수면제를 네 알이나 먹었다지만 이건 좀 정도가 심하다.
“…하다 하다 이젠…….”
성의 없이 약통을 밀어내고 느릿느릿 상체를 일으켰다. 핑그르르 돌아간 약통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남아 있던 약을 모두 먹은 터라 바닥에 부딪힐 때마다 텅, 텅, 공허한 소리가 났다.
협탁에 놓인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오전 7시. 평소보단 늦은 기상이지만, 예정된 것보단 한 시간쯤 빠르다. 아마 여유롭게 준비해도 기사가 오기까진 한참이나 남으리라.
“샤워부터 해야겠네.”
작게 중얼거리며 식은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밤새 몸부림을 쳤는지, 옷과 이불 역시 엉망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늦지 않게 눈을 떠서 씻고 나갈 시간이 있다는 점일까.
비틀비틀 침대에서 내려와 방 안쪽에 딸린 욕실로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어제 벗어 놨던 옷들이 발치에 걸렸다. 구겨지면 입지 못할 옷들이었지만, 그다지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세진아.’
“……하아.”
어느 순간 시작된 악몽은 약혼식 날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선명해졌다. 처음엔 어렴풋이 상황만 기억나다가, 이제는 그 감정과 기분, 느낌까지 생생히 떠오르는 식이었다. 꿈속에서 만난 남자는 억센 손길로 내 머리칼을 움켜쥐고, 고개를 뒤로 젖히게 한 채 이렇게 속삭였다.
‘창부처럼 굴어야지.’
그가 누구인지, 왜 그런 요구를 하는지, 어째서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에 대한 과정은 없다. 그저 몸이 억지로 열리는 감각과 그 당시 느꼈던 서러움만 생생히 떠오를 뿐.
‘가끔 붙어먹자고. 응?’
“…….”
아니, 오늘은 좀 달랐던가.
‘……가 ……이거였을 줄은…….’
대체 무슨 말을 들었길래 꿈속에서의 내가 저항하길 포기한 걸까. 피가 나도록 찢어진 아래보다 가슴 언저리가 더 아팠던 이유는 무엇일까.
수도 없이 악몽을 꿨지만, 어제와 같은 기분은 처음이었다. 무언가 트라우마가 있긴커녕 다른 이와 몸조차 섞어 본 적 없는 나인데. 물밀듯 밀려들던 무력감은 단순히 꿈이라 치부하기엔 너무도 생생했다.
“파혼당하는 거 아닌가 몰라…….”
매일 강간당하는 꿈을 꾸는 결혼 상대라니. 어디서 이런 정신병자를 데려왔냐며 선호가 기함할 모습이 훤히 보였다. 만약 그렇게 되면 아버지는 망설임 없이 나를 집안에서 내쫓아 버리겠지.
픽 헛웃음을 흘리며 하나둘 옷가지를 벗어 내렸다. 몸을 푹 담그면 좋겠지만, 그렇게까지 사치를 부릴 생각은 없다. 어떻게든 잠을 잤으니 남은 건 오늘 있을 약혼식을 무사히 준비하는 것뿐이었다.
오늘은, 아버지가 그토록 고대하던 해신그룹의 마지막 기회였으니.
* * *
선호그룹과의 약혼식은 암암리에 조용히 진행될 예정이었다. 알음알음 소문이 퍼지긴 했지만, 공식적인 발표는 훨씬 나중이었다. 듣자 하니 결혼식도 미정이라던데, 결국엔 다 구색 맞추기에 불과했다.
어쨌든 나는 이른 아침부터 김 실장이 예약한 샵에 들러 옷과 머리를 세팅했다. 예복을 입을 땐 착장을 돕기 위해 달라붙은 직원만 세 명이었다. 한 명이 넥타이를 매주면 다른 한 명은 재킷을 준비하고, 또 다른 한 명은 무릎을 꿇고 구두를 신겨 주는 식이었다.
그 후엔 직원들끼리 소소한 실랑이가 있었다. 머리를 올리는 게 좋을지, 아니면 내리는 게 좋을지. 한참 논의하던 그들은 이마가 예쁘니 반은 넘기는 게 좋겠다며 저들끼리 원만한 합의를 마쳤다. 당사자인 내 의견을 쏙 뺀 결론이었으나, 김 실장마저 고개를 끄덕이는 바람에 그냥 그러기로 했다.
“벌써 이러면 결혼식 땐 다섯 명쯤 붙겠네요.”
식장으로 향하는 차 안. 장난 반, 진담 반으로 건넨 말에 김 실장은 웃음기라곤 없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잘하면 그땐 전날 밤부터 미리 준비해야 할 수도 있다고.
“긴장은 안 되십니까?”
무심코 차창 밖을 내다봤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이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평화로웠다. 반면에 내 기분은…… 뭐랄까, 조금 애매했다.
“글쎄요.”
완벽히 갖춘 차림새는 오늘따라 참 어색한데, 텅 빈 속은 울렁거리긴커녕 편안하다. 민재가 ‘존나 구리다.’라고 표현했던 그 옷, 그 상아색 예복조차 부들거리는 질감이 달갑지 않았다.
“아직 본 식도 아니고…….”
“…….”
“잘 모르겠습니다.”
김 실장은 잔뜩 복잡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적나라한 시선이 안경알 너머로도 따갑게 느껴졌다. 그럼 본 식 땐 긴장할 거냐고, 마치 그리 물으려다 관둔 것처럼.
“도착했습니다, 본부장님.”
한참을 이동하던 차는 명성호텔 영빈관 앞에 멈춰 섰다. 운전석에서 내린 기사가 차를 빙 돌아 뒷좌석 문을 열어 줬다. 감사 인사와 함께 차에서 내리려던 나는 기사가 내민 손을 보며 살짝 웃어 보였다.
“에스코트는 제가 웨딩드레스를 입게 되면 부탁드리죠.”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다. 오메가라고 하면 습관적으로 에스코트해 주려는 베타들이. 치렁치렁한 치마를 입은 것도 아니고, 굽이 높은 구두를 신은 것도 아닌데. 오메가 중엔 여자가 많은 데다, 워낙 특이 형질이 드무니 그런 듯했다.
“아…… 죄송합니다.”
기사는 멋쩍게 내밀었던 손을 거둬들였다. 괜찮다는 의미로 눈을 맞추자, 귀 끝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뒤늦게 차에서 내린 김 실장이 그 모습을 보며 흠흠, 헛기침했다.
“정세진 님,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호텔 직원을 따라 별채로 가는 길엔 일정 간격으로 경호 인력이 배치돼 있었다. 아버지가 지시한 건 아닌 듯했고, 아마 선호가 준비한 인력이지 않나 싶다. 기자들을 막기 위함이겠지만, 오히려 이편이 더 눈에 띈단 생각이 든다.
“이곳에서 대기하시면 됩니다.”
직원은 대기실 앞에 서서 손수 장지문을 열어 줬다. 드르륵, 열린 문틈으로 건너편에 있는 출입구가 보였다. 아마 저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나 본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꽃 냄새가…….”
꽃 내음이 났다. 고작 한두 송이가 아닌, 꽃밭에 있는 것처럼 화사한 향기가. 찬찬히 둘러본 내부는 가지각색의 꽃들로 화려하게 장식돼 있었다. 하얀색, 노란색, 분홍색에 보라색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생화였다.
“……호텔 측에서 준비한 겁니까?”
이런 행사에 꽃이 빠질 리 없다는 건 알고 있다. 다만, 이렇게 많이 장식된 걸 처음 볼 뿐. 그것도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좋아하는 꽃들로만 한가득.
“선호에서 준비한 겁니다.”
직원은 차분한 목소리로 내 짐작이 틀렸음을 알려 줬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안쪽에 놓인 테이블까지 가리켰다.
“전부 생화로 준비하라 일러두셨습니다.”
“…….”
‘정세진’ 그렇게 쓰인 카드 옆엔 가지런히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결혼식도 아니고 약혼식에, 그것도 정략결혼 상대에게. 무려 그 구하기 힘들다는 은방울꽃으로.
“그럼 필요한 게 있으시면…….”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운명의 장난일까.
홀린 듯, 중앙에 놓인 테이블로 다가갔다. 직원이 무어라 덧붙이는 말도 들리지 않았다. 반으로 접힌 카드를 열어 보자, 자필로 은방울꽃의 꽃말이 적혀 있었다.
“……꽃을 좋아하셨습니까?”
김 실장은 장지문이 닫히기 무섭게 대뜸 질문을 건넸다. 몹시 의외라는 말투였는데,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나는 카드를 내려놓고 방울방울 흔들리는 꽃다발을 한 손에 쥐었다.
“예, 뭐…….”
꽃이라면, 좋아한다. 정확히는 꽃이 아니라 그들이 머금고 있는 포근한 향기를.
“좋아하는 편입니다.”
아주 어릴 땐 조향사가 되고 싶었다. 나무, 꽃, 풀, 혹은 흙이나 모래. 제각기 다른 요소들은 계절마다, 그리고 날씨마다 다른 느낌을 주곤 했다. 진작부터 그 미묘한 매력에 취했던 나는 언젠가 이러한 향기를 소유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 같다.
“은방울꽃은 특히 더 좋아하고…….”
한때 내 꿈에 대해 들었던 상대(아버지인지 어머니인지는 모르겠다)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페로몬 냄새도 없는 오메가 주제에, 그게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냐고.
“향이 좋아서 향수로도 많이 쓰이는 꽃이거든요, 이게.”
이 이야기엔 딱 두 가지 오류가 존재한다. 첫째, 페로몬은 냄새가 아니고, 둘째, 내 페로몬엔 냄새가 없지 않다. 그리고 이 모든 것과 무관하게 내 후각은 평범한 사람보다 훨씬 좋은 편이었다.
“……꽃 같은 걸 좋아하실 줄 몰랐습니다.”
“말씀을 안 드렸으니까요.”
어쨌든 비슷한 일이 몇 번 반복되고, 나는 조향사가 되겠다는 꿈을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게 됐다. 정확히는 말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는 게 옳았다. 내 미래는, 아버지가 만들어 낸 탄탄대로를 달릴 뿐이니까.
“미리 알았으면 종종 사다 드렸을 텐데요.”
“하하…… 김 실장님이 저한테요?”
바짝 긴장했던 어깨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향긋한 꽃향기를 맡자마자, 정체 모를 불안함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 대신 떠오른 건, 마음에서 우러나온 기분 좋은 미소였다.
“그런 건 아내분께 해드려야죠.”
“…….”
사실은, 무의식중에 긴장하고 있던 모양이다. 고작 꽃다발 하나에 이토록 감성적인 기분이 되는 걸 보면. 이런 비즈니스로도 상대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역시…… 향수보단 생화가 낫네.”
슬며시 눈을 휘었다. 그런 나를 보며 김 실장이 멍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그는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한 박자 늦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정원에도 생화가 많을 겁니다.”
뒤이어 흘러나온 한마디는 어딘지 모르게 씁쓸한 감이 묻어났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저 들고 있던 꽃다발을 내려놨다. 손끝에 남은 은방울꽃 향기에, 처음으로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