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Nouveau Depart(2)
“…….”
“얼굴 다 봤죠?”
흥,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못 배운 것들은 이래서 안 된다느니, 주제도 모르고 사람을 열받게 한다느니. 그가 뇌까리는 말들을 듣고도 김 실장은 사무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
어떻게 하면 좋을까. 주제를 바꾸는 건 쉽지만, 민재의 정신을 돌려놔도 김 실장은 명령을 잊어버릴 사람이 아니었다. 쓸데없이 꼼꼼한 일 처리가 이럴 땐 꼭 방해가 됐다.
“……아쉽게 됐네.”
하나하나 베스트 단추를 채우며 입을 열었다. 한창 불만을 표하던 민재가 매섭게 나를 노려봤다. 성난 시선에 가시가 돋고, 비틀린 입매가 차갑게 벼려졌다.
“왜, 뭐가 아쉬운데?”
그간의 경험에 의하면, 민재는 내가 반대 의견을 낼 때 더 불이 붙는 경향이 있다. 아마 조금이라도 직원들 편을 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을 해고할 거다.
민재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무관심한 태도. 그래, 딱 얼굴만 아는 사람이 퇴사하는 정도의 아쉬움이 중요했다.
“아니, 아까 그 직원이 조용해서 편했거든.”
“…….”
의외로 반응을 보인 쪽은 김 실장이었다. 슬쩍 미간을 좁힌 그가 고개를 돌린 채 실소한 것이다. 다행히 민재는 눈치채지 못했고, 삐딱한 얼굴로 눈썹을 씰룩였다.
“졸라 수다스럽게 생겼더만……. 그래서?”
“그냥 그렇다는 거지. 알잖아. 나 남이랑 말 섞기 싫어하는 거.”
어깨를 으쓱하며 마지막 단추를 채웠다. 베스트 밑단을 탁탁 털어 내자 민재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쭉 내려왔던 입매가 움찔 달싹였다.
“또 얼굴 트기 귀찮은데…….”
반쯤 사실에 기반한 핑계였다. 적응을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공간은 귀찮고 번거롭기만 했다. 민재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지, 다리를 반대쪽으로 꼬며 혀를 찼다.
“아무튼, 사회성이라곤 쥐뿔도 없는 새끼……. 그러고도 네가 본부장이냐?”
무어라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가볍게 마주 웃는 것으로 민재는 기분이 완전히 풀린 듯했다. 까딱, 까딱, 발끝을 움직인 그가 결심한 것처럼 고개를 쳐올렸다.
“김 실장님, 아까 걔들 그냥 둬요.”
대단한 선처였다. 적어도 민재만큼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정세진 저 모자란 새끼 쪽팔려서 어디 내놓을 수가 없네.”
거울 속 김 실장이 고개를 돌렸다. ‘예, 알겠습니다.’ 입으로는 그렇게 답하면서 눈으로는 뚫어져라 나를 관찰한다. 새삼스럽게. 이게 뭐 드문 일이라고.
“그보다 여긴 무슨 일이야?”
지금이야말로 주제를 돌릴 타이밍이었다. 김 실장은 눈치껏 내가 입은 옷과 같은 색의 재킷을 들고 다가왔다. 그가 입혀 주는 대로 팔을 꿰자, 민재가 와락 얼굴을 구겼다.
“너 결혼한다며?”
눈만 들어 민재를 바라봤다. 거만하게 소파에 기대 있던 민재가 콧잔등에 주름을 잡았다.
“진짜야?”
얘도 모르고 있었나?
“그거 물어보러 여기까지…….”
“씨발, 진짜냐고 묻잖아!”
버럭 소리친 그가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허벅지를 넓게 벌리고 양팔을 무릎 위에 걸친다. 탁, 탁, 바닥을 치는 구둣발이 어쩐지 초조해 보였다.
“결혼하는 거 맞아.”
재킷의 옷깃을 잡아 앞섶을 단정하게 여몄다. 김 실장이 구겨진 목 뒤를 똑바로 펴주었다. 새로 들어온 원단이라더니 몸에 감기는 감촉이 썩 나쁘지 않았다.
“그러니까 연차까지 내고 이러고 있지.”
아직 학생 신분인 민재는 해신그룹 실무에 일절 관여권이 없었다. 원래는 외국에서 대학을 다녀야 했고, 지금 한국에 있는 것도 휴학을 빙자한 도주였다. 내 혼담을 몰랐을 수는 있지만, 그걸 확인하겠답시고 여기까지 찾아오는 건 이상했다.
“별일이네. 네가 사업에 관심을 다 가지고.”
“……사업?”
낮게 되물은 민재가 탁! 발을 굴렀다. 아드득 어금니를 맞무는 소리가 음산했다.
“미쳤네.”
그는 벌떡 일어나 공격적인 기세로 다가왔다. 눈높이가 엇비슷해서 그런지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민재는 내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비아냥거리듯 말꼬리를 늘였다.
“사어업? 지금 사업이라고 했냐?”
“…….”
“야, 주제 파악해. 너 팔려 가는 거야. 고작 너 따위가 결혼하는 게 사업이라고?”
거리가 가까워진 만큼 아로마 향기도 짙어졌다. 늘 뿌리던 향수까지 잊은 걸 보면 어지간히 급하게 달려오긴 했나 보다.
“상대는 뭐, 알파? 그쪽에서 특이 형질이라도 낳아 달래? 아니면 나이 많은 노친네가 너 같은 오메가 맛이 궁금하대?”
전자는 모르겠지만 후자는 확실히 아니었다. 권이도는 서른두 살로, 나와는 고작 세 살 차이였다. 오메가 맛이 궁금했는지는, 거기까진 내가 알 바 아니었고.
“관둬, 씨발. 괜히 집안 망신시키지 말고 아버지한테 못하겠다고 얘기해.”
할 얘기가 끝났는지, 민재는 휙 소파로 돌아갔다. 시근덕거리는 목소리로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기도 했다.
“오메가 구실도 못 하는 게 결혼은 무슨…….”
“…….”
김 실장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의 염려와 다르게, 이 역시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다.
“그 얘기 하러 왔어?”
남들은 특이 형질이 되고 싶어서 안달이라는데. 나는 단 한 번도 내 형질에 감사한 적이 없다. 아버지의 말처럼 ‘반편이 오메가’이기 때문이건, 민재의 말처럼 오메가 구실을 못 하기 때문이건. 내게 오메가라는 형질은 가족들이 나를 비하할 또 하나의 요소에 불과했다.
“그럼, 내가 설마 너 보러 왔겠냐?”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박혔다. 늘 그랬지만, 오늘따라 유독 까칠한 감이 있다.
“미안한데, 벌써 날짜도 잡혔어.”
결혼식 날짜가 잡힌 건 아니지만, 그냥 그렇게 얘기했다. 구구절절 사정을 얘기해 봐야 어차피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을 테니.
“게다가 당장 다음 주 토요일에 약혼이고.”
“그걸 누가 몰라서 이래? 그딴 건 캔슬하면 되잖아!”
아버지에게 말했다간 당장 호적에서 파일 소리였다. 선호그룹과의 약속을 취소하다니,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수는 없다.
“상대도 끽해야 어디 중소기업 사장일 텐데 약혼식이 뭐 대수야? 김 실장님! 당장 토요일 일정 취소해 버리세요.”
민재는 짜증스러운 말투로 김 실장을 향해 명령했다. 분명 제 말을 들을 줄 알았나 본데, 안타깝게도 그의 희망은 단번에 깨부숴졌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도련님.”
“……뭐라고요?”
민재의 두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김 실장은 제법 냉정한 얼굴로 고개를 털어 냈다.
“약속 상대가 선호그룹입니다.”
내게 그랬던 것처럼 현실을 일깨워 주는 한마디였다. 굳이 나설 필요도 없이 단호한 뒷말이 덧붙여졌다.
“저희 쪽에서의 일방적인 취소는 어렵습니다.”
“…….”
민재도 알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생떼를 부렸는지. 그러니 저렇게 사색이 된 얼굴로 입을 다물었겠지.
“기업 간의 신뢰가 걸린 문제야.”
거울을 보며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진주, 라기보단 흰빛에 가까운 상아색 정장이었다. 행커치프를 색 있는 걸로 해야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곁눈질로 민재를 살폈다.
“나 때문에 망칠 수는 없잖아.”
“…….”
민재는 한풀 기가 꺾인 모습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까의 짜증은 온데간데없고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고 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답지 않게 심각한 얼굴로, 그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래서, 생판 모르는 알파 새끼한테 다리나 벌리면서 살겠다고?”
“도련님!”
김 실장이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이번 발언은 좀 선을 넘지 않았나 싶다. 물밀듯 밀려오는 현실감에 나도 모르게 비소가 터졌다.
“모르지. 다리를 벌릴지, 아니면 입만 벌리고 끝날지.”
“…….”
공기가 서늘하게 얼어붙었다. 민재는 물론, 그를 말리려던 김 실장까지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분명, 이렇게까지 말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의지와 달리 입술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뭐 결국엔 둘 다 벌리겠지만…….”
민재의 말은 대체로 틀리지 않았다. 나는 팔려 가는 게 맞고, 높은 확률로 그쪽에서 요구할 건 특이 형질을 타고날 아이다. 권이도와 결혼하면 매일 밤 종마처럼 뒤를 대줘야 할 게 분명했다.
“잘됐네. 이럴 때 아니면 오메가 구실을 언제 해보겠어.”
“…….”
민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씨발, 그렇게 지껄이는 목소리가 마구 떨리고 있었다. 목에 핏대가 선 걸 보니, 한마디만 더 하면 뻥 하고 터져 버릴 것 같다.
“……농담이야.”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엎지른 물을 주워 담았다. 내게 어떤 반응을 기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선 이게 최선이었다. 김 실장이고, 민재고. 왜 사람을 들쑤시지 못해 안달인지.
“뭘 정색하고 그래. 그냥 하는 말 가지고.”
“…….”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너도 정장 하나 할래? 결혼하기 전에 형이 옷 한 벌은 해주고 갈게.”
괜히 친근한 척 말을 붙였다. 막내인 서영이 것도 고르라고 하자 민재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금방이라도 욕지거리를 내뱉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얌전한 반응이었다.
“형은 씨발…….”
물론 뒷말은 잔뜩 까칠했지만.
“보는 눈도 거지 같은 게 사주긴 뭘 사줘. 야, 너 그 옷 존나 안 어울려.”
“그래?”
고개를 돌려 거울 속 내 모습을 살펴봤다. 피팅용 옷이긴 해도 그럭저럭 사이즈는 괜찮았다. 어깨선은 딱 떨어지고 세로로 들어간 재봉선도 깔끔하다. 내가 보기엔 이거나 저거나 비슷한데. 역시 부담스러운 하얀색이 문제였을까.
“어, 조온나 구려. 너한텐 저런 어둡고 칙칙한 색이 딱이야.”
그러면서 민재가 가리킨 건 기성복으로 나온 평범한 정장이었다. 직원이 거들떠보지도 않은 것이었고, 내가 입은 것과 원단부터 달랐다. 누군가 하나쯤 훔쳐 가도 개수를 세어 보지 않는 이상 눈치채지 못할 물건.
“저게 네 수준이지.”
입고 있던 예복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줄지어 걸린 옷들은 언젠가 처우를 기다리던 내 모습 같았다. 아니, 그래도 지금은 값비싼 껍데기로 포장할 수 있어 다행인 걸까.
“그럼 저 옷도 하나 하지 뭐.”
“…….”
김 실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높디높은 안목을 가진 그로선, 저런 양산품이 눈에 차지 않을 법도 했다. 너까지 왜 그러냐는 표정이었지만, 내게 그 의문을 해소해 줄 의무는 없었다.
“김 실장님. 오늘 입었던 디자인 다 맞춰 달라고 해주세요. 치수는 전에 쟀던 걸로 하면 될 겁니다.”
“……정말 저쪽 의복도 하실 겁니까?”
“그럼요. 제가 언제 농담하는 거 보셨어요?”
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는데, 그는 삽시간에 표정을 굳혔다. ‘아까는 농담이라며?’ 그리 말하려다 애써 집어삼킨 게 분명했다. 물론 저런 얼굴로도 성실히 주문을 넣을 걸 알고 있었다.
“이후 일정은…….”
“글쎄요.”
입고 있던 재킷은 벗어서 김 실장에게 건네줬다. 민재의 기분을 풀어 줘야 한단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론 굳이 그래야 하나 싶기도 했다. 다시금 밀려 나간 현실감은 조금 샘솟았던 의욕마저 앗아가 버렸다.
“집에 가서 잠이나 잘까…….”
약혼식 날까지는 최소한 컨디션을 관리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아버지가 수면제까지 챙겨 줬으니, 가능한 잠도 실컷 자둬야 했고. 물론 수면제를 한 움큼 먹어도 숙면을 취하는 건 어렵겠지만 말이다.
“그럼 차 대기시켜 놓겠습니다.”
김 실장은 의외라는 얼굴을 하면서도 순순히 내 휴식에 동의했다. 어딘가 안쓰럽단 눈으로 나와 민재를 번갈아 보기도 했다. 나는 무심코 시간을 확인하다 황급히 생각을 고쳐먹었다.
“우선은 회사로 가죠.”
“……미친, 일 못 해 죽은 귀신이 붙었나.”
민재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기껏 연차까지 써놓고 회사로 돌아간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다. 김 실장 역시 굳이 그럴 필요 있냐는 듯 미간을 좁혔다.
“오늘은 쉬셔도 될 텐데요.”
“아뇨.”
쉬는 걸 싫어하진 않지만, 뇌리를 스친 생각이 그 욕구를 막아섰다. 앞으로 일주일. 약혼식이 끝나고도 휴가를 쓸 일은 충분히 많을 테니.
그리고 어쩌면,
“인수인계를 미리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앞으로 평생, 쉬게 될지도 모르겠고.
* * *
해신금융그룹 경영기획 본부장 정세진.
내 이름 석 자에 달린 타이틀은 아버지가 손수 적어 넣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가 아버지의 자식이 된 그 날부터. 추운 겨울, 맨발로 눈을 밟으며 길거리를 서성이던 그 날부터. 가족 없는 나를, 해신그룹 맏아들로 데리고 온 그 날부터.
그 후로 스무 해가 지나, 나는 스물아홉이 되어 해신그룹 본부장 자리에 앉았다. 처음에 비해 많은 걸 얻었고, 얻은 만큼 잃었으며, 남아 있는 것들마저 조만간 잃게 될 운명이었다. 뭐,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으니 이렇다 할 미련은 생기지 않았다.
“도착했습니다, 본부장님.”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약혼식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그간 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 기어이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아버지는 김 실장을 시켜 내 모든 일정을 취소했고, 대신 마사지와 피부 관리 등으로 하루를 꽉꽉 채워 넣었다.
그 덕에 아까부터 차 안엔 민재가 풍기던 것과 같은 아로마 냄새가 풍겼다. 운전하던 기사가 코를 킁킁대며 향수를 새로 바꾸셨냐고 질문할 정도였다. 그러나 심신을 안정시켜준다는 허브 향조차, 오랜 불면증으로 인한 피로까지 해결해 주진 못했다.
“괜찮으십니까?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기사는 차 문을 열어 주며 걱정스럽게 내 안색을 살폈다. 기사뿐만 아니라 직원들도, 그리고 김 실장도, 오늘 마주친 모두가 저런 눈을 하고 나를 바라봤다. 그만큼 내 안색이 별로였던 모양인데, 내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잠을 좀 설쳐서요.”
이렇게 말해두면 열에 아홉은 납득한 얼굴로 관심을 거두곤 했다. 유일하게 김 실장만은 ‘너도 사람이긴 하구나.’라며 동정의 시선을 보내 왔지만 말이다. 다행히 기사는 전자였는지, 무어라 묻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모시러 오겠습니다.”
넌지시 눈인사를 건네고 그를 등진 채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갈 때마다 무거운 피로가 어깨를 짓눌렀다. 잠을 좀 설치는, 고작 그런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내 사정을 자세히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세진아.’
“…….”
후우, 한숨을 내쉬며 건물 입구에 카드 키를 갖다 댔다. 쓸데없이 높기만 한 오피스텔은 내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처음으로 독립한 곳이었다. 말이 독립이지, 반쯤 쫓겨난 것에 가까웠다.
‘세진아.’
“……그만 좀 불러라.”
그놈의 세진이. 아버지를 제외하면 나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건만. 대체 언제 봤다고 세진이, 세진이, 하며 친한 척 구는지 모르겠다. 거기다 내가 대답하지 않으면 금세 바뀌어 버리던 호칭까지.
‘정세진.’
피곤한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잡념을 지우기 위해 웅웅거리는 기계음에 집중했지만, 도리어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만 더 뚜렷해졌다. 세진아. 그렇게 부르던 목소리는 어느 순간 더없이 싸늘한 어조로 뒤바뀌었다.
‘창부처럼 굴어야지.’
“…….”
띵, 엘리베이터 문이 좌우로 열렸다. 나는 안으로 들어서며 재킷 안쪽에 넣어 둔 약통을 꺼냈다. 안에 남은 약이 하나, 둘, 셋, 네 개. 조금 애매하지만, 이 정도면 얼추 중간에 깨지 않고 잘 수 있는 양이다.
“하아…….”
본능적인 두려움이 발끝에서부터 타고 올라왔다. 불면증이야 예삿일이라지만 잠들기 무서운 건 얘기가 달랐다. 수면제를 먹어도 잠이 안 오는데, 자기 싫다는 생각까지 더해지니. 요 며칠 제대로 잤던 날이 손에 꼽을 정도다.
우웅,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위층으로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가장 높은 층에 다다르기까진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나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목까지 차오른 갑갑함을 토해 냈다.
요즘, 매일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강간당하는 꿈을 꾼다.